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일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인상 깊게 읽고 그 소설이 허구가 아니고 작자의 실제 경험담이며, 자전적인 글 <영혼의 자서전>에서 다시 언급한다고 해서 상 하 두 권으로 된 책을 구입하였다.
택배로 책이 도착하자 다른 책을 치워두고 바로 읽었고 어제 상권을 마쳤다.
출판사 <열린책들>의 책들이 갈수록 마음에 든다.
먼저 <자성록>과 <그리스인 조르바>를 구입하고 읽었으며 <밤으로의 긴 여로>가 대기 중이고 <닥터 지바고>가 내일 도착할 예정인데, 이 시리즈의 도서는 실로 꿰매는 사철방식이라 하여 오랫동안 보관해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한다. 적당한 판형으로 휴대하여 지하철 등에서 펼치기 편리하고 짙은 검정 인쇄의 글은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서 인쇄상태가 다소 옅어 상대적으로 읽기에 어려움이 있는 점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약간 아쉬운 점은 세계문학의 방대한 규모에 비추어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문학작품이 연계되어야 할 터인데 상대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너무 많이 소개되고 있으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도 제법 실려 있는 편인데 이후로는 작품성 있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골고루 소개하는데 더욱 노력해주었으면 싶다.
프롤로그에서 난 무식했거나 방황했었다.
첫 페이지를 접했을 때가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잡지 못했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졸기 시작했다. “그래 서두를 잘 넘기고 난 후 순풍 따라 흘러가게 될 테니 졸지 말고 눈에 힘을 줘서라도 정신차려 읽자”며 다독거리며 읽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작은 이러하였다.
어머니의 그리스인 피, 아버지의 아랍인 피가 그의 혈관 속에 흘러 삶이 시작되었고 대지와, 바다와, 여인과, 별이 가득한 하늘이 그의 깊은 心中에 자리잡게 되었다.
여린 소년시절엔 여린 소녀와, 그리하여 우리들은 양말을 벗고 누워서 발바닥을 서로 꼭 대었던, 한마디 말하지도 않았고 여린 소녀의 따스함이 여린 소년의 발바닥으로 전해지고 그 기운은 나중 온 몸을 가득 채우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짐승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오름길을 따라가려면 고통이 가장 위대한 길잡이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바로 회초리였다……
집안에 틀어박혀서 그들은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때문에 지극히 은밀한 욕망을 몰래 간직했고, 이런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서 풍성해지거나 목을 졸랐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태동은 초등학교 시절 쯤에서부터 일까.
또래와는 달리 책을 가까이하게 된다. “장난감을 모두 친구에게 팔아서 나는 보급판으로 나온 성인들의 전기를 샀다.” 상상력이 발동하여 예들 든다면 교회의 성상에서 유치하기는 하나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나름의 의미에 대한 조작이나 행동하려 애쓰기도 한다.
아버지로부터의 영향, 어떤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꼼짝 않고 서서 재난을 지켜보며,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혼자만이 인간의 위엄을 지켰다는 시각 속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크레타人으로서의 자긍심도 한껏 고무된다.
“떠나간 조상들이 죽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이면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우리들의 눈과 손과 마음을 차지해 버린다는 사실을 나는 그토록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사춘기가 도래하여 뜻이 맞는 친구들과 교제하며 소설을 중심으로 많은 책을 읽는다.
물리학 선생을 통하여 두 가지 비밀을 알고 고뇌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 인간은 신이 아끼는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당시 그의 어떤 觀을 혼돈하게 한다. 당시 그는 사랑과 여자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사춘기의 고뇌하는 사유를 표현하는 그의 문장이다.
“바다는 가슴을 치고, 바닷가를 때리고는 다시 얻어맞는다. 바다는 자유를 찾으려고 앞에 부옇게 드러나는 방파제를 무너뜨리고, 그 너머로 가기 위해 투쟁한다……나는 바다의 소리를 듣고 바다는 내 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동틀 녘까지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다.”
첫 데이트 경험에서는 독자인 나에게 저으기 실망(?)을 안겨준다.
영어를 가르치는 에이레 아가씨.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문간에 서서 기다리는 아가씨를 바라보며 견디기 힘든 연정과 기쁘거나 슬픈 수많은 말이 가슴에서 솟아 목구멍까지 올라 왔으나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헤어졌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작자는 비몽사몽간에 홀리듯 과부의 집으로 향하고, 마침내는 쾌락의 승화로 정신과 육신 모두 해방감을 느끼고 나아가서는 원초적인 건강함을 가졌다고 해야 하나?)
첫 애정행위는 무척 순수하였다.
아테네에서의 대학생활, 모든 젊은 여자에게서 신선한 얼굴을 지워 버리고 미래의 쪼글쪼글한 노파를 보는 것처럼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마치 불교의 부정관을 인지한 것처럼.
당시 그가 호흡한 공기는 단 한 번도 여자의 숨결로 흐려진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글에서는 넘치는 섹시美가 보인다.
“처녀의 몸을 지닌 그리스는 파도 속에서 헤엄을 치다가 떠올랐고, 태양은 신랑처럼 그녀 위에 엎드렸다.”
그리스를 돌아 보면서 다시 젊음의 사유는 변신을 시도한다.
파로테논 신전을 예를 들어 처음엔, 대리석으로 지은 신전이 냉정한 합리성을 나타내어 젊은이의 반항적 마음엔 불쾌하게 느껴진다고 했다가 곧 성숙화한 사유로 전환되어, 앞에 치솟은 신전은 얼마나 찬란한 우승배였고, 이성과 감정의 조화였으며, 인간의 노력이 이룬 숭고한 결실이라 칭송한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크레타를 찾은 그는 에이레 아가씨 집을 찾아가 그녀의 체취를 본다.
“노래, 짐승의 울부짖음, 에이레 아가씨의 절규-이 모두가 밧줄이 되어 내 목을 졸랐다.”
“만일 여자가 같이 자자고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신은 이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너는 지옥의 밑바닥에 유다와 자리를 같이 하리라.”
그는 이를 소재로 최초의 글을 쓰게 된다. <뱀과 백합>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그는 만족한다.
“그녀는 이제 종이 위에 누워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 축적되었던 고뇌는 진실이 아니었고, 상상력에 의해 새로 태어난 존재가 진실이었다. 상상의 힘으로 나는 현실을 지워 버리고 안도감을 느꼈다.”
크레타人으로 크레타에 대한 역사인식 또한 대단한 자긍심이 있다.
크레타는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첫 교량역할을 했으며 완전한 암흑이었던 유럽을 깨우친 첫 장소도 크레타였으며 신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숙명적인 사명을 성취한 것도 역시 크레타였다는 것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따고, 아버지가 약속해준 대로 그리스 순례에 나선다.
순례를 통해 그리스人의 위치에서 역사적 인식을 공고화한다.
그리스의 숭고한 업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달았으며 그리스의 비극적인 운명과 모든 그리스인이 무거운 의무를 지고 있음을 보다 깊이 의식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양에 관한 그의 부정적인 인식은 어디에서 근거할까?
‘동양’의 불안정하고 혼란한 함성’, ‘…..동양의 노예근성…’ 등 이유를 모르겠다.
다시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 25세 무렵?
몸과 마음과 영혼, 그는 이 세 가지 광포한 야수를 소유하되 다 같이 환희를 느꼈고 만족했으며 그들의 굶주림은 다 같이 사라졌다.
이탈리아에서의 쓰라린 두 가지 추억이 항상 마음속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어느 노부인 집에서의 저녁과 1박. 혼자 사는 노부인이 모처럼 안정된 마음으로 푹 잠을 자게 된 점에 고마워 하던 일, 역시 백작 부인의 집에서 기거하던 동안 지극히 늙은 나이의 백작 부인이 보여주는 절망적인 찬란함과 수줍음과 처녀성이 어떻게 다시 진실한 여인에게서 죽지 않고 되살아났던 일에서 그는 관능을 배제한 인간적인 情의 유대를 중시한 측면을 보여준다.
이탈리아를 다녀온 후 아름다운 영혼의 불멸을 기대한다.
그리고 내면의 함성을 쏟아 내어 자신이 터져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앙겔로스’라는 친구를 조우하고 그와 함께 아토스 산을 오르고 여러 수도원을 전전한다.
수도원의 신부이자 수사는 다양한 군상들이고 그 면면에서 동화되고 비웃고 갈등하고 사유한다.
아토스 산에서 돌아와 그리스도가 집도 없이 방황하고, 위험에 처했으며, 이제는 그가 인간에게 구원을 받아야 할 차례라고 느끼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上卷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모두 독자 저마다 무지함을 위장하여 졸음과 마주하기도 한다.
下卷의 서두, 약간 맛보았는데 유사한 징후가 보인다.
자연을 벗삼아 고독과 책을 즐기며 진한 감수성으로 그의 생각과 걸어온 길을 채색한다.
性에 관한 한 보수적이며 민족주의자이며 보헤미안的 기질인가.
이제 下卷에서는 중 장년의 인생을 전개하면서 니체며 붓다며 그의 사상의 기저를 열람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며 남긴 동양觀은 어떠했으며 上卷에서 보여준 부정적인 인식에 변화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족적인 이 자서전은 기존 자서전의 전형인 사건의 궤적을 따라가며 살을 붙인 전개방식이 아니라, 思惟를 낱낱이 벌거벗겨 시공간을 넘나드는 고뇌를 수려한 문장력으로 꿰맨 다음 진솔하게 털어놓는 점에서 따뜻한 감성의 자서전이 된다.
더불어 옮긴이 안정효의 막힘 없는 번역은 무척 매끄러워 전혀 불만이 없다.
이윤기, 안정효 이런 분들의 번역은 우리 번역문학의 금자탑이 된다.
미할리스 대장이 오래전부터 책꽂이에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해서 별로 알지 못했던 시기였다. 누군가 선물한 책이었던 듯한데, 어릴 때 읽었던 대장 부리바가 생각나서 갖고 다녔지만 읽지는 못했다. 책을 펼치면서 아무래도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카잔차키스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영혼의 자서전(상)은 그의 카잔차키스의 독특한 청춘 역정을 보여준다.
혈기 왕성한 그리이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삶에 대한 성찰, 그리고 종교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접근해가는 시간이 부럽다. 당시 수도원의 실상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독기는 과연 충만한 신앙심에서 나왔을까?
'대리석으로 지은 냉정한 합리성은 낡은 것을 모두 때로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세우려는 젊은이의 반항적 마음에는 불쾌하게 느껴진다. 마음의 충동을 지나치게 짧은 고삐에 잡아매려고 지혜를 모았던 자는 지나치게 신중하고 노망든 자였으리라.'(181p)
원작도, 번역도 이 문장 하나로 매우 훌륭함을 알겠다. 사상과 표현 모두 깊고 사색적이다. 그리고 그 모든 젊음의 고뇌와 성찰을 기록해 나간 투철함에 기가 질린다. 나는 그렇게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
처음 30페이지 정도 넘어가니...숨이 콱 막혀오는 것 같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오래전 읽었고, 마지막 장면과 그 '자유'에 대한 잔상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남아 있는데, 그렇다고 잡지마냥 재미나게 읽은 것은 아니라서,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은 읽을 생각이 없었다.
일단, 이 책을 집게 된건...가급적 민음사나 열린책들의 고전 시리즈는 책 주문 하면서 반드시 한권은 의무적으로 끼워놓자는 차원에서 아무런 정보없이 넣게 되었는데....
도대체 한 작가의 작품이 담아내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뛰고 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다가 그들의 자서전이나 살아온 일대기를 보다보면, 그들의 작품 세계가 어디서 연유하였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의 책을 읽고 있자니, 그의 성장과정 속에서, 시대적 상황, 지리적 위치, 주변인들이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을 하게 되면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 는 어느날 무심코 타자기 앞에서 쓴 작품이 아닌...그의 많은 날들이 오릇이 담겨져, 그 정신이 문자로 표현되고 이야기로 구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요즘 허접 국내 여류작가의 쓰레기 같은 소설에 눈길을 줄 수 없는 이유 역시...
아마 그것들의 인생에는 그래봤자, 80년대 주역이 아닌 주변인으로써의 감성과 별이 빛나는 밤에,나 들으며 꿈꿔왔던...설레임과 쓸쓸함 밖에 없었을테니. 흥!!
급작스레, 문학이 독자와 소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그렇게 혼란한 시절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드라마틱한 뭔가를 대리 경험 하는 것같은...그런 얄팍은 마음은 아닐게다.
(삶의 지식이고 어쩌구 하는 이야기도...그닥 와 닿지 않고...--;;)
다른 시공간을 살아왔어도...어차피 모든 사람이 한 곳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는데...
그런 면에서 만나는 어떤 보편적인 뭔가가 있는 것일까?
종종, 내 마음을..나의 바람을..나의 후회를... 오롯이 스캔하여 꺼내놓은 듯한...
그 심상(心狀)이 닮은 글을 보면 숨이 멎는 것 같다.
멍청하게 살아가다가 싸다귀를 한 대 맞은 느낌이랄까.
행간에 느껴지는 굵은 선이 좋았고... 읽고 나서, 내 삶에 대한...비장한 각오 같은 것도 했던 것 같다.
얼른 2권이 읽고 싶네.
니코스 카잔차키스. 조르바 덕분에 알게 된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완성된 자전적 작품인 이 책은 내겐 속깊은 오랜 친구 같다. 터키 점령하의 크레타에서 보낸 유년 시절부터 정신적 충만함을 찾아 이탈리아, 예루살렘, 파리, 빈, 베를린, 러시아를 거쳐 크레타로 돌아오기까지의 그의 여정을 함께 걷는다. 생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지혜가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수많은 책을 읽으며 위로받고, 격려받고,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얻었기에 버킷리스트라고 부를 만한 것을 꼽으라고 하면 망설여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단연 특별하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 가만히 펴들기만 해도 마음의 파도가 잦아들고 다시 기운이 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