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5박 6일 여행을 앞두고 고민거리가 생겼다. 인천공항까지 공항버스를 이용할 것인지 아니면 차로 이동할 것인지. 차로 이동하는 것이 편하지만 늘 주차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설 주차대행에 비해 공항 주차장 주차비가 덜 들었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여객터미널까지 걸어가는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주차비보다 공항버스 값이 더 든다는 딸아이 주장이 비교하고 고민하는 나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차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5일간 주차비로 생돈 나가는 것 같아 찜찜했다. 무료주차할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끝까지 미련이 남아 투덜거렸다.
발문을 쓴 소설가 김화진이 소설에 '고전미'가 있다고 평하는 작가 오한기의 <무료 주차장 찾기>는 연작 소설집으로 세 편의 소설이 담겨있다. 세 소설의 주인공 모두 소설가인 오한기 자신인듯싶다. 읽다 보면 에세이인가 싶지만 (실제로 육아 에세이를 써 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이 있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오한기 작가가 만든 캐릭터('작가의 말'에서 밝힘) 임을 감안하면 소설이 맞다.
표제작 <무료 주차장 찾기>에서 주인공인 '나'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일곱 살짜리 딸 주동의 육아를 담당하는 작가다. 어느 날 주동의 유치원 홈페이지에 기사가 버스를 몰고 사라져 등하원을 보호자가 직접 해야 한다는 공지가 떴다.
'무료 주차장을 찾으러 갑니다.
보도기사로 접한 사실인데, 기사는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p. 31)'
이 사건으로 딸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시간이 생겨나 주인공 '나'의 워라밸이 깨져버렸다. 유치원 버스 기사가 사라진 이유는 원장의 갑질이었다. 주택가에 유치원이 있어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은데, 정직원을 시켜준다는 구실로 주차비용을 기사에게 전가했기 때문이었다.
<숲 체험> 주인공의 직업은 소설가를 포함해 여섯 개나 된다. 이 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쏟는 건 딸 육아다. 딸 주동은 울다가도 울음을 그칠 만큼 올림픽 공원 '숲 체험'을 좋아한다. 비극은 올림픽 공원 주차장이 늘 꽉 찼다는 데서 시작된다. 딸아이 '숲 체험'만큼은 포기 못한다. 올림픽 공원에 갈 때마다 주인공의 머릿속에 늘 '무료 주차'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반품 알바>의 주인공 소설가 '나'는 아내가 정리해고당해 경제적으로 위험으로 처한다. 이때 도마뱀 구매대행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 선배가 제법 돈벌이가 되는 알바를 제안한다. 반품된 도마뱀을 회수하는 일인데 회수한 도마뱀을 되팔던지 보관하던지 알아서 처리해 주는 조건이 붙었다. 금방 되팔 수 있을 줄 알았던 도마뱀은 정식 사업자가 아니라 불가능했고, 가뜩이나 수명이 긴 도마뱀은 점점 늘어나 처치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도 어딘가 갈 일이 생기면 무료 주차가 가능한지부터 알아본다. 주차비는 왜 이리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주차장이 없거나 있어도 주차비를 물어야 한다면, 차도 막히고 길에다 시간을 버릴 수 없다는 핑계를 억지로 갖다 대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맘먹는다. 그럴 때마다 쥐뿔 돈도 많이 못 버는 딸아이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한마디 한다.
"아빠~ 그럼 차는 언제 쓸 거야."
세 편의 연작 소설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이 어쩌면 '깔끔하게 구획된 하얀 선 내부의 보장된 공간을 갈망 (p. 61, <무료 주차장 찾기>)'하는 건 아닐까? 그 공간을 마련하려고 대여섯 개의 알바도 마다하지 않는 소설 속 주인공인 소설가 '나'처럼 말이다.
전세나 사글세 집에 살면 마치 누군가 내가 전화해 내 구역에 왜 차를 대 놨냐는 투로 '차 빼주세요'라고 말할 것 같아 불안하다.
'이보세요, 오한기 씨! 답답하게 도덕책 같은 소리 늘어놓고 있네. 무료 주차는 우리 권리라고요!
조나가 말을 끊었다. 나도 물론 조나가 제시한 명제 자체에는 동의하는 바지만... (p. 57, <무료 주차장 찾기>)
무료 주차가 권리라고 외쳐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주차 공간이 모자란다. 돈을 더 내고 주차공간을 서너 칸씩 차지하는 사람이 있는 까닭에 더 모자란다. 그래서 주차공간을 차지하려고 저녁이 되기 전에 귀가를 서두른다.
그렇다고 언제나 주차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인생으로 다시 살 수 있을까? 주차 공간도 없는 인생을 택배로 받았으니, '이건 아니지'라는 변심을 이유로 반품이 되는가 말이다. 또 반품한다면 어디에 반품해야 하나. 더 비극은 반품된다손 치더라고 반품된 도마뱀처럼 처치 곤란한 인생이 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동을 미술학원에 들여보내고 나면 두 시간의 자유시간이 생긴다. 강일동 스타벅스에서 한 시간 작업하고 차를 몰아 고덕역 이마트로 향한다. 이게 전부 다 주차비 때문이다. 공연히 드넓은 이마트를 떠돌다 보면 몇 푼 아끼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현타도 오고. 그러고 보니 나에게 육아란 곧 '무료 주차장 찾기'일 수도 있겠구나. 무료 주차장이 무얼 상징하는지 정확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어렴풋이 감이 잡히는 듯. (p. 154, 작가의 말)'
딸이 한 말이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차를 몰고 백화점으로 가 주차한다. 엥? 내가 쓴 돈만큼만 주차시간이 무료다. 이만큼 샀으면 한 시간을 주차할 수 있으려나? 아니 두 시간? 두근두근...
'에라이~ 무료주차 공간이나 찾아다니는 내 인생이라니...
이런 소설은 처음이다.
작가 이름 오한기. 화자 이름 오한기.
게다가 화자의 직업마저도 소설가다.
세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가족들)까지 모두 같다.
그래서 연작소설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느껴졌다. 이전의 작품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지어오신 모양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한 편을 쓰는 매력적인 작가”(산문가 김신식)라는 평가를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한기 소설가는 ‘가장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기존 소설의 관습과 문법을 비트는’ 작가로 손꼽혀왔다. 정말이었다. 이야기들의 배경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극사실주의로 읽히는 대목들이 많다. 그런데 서사의 흐름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다. 그렇다고 판타지라 할 정도로 튀지는 않는다.
앞표지에 선명하게 "연작소설집"이라 쓰여있건만 이야기들의 정체를 특정할 수가 없다. 자전적 경험 같은데 소설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재미있기는 힘들다. 에세이인가, 소설인가 계속 헷갈리다가 중반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에 빠져 읽었다. 에세이면 어떻고 소설이면 또 어떠랴. 오한기가 창조한 세계는 재미있고 의미까지도 있으니 그저 몰입하면 될 일이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보란 듯이 무너뜨린 《무료 주차장 찾기》.
여러모로 이 소설들은 기존의 소설적 틀에 가둘 수 없는 오한기만의 이야기였다. 그는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시니컬하지만 소심하게 도덕적이고 따뜻하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내 맘대로 당당하게 타입의 괴짜일 것 같다. 물론 에세이가 아니니 실제 작가님이 어떤 분일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화자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작가님의 큰 그림 속에는 독자의 이러한 상상과 착각도 포함된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꼬이고 얽힌 혼란스러운 반응까지도 기대하며 신나서 쓰셨을 것 같다는 예상이 절로 든다.
제목도 특이하다. 소설 제목이야 워낙에 다채롭고 기발한 게 많지만 이상하게 《무료 주차장 찾기》는 더 생뚱맞아 보였다. "무료 주차장"이라는 말을 평소에 쓰지 않아서 생소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도중에도, 다 읽고 책을 덮고서도 제목에 숨은 다른 의미를 더 찾고 싶어 계속 곱씹었다.
표제작인 첫 번째 소설 <무료 주차장 찾기> 속 화자 오한기는 소설가지만 고정적인 수입은 적다. 다행히 대기업 정직원 마케터인 아내 덕분에 생활이 어렵지는 않다. 딸 주동이는 오한기가 전담해 돌본다.
그러던 어느 날,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주동이 유치원 버스가 사라졌다고 했을 때, 유치원에 가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피식 웃었다. 주동아, 거짓말을 해도 그렇게 유치원 버스처럼 귀여운 거짓말을! 그런데 알고 보니 진짜였다. 유치원 홈페이지에는 기사가 버스를 몰고 사라졌다며 당분간 운행할 수 없으니 등하원을 직접 해야 한다는 당황스러운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무료 주차장을 찾으러 갑니다.
기사는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 31면
원인은 원장의 갑질이었다. 유치원이 주택가에 있어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은데, 원장이 정직원 전환을 인질 삼아 수십 년 동안 주차비용을 기사에게 부담시켰던 것이다. 기사가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기에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빤하지만 씁쓸한 사건이었다.
황당무계하지만 있을 법도 한 이야기였다. 무료 주차장을 찾는다는 말뜻에 한동안 골몰했다. 나도 동네를 벗어난 곳에 갈 일이 있으면 주차 환경 먼저 살펴본다. 근처에 공영주차장이 있는지, 살짝 신세 질 만한 아파트 단지가 있는지, 갓길에 댈만한 장소가 있는지 말이다. 어렵겠다 싶으면 대중교통이 오히려 편하다.
사실 주차요금을 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지만 모든 운전자들이 그렇듯 주차비는 이상하게도 참 아깝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자동차는 끝없이 판매하면서 주차 공간에 대한 시스템은 그에 상응하지 못하는 세태가 마치 자동차는 만들면서 정작 도로는 여전히 흙길, 자갈길로 내버려둔 것처럼 어이없다. 주차 자리 같은 기본적인 자원조차 확보하기 어려워 하염없이 돌고 돌아 헤매야 하는 현대 생활의 고단함과 부조리가 "무료 주차장"으로 나타나 보였다.
달릴 때가 있으면 멈출 때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멈출 수 있는 "무료 주차장"이 있다면 한결 가볍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당당하게 주차장에 주차했으니 차 빼라는 전화가 올까, 주차 단속이 뜨진 않을까 초조해하지 않고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를 보장받는 기분일 것 같다. 나를 받아들여주고 존중해주는 환대의 감정을 느낄 것 같다는 건 오버일까. 잠시 멈추고 쉴 안식처마저 늘 애써 찾아야 하는 우리의 불안정한 삶을 비추는 것 같았다.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멈출 공간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또 달려야 하는 아이러니가 서글프다.
블랙 코미디 같은데 빨간머리 앤도 떠올랐다. 공상하며 다채로운 이야기를 짓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사는 앤이 오한기 작가님과 닮았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제약 없이 써내는 이야기꾼 같았다. 독자의 시선마저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져 좋았다. 소설의 가치나 문학의 의미 같은 거창한 정의에 매이지 않고 편하게 흘러나오는 이야기 같았다. 재미를 중시하며 즐겁게 쓰는 소설이 주는 유쾌함과 통쾌함이 있었다.
삶이란 본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을 닮은 소설도 낯선 이야기가 말이 안 된다고,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난할 게 아님을 깨달았다. 명확한 구조나 의미 없이 흐르다가 난데없이 방향을 틀어버릴 수도 있는 게 인생이었다. 창조자인 소설가가 그렇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스토리였다.
색다른 소설, 현실적이지만 붕 떠 있는 것도 같은 소설. 영상에서 벗어나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에 빠지고 싶을 때 《무료 주차장 찾기》 추천합니다.
*** 출판사 작가정신의 서포터즈 작정단 13기의 자격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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