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다른 두 개의 세계 속에 각각의 내가 있다.
그 언어들이 나를 만든 건지, 내가 그 언어에 맞는
자아를 매번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본문 중-
언어는 한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인류 역사를 보면 언어로 국가가 분류되고 번역을 통해 해석을 해 놓지만 겉면으로 보여주는 단어의 뜻과 다르게 그 나라의 문화를 담고 있어 아무리 외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그 깊이까지 가기는 어렵다. 한국어만 보더라도 '정'이라는 단어를 외국인에게 설명할 때 어떻게 전달해야 그들에게 단어 뜻과 같이 한국인이 가지는 그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사실 그냥 해석하면 되겠지 했는데 오늘 <언어의 위로>를 읽으면서 이 부분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저자.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냐고? 전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프랑스어는 영어만큼 큰 차지를 하지 않는다. 영어권이 많으니 확실히 이 언어를 배우면 도움이 된다. 하지만, 프랑스어라니.. 공부조차 해보지 않는 나에게도 이 언어는 어렵다는 것을 익히 들었던지라 전공자가 아닌 상황에서 떠났다는 게 대담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학원을 다니고 언어를 배우면서 프랑스어와 한국어의 다른 점을 느끼고 더 나아가 언어를 통해 정체성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도서 제목을 보고 자기 계발과 같은즉, 철학적 요소가 있을 거라 생각을 했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언어가 주는 생각과 문화를 만나게 되었는데 편지를 쓰더라도 간단한 인사말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 단어를 쓰는 프랑스어가 낯설었고, 토론을 즐겨 하는 이들은 결코 감정적으로 상대를 이기려는 게 아니고 오직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다름을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서로 생각이 달라도 그저 다를 뿐 인간적으로 서로 적이 될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해 저자는 문화의 차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문화로 인해 한국어와 프랑스어 사이에게 방황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한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명언이 있다. <언어의 위로>를 읽으면서 문득 이 문장이 떠올랐다. 모국어가 아닌 곳에서 20년간 외국어를 사용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언어는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잊히게 마련인데 그 사이에서 얼마나 방황을 했을까? 이를 보면 언어가 인간에게 주는 것은 단지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신념과 삶의 의지를 가져다주는 것을 깨달았다.
『언어의 위로』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 책에서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저자는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 마주한 낯섦과 불완전함, 그리고 그로 인해 경험한 혼란과 매혹을 진솔하게 풀어내며, 언어가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탐구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언어와 씨름하며 나 자신을 형성해갔던 내 지난 시간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작가는 20년간 프랑스어와 함께하며 느낀 좌절과 설렘을 고백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내가 프랑스에서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낯선 언어가 익숙해지기까지의 긴 여정 속에서 마주했던 부족함과 한계들, 그리고 그것들이 나를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었는지.
어설픈 표현 하나에도 자책했던 순간들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언어와 부딪히며 쌓아온 시간들은 내 안에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불완전하고 매끄럽지 못한 언어였음에도, 나는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더 넓은 세계로 발을 내딛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한 외국어 학습기나 경험담에 머물지 않는다.
언어가 삶에 스며드는 방식과, 그로 인해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담고 있다. 저자는 언어가 완벽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문을 열게 된다. 언어란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 책은 조용히 일깨워준다.
프랑스어는 나에게 늘 쉽지 않은 언어였지만, 나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작가의 글은 그러한 언어의 역할과 그것이 내 삶에 남긴 흔적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언어는 단순히 배우고 익히는 것을 넘어 우리 존재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는다.
이 책은 언어라는 동반자와 함께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얼마나 값진지, 그리고 그 여정에서 발견되는 성장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지는지를 차분히 깨닫게 해준다.
모국어는 나를 키웠고, 외국어는 나를 해방시켰다.
???
마치 멀리서 보면 그럴 듯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조품처럼, 나의 프랑스어에는 빈틈이 여전히 많다고,그것이 나의 프랑스어 수준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단 한가지라고. (-25-)
언어가 서툰 상태로 외국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체념의 자세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벌어지는 부당한 일, 불편한 상황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게 아니지만 외국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으니 약자의 본능으로 입을 다물고 마는 일상을. 그 경험이 쌓여 만들어지는 순응의 습관을 잘 알고 있다. 이민자들의 마음 속에는 더운 불씨를 머금은 장작 몇 개가 잿더미에 덮여 있을 것이다. (-64-)
해외 생활의 가장 한스러운 순간이 언제인지, 이로써 알게 됐다.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이 위독할 때, 혹은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할 때, 곧바로 달려갈 수 없는 그 원통함을 어떻게들 다스리고 사는지 모르겠다. (-125-)
유학생인 내게는 모든 학생들이 다 여유있게 사는 듯 보였지만, 그 안에서도 구별되는 아이들이었다. 모두가 보풀이 다 일어난 낡은 모직 코트를 입을 때,윤기가 흐르는 가죽 무스탕을 입고 다니고 겨울 방학이 되면 스위스의 별장으로 스키를 타러 가던 아이들,나와 친하게 지냈던 '보통의' 프랑스 친구들은 그들을 '피스 아 파파'라고 불렀다. (-163-)
지금 현재 나의 생각,가치관,관점, 세상을 바라보는 진리나 지식과 지혜는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어려운 단어나 문장, 색다른 언어가 내 앞에 놓여진다 하더라도,그것이 언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모국어는 나에게 익숙하면서 ,어렵게 느껴지고, 외국어는 낯설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새롭게 느껴진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의 해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는 권력이 되고, 내 삶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모으는 힘이다.
자가 곽미성은 영화 공부를 위해 파리에 유학하였으며, 스무 해 넘는 세월동안 프랑스어르 잀아처럼 쓰고 있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쓴 시간 만큼 긴 시간동안 프랑스인과 소통하고, 프랑스어르 쓰면서 살아가지만, 언제가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 자괴감,절망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매순간 약자로서, 체념과 순응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이 책은 자가 곽미서의 언어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끼쳤고, 그 변화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나의 언어는 온전히 새로운 언어로 대체되기 힘들다. 한국어가 영어로 번역되면,그 번역의 질이 깨지고,달라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 박경리의 토지가 번역되기 힘든 이유다.
번역이 반역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우리는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지식인에 의해 서구권의 여러 언어들을 일본식 한자로 번역하려 쓰여지고 있다는 걸 비추어 볼 때, 언어는 지금이 다르고,내일이 달라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조어는 태어나고, 낡은 언어는 사람들에게 쓰여지지 않음으로서, 서서히 언어의 가치와 의미가 사멸되는 게 정상이다.이런 요소들이 모여서, 언어의 위로가 되었고,우리는 그 언어 속에서 새로운 생각과 가치관 소속감과 민족성을 드러내며 살아간다.작가 곽미성의 언어의 위로는 20년간 프랑스어를 쓰며 살아온 자신을 체념과 순응의 시간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모국어는 나를 키웠고
외국어는 나를 해방시켰다
정복하지 못한 언어의 갈증을 느끼는건
외국어 마스터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염원이 큰 이유가 크다.
닿지 않는 닿을 듯한 뭔가 모를 모국어의 우위에 놓인 듯한
이 묘한 외국어를 향한 짐착을 아직도 내려놓질 못한거 보면
이젠 정말 미련인가 싶어진다.
학창 시절부터 줄곧 배워왔음에도 성인이 된 지금도
원어민과의 프리토킹 정도는 가뿐히 하고 싶은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내가 포기하지 못한 외국어 정복의 꿈과
모국어 사이의 애증과 언어 세계의 매력과 판타지를
담백한 고백으로 전해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일은,
마치 손으로 모래를 옮기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손을 꼭 쥐고 조심조심 움직여도 알갱이가 술술 빠져나간다.
지금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완벽히 '치환'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번역 혹은 통역은 언어의 '치환'이 아닌, 두 언어 사이의 대화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p106
번역본과 원서를 비교하면서 읽는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인생 책이 있었으나
원서를 읽어내는 어려움이 컸지만
온전히 담겨있는 완전히 다른 언어의 세계에 대한 매력을
아마 그 때쯤 알게 된 것 같다.
직역한 문장을 번역해내는 놀라움과 센스를
감탄할만한 작품을 만나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두 언어의 조화로운 대화가 텍스트 안에 묻어 있고
그 글을 눈으로 읽어내면서 마음으로 새기는 과정.
서로의 독립된 개별의 존재를
중간 지점에서 하나로 이어 붙이기 쉽지 않은 과정을
아주 가끔 멋진 번역서로 만나보게 될 때의 희열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난 여전히 간절함과 기대로 책을 펼쳐 들게 된다.
비단 이 책의 저자처럼 프랑스어와 모국어 사이의
가깝지만 가깝지만은 않은 그 선을 넘나드는 관찰자적
생활자의 모습은 너무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져서 좋다.
비슷하게 공감할 수 있는 독자의 취향을 저격해버린 것 마냥 말이다.
모국어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결핍도 있고, 프랑스어의 세계를 잃어버렸을 때의 결핍도 있다.
모국어로 생각한 것을 프랑스어로 표현할 때에도 결핍은 생기고,
프랑스어로 생각한 것을 모국어로 이야기할 때도 결핍은 느껴진다.
앞의 두 가지가 '그리움'에 해당하는 결핍이라면,
뒤의 두 가지는 언어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지 못하는,
로맹 가리가 말한 카멜레온의 고통에 가까운 결핍일 것이다.
p119
두 언어를 두 개의 방식으로 사고 할 수 있을까.
자라온 환경과 문화도 다른 곳에서
애초에 절반만 희석되어 살아가는 삶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완전히 스며들기 위해선 어느 것 하나의 결핍은 두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 듯 보인다.
'그립다'라는 정서를 프랑스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깊고 넓은 범위를 나타내는지
그 감정 하나를 싣는 것만으로도 뭔가 모를 한계가 극명히 보이는 듯하다.
두 세계를 다 담아낼 수 있는 언어를 만나볼 수 있긴 한가.
어떤 언어도 완전히 담을 수 없다는 말에 동감한다.
그런 결핍과 허기, 간극을 줄여나갈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해방되어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염원을 가득 담은 간절한 마음은 영원할테지만 말이다.
두 언어가 서로 가까이 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그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책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는 건
나또한 닿지 못한 세계에 대한 간절함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해방을 꿈꾸지만 완전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가까이 닿기 위해 매일을 배우는 마음으로 외국어를 놓치 못할 것이다.
기분 좋게 밀려가기도 맞닿기도 하면서 말이다.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