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된 적이 있다. 그녀가 죽기 전에 남긴 “남은 밥이 있으면 좀 주오”라는 메모 때문에 그녀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웠다.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시인이나 작가,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물질 풍족시대의 그늘에서 싱그러운 젊음을 꽃피워야 할 재능있는 작가가 그것도 한창의 나이에 자신의 방에서 홀로 죽어가다니… 이 자리를 빌어서 그녀의 명복을 빈다. 부디 천국에서는 배고프지 않고 맘껏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를… 그런데 이러한 실정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도 역시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작가로써 먹고 살기가 힘든 일인가 보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자서전적 소설인 이 책에서 젊은 시절 글을 써서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자신의 경험을 쓰고 있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었다.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글쓰는 일은 수렁에 빠졌으며, 특히 돈 문제에 짓눌려 허덕였다. 이따금 돈이 떨어지거나 어쩌다 한번 허리띠를 졸라맨 정도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노상 쩔쩔맸고, 거의 숨막힐 지경이었다. 영혼까지 더럽히는 이 궁핍 때문에 나는 끝없는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5쪽)
이렇게 서두를 쓰고 있는 폴 오스터는 자신의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자신은 열예닐곱 살 때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노라고 말이다. 작가가 되는 것이 그에겐 필연이었는가 보다.
의사나 정치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거기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6쪽)
열예닐곱에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고3이 되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수능이나 내신 점수에 맞추어 자신의 전공을 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더라도 점수가 안되어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의 말처럼 작가는 선택되는 것이므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혼돈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글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폴 오스터의 말을 빌리자면 “신의 호의를 얻는” 운 좋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은 것이다. 작가에게 자유는 어떤 영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긴 이건 작가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와 같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들에게 필수 요소인 것 같다. 폴 오스터도 글을 쓰면서 먹고 살기 위하여, 정규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시간제로 일하게 되는데 이는 순전히 글쓰는 자유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토막으로 일하다 보니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이 항상 부족하고, 돈이 부족하니 또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결국 아르바이트에 치여서 글 쓸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게 되는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이게 된다. 그나마 아르바이트는 주로 번역 일이었으니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글 쓰는 일과 그리 멀리 떨어진 일은 아니니깐 말이다.
이 책의 뒤에는 자서전적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자신이 힘든 시절에 썼던 세 편의 희곡 <로렐과 하디, 천국에 가다>, <정전>, <숨바꼭질>과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개발했으나 아무도 지원해주지 않아 사장되어 버린 카드게임인 <액션 베이스 볼>에 대해서 덧붙여 있다.
폴 오스터는 이 책을 통하여 “이렇게 작가가 되는 일은 힘든 것인데도 작가가 될 텐가? 매일 배고프고 가난에 허덕이고, 결혼한 아내와 아이는 이 가난을 견디지 못해 떠나고, 혹시나 글을 쓰더라도 헐값에 팔아 치워야 한다네. 이 고생이 평생 갈지도 모른다네. 뭐? 그래도 작가를 하겠다고? 정말 각오는 된 건가?”라고 재차 확인하는 것 같다. 운이 좋다면 폴 오스터처럼 유명해져서 많은 작품을 남기면서도 돈도 벌 수 있겠지만, 그런 그에게도 유명해지기까지 이렇게 많은 힘든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나마 작가가 살아있는 동시대에 사람들로부터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도 행운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작가가 죽고 나서야 혹은 한 세기 정도 지난 후에야 주옥 같은 글을 인정받는 작가도 있으니깐 말이다. 하긴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후대에 이름을 남기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은 남길 수 있으니 이 사실만으로도 만족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과 같이, 재능을 다 꽃피우기도 전에 죽어가는 일과 같은 비극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들을 죽음으로 몬 것은 이 사회의 일원인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들을 위한 개인 혹은 기업의 후원이나 문화재단 설립 등을 통하여 지원해주고 후원해 주는 장치가 필요할 것 같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먹고 살기의 걱정 없이 마음껏 창작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꿈꾸어 본다.
눈을 감고 과거의 시간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일이 가끔 있다. 이제 삼십대 초반을 넘어 꺽어지는 나이로 막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요즘, 부쩍 그러한 날이 많아졌다. 놀라운 것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되돌아가는건 단 1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름 고난의 시절이라 부르던 과거의 시간들도, 지금와선 대수롭지 않게 기억된다는 것은 이채롭다.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과거란 시답잖은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쩔쩔매느라 낭비된 시간들의 연속같다.
그럴때 회상속에서 얻는 하나의 힌트가 있다. 그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게 현재 삶에 대범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삶에 자신감을 갖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현재를 헤쳐 나가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인생 전체의 그림이란 한눈에 들어오질 않고, 인생이란 본래 상수가 아니라 변수들의 연속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그것은 인생관 혹은 간단히 소신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평범한 삶이란 무엇인가 ?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이를 낳고 또 평범하게 늙어가는 것일까? 아이의 양육이나 돈을 모아 집을 사고, 그리고 노후가 걱정되지 않게 든든한 예금 통장을 갖는 일이 정말 우리 인생의 사명일까? 그러나 애초부터 이러한 평범한 인생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삶이란 자유를 돈과 맞바꾸는 삶이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워는 돈은 자유와 같다고 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그가 가진 것만큼 시간을 소유한다는 말이며 이 말은 그가 오늘 하루, 아니 미래까지도 자유롭다는 의미다. 그러나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영혼을 팔고 시간을 헌납해 돈과 맞바꿀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쁘게 말하면 현실 부적응자 좋게 말하면 이상주의자, 다르게 말하자면 글을 써서 생계를 잇고자 하는 작가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는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미숙한 한 젊은 영혼의 일대기를 짧게 다루고 있는 자서전이다. 이제 갓 작가로 걸음마를 떼는 단계에 있던 폴 오스터의 젊은 날의 초상 쯤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오스터는 자신의 젊은날을 뼛속까지 파고드는 리얼함으로 생생히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자서전이라 이름붙이기에 어색한 면도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폴 오스터 자신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오직 삶 가운데 20대의 어느 한 시점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 전체를 포괄하진 못하지만 현재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는 폴 오스터의 습작시절의 생의 기록이기에, 평소 작가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읽는 내내 지적인 흥미로움을 얻기에 충분하다.
책 뒷 부분의 희곡을 제외하면 170여 페이지에 지나지 않은 짧은 글이지만, <빵굽는 타지기>속에는 젊은날을 살아보았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사연없는 인생이 없다지만, 젊은이라면 없는 사연도 만들어 내야 하는 진취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폴 오스터는 부러운 사람이다. 지나온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미숙함과 서투름에 대해, 혹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와 편견, 그리고 잘못된 선택에 대해 그 누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없이 회상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가진 것 하나없고,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애송이가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자 오직 타자기 하나로 생계를 잇겠다는 포부를 갖고 고군분투하는 경우라면, 매일 그는 실패와 맞닥뜨릴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변변치 못한 일로 몇년간 시간을 허비하고, 세상의 냉혹함을 경험하면서 결국엔 돈 한푼 모으지 못했던 시간들이 폴 오스터처럼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내겐 뭔가 가슴 깊이 열정이란게 숨쉬고 있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 열정이 나를 살리게 했던 것 같다. 폴 오스터에게 그 열정은 오직 작가가 되겠다는 것, 즉 빵을 타자기 하나로 굽겠다는 것이었다.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었다.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글쓰는 일은 수렁에 빠졌으며, 특히 돈 문제에 짓눌려 허덕였다. 이따금 돈이 떨어지거나 어쩌다 한번 허리띠를 졸라맨 정도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노상 쩔쩔맸고, 거의 숨막힐 지경이었다. 영혼까지 더럽히는 이 궁핍 때문에 나는 끝없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p.5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폴 오스터는 1960년대 대학 생활을 했다. 그 시기 미국은 베트남전에 수많은 젊은이를 무작위로 보내던 시절이다. 더불어 대학은 학내 분규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그는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죽는것보다 싫어했다. 애초부터 베트남전은 모든 미국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니까. 이 모든 것을 회피하고 파리라는 도시에 끌려 그는 프랑스로 교내 연수를 떠났다. 이 새로운 도시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젊은날의 습작기를 보낸다. 7년 가까이 파리에 살면서, 그는 리뷰 잡지에 서평을 기고하고, 시를 몇편 지어낸 것을 제외하면 프랑스어 번역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세상과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유조선을 타고 대양을 항해 하기도 했고, 영화 제작자의 시나리오를 다듬는 일이나 대필 작가의 경험도 쌓아본다. 결혼을 하고부터 아내와 함께 번역 잡일을 같이하고, 유명한 개인 소장가의 1인 사원으로 파트타임 일을 해 보기도 한다.
이것저것 돈벌이를 위해 기웃거렸지만, 그가 하나 원칙으로 삼은게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돈과 자신의 시간, 즉 영혼을 맞바꾸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즉 평범한 직장인으로 하루 종일 어딘가에 매어 사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까지 생겼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했다. 돈이 되는 소설은 쓰지 못했고, 번역일은 애초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과 영혼을 맞바꾸지 않겠다는 삶의 소신은 버리지 못했고, 곧이어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삶을 회피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불성실한 인간이 아니다. 더불어 안락만을 추구하는 여름날의 베짱이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 그것으로 생계를 잇고 싶었던 것 뿐이다.
폴 오스터의 그 치열한 젊은날을 바라보면, 작가란 되고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도록 숙명지워진게 아닌게 생각될 정도다.
결국 그는 이혼을 했고, 궁핍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탐정소설을 직조해 냈지만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건 어린 시절 아이들과 함께 카드 놀이를 하면서 익혔던 카드 베이스볼 게임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팔아보자는 생각에, 그는 전미장난감 페스티벌이 열린 행사장으로 이 아이디어를 사줄 사업자를 찾아 면접을 보러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카드 게임의 규칙을 한창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폴 오스터에게 사장은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고맙소, 이젠 그만 가봐도 좋소" 그는 이 때의 경험을 먼 훗날 이 책에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는 (사장은) 돌아서서 내 곁을 떠났다. 카드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을 모두 시가 상자에 도로 집어넣는 데에는 1,2분이 걸렸고, 내가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도 바로 그때였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1,2분 동안이 바로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에 도달한 순간이었다고." p.154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저절로 `불행의 종합 선물세트' 같던 나의 20대가 필름처럼 돌아가는 듯 했다. 성실하고 열심히 앞을 보고 나아갔지만 내 앞을 가로막은 안개는 걷히지 않았고, 이제 막 들어선 터널은 어둡고 그 끝은 묘연했던 시기, 그게 바로 나의 이십대의 모습이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안개는 태양이 떠오르자 곧 걷혔고, 어둠만이 가득했던 터널의 끝에서 나는 눈부신 빛을 보고 말았다.
폴 오스터란 작가의 책은 처음이고, 현재 그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작가 소개에 나타난 그의 대표작들을 보면, 밑바닥에 도달한 작가는 그 동안의 고난과 경험담을 재료로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써 낸 것 같다. 그리고 세계 수십개국어로 그의 소설이 번역돼 팔리고 있으니, 더이상 그는 가난하지 않을 것이다. 20대, 아니 젊은이에게 좌절과 실패 혹은 불안과 고통은 독이 아니라 약이 된다는 것을 폴 오스터는 이 책을 통해 가르쳐 주는 듯 했다. 20대 젊은 날, 내 소망은 나를 위한 근사한 서재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책을 쌓아두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며, 미래의 어느날 한가로이 그 책을 읽기를 바랐다. 지금 나는 그 소망을 반쯤은 이뤘다.
근사한 서재와 수많은 책들 사이에 파묻히는 일은, 그러나 경제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시간과 영혼, 그리고 돈 사이의 거래를 허(許)했다. 나는 대한민국 직딩이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는 직딩이다. 젊은 시절의 폴 오스터처럼 수지맞지 않게 살 용기란 애초 내게 없었고, 그러한 삶은 내겐 불가능했다. 나는 풍차만 보면 달려드는 돈키호테가 될 순 없었다. 그러나 폴 오스터처럼 작가라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돈키호테의 기질을 갖질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작가란 되고 싶다고 될 수 없으며, 작가란 숙명처럼 태어나는 것이라 하질 않던가 ?
2008.11.30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멋진 경험을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치자. 욕망을 충족할만큼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을 '제대로' 쓸 시간은 줄어드는 거다. 돈이 쌓여 있으면 뭘하나, 돈을 쓸 시간이 없는데. 그래서 바쁜 사회엔 유흥점들이 판을 치는 거다.
반대로 나만의 시간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위해서 쓰겠다고 결심했다고 치자. 이번엔 돈이 없을 것이다. 뭔가를 '제대로' 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돈을 버는데 그 시간을 쓰지 않았다는 소리인데, 이 경우 요행이 따르지 않는 한 인생을 즐길만한 돈은 없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며 아무리 큰 돈이 주어져도 시간을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을 돈과 바꾸는 건 손해보는 짓이다. 돈의 경우 요행이 따르거나 구조적으로 합법적으로 남을 약탈하는 방법으로 차고 넘칠만큼 벌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 요행은 일부 극소수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요행을 위해 나머지 불운한 자들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요행을 가진 자들을 위해 일하면서도 돈은 충분치 않게 번다. 이것이 폴의 오판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소설가가 되어, 넉넉히 먹고 살며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소설 밖으로 나온 이후의 긴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 오판마저도 잘한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짧고, 그의 무명의 작가로서의 고생은 길었다.
젊은 날, 돈 대신 자유로운 시간을 선택한 그는 그 자유가 글을 쓰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로 먹고 살기는 힘들었다. 먹고 살만큼 글을 쓰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너무 많은 글을 써야 하고, 그렇게 글을 쓰는 일이 더 이상은 즐거운 일이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한국에서도 외국 어느 곳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걸 어디가서 개탄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교수들의 월급이 일용 노동자들의 월 급여만큼 짠 곳도 있다. 조용남이 자신의 이름으로 몇억에 팔 그림을 대신 그린 예술가는 딱 먹고 숨쉴수 있을만큼만의 돈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밤을 새며 그림을 그린 듯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길을 선택하여 사는 것의 그 상세한 실체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폴 오스터의 실제 경험인지 소설적으로 많이 극적인 부분이 가미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먹고 사는 일이 충족되어야 하고, 먹고 사는 일을 좋아하는 일을 해서 충당하기에는 좋아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이 아닌 피곤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가장 중요한 시기의 시간들은 서서히 내 삶에서 빠져나가고 남는 것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돌아보는 동안, 그 동안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계속 먹고 살아야 하고 시간을 잃어버려야 한다.
원제는 뭐라더라..조금 다른데, 한국책 제목이 빵굽는 타자기. 타자를 쳐서 빵을 구워 먹고 사는 이야기.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폴 오스터의 이런 류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힐링이 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먹고 사는 이야기임에도, 그는 사회 질서에 저항한다. 처참히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비참해지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그 무언가. 타협하지 않고 버티는 어떤 힘 같은 것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