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의 주인공들은 신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신탁을 통해서 신의 뜻을 미리 알고 피하려는 것이 오히려 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결말을 맞는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혹시 신의 뜻을 거스른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던 참에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 http://blog.yes24.com/document/7241329>에서 작은 힌트를 발견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정말 행복한가?’라는 제목으로 된 장 폴 사르트르의 <파리떼>에 대한 리뷰입니다. 아르고스의 오레스테스 가문의 비극을 다룬 신화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트로이전쟁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전쟁이 끝나고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남편이 전쟁터로 떠난 다음 아이기토스와 정분이 났던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정부와 함께 남편을 살해합니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는 어머니와 정부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신의 계시를 밝혀달라는 오레스테스의 요청에 제우스신의 계시는 “젊은이, 신들을 심판해서는 안 돼, 신들은 그들만의 비밀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네.”였습니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번개와 함께 내려진 제우스신의 계시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번개가 큰 돌을 쳤어.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이야? 이 번개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 사람의 명령도, 신의 명령도 듣지 않아.(김의기 지음,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 301쪽)”라고 신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오레스테스가 제우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 배경을 사르트르는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자유죠. 당신이 나를 창조한 순간, 나는 이미 소유가 아니게 되는거죠. 당신은 신이고 나는 자유로운 존재죠. 우리는 각자 혼자예요.” 오레스테스의 이런 생각에 대하여 제우스 역시 “일단 자유가 인간의 마음에 횃불을 당기면, 신은 그 앞에서 무력해지는거야. 이제 모든 문제는 인간과 신의 문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문제가 되고 말아”라면서 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고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이런 해석에 관심이 끌려서 읽게 된 것이 아이스킬로스의 <오르테이아>입니다. 호메로스가 전하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오르테우스 가문에 얽힌 가족구성원들 간의 상쟁을 다룬 비극 3부작입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국하는 시점에서부터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시점까지를 다루는 제1부 아가멤논에서는 이들의 살해동기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로 떠나기 전에 역풍을 만나고 역질로 군대가 어려운 상황을 맞았을 때, 제우스신이 거느리는 독수리들이 새끼 밴 토끼를 잡아먹은데 대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이 분노한 때문이며, 아가멤논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 분노가 풀릴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됩니다. 결국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고서야 출항하게 된 것이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의 이런 처사에 분노하여 복수를 꿈꾸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살아남은 딸 엘렉트라를 방치하고 또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가멤논의 복수를 할까 두려워 국외로 추방했다고 하는 이야기의 진행을 보면 그녀의 주장은 그저 부정한 자신을 감추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아가멤논의 아버지 오르테우스와 그 동생 플레이스테네스 사이에 얽힌 피의 저주를 이어받은 플레이스테네스의 아들 아이기토스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유혹하여 아가멤논을 살해함으로써 오르테우스에 대한 아버지의 복수를 대행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2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아르고스로 돌아온 오르테이아가 엘렉트라를 만나고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서는 사르트르가 재해석한 것처럼 오르테이아의 복수극을 제우스가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아폴론의 적극적인 신탁이 있었고, 제우스 역시 우회적으로 찬성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르테이아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저주에 따라 복수의 여신들의 추적을 받게 되는 3부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오르테이아의 죄를 추궁하는 저주의 여신들과 무죄를 주장하는 오르테이아가 아테나여신의 판결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오르테이아에게 복수를 신탁했던 아폴론도 등장하여 변호하고 배심원단의 동수 판결에 대하여 아테나여신이 오르테이아를 지지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되는데, 이에 반발하여 아테네를 저주하는 복수의 여신들을 달래서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그리스 신화는 시대가 흐르면서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앞으로 관심을 두고 공부를 더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레스테이아는 이 책의 주인공인 오레스테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나라가 서기라는 숫자매김을 시작하고도 한참뒤에 생겨났다. 그렇지만 만약 오레스테이아가
쓰여진 연도나 글쓴이가 누구인지 모르고 읽어보면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떠오른건 누구나 그렇게 결론으로 갈 만큼 이야기 소재와 풀어나가는 데 있어 공통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서양의 위대한 이야기의 근원은 그리스 로마로 올라간다고
환원지을 수도 있을까? 마치 서양의 철학을 플라톤으로 귀결시키는 의견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에 움베르토 에코가 책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과연 그 시대의 가장 대표할만한 것들이었나를 놓고서 공동으로 쓴 다른 글쓴이와 잠시 이야기 나눈 대목이 생각난다.
그점이라면 이 책은, '맞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년부터 읽어왔던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를 관통한다. 제우스를
비롯한 그 형제들과 다른 신, 그리고 그 윗대의 크로노스와 탄탈로스 무리들, 그리고 아테네와 전쟁에서 막판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트로이까지…
비극, 그것도 가족간 비극. 가족이지만
왕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 내 한몸 가누려고 해도 정말 많은 욕심과 무례, 관습의 어긋남, 때로는 지어야 하는 철면피같은 표정. 이 모든 것은 왕의 가족들에게서 충분히 나올 만한 정황이나 이야깃거리라고 본다. 오늘날로 보면 기업의 역사, 그걸 둘러싼 기업주와 그 가족들의 역사를
투영해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이 책이 아닌, 트로이 전쟁사나 다른 이야기책을 보면 나오는 아가멤논은, 무뢰한이자 야심과 욕심이 철철 흘러내리는 인간이다. 그런 사람이
이 책에서는 문득 나왔다 사라져버림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의 이야기 흐름이 어색하다는
말은 아니다.
문득 그리스의 비극이 유행하던 시대로 돌아가, 배우와 코러스가 장엄하게
연기하는 그 광경을 보았으면 얼마나 가슴이 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책을 보다가 드는 의문은, 이 책의 결말을 보면서 이게 과연 비극일까
싶은 물음이 떠올랐다. 며칠 되새김질해보니 그럴 듯도 싶긴 하지만, 그동안
익숙하게 생각했던 비극과는 그 뜻이 조금은 다르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리스 신은 과연 신일까 아니면
사람과 신의 중간단계쯤에 있는,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지만 신으로 부르기에는 사람과 닮은 슈퍼 히어로
정도일까? 하는 궁금함이다. 아마도 민주주의의 발전은 신에게
조차 그 영험함을 다 주기에는 인간의 위대함을 양보하기 싶어하지 않는 초기 인문주의자들이 아니었을까?
문체가 분명 오늘날과는 다른데 , 그 다름 속에서 참신함이라는 모순의
감정이 느껴진다.
1. 아가멤논
[노인이라도 배움에 있어서는 항상 젊은 법이지요…예부터 인간 세상에 잘 알려진 속담이 있으니, <사람의 행복이
커지고 부유해지면 자식을 낳게 되니, 자식 없이 죽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행복의 뜰 안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불행이 싹터 자란다!>…해묵은
죄악은 계속해서 죄악을 낳고 새로운 죄악으로 더욱 번성하게 되니, 오늘이든 내일이든 때가 되면 그 열매의
저주는 또다시 죄악을 낳는다네. 결코 피할 수도 견딜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는 일. 어두은 저주의 불경하기 그지없는 오만함은 그 집안의 아비를 닮았구나...커다란 행운을 누리는 친구를 시기하지 않고 존중해줄 수 있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드물다. 악한 마음의 독기는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어 시기로 병든 자를 이중의 원한으로 괴롭히는 법이다. 자신의 불쾌함으로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데다 또 남이 잘되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과의 교류란 거울에 스쳐가는 그림자처럼 허황된 것에 불과한 것을
과거에 보았기 때문이다...오, 인간의 운명이여! 행복할 때는 그림자처럼 뒤집히기 쉽고, 불행할 때는 젖은 해면으로
한번 훔치면 지워져버리는 그림과 같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처럼 지워지는 운명이 나에게는 더욱 슬프구나.]
2.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
[나를 지배하는 자의 행위가 옳든 그르든 강요에 못 이겨 그 행위를
찬양해야 하고, 마음속의 증오를 잊어야만 하네!...위대한
힘을 지닌 운명의 여신들이여, 제우스의 힘으로 정의가 나에게 다가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모ㄱㅈㅓㄱㅇㅡㄹ
이루도록 해주소서. <네가 소리치면 그 메아리가 되돌아온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이렇게 정의하는 죄지은 자의 죗값을 거두어들일 때 소리 높여 호통을 친다! <피 묻은 칼에는 피 묻은 칼로 보답하라! 행한 자는 그대로
당해야 한다!>...그러나 인간의 파렴치하고 대담한 교만과 비길 것이 무엇이며, 인간들에게 고통을 수반하는 뻔뻔하고 욕정에 빠진 여인의분별없는 욕망과 비길 것이 무엇이랴? 여인의 강력하고 제어할 수 없는 욕정은 심지어 짐승의 욕정마저도 능가하는 것을...]
3. 자비로운 여신들
[무서운 것도 적절한 곳에서는 이롭게 작용하느 stn가 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감시자가 늘 지키고 있어야
한다. 고통의 눈물을 통해 엄한 훈련을 하는 것도 이로울지니. 인간이든, 백성이든, 한 나라든 만약 마음 속에 정의를 맞는 두려움이 자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스스로 정의를 존중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