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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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 동녘 | 2014년 6월 2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 9.2 (73건)
분야
인문 > 한국/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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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불가의 속살을 엿보다 평점10점 | b****3 | 2014.11.23 리뷰제목
강신주 지음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화두란 불가에서 성불을 이루는 과정이다. ‘화두’ ‘성불’ 이런 어휘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왜 하는지는 모르고 지내왔다. 막연히 스님들은 화두를 가지고 깨달아 ‘할’이라 한다는 정도였다. ‘성불’ 또한 부처를 이룬다? 정도였다. 이 책은 불가에 대한 나의 겉껍질만 알았던 지식을 속살로 끌어주었다.
리뷰제목

 

강신주 지음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화두란 불가에서 성불을 이루는 과정이다.

화두’ ‘성불이런 어휘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왜 하는지는 모르고 지내왔다. 막연히 스님들은 화두를 가지고 깨달아 이라 한다는 정도였다. ‘성불또한 부처를 이룬다? 정도였다. 이 책은 불가에 대한 나의 겉껍질만 알았던 지식을 속살로 끌어주었다.

막내에게

뭐 읽을 만한 책 사놓은 게 있니?”

이 저자의 책 보셨나요?”

하고 내민 책이다. 제목부터가 읽기 팍팍하겠구나.’

빨리 읽지는 못하겠구나. 천천히 봐도 돼?”

하여 잡았다. 저자의 서문에서 독서는 나답게 읽는다.’에 끌린다. 화두를 설명하면서 성불에 이루는 과정을 독서과정에 견준 설명이다. 사실 저자의 문맥을 독자가 그대로 따르는 독서는 바른 책읽기라 말하기 어렵다. 저자의 의도가 행간에 따라 펼쳐진다지만 독자는 자신만의 해석에 의해 독서행위가 이루어진다.

부제로 무문관, 나와 마주서는 48개의 질문이라 나왔다. 무문관은 문이 없는 관문이란 뜻이다. 무문관은 무문 혜가스님이1228년 암축된 화두 48개를 모은 화두모음집이라 한다. 화두를 깨닫게 되면 그 또한 부처가 된다 하였다.

스스로 선다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말이다. 사실 절집을 찾게 되면 석가모니불 좌우에 수천의 나한상을 보게 된다. 이 또한 부처의 위치에 자리한 분들이다. 거기에는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아난가섭도 모셔졌다. 일반적으로 불가의 한 구석만을 보고 독불장군이라 하던데 무소의 뿔처럼 가라에도 스승을 뛰어넘는 선 지혜가 있다는 걸 몰랐다.

선불교 즉 선종에서 화두의 중요성을 새롭게 느낀다. 임제스님의 임제록에 전해진다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의미를 여행의 가짜여행과 진짜여행으로 예시를 준 것은 독자에게 슆게 이해시키려는 저자의 지혜이다. 그 노력은 한 문(소제목)의 제시를 마무리 하며 서양철학과 비슷한 예시를 던져 주어 또 다른 방향의 생각을 갖게 한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들판에 기득 핀 다양한 꽃들처럼 자기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 화엄세계라 하였다.-233- 얼마나 장감이 가는 인간다운가? 불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노장의 책을 읽으며 불가의 화두라는 이야기들은 비슷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었다. 나 같은 사람도 그리 느꼈는데 학자들의 선불교를 중국화된불교의 이교라 지적했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대승과 소승불가, 불립문자라는 내력도 환하게 들어온다. 사실 엄격한 계율의 종교보다 민중과 가깝게 느껴지는 미륵이 더 친근감이 간다. 바로 집착을 깨는 자유로운 생각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나 생각이다.

어떤 이는 너무 쉽게 풀어썼다고 얕볼 수 있을 듯도 싶다. 그러나 그런 의견은 불문의 선종과 교종의 관계를 안다면 참아야 할 것이다. 어렵게 불경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 질이 높다 할 수는 없다. 민중은 불상보다 미륵불에 더 친근감을 갖기에.

4부로 나뉘어 중간 제목에 따라 각 무문으로 펼쳐가며 지루함을 달래는 청량감을 주는 한 장의 그림이 시선을 끈다. 작가나 편집자의 독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 출판사에서도 작가의 지명도가 있었겠지만 500쪽에 가까운 부피와 칼라사진도 쉽지 않은 결정이지 않았을지 

지금껏 독서를 제법 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만큼 읽어 갈수록 끌어당기는 책이 있었나 싶다. 근래 새벽 독서를 이책이 끌었다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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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수 있는가?』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화두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h*****9 | 2015.05.04 리뷰제목
내가 철학자 강신주의 책을 읽은 것은 『강신주의 감정수업』 고작 한 권 뿐이다. 이웃분들에게 리뷰로만 만났었기에 좀더 내게 친숙한 문학에 대한 글과 스피노자의 감정론을 말하는 글을 읽으며 강신주의 글에 좀더 친숙해졌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제목에서부터 지극히 철학적이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수 있느냐니, 절벽에서 손을 떼면 그대로 아래로 떨
리뷰제목

  내가 철학자 강신주의 책을 읽은 것은 『강신주의 감정수업』 고작 한 권 뿐이다. 이웃분들에게 리뷰로만 만났었기에 좀더 내게 친숙한 문학에 대한 글과 스피노자의 감정론을 말하는 글을 읽으며 강신주의 글에 좀더 친숙해졌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제목에서부터 지극히 철학적이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수 있느냐니, 절벽에서 손을 떼면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버릴텐데. 철학자는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떠한 것을 느낄수 있을 것인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내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과거 선사들의 48가지 화두를 모은 책이 무문관이다. 무문관이란 문이 없는 관문을 가리킨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기에 어떠한 질문을 받게 되면 그에 따른 해답을 가지고 질문을 하기 마련이고, 대답을 해야 하는 우리는 그의 해답에 가까운 대답을 하고자 한다. 만약 해답이 없는 질문이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고민하기 마련이다. 해답을 찾고자 머리를 써 보지만 보통의 사람은 해답을 찾기 어렵기 마련, 아마도 주어진 해답만을 찾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수 있는가?』라는 작품에서 문이 없는 48개의 관문, 즉 48개의 화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종교에 대해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기독교가 하느님에 대한 말씀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불교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즉 깨달음에 대한 종교라는 것이다. 스스로 부처가 되려는 것. 죽어서 천국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인간이 살아 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것이 불교의 정신이라고 했다.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단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주인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지 않는 법입니다.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으로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예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37페이지)

 

 

 

말은 뺄 수 없는 칼과 같습니다. 그냥 죽을 때까지 사람의 마음에 꽂혀 있기 때문이지요. (283페이지) 이 문장에서도 느끼는 바가 크다. 평소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오는 날이면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에 불편한 마음이 오래간다. 책에서도 '묵언수행'에 대해 나오는데, 묵언수행으로 함으로써 타인을 만날 때, 말을 하지 못하니 상대방의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하지 않아야 될 말도 하게 마련이고, 말을 많이 하므로써 상대방이 해야 할 말을 가로막기도 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상대방의 말을 듣다보면 상대방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어떠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데도 그걸 어려워한다. 아니 힘들어한다. 그러고는 후회하는 것이다. 한마디의 말이 상대방에게 칼을 꽂는 것과도 같은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침묵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수도 있었다. 한가지 더, 저자는 고뇌를 털어놓는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을 권한다. 갑갑한 자신의 마음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답을 구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그것에 좌지우지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어느 순간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싯다르타도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외도도 싯다르타와의 문답을 통해 그렇게 스스로 깨달음에 이른 겁니다. '스스로!' 계단과 사다리도 상징되는 일체의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온몸으로 깨닫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일 수도 없는 법이니까요. 깨달음은 스스로 주인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82페이지)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볼수 있는 시간이었다. 과연 나는 제대로 삶을 살고 있는가. 나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내 생각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내 생각만으로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속에서도 그렇지 않았나. 스승은 제자에게서도 깨달음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마음, 그 마음 속의 깨달음을 얻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한 곳으로 치우치는 마음보다는 진정한 내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이 깨달음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낄수 있다는 것.

 

 

나의 삶은 다른 어떤 사람의 삶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것이라는 사실, 그래서 무엇에도 쫄지 않는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 불교는 바로 이것을 깨달으라고 우리에게 촉구했던 것입니다. (43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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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나의 삶을 둘러싼 48개의 화두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c******4 | 2014.07.09 리뷰제목
어느 스님이 "무엇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라고 묻자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   - 무문관 37칙 정전백수(庭前柏樹) 중에서 -   알송달송한 선문답 같은 이야기입니다.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자 한 명이 조주스님에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한번에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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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스님이 "무엇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라고 묻자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  

- 무문관 37칙 정전백수(庭前柏樹) 중에서 -

 

알송달송한 선문답 같은 이야기입니다.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자 한 명이 조주스님에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한번에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여기에 대해 조주스님은 쿨하게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이 이야기를 들은 제자 스님은 자신의 질문에 동문서답하는 조주스님에 대해 화가 납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화상께서는 경으로 보여 주지 마십시요". 그러자 조주스님은 말합니다. "나는 경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스승으로부터 다짐을 받자 제자는 다시 묻습니다. "무엇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주대사는 대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여기서 '경'의 개념이 중요합니다. 제자는 잣나무를 자신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뜰앞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로 이해하고 있지만, 스승은 잣나무는 자신의 마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이지요. 조주대사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현재 제자의 마음이 온통 달마대사에게 빼앗겨 있어 눈앞에 있는 "뜰 앞의 잣나무!"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네 마음에 주목해라!' 네 마음이 없었다면, 사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라고 말입니다. 눈앞의 잣나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달마대사에 집착되어 있는 한 역설적으로 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집에 관한 책입니다. 무문스님이 1228년에 48개의 화두를 선별해서 해설한 <무문관(無門關)>의 이야기를 강신주의 입장에서 해석해 본 내용입니다. 무문관이란 말은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관문인데 문이 없다니요? 제목부터 화두를 담고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상식에 반하는 이야기같지만 그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해탈하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신주가 풀어낸 48개의 화두는 누구나 삶의 주인이 될어 생각할 때 풀리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과 자유를 긍정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선불교의 인문정신이 곳곳에서 묻어 나옵니다. 성불한다는 것은 바로 일체의 집착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유행가에 나오는 '타타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상태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외부적 권위에 의지해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욕이든 어느 것이나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려면 버려야 할 요소입니다.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강신주 저자의 책을 몇권 읽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따라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동양의 선불교의 화두에 관한 내용이지만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사용했던 개념들을 원용하기도 합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고, 백척간두에서 발을 떼어야 합니다. 그 험난하지만 의미있는 길을 찾고자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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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절벽에서 손을 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k*****1 | 2015.03.20 리뷰제목
무문관無門關, 문이 없는 관문을 뜻하는 이 말은 또한 선불교의 대표적인 텍스트라고 한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물음을 선불교에서는 화두라 하는데, 이런 화두는 부처 즉 깨달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자신만의 삶을 사는, 즉 삶의 주인이 되어야만 풀리는 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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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無門關, 문이 없는 관문을 뜻하는 이 말은 또한 선불교의 대표적인 텍스트라고 한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물음을 선불교에서는 화두라 하는데, 이런 화두는 부처 즉 깨달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자신만의 삶을 사는, 즉 삶의 주인이 되어야만 풀리는 난제로, 이런 화두는 온몸으로 처절하게 풀어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선배들의 일화를 숙고하여 고민하는 방법으로 풀어낼 수도 있다고 한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법을 간화선看話禪 이라고 부르는데, 화두집은 간화선의 교재가 되는 셈이다.

 

이런 화두집의 원형은 1004년에 도원스님이 완성한 전등록傳燈錄으로 여기에는 1700여개의 화두가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나 방대한 화두는 오히려 수행에 걸림돌이 되었고, 이에 설두중현 스님과 그의 제자인 원오극근 스님이 전등록에 등장하는 화두들 중 역사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100여개의 화두를 선별하여 벽암록碧巖錄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무문혜개 스님은 이것도 많다 하여 벽암록에 나오는 화두에서 48개를 선별하여 해설한 텍스트를 1228년 출간하였으니 이를 무문관無門關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인 강신주가 무문관 48개 화두의 관문을 통과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어른은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어른이 되었지만 힘과 자유는 생기지 않았다며,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하는 행동과 생각들이 타인들과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그것은 내가 나로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를 흉내내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있어야만 비로소 어른이 됨을 깨달은 것이다.

 

화두는 선불교의 핵심정신이라고 한다. 상식을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풀리는 문제라는 것은 상식을 쫓는 사람에게는 역설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풀리는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깨닫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을 찾아야 하고, 그러기에 문이 없는 관문, 즉 무문관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48개의 화두에 대하여 선불교의 교리로써 화두를 설명하고, 거기에 덧붙여 근현대의 철학자들은 그러한 화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불교에서의 수행은 죽어서 천국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깨달았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즉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내는 것을 뜻한다.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순간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수동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명성에 연연하는 순간 우리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명성이 되고 만다. 홀로 있을 때는 주인으로 살 수 있다 할지라도, 타인과 만났을 때에도 그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주인으로 살아야 진정한 주인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는 타자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자신을 부정해 오지는 않았는지 반문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화두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가리키지만, 모든 문제가 다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다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닌 셈이다.

 

불교에서 깨닫는 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사는 것, 즉 자기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집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내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는 오만과,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 모두가 집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는지를 생각해보면 나 역시 내 삶의 주인으로써 살아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뒤늦게 삶의 주인으로써 살아가고자 해보지만, 그것 역시 쉽지만은 않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스스로 서겠다는 것이지만, 밑으로 보이는 절벽은 아찔하기만 하다. 관문을 통과해야 하겠기에 문을 찾아보지만 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무문관의 48개 화두 앞에서 나의 집착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무문관 4칙 호자무수(無門關 4則 胡子無鬚)라는 화두이다. 혹암 화상이 말했다고 한다. "서쪽에서 온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 하고.. 달마도에 나오는 달마대사는 짙고 풍성한 수염을 달고 있다. 그런데 그런 달마대사가 실제로 수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달마도라는 그림만 보고서 수염이 있다고 믿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혹암 화상은 달마대사가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왜 없는지를 묻고 있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달마도에는 분명히 수염이 그려져 있는데, 왜 없느냐고 묻고 있기에..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우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우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결국 달마대사가 수염이 있다고 믿는 우리는 달마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런 집착을 뒤흔들기 위해서는 우상을 파괴하는 방법밖에 없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 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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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당신은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평점10점 | p****p | 2014.07.21 리뷰제목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는 현명한 스님들의 물음 48가지를 모아 엮은 무문관을 강신주의 해석으로 풀어낸 책이다. 대부분 책 제목을 보면 책 제목에서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다상담』을 보면 삶에 관한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하겠다는 뜻이겠거니 추측할 수 있다. 또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시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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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는 현명한 스님들의 물음 48가지를 모아 엮은 무문관을 강신주의 해석으로 풀어낸 책이다. 대부분 책 제목을 보면 책 제목에서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다상담』을 보면 삶에 관한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하겠다는 뜻이겠거니 추측할 수 있다. 또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시인들의 시를 철학적 이론들과 연관지어 해석하겠구나 등으로 감을 잡는다. 그런데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이 책은 제목만으로는 도통 감을 잡기 힘들다.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겠냐니, 마치 읽는 이를 시험하고 있는 것같이 꽤 도발적이다.

 

 이 책에는 경전에 얽매이지 않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꾸짖다시피 던진 말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상당히 거칠다. 뺨을 치는 건 대수고, 손가락을 자르는 등 온화한 방식이 하나도 없다. 살생을 금하고 자비의 정신으로 깊은 산속 청명한 마음을 지니며 수행할 스님들의 이미지를 생각하였을 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마음마저 든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일체의 허영과 가식, 허례에서 벗어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꾸짖음은 모두 나 이외의 우상을 허물고 진정한 나 자신으로 서야한다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사실 성불,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스님들에게 일체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스승을 모시려 하고,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지 묻는 것이다.

 

 

 

 

 알고자 하고 되고자 노력하는 이 스님들을 기특하게 여길 법도 하련만, 무문관에 등장하는 모든 스님들은 그러한 제자들의 뺨을 갈긴다. 그 반응에 당황하는 스님이 있는가하면, 그새 깨달음을 얻고 미리 선수를 쳐 스승의 뺨을 갈기는 스님도 있다. 더 이상한 점은, 그 뺨을 맞은 스승들이 제자를 대견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스승의 뺨을 친다, 그것에는 스승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스스로 서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그들에게 깨달음이란 나 이외의 다른 성인들이나 경전에 의존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인 존재로 나아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인정욕구에 굶주려 있고, 진여의 측면보다 생멸에 훨씬 더 가까이 있어 매일 오락가락한 기분 상태로 살아가는 나에게 이 책은 하나의 도전이었으며 반성이었다. 나에게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는데 언제부턴가 나 스스로도 그 꿈에 대해 내가 잘못 접근하고 있다는 자각이 묘하게 일고 있었다. 그 첫 시작은 이승우 작가님의 책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고 있다』였다. '작가란 소설을 쓰다가 되는 것이라고', 그 물음 앞에 놓인 나는 그동안 빈 활자의 공포에 직면해가며 제대로 된 소설 하나 완성해보지 않았던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 쓰자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되도 않는 글줄들을 늘어놔 보기도 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얻게 된 깨달음은 나는 작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가 되었을 때 주어지는 타인들의 시선이나 공명심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꾸어왔던 그 꿈이야말로 일종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내 글줄에서 비어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글쓰기의 방법이나 다른 소설들의 권위에 기대려 하면서 나만의 것을 찾아낼 노력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무문관의 스님들이 보았다면 몽둥이 세례를 당하고도 남았을 일이다. 삶의 경험과 그 속에서 얻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말들은 거쳐 지나가는 과정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지 종착역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샌가 그것을 잊고 지내왔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꿈과 그 꿈에 접근하던 나를 돌아보았고 그러던 중『소설과 소설가』의 작가 오르한 파묵이 떠올랐다. 23세의 나이로 작가가 되겠다는 그에게 주위 사람들은 '나이를 좀 먹고 인생과 사람들,세상을 경험해본 다음에 소설을 쓰라고' 만류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사람을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에요. 다른 소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써 보고 싶기 때문에 쓰는 거라고요!" (『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 민음사, p.178)

 

 만약 23세의 오르한 파묵이 그에게 소설 쓰기를 만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소설 쓰기를 그만두었더라면 지금의 거장 오르한 파묵은 없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 무언가 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겨 나아가야만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동안 나는 무문관의 스님들처럼, 오르한 파묵처럼 세상 앞에 온전한 자신으로 당당히 서 있지 못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언제나 나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나 이외의 것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하는 바람에 자신이 그 부속물로 편입되어 버리는 부차적인 삶은 걷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 이 책의 편집에 대해서 참 고마웠고 탁월했다 느낀 점은 저자의 에필로그 뒤에 무문관 원문을 옮겨 두었다는 것이었다. 내용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따라가고, 한편으로는 저자의 해석에 말려 나의 독자적인 해석이 있을 공간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그 사유의 깊이를 버겁게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원문의 깊이는 기억 저편에서 저만치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책 말미에 무문관 원문을 순차적으로 배열한 편집의 배려로, 나는 책이 주는 깨달음을 되새기며 그 뒤에 나의 해석을 작게나마 덧붙일 수 있었다.

 

 사실 관련 주제를 배워본 적 없어 철학적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내가 책의 원문만 보고서 그 내용을 탐독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올해 초 『강신주의 감정 수업』을 읽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 보려 했다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내려놓고 말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철학자가 놓아준 보조 계단 없이 나 혼자 스스로 원문의 높이에 맞서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한 문장 한 문장씩 나아가다 이해의 벽에 부딪힐 때 사유로 맞설 수 있는 정신적 여유도 요구된다. 지금 준비하는 일이 끝났을 때 다시 원문 읽기에 도전할 것이고, 그래야만 나는 비로소 무문관에 대한 나만의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지금 쓰는 리뷰가 내가 쓴 책 리뷰 중 가장 긴 듯 하다. 이만큼 쓰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이 놀랍지만 그만큼 이 책이 내게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겠지.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의아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강신주의 저서들을 통해서 이미 여러 번 부딪힌 적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간 기독교 공동체 생활에서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면서 나는 교회에 대한 회의를 품은 적 있었으나 나의 신앙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 먼저 저자는 초월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해 '만약 십자가를 두고 "녹슨 쇳덩어리!"라고 바쿠닌이 외쳤다면, 교회나 성당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바쿠닌은 이단이나 사탄 취급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이를 수 없는 절대적인 초월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본 책, p.110)'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는 기독교의 '십자가'에 대한 의미를 덧붙이고 싶다.

 

 기독교에서는 우상 숭배를 금하고 있고, 이는 십계명에도 명시되어 있다. 성경에서 주로 우상 숭배 금지는 민간 신앙이나 토템 신앙처럼 돌을 섬기거나 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것이 강신주씨가 설명한 십자가에 대해서도 적용된다고 본다. 기독교도들이 십자가에게 신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면서 누군가 그것을 '쇳덩어리'로 끌어내리는 것에 분개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의 죄가 있다고 생각하실 것이라는 거다.

 

 기독교의 십자가란 단순히 그 형태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흘리신 보혈의 큰 사랑을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이 베푼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재물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고 그것을 어려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믿는 자 자신이 언제고 지니게 될 수도 있는 '십자가의 무게'를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강신주가 이 책에서 설명한 불교의 정신과 기독교의 정신은 닮아 있다.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 그리고 먼저 깨달은 자의 의무로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할 책임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로 구원의 길을 함께 걷게 할 의무 등이 그렇다. 비록 나는 불교의 경전이나 교리를 깨우치지 못했고, 성경조차도 1회독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러한 일체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나 스스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초월 종교의 모습이 비추어질 때 저자는 보다 관대한 입장으로 바라보는 반면, 기독교에 대해서는 인간을 절대 타락자로만 인식하여 인간의 자율성을 허용치 않는 종교로 부정적으로만 그려내는 점이 아쉬웠다. 언제고 내가 기독교안에서 충분한 깨달음을 얻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아지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점차 고쳐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새로운 꿈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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