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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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문화사

리뷰 총점 8.4 (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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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역사이론/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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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문사철 인문정신의 산실- 규장각, 조선 기록문화의 보고 평점8점 | e****0 | 2011.03.07 리뷰제목
조선 왕조가 무려 5백년 이상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을 읽으면 새삼 그 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철저한 기록정신, 그것은 조선 왕과 사대부들의 인문 정신과 사유의 산물이었고, 그런 기록문화의 정점에는 규장각이 있었다. 어필과 기록화, 지도, 역사기록 , 각종 의궤, 개인 저서와 문집 등 다양한 기록물들을 보관했던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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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가 무려 5백년 이상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을 읽으면 새삼 그 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철저한 기록정신, 그것은 조선 왕과 사대부들의 인문 정신과 사유의 산물이었고, 그런 기록문화의 정점에는 규장각이 있었다.

어필과 기록화, 지도, 역사기록 , 각종 의궤, 개인 저서와 문집 등 다양한 기록물들을 보관했던 규장각은 조선 기록 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조선 지성사의 보고였다.


조선의 기록 문화는 기본적으로 국가 권력이 주도해 나갔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 ‘사기’가 사마천 개인이 수십 년에 걸쳐 기록한 역사서였던데 비해,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의 역사적 기록은 모두 국가 권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기록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역사를 기록하고 그 방대한 자료와 기록을 보존하고, 편찬하는 데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또 그 기록들은 지금도 조선 역사를 해석하는 데 기본적인 사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세계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기록물 이상의 정신문화적인 가치, 또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의 값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책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것을 넘어 편찬하는 작업까지 주도해갔다. 정조는 유명무실했던 규장각을 통해 이런 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으로써, 정조 시대를 조선후기의 문화적 부흥을 다지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규장각에서 발견한 조선의 명품들’을 읽고 나면 조선의 기록문화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재확인하게 된다.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일종의 보고서 형식의 책이 의궤인데, 이 책에는 조선 의궤의  종류가 다양하고 내용도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보고나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의궤를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이라고 하는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고, 조선의 행정이 얼마나 체계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규장각에서 찾는 조선의 명품들’ 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왕들의 친필이나, 대신들의 초상화, 지도 등도 조선의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서 화원들은 예술로서보다는 그림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주역할 이었다. 의궤에 들어갔던 반차도나 임금의 초상화도 그런 기록의 의미가 강했다.

조선의 기록문화는 국가 주도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대부들의 기록 정신 또한 빛났다.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 열하일기’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 조선 지성사에 길이남을 저서나 남명 조식의 ’남명집’,이지함의 ‘토정 유고’ 같은 사대부들의 현실에 대한 언급이 담긴 문집들 또한 규장각을 빛내주는 기록물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규장각 명품들, 왕들의 필체나 지도, 초상화, 의궤속 반차도가 상당히 아름다웠다는 점이었다. 기록으로서나 자료로서의 의 가치도 물론 대단하지만 예술적인 가치 또한 상당한 경지였다. 이 책의 사진을 보더라도 기록이 아니라 정교한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조선이 기록물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방식의 체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규장각도 그렇지만 실록을 분산해서 보관하고,  조정과 관련한 기록을 작성하는 것은 국가에서 인력과 기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체계적인 작성과정과 보관 과정을 보면 기록의 중요성과 보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기록하고 관리했기에 그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었던 와중에서도 기록물과 자료들을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키지 못했던 의궤 등의 기록물이 있었다.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갔던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됐던 어람용 의궤나 일본으로 반출됐던 의궤가 그것인데, 최근 그 의궤들을 반환받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규장각은 단순히 기록물을 수집, 보관하는 도서관 역할이나 책을 편찬하는 출판사의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조에 의해 규장각은 학문 연구의 중심 기관이자 핵심적인 정치기관으로 거듭났다.

그렇지만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은 이 책은 조선 기록문화의 수준과 깊이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규장각 명품들은 조선의 시대정신과 지성, 문화, 예술, 생활을 아우르는 보고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의 이러한 뿌리 깊고 체계적인 기록문화는 역사를 중시하고, 사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조선 사대부들의 문사철(文史哲) 인문정신의 산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전통이야말로 바로 조선 왕조가 500년 이상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유지하는 데 가장 큰 버팀목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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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정조대왕의 원대한 꿈, 오늘에 꽃을 피우다 평점10점 | k******9 | 2007.09.27 리뷰제목
1776년. 정조대왕은 창덕궁의 후원, 지금의 부용정 건너편에 2층의 건물을 짓는다. 2층은 주합루(宙合樓). (땅과) 우주가 합해지는 공간이다. 참으로 원대한 이름이다. 그리고 1층에 규장각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규장각(奎章閣). 정조대왕과 당대 지성인들의 개혁정치와 문예부흥의 공간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2007년. 서울대학교에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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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정조대왕은 창덕궁의 후원, 지금의 부용정 건너편에 2층의 건물을 짓는다. 2층은 주합루(宙合樓). (땅과) 우주가 합해지는 공간이다. 참으로 원대한 이름이다. 그리고 1층에 규장각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규장각(奎章閣). 정조대왕과 당대 지성인들의 개혁정치와 문예부흥의 공간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2007년. 서울대학교에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규장각의 모습과 내용은 옛날과 다르지만 그 정신은 서릿발같이 살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오늘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무서운 역량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다. 그리고 그 힘은 현재 한국문화의 무서운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3년~2004년 방영된 '대장금'은 우리나라를 넘어서 동아시아에 바람을 일으켰다. 1997년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001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그리고 올해 2007년 의궤(儀軌)가 세계기록유산에 나란히 등재되었다. 다른 세계유산에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자취는 강하게 서려 있다. 200여 년 전 규장각을 통해 정조대왕이 펼치려 했던 원대한 꿈, 이상은 바로 현재의 우리의 꿈, 이상이며, 그것이 조금씩, 그러나 강하게 이뤄져 나가고 있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무려 26만 점이 넘는 왕실 기록, 한국본 및 중국본 도서, 문집, 고지도, 고문서, 책판 등이 소장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일제에 의한 강제 통합으로 인한 아픔이 서려 있지만,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국학기관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 곳에 소장되어 있는 유산들은 하나같이 그 가치를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는 세계인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했다. 이들이 없었던들 수많은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나 영화는 전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 엄청난 바람을 일으켰던 '대장금', 한국영화사상 최고 흥행작의 하나인 '왕의 남자'. 만약 조선왕조실록이 없었다면 이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물론 '대장금'과 '왕의 남자'는 아주 작은 사실에 엄청난 허구를 부풀려 만든 극이며, 그 작은 사실마저도 잘못 다루고 있어 안타깝기까지 하다. 기록에 의하면, 장금은 수라간에서 일한 궁녀는 아니었다. 공길도 왕에게 바른 말을 했다가 곤장을 맞고 쫓겨났다. 어쨌든 조선왕조실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수원 화성(水原 華城)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화성의 상당한 부분이 1970년대 이후 복원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복원된지 채 30년이 되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인 화성이 어떻게 인류가 길이 보존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을까? 당시 정부가 복원을 잘해서? 어림 없는 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화성의 공역에 관한 전말을 담은 보고서인데, 이 의궤 덕분에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이러한 공사보고서를 남긴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뿐이었다. 의궤는 우리 선인들의 무서운 기록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이런 명품들이 규장각에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이 책의 저자도 그 많은 명품들 가운데 일부만을 소개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부의 명품들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맛볼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작년 국제신문(부산에서 발행하는 신문임)에 연재하였던 '규장각 다시 읽기'를 바탕으로 이제까지 썼던 여러 책들의 내용을 맛깔나게 버무려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수백 점에 달하는 컬러 도판은 규장각 자료들의 아름다움을 잘 느끼게 해줄 수 있게 세심한 배려가 있음이 돋보인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편협한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털끝 하나도 내가 아니면 남이다."라는 정신으로 그려진 선비들의 초상화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선비들의 넘치는 인간미와 화인들의 치밀하고 무서운 역량을 만끽할 수 있다. 지봉유설(芝峰說),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 다양한 백과사전류 도서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代國都之圖)와 같은 세계지도를 통해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던 우리를 만날 수 있다. 세계적인 기록유산들은 우리 후손들에게 무한한 긍지를 안겨주고 있다. 선비들의 문집은 선비들의 방대한 학문 세계와 꼿꼿한 정신을 오롯이 보여준다. 19세기까지 거북선이 있었고, 춘향의 고향 남원 광한루와 평양 냉면집의 유명함은 방대한 조선의 지방지도에서 만날 수 있다. 규장각, 그 매력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일까?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선비들은 백성들에게 믿음을 얻는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믿음을 저버릴 경우 하늘과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정치를 투명하게 하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을 담은, 진실에 가까운 글을 후세에 남겨 역사의 평가를 받고자 하였다. 이는 왕조가 존속한 내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방대한 기록문화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너무나 다양하며, 거의 대부분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깝다. 칼이 붓을 이길 수 없으며, 또한 기록이 정치의 투명성, 공개성, 책임성을 보장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역량을 지닌 기록 강국이었다. 그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정조대왕은 이를 바탕으로 민국(民國)이라는 원대한 꿈을 꿔나갔던 것이다. 그 바탕에 규장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오늘에 비로소 그 꽃을 피웠다.

 

 

정조가 규장각을 처음 설립할 때 가졌던 '법고창신'의 정신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투철한 기록 정신은 공개성과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 정치 행위에서 벌어진 모든 사실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부정과 비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투철한 기록 정신은 자신의 시대를 떳떳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양하고 방대한 기록물을 제작하고 철저하게 보관한 민족,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 있다. 이제 이들 기록물의 가치를 공유해가면서, 미래를 살아가는 지혜의 원천으로 삼아볼 것을 권한다. (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24쪽) 

 

 

[덧붙이는 글] 정조대왕과 규장각에 관해 많은 이들의 관심이 있을줄로 안다.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얻고 싶은 분들은 아래의 참고문헌을 활용하면 좋겠다. 이 서평을 쓰면서 이 참고문헌들도 많이 활용하였다.

 

신명호,『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신병주,「신병주의 규장각 다시 읽기 <1> - 전통 문화의 보물 창고」,『국제신문』2006년 7월 6일.

신병주,『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랜덤하우스 중앙, 2003.

정옥자,『오늘이 역사다』, 현암사, 2004.

한국문화유산답사회,『서울』(답사여행의 길잡이 15), 돌베개, 2004.

한영우,『다시 찾는 우리역사』(초판), 경세원, 1997.

한영우 글·김대벽 사진,『동궐도』, 효형출판, 2007.

홍순민,「창덕궁과 후원」,『한국사시민강좌』제23집, 일조각,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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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책을 읽고 직접 답사해 보세요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o******1 | 2008.01.05 리뷰제목
(1)규장각을 알아보다   고급스런 종이와 선명한 사진들은 책을 읽기도 전에 나를 사로잡았다. 이 한권의 책으로 규장각의 명품들을 직접 소유한 느낌이랄까. 요즘 ‘정조대왕’열풍이 불고 있어, 언론에서도 이 책에 대해 언급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즉시 신문기사들을 찾아봤는데 역시 신문에서 이 책에 관해 많은 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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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규장각을 알아보다

  고급스런 종이와 선명한 사진들은 책을 읽기도 전에 나를 사로잡았다. 이 한권의 책으로 규장각의 명품들을 직접 소유한 느낌이랄까. 요즘 ‘정조대왕’열풍이 불고 있어, 언론에서도 이 책에 대해 언급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즉시 신문기사들을 찾아봤는데 역시 신문에서 이 책에 관해 많은 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조선시대의 학문연구기관이자 도서관이었던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국가기관으로 설치된 뒤 1781년에는 벌써 3만권 남짓한 도서목록이 작성될 만큼 성장했다. 규장각 자료는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취조국,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갔고, 1945년 서울대가 넘겨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장 자료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도서 2만 5000책과 문서 5만점, 목판 1만 7800장 등 22만여점에 이른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은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보물창고인 규장각 서고에서도 정수를 추려낸 것이다.1)

  규장각에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등 국가의 공식 연대기를 비롯하여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 국토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회화적으로 그린 지도, 《해동제국기》《열하일기》 같은 기행문, 개인의 일기와 문집, 생활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각종 고문서 등 조선시대 사람들이 남긴 방대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역사학뿐 아니라 한문학, 지리학, 언어학, 민속학, 군사학, 미술사, 복식사 등 각 분야의 관심사를 충족시켜줄 매력적인 자료들이 가득하다. 이 자료들에는 선조의 삶과 생각의 자취가 담겨 있고 그 시대인들의 문화역량이 함축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명품이라 부를 만하다. 이 책은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골라 소개하고 있다. 책의 제목을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명품들은 그야말로 맛보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만큼 규장각은 조선시대를 알 수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들의 보물창고다.2)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을 다녀오고 난 직후였다. 그곳에서 직접 보물들을 보자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약 90분간의 견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견학 후에 책으로 접하는 것은 참으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직접 본 보물들을 책에서 다시 접하다니!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은 15년간 규장각 연구원으로 일해 온 저자가 규장각에 있는 수많은 사료 가운데 대표적인 명품 80여 점을 골라 그 내용과 의미, 다양한 에피소드를 쉽게 풀어낸 책이다. 그리고 저자의 재치 있는 비유, 예를 들면 영조의 청계천 공사를 미국보다 앞선 <뉴딜정책>이라고 소개하는 대목은 읽는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을 들지 않게 했다. 친숙한 이야기도 등장해 흥미를 더했다. 바로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왕의남자>의 이야기도 실렸는데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장금은 <<중종실록>>에 6번이나 등장하고 <왕의남자>의 공길은 <<논어>>를 인용하여 바른말을 했다가 곤장을 맞고 유배간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자,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2)표현에서 재치가 느껴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상황들을 아주 재치 있게 풀이한다. 그 표현의 재치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는 동안 메모지를 옆에 두고 쪽수를 체크해 두었다. 그 대목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유형원은 관료 임기제를 철저히 지켜 행정의 실효성을 꾀하고, 왕실을 위해 설치된 많은 관청을 대폭 축소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자고 주장했다. 현대 국가에서 추진하는 ‘작은 정부’ 구상과 유사하다.” ‘작은 정부’라는 표현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전공이 행정학과이다 보니 행정학에서 늘 ‘작은 정부’를 강조한다. 그래서 이 표현이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현대 행정학에서 강조하는 ‘작은 정부’를 유형원은 아주 오래전에 강조하고 있었다니 놀랍다. - 321쪽

②“이지함은 <<토정비결>>로 연상되는 기인이 아니라 선구적인 사회경제정책을 제시한 사상가이자 개혁가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이지함은 애덤 스미스보다 훨씬 먼저 ‘국부론(國富論)’을 주장한 토종 조선인 학자를 만나는 기쁨을 안겨준다.” 애덤 스미스가 누구인가! 바로 행정학과 정치학에서 늘 등장하는 그 유명한 인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애덤 스미스를 능가하는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지함이다. -362쪽

③“실록은 왕의 동정을 중심으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생활 등 다양한 분야를 종합하고 있는 ‘조선시대판 타임갭슐’이다.”  - 194쪽

④“조선시대 청계천 공사는 1930년대 실업 문제를 대토목공사로 해결하고자 한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뉴딜정책의 핵심은 국가가 대규모 공공건설 사업을 벌여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1933년의 테네시 계공 개발공사(TVA)가 대표적이다. 홍수 방지와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한 이 사업은 영조 때의 청계천 공사와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뉴딜정책보다 무려 170년 전에 조선의 한 왕에 의해 홍수 방지와 실업자 구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청계천 공사가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59쪽

⑤“<<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결혼식에 대한 가장 완벽한 기록이지만 오늘날 궁중 혼례의 재현에는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요즘의 시각에서 보면, 66세의 노인과 15세 청소년의 결혼식이란 아무래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 275쪽


(3)놀라움과 신비함이 나를 사로잡다

①“<천하도지도>는 현재의 세계지도와 거의 유사할 만큼 정확하다. <혼일강리도>처럼 북반구만 그린 게 아니라 남반구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즉 신대륙까지 그려 넣었다. <혼일강리도>가 신대륙 발견 이전에 제작된 것을 고려하면 <천하도지도>는 그만큼 넓은 세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15세기 초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세계지도 <혼일강리도>와 18세기 후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천하도지도>를 비교해보노하면 350년의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에서 이 지도들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요즘이야 인공위성으로 세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지만, 그 당시 어떤 기술로 이와 같이 정밀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지도가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느껴진다. - 140쪽

②내가 지난 11월 3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을 견학하고 가장 놀라웠던 것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다. 비단 나만 놀란 것이 아닌 당시 그곳을 방문한 수강생들도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지하 1층 전시실 벽면에는 가로 3.3미터, 세로 6.7미터 크기의 장대한 지도가 걸려있다. 22첩으로 구성된 책자들을 모아서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지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지도. 바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다.” - 161쪽


(4)새롭게 알게 된 지식을 이야기 하다 

①“조선인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인물은?” 과연 이 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몇 이나 될까. 이번에 그 정답을 알게 되었다. “을사조약의 순국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민영환. 그는 자결하기 9년 전, 조선인 최초로 세계를 일주했다.” - 120쪽

②“박제가는 1778년 이덕무와 함께 북경에 갈 기회를 얻었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것이 <북학의>다. 박제가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였다. 그러나 중국 땅을 너무 감격스럽게 밟은 탓일까? 중국 문명에 지나치게 동화된 측면이 있었다.” 나는 조선 후기를 공부할 적마다 박제가의 <북학의>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약간은 실망하게 되었다. 박제가가 ‘중국은 최고, 조선은 최하’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100쪽

③‘이덕무’라는 학자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학자가 왜 인지도가 낮은지 의문이 생겼다. “이덕무는 조용하지만 강한 학자였다. 스스로 ‘책에 미친 바보’라 할 정도로 온갖 책을 두루 읽었다. 경사와 문예에서 경제, 제도, 풍속, 서화, 금석, 도서, 조수, 초목에 이르기까지 탐구하고 고증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그렇게 쌓은 역량이 <청장관전서>에 집약되었다.” - 373쪽


(5)「조선왕실기록문화의 꽃-의궤」부분을 읽고서.

  「조선왕실기록문화의 꽃-의궤」부분을 읽으면 249쪽에서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가 나온다. <화성성역의궤>부분을 읽었을 때, 최근에 신문기사에서 본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화성성역의궤는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정조시대에 만들어진 경기도 수원 화성의 건축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등재됐다. 경기도 수원시는 화성성역의궤가 지난달 14일 유네스코 제8차 세계기록유산국제자문위원회의 결정을 거쳐 오늘(2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등재됐다고 밝혔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건설 계획과 공사진행상황, 공사비, 공역 참가자 작업일수는 물론공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그림까지 그려져 있어 조선시대의 문화, 건축 수준을 파악하는데 중요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화성성역의궤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 승정원일기, 고려대장경판 등 총 6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3)

  더 재미있는 사실은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이유가 바로 <화성성역의궤>때문이라는 사실. “수원 화성(水原 華城)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화성의 상당한 부분이 1970년대 이후 복원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복원된지 채 30년이 되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인 화성이 어떻게 인류가 길이 보존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을까? 당시 정부가 복원을 잘해서? 어림 없는 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화성의 공역에 관한 전말을 담은 보고서인데, 이 의궤 덕분에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이러한 공사보고서를 남긴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뿐이었다. 의궤는 우리 선인들의 무서운 기록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4)


(6)『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을 읽고

  이 책은 너무 매력이 많다. 많은 사진과 해설, 재치 넘치는 표현, 교과서에서 알 수 없는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 등 책을 읽다보면 빠져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역사에 이토록 흥미를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바로 이 책이야 말로 명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신문기사들을 찾아보았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알아보았는데 ①이 책에 대한 평가 ②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읽었는가? ③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은?  그 결과 많은 신문자료들을 얻을 수 있었고,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되었다.

  이제 이 책을 더욱 맛있게 읽는 방법을 소개하고 마칠까 한다. ①<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을 직접 견학하라. 예를 들면 그곳에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직접 보게 된다면 단순히 책에서 보는 느낌과 확연히 다를 것이다. 감동 그 자체이다. 11월 3일 날 견학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②신문기사를 찾아봐라.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을 신문기사에서 다루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화성성역의궤>부분이다. ③역사서를 읽을 때 백과사전처럼 활용하라. 역사서를 읽게 되면 적은 분량으로 오랜 역사를 다루다 보니 요약 형식이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훌륭한 백과사전이 될 것이다. 이 세 가지를 곁들여서 읽으면 더욱 알찬 독서가 될 것이라 믿는다. 

 

by.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학생

 

참고 : 신문기사 등 여러 해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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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선조들이 남긴 진정한 명품들 평점8점 | d*******r | 2009.03.15 리뷰제목
최근 정조가 남긴 문헌이 발견되면서 정조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정조의 죽음이 독살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다시금 조명을 받은 부분은 정조의 국정운영에 대한 강인한 모습이었다. 정조의 그와 같은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규장각이다. 정조는 학문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구상하면서 그 일환으로 규장각을 지었던 것이다. 역대의 도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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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조가 남긴 문헌이 발견되면서 정조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정조의 죽음이 독살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다시금 조명을 받은 부분은 정조의 국정운영에 대한 강인한 모습이었다. 정조의 그와 같은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규장각이다.


정조는 학문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구상하면서 그 일환으로 규장각을 지었던 것이다. 역대의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 기관이자, 정약용을 비롯하여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당파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젊고 참신하며 능력 있는 인재들을 불러모아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핵심 정치 기관으로 삼았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경희궁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즉위 후 처소를 창덕궁으로 옮겨,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고 쓴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이 남긴 어제(御製, 왕들이 직접 지은 글), 어필(御筆, 왕이 쓴 글씨) 등을 보관하게 하고 ‘규장각(奎章閣)’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규장각은 역대의 주요 전적을 보관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규장각에 소장된 수많은 자료들 중에서 어필, 온양별궁전도 등과 같은 기록화, 노걸대, 박통사, 첩해신어, 통문관지 등 외국어 학습서, 북학의, 열하일기 등 외국문물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대동여지도 등의 지도와 지리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가의 공식 연대기를 비롯하여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 오늘날 백과사전과 같은 지봉유설, 유원총보, 조선시대 중인들의 삶을 기록한 규사, 호산외기, 이향견문록, 소대풍요 등 다종, 다양한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소개하고 있다.


15년간 규장각 연구원으로 활동한 지은이는 위 작품들을 단순히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 각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내용 등을 많은 자료와 사진 등으로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지은이의 해박한 글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과 모습, 체취를 느끼는 기회가 되었으며, 또한 위 작품들의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새겨보는 계기가 되었고, 여태까지 몰랐던 부분들이나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위 작품들은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문화역량이 함축된 ‘명품’중의 ‘명품’이었다. 우리만 그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고 지나쳐 왔던 것은 아닌가하는 죄스러운 마음마저 드는 것은 왜일까.


선조들이 모든 것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찬란한 우리 문화의 유산을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인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규장각의 분소라고 할 수 있는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 297책을 약탈하여 가서 현재까지도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면서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지.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반환을 받아야 할 것이다.


‘명품’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기록물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다. 선조들의 ‘명품’을 이어받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명품’이 가진 정신을 현재에 실현하고 직접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을 본받아 새 것을 창출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규장각 설립 취지는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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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조선후기 기록문화를 한 권에 담은 백과사전 평점10점 | z***a | 2009.06.02 리뷰제목
어릴 때 자주 꾼 꿈이 있다. 3,4년이나 지속된 꿈이다. 꿈에서 난 어린 책도둑, 너무나 당당한 도둑이다. 꿀 때 마다 느끼지만 이 친구 정말 멋있다. 검고 커다란 보따리를 어깨에 들쳐 매고 서점에 들어가 마음대로 책을 골라 넣고 유유자적 걸어나오는 유쾌한 소년이다. 만약 치기어린 내가 문이 아닌 무를 탐했다면 꿈 속의 비경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각종 무술비급이 소장되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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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자주 꾼 꿈이 있다. 3,4년이나 지속된 꿈이다. 꿈에서 난 어린 책도둑, 너무나 당당한 도둑이다. 꿀 때 마다 느끼지만 이 친구 정말 멋있다. 검고 커다란 보따리를 어깨에 들쳐 매고 서점에 들어가 마음대로 책을 골라 넣고 유유자적 걸어나오는 유쾌한 소년이다. 만약 치기어린 내가 문이 아닌 무를 탐했다면 꿈 속의 비경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각종 무술비급이 소장되어 있는 숭산 소림사의 장서각에 잠입해 들어가 상승무술을 훔쳐 익히는 꿈을 꿀 것이다. 이러한 내가 만약 이덕무 같은 백탑파와 동시대에 살았다면 내 꿈 속에서 그리는 보물섬은 다름아닌 규장각奎章閣일 것이다.

규장각은 1776년 조선 정조가 설치한 왕실도서관이자 학문연구소 아울러 당시 개혁정치의 산실이다. 이 책《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은 총 7편에 걸쳐 규장각이 소장한 조선후기 기록문화의 진품명품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명품들은 「우리 선조들의 삶과 생각의 자취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인들의 문화 역량이 함축되어 있다」고 저자 신병주는 강조한다. 책의 각 편을 조금씩만 맛보고 가자.

〈어필과 기록화의 세계〉편에선 선조, 숙종, 영조, 흥선대원군의 친필과 화폭으로 그들의 성품을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아울러 임금의 온천행차를 소개하고 있는데, 재미난 사실은 역대 임금 중 온양온천을 가장 자주 찾은 이가 현종이라는 점이다. 솔직히 현종이 어떤 임금인지 개념이 없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다. 현종은 재임기간 내내 종기와 피부병으로 온천욕을 즐겼다 한다. 허목, 이천보, 유척기, 유언호 같은 조선후기 대신들의 초상화를 접할 수 있다. 이들 초상화는 매우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인물의 정신마저 살려내도록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끝으로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를 보면서 후손들에게 뼈아픈 좌절의 역사를 잊지 말기를 신신당부하는 선조들의 노고를 읽을 수 있었다.

〈전통과 세계의 만남〉편에선 역관의 회화서나 기행문을 통해 조선이 쇄국이 아닌 외국과의 교류에 힘써왔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먼저 《노걸대老乞大》란 고려말에 나온 중국어 회화 교재를 보자. 비록 600년 전에 만들어진 책이지만 내용면에서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중국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거의 없다. 이에 비해 한글의 변화가 크게 두드러진다. 400년 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쓴 한글체 서신을 보니 여러 번 읽어야 그런대로 의미의 가닥이 잡힌다. 그러나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 외국기행문을 보자.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선 이용후생利用厚生이란 실학적 사상이 담긴 여러 주장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글을 버리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그의 사대주의적 발상에 정말 뜨악했다. 촌사람이 휘황찬란한 도시에 와서 눈이 뒤집힌 경우랄까. 그래도 박제가의 《목우도牧牛圖》는 친서민적인 정취가 물씬해 보기 좋았다. 조선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열하까지의 고된 여정과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초상화에 나타난 연암의 얼굴이 이외로 범상이라 무서워 보인다. 겉으로 매서워 보이지만 내심 따스한 정이 넘치는 사람이란 걸 이미 그의 가서를 통해 잘 알고 있던 터라 오히려 재미난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뭉클했던 건 《부아기정赴俄記程》과 《환구음초環璆唫艸》에서 드러난 민영환 일행의 러시아기행과 조선 최초의 세계일주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격동하는 조선말, 풍전등화마냥 기구한 그들의 삶이 더욱더 애달프게 느껴진다.

〈지도와 지리지에 나타난 시대의 흐름 찾기〉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운 다양한 지도를 보여준다. 지도를 통해 조선이 바라본 세계의 모습을 살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조선지리학의 선구자인 고산자 김정호 같은 이들의 과학적 열정을 직접 느낄 수 있다. 조선의 전국지도뿐만 아니라 지방의 지형적 특색을 예술미로 승화한 지방지도,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도混一彊理圖〉의 모습까지 만나볼 수 있다.

〈세계적인 기록유산들〉편에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1997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2001년)와 《일성록日省錄》등 국가 공식 연대기를 소개한다. 이런 유산들을 보면서 다시금 꼼꼼한 기록정신에 놀라게 된다. 한편 각종 전란에 소실되고 전후 더 깊은 산중으로 옮겨지는 실록을 보며 조선의 명운을 함께한 그 기구함에 씁쓸한 심정이 든다.

〈의궤로 보는 조선의 왕실문화〉편에선 저자가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이라 부른 의궤儀軌를 소개한다. 의궤란 세자책봉, 궁중잔치, 혼례와 장례식, 산릉조성, 궁궐건축 같은 일들을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왕실행사 보고서로,「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의궤가 아니면 놓치는 많은 사실들이 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과학진흥의 면모, 영조와 계비의 혼례에 얽힌 에피소드, 그리고 정조의 화성행차와 사도세자나 혜경궁 홍씨에 대한 그의 효심 등 왕실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엇보다 파리국립도서관에 있는 어람용 의궤들이 본국으로 하루속히 돌아오길 바란다.

〈조선의 지성을 대표하는 백과사전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국사책에서 한번쯤은 들어본 자랑스런 백과사전들이 소개된다. 먼저 프랑스 백과전서파보다 150여년이나 앞선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재미난 점은 이것만은 중국이 따라올 수 없는 조선최고라는 취지의 글을 남기는데,「부녀자의 수절, 천인의 장례와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쏘는 재주」가 그러하다. 동방예의지국임을 자랑하거나 주몽의 후손임을 새삼스레 증명하는 일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그런데 맹인의 점치는 재주라니, 단순한 농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연유로 이를 특기했는지 모르겠다. 이덕무도 강력 추천한 명저인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은 토지, 교육, 과거, 군사제도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그 개혁방향을 제시한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조선사회의 6가지 폐단인 노비제, 과거제, 벌열, 기교, 승려, 게으름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세기 대표적 백과사전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모진 세월을 거쳐 1930년대 최남선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실로 안타깝고 또 그나마 다행이다. 참고로 오주 이규경은 간서치 이덕무의 손자이다.

〈선비들의 정신세계 속으로〉편은 먼저 이황과 더불어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룬 남명 조식을 소개한다. 경과 의를 평생 실천한 남명은 몸에 지닌 칼에「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란 경구를 새길 정도로 엄청난 포스의 소유자이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青莊館全書》로 유명하지만 그의 일본문화연구서인 《청령국지蜻蛉國誌》도 다채롭다. 일본에 친히 가보지 않고 작성한 연구서이지만 일본의 지도, 풍속, 물산과 인물 그리고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목록까지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런 호서벽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이 책은 잘 빚어낸 옴니버스식 백과사전이다. 모든 가정의 서가에 한 권씩 있어 틈 나는대로 펼쳐 읽었으면 하는 양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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