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Utopia)를 거론할 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헉슬리의『신세계』, 오웰의『1984년』, 그리고 이후의 많은 反유토피아적 미래사회를 그린 작품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는 문학사적 지위를 가지기에 그 소설적 작품성을 떠나, 우리인류에게 미친 사상적 공감의 족적은 지대하다 할 수 있겠다.
우리 인류가 염원하는 이상향, 욕망이 불필요한 곳, 경쟁과 갈등이 없는 곳, 모든 이가 평등 한 곳, 이러한 곳이면 우리는 행복을 만끽 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우리들에게 진정 어떤 의미일까? 고통, 근심, 번뇌가 지워진, 꿈과 환상이 더 이상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지 않는 상태를 행복한 사회, 인간의 미래 사회로 상정한다.
<은혜로운 분> 1인이 지배하는 사회, 숫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획일화된 사회,‘자유’라는 어휘가 낯선 사회, 아니 ‘자유’는 미개했던 인간들의 불안한 이성에 대한 다름의 표현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을 지배하는 이념, 행복과 자유의 공존에 대한 고뇌를 축으로 하여, 인류가 지향하는 궁극의 낙원(樂園)이란 어떤 것인가를 성찰하게 하며, 이는 작품이 쓰여진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일명 볼쉐비키 혁명)으로 인한 공산화한 전체주의 러시아의 집단화되고, 경직된, 그리고 유물론에 의해 사상이 강제된 시대적 상황과 정치사회적 배경과 결합하여, 자연스럽게 민중의 해방으로, 공산주의 혁명이 지향한 것은 다름 아닌 부의 평등분배, 균등한 기회, 욕망의 고통이 없는 사회, 즉 ‘유토피아(utopia)'의 세계로 안내된다.
따라서 이 작품이 획일화된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무관치 않으며, 근대산업사회의 기P화되고 비인간화된 현실적 우려를 분명하고 깊이 있게 천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모든 인간은 번호로만 식별 될 뿐이다. ‘D-503', 나는 수리(數理)전문가로서 우주선‘인쩨그랄’호의 조선(造船)기사이다. 투명한 유리벽에 인공해가 비추는 숙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난다. 모든 번호들은 같은 음식을 같은 시각에 같은 동작으로 삼키고, 거대한 사각형 구조로 단일한 움직임으로 동시에 이동한다. 하루에 두 번의 휴식시간, 성(性)의 구분은 번호표식 앞의 알파벳이 알려준다. 지정된 시간에 당국에 등록하고 투명한 유리 숙소의 커튼을 내리면 두 번호는 섹스를 한다. 여기에 의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적 오류가 없는 행복, “절대적인 미학적 소속성에, 이상적인 비자유에 근거”하는,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중의 한 개인’인 사회, 강력한 단일 조직체로서, 비자유의 본능이 태곳적부터 인간의 유기적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실재할 수 없는 생각이기에 그렇다.
“모든 번호에게는 다른 어떤 번호라도 성적 산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라는 ‘단일제국’의 성법전(性法典)이나, 사전에 만장일치의 완벽한 동의가 이뤄진 뒤 진행되는 <은혜로운 분>의 선출방식처럼, 국가가 통제하는 것은, 통제치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연성과 맹목성, 비과학성의 부조리에 비해 월등한 이성적 결실이라 주장된다. 즉, 기지수(旣知數)의 시대, 불확실성이 배제된 사회, 비자유의 이상성으로 상징된다. 나아가, 이렇게 통제되고 비자유가 지배하는 단일제국이야말로 낙원이라고 외친다. “우리는 다시 아담과 이브처럼 천진무구 해졌어”라고. 어떠한 것도 개인이 자유로이 생각하고 행동 할 필요가 없는 안전히 획일화되고 통제된 사회에서 ‘천진무구’란 것은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은혜로운 분>과 단일제국을 찬양하던 나, D-503에게 믿을 수 없는 것, 미증유의 혼란스러움이 발생했다. I-330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심장이 뛰는 것은 “압축, 수축 펌프에 의한”기계적인 이상적 펌프의 작동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러한 심장의 울렁거림에 “사랑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은 부조리하고 부자연스럽다.”그래서 질병일 밖에 없다. 이는 개인이 말살된 사회,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는 사회만을 아는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당혹스런 생각이 된다.
결국 혼돈에 휘말린 D-503의 I-330에 대한 집착은 단일제국과 그 밖의 세계를 구분하는 초록색 유리벽너머 숲을 통해, 믿을 수 없는 것, 새로운 것, 미지수의 세상을 보게 한다. 통제된 감시사회 속에서 D-503의 혼란스런 두뇌는 용인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한다. 또한 I-330을 비롯한 단일제국을 파괴하려는 ‘그들’, 그리고 번호들의 감정적 흔들림을 말살하기 위한 두뇌수술이 자행된다. 오직 기계화된 천진무구한 절대이성의 인간으로 개조된다.
감성을 지배하는 뇌세포의 제거수술을 받은 D-503은 자신의 자백으로 처형을 기다리는 가스상자 속의 I-330을 바라보며, “처형을 연기해선 안 된다. ~ 中略 ~ 유감스럽게도‘이성을 배신한 인간’의 수는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승리하길 희망한다. 아니, 그보다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이성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이 마지막 D-503의 독백에서 우린 역설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의 실패를 보기도 하고, 유토피아의 불안하고 위험스럽기조차 한 형태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작품은 유토피아 혹은 당시 러시아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극이며, 근대산업사회가 가져온 비인간화, 기계화, 물질 만능화, 획일화, 집단화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기도 하다.
“자유가 없는 행복이냐, 아니면 행복 없는 자유냐”, 인간의 이성이 이 본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전개할 수 있을까? 존재 할 수 없는 낙원, 상상속의 이상향, 인류는 UTOPIA를 과연 건설해 낼 수 있을까? 자유를 선택한 오늘의 우리는 정말 행복하기가 어렵다...
예브게니 자먀틴이 쓴 우리들은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힌다
이 책의 발표 시기로는 앞서 말한 두 작품보다 먼저 발표되었으며
1924년에 영역본이 나왔다고한다
하여,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점에서 두 작품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고
우리는 알고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가의 태생이 소련이라는 점에서
앞에말한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보다는
마이너한 작품이고 그만큼 인지도를 얻지못했다고 잘 알고있다
당시 소련을 비판과 풍자한 탓에 소련에서는 발표되지 못하였고
규제가 완화된 1988년에서야 소련에서 출판되었다고한다
이책을 번역해주신 석영중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우리가 ‘개별성’을 잃는다면, 우리는/나는 누구인가?
- 《우리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6/2006)
“매일 아침 육륜(六輪)의 정확성으로 동일한 시간, 동일한 분에 우리 -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18)
29세기의 지구를 지배하는 ‘단일제국’의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매일 오전 7시에 단일제국 찬가를 합창하며 기상한다. 이들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집에서 살아가는 반면, ‘녹색의 벽’ 너머에는 불투명한 ‘고대관’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다. 이곳은 200년에 걸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전쟁으로 삶의 공간이 파괴된 곳이다. 하지만 단일제국의 하루는 일사분란하다. 마치 여섯 개의 바퀴에 의지한 채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거대한 증기 기관차처럼 말이다. 이들의 취침 시간은 정확히 22와 2분의 1시(오후 10시 30분)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의 생활 패턴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군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풍경을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은 디스토피아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당시 36세의 젊은 작가는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20년에 집필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품 전체를 통해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당시 러시아 국내에서 출간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스탈린 집권 이전에 집필되었기에,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 보다는, 경제 체제의 지배와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독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특히 거대한 생산 라인의 부품처럼 최대의 효율성을 위해 일하도록 ‘길들여진’ 구성원들의 소외와 자유의 박탈 문제를 꽤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자본을 가진 거대 기업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막강해진 지금 시대의 현실과 더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일제국의 구성원들은 녹색의 벽 너머의 인간들처럼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거대한 유리 반구로 경계 지워져 있는 이 곳에서 이름 대신 여자는 알파벳 모음, 남자는 자음 한 자로 시작하는 번호로 불린다. 이를테면, 소설의 화자는 D-503이고, 화자와 ‘맺어진’ 연인은 O-90으로 불리는 식이다. 이 곳의 구성원들은 개인성 자체를 의식하도록 길들여진 듯하다. 획일적이고 평균적인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반면 단일제국을 지배하는 존재는 번호 대신 ‘은혜로운 분’으로 불린다. 이는 특정한 ‘이름’이 부여된 인간과 달리, 막연하고 불가해한 이름으로 불림으로서 스스로를 구별 짓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생각까지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중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동일한 것이다.”(12) 그러므로 각자가 자각하는 자신은 언제나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닌”(8) 상태에 머물 뿐이다.
수백 년 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인간들의 ‘고대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처럼 건물들이 ‘불투명’하다. 반면 단일제국의 건물들은 모두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다. 상상이 되는가? 7시에 기상하여 눈길을 옆으로 돌리면 옆집 사람이 무엇을 하는 지 볼 수 있고, 때론 눈길도 마주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평소에 ‘사생활’ 없이 살아간다. 단, 사랑을 나눌 때에만 국가에 신고를 하고 이를 증명하는 분홍색 감찰을 얻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때에야 비로소 커튼을 내릴 수 있는 허가가 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사람들은 성생활까지도 국가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나아가 사랑에 있어서 희열(분모)/질투(분자)로 정의되는 ‘행복의 공식’에서, 질투를 무한히 작게 만들면 행복을 무한히 증대시킬 수 있다는, 기계적이고 우려스러운 믿음을 신봉한다. 이때 질투를 무한히 작게 만드는 방법으로서 ‘국가’는 모든 파트너의 자유로운 공유를 제도화한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소설 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제도가 보다 구체적이고 파격적으로 설정되어 이어지는 모습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람과 깊이 맺는 인간적인 관계가 오히려 의심스럽고 불순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인 D-503은 단일제국의 수학자이면서, 건조중인 우주선 ‘인쩨그랄’의 조선 담당 기사이다. 학창 시절 친구이자 시인이기도 한 흑인 R-13은 여인 O-90와도 파트너다. 곧 이 세 사람은 삼각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인간들과는 달리 이 세 명 사이에는 서로에게 질투를 품지는 않는다. 화자는 오히려 자신들의 관계를 ‘완벽한 삼각형’이라고 만족하기까지 한다. 이들 각자는 단일제국의 업무를 분담하는 ‘개미’ 혹은 거대한 기계의 규격 부품과 같은 의무를 다하고자 할뿐이다.
단일제국의 철학은 테일러 주의(Taylorism)와 포드주의(Fordism)이라는 표현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메커니즘의 아름다움이란 진자와 같이 정확하고 불변하는 리듬에 있다. 그러나 사실 어려서부터 테일러 시스템에 의해 길러진 당신들은 진자처럼 정확하게 되지 않았는가? (...) 메커니즘에는 환각증이 없다.”(175) 단일제국에 스며들어 있는 공기에서는 ‘미래와 이성에 대한 낙관을, 오차 없는 기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감지할 수 있다. 생산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들(그러니까 각각의 번호들)은 밤에 반드시 잠을 자야 한다. 이것은 의무이기에, 밤에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은 심지어 범죄가 된다. 이 단일제국의 번호들에게는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의무는 인간다운 생활과 행복 추구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생산 목표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개인의 개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와 달리 ‘영혼’이 내면에 형성된 번호들,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여겨지는 ‘꿈을 꾼 이들’, 제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들’은 ‘환각증’을 가진 사람들로 진단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단일제국은 이들에 대한 ‘처리’ 방법을 알고 있다. 환각증을 가진 사람들은 소위 ‘위대한 수술’을 받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수술이란, 간단하다. 엑스레이로 대뇌 하부의 뇌신경 마디를 3회에 걸쳐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수술 받은 번호들은 결국 화자처럼,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가진 ‘본래의’ D-503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단일제국의 번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체의 일부’로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데 머문다. 어쩌면 화자가 건조에 참여중인 우주선 ‘인쩨그랄’의 이름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이 명칭은 영어의 인티그럴(integral)에 해당할 텐데, 이 용어야말로 ‘전체의 일부로서 필요불가결한’, ‘완전한’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분수(fraction)에 대항하는 정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인티그럴’이 ‘총체’라는 의미나 적분, 혹은 적분 기호로의 의미도 함의한다는 점에서 우주선 ‘인쩨그랄’의 명칭 하나에도 소설 전반이나 화자와 관계된 다의적인 상징성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다양한 상징성을 구현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수 있는 특징은, 화자 D-503의 의식 변화다. 그는 동질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 점점 더 ‘혼자됨’을 자각해간다. ‘나는 혼자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꽤 많이 반복된다. 그리고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 있다면.”(69)이라고 말할 정도로 화자의 내면은 자아분열에 가까운 균열과 정처 없음을 경험한다. 결국 그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의식은 질병’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고유한 개인으로 드러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사회의 관습이라는 것이 그렇듯, 관습의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단일제국의 의사는 화자의 내부에 ‘영혼’이 형성된 것이 틀림없으며, 자연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린다. 따라서 이 ‘환각증’을 제거하려면 ‘수술’을 받는 길밖에 없다는 처방을 내린다. 이 수술은 앞에서 언급한 신경 마디를 태우는 수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진단에도 화자 D-503은 ‘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의식하고 결국 “나는 단독체”(153)라는 자각에 이르는 것이다.
화자가 스스로를 단독체로 자각하는 분열과 고뇌의 양상은 화자가 여성 I-110과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I는 단일제국의 구성원들에게 존중을 받는 인물이지만, 벽 너머 인간들의 장소인 불투명한 ‘고대관’에서 금지된 술과 담배를 하며 화자를 유혹한다. 물론 화자를 유혹한 주된 이유는 화자가 참여하는 우주선 ‘인쩨그랄’을 탈취하고자 하는 혁명 활동의 포섭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I는 혁명 세력의 일원이었다. 우주선 ‘인쩨그랄’을 탈취하여 단일제국의 우주 진출을 막으려는 계획에 참여해왔던 것이다.
소설에서 예기치 못한 반전을 꼽는다면, I가 참여하는 혁명 활동이 다이나믹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흐지부지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I에 단단히 빠져 있던 화자는 혁명 활동에 참여하는 듯 했지만, ‘인쩨그랄’ 탈취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며, 결국 어처구니없이 실패하고 만다. 급기야 화자 D-503은 국가로부터 ‘수술’까지 받아 마치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난다. 화자는 단일제국의 충실한 개인이 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내게는 극적인 반전도, 기대도 개의치 않는 듯한 반전이었지만 결국은 디스토피아적인 마무리다. 마치 ‘녹색의 벽’ 너머 인간의 세계로 넘어갈 것만 같았던 화자가 다시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은혜로운 분’의 영향력 아래 복귀하는 설정. 내겐 오히려 상투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현실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지만, 현실에서 패배하는 개인의 모습을 통해 어쩌면 오히려 더 실감나는 정서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 자먀찐은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전체주의적 사회 속 개인의 문제를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나 된 전체로서의 개인을 강요하는 공동체에서 오히려 극도로 소외된 인간 존재에 대해 고찰했다. 5월의, 제국 상공의 푸른 하늘과 ‘녹색의 벽’, 그리고 노란 꽃가루가 넘어오는 인간들의 사회, 불투명한 ‘고대관’의 모습을 상상하다보니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렸던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초기 작품을 떠올렸다. 특히 키리코의 그림 ‘이탈리아 광장’(1913)처럼 고독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혹은 그의 그림 가운데 마찬가지로 인기척 없는 광장 풍경을 담은 그림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소설 속의 묘사처럼, ‘마졸리카 도자기’를 닮은 파란 하늘 아래 누런 흙바닥이 있는 광장,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원형의 성이 있는 풍경처럼 말이다. 그리고 늦은 오후인 듯 길게 들어진 동상의 그림자. 그림의 광장은 소설에서 불투명한 건물이 늘어서 있는 ‘고대관’의 모습을 닮은 듯했다. 인기척뿐만 아니라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왠지 모르게 황량하고 고독해 보이는 세계,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이 팽배한 그림이 소설의 분위기와도 꽤나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비밀 없이 모든 것이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는 작품 속의 사회에서 개인은 균일한 부품으로, 전체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투명한 다이아몬드처럼 말이다. 반면 ‘녹색의 벽’ 너머의 인간 거주 구역에서 모든 건물은 불투명하다. 이들의 존재 조건은 불투명한 흑연을 닮아 있다. 하지만 이로써 각자에게는 사생활이란 것이 생겨나고, 이로부터 사람들은 ‘혼자됨의 시간’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일단 개인성을 자각하게 되면, 그는 ‘단독체’로서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테다.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혼자됨’을 자각하는 인물이었다. 인간이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존재이자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이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 그리고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들이 비록 실수하고 실패하며 방황을 수반하더라도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자에 보다 더 공감하고 연민할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존재의 불투명성은 타자를 바라보는 마음가짐을 보다 겸손하게 하고, 타자를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극단적이고 경직된 도덕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이 숨 쉴 여지를 남겨 놓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전체와 개인성의 발현, 소외와 고립, 그리고 자유의 문제를 견주어 생각해보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