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
책은 연설문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어리석음의 여신’(우신 愚神)을 연설자로 세워, 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인지 스스로 칭찬하는 연설을 하게 한다.(물론 이건 일종의 반어법) 우신예찬이라는 제목은 이런 구도에서 나온 것으로 일종의 의인화라고 볼 수 있을 듯도 하다.
책의 시작에서 ‘어리석음에 대한 예찬’은 풍자의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별 내용은 없지만, 사람들이 잘 모를 만한 어려운 단어 몇 개를 대충 넣은 연설을 했다고 하자. 애초에 연설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그런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갖게 된다는 것. 한편 또 다른 이들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자신은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그 시답잖은 연설에 크게 맞장구를 치면서 대단한 것인 양 허풍을 떨기도 한다. 둘 다 어리석은 꼴이고, 여신은 이들을 비꼬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넓게 펼쳐져 있는지를 자랑한다.
책의 중반에서 이 ‘어리석음’은 좀 더 심각해져서 일종의 비판‘으로 전환된다. 특히 당대의 권력자들 – 성직자와 학자들, 귀족들과 군주들 –이 보여주는 어리석음에 대한 묘사는, 저자 자신이 나중에 극구 부인했더라도 비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후반부 몇 개의 절들에서 ‘어리석음’은 잠시 긍정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어리석음(겸손)이라는 형태로 등장할 때인데, 저자가 주로 인용하는 바울의 서신서들에서 이런 ‘좋은 의미의 어리석음’이 자주 발견된다. 이 부분에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야말로 복된 삶을 산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특유의 풍자와 비판은 빠지지 않는다.
↑ 이 양반이 에라스무스.
2. 감상평 。。。。。。。
에라스무스 자신도 큰 고민을 하지 않고 겨우 이레 만에 썼다고 말한 작품. 사실 그 이름도 유명한 고전이라 어느 정도 읽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책장을 넘겼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진 않았다. 오히려 군데군데 에라스무스의 위트가 드러나는 문장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유부단함의 대가답게(물론 보기에 따라선 ‘안전지향’, 혹은 ‘신중한’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책 전체에 걸쳐 풍자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인물에는 실명을 전혀 붙이지 않는다. 이게 훗날 이 책을 가지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변호하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어떻게 보면 좀 비겁한 게 아닌가도 싶지만, 뭐 모두가 혁명가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교황, 주교, 군주 정도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꽤나 용기를 냈다고 할 수밖에. 어차피 이런 직위에 오른 사람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으니, 굳이 실명을 쓰지 않았더라도 책을 읽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일부 반대자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교황 자신도 교회와 성직자들의 우매함을 비판하는 이 책을 읽으며 웃고 말았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도, 어느 나라에선 대통령 비방하는 전단 뿌렸다고 구속시키고 배후를 캐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번역을 괜찮게 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함께 폈었는데, 사진이나 그림은 훨씬 많아서 눈은 즐겁게 해 주었었는데, 번역이 너무 직역투라 읽고 나면 무슨 내용인지 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다시 열린책들판으로 돌아왔다. 다만 이쪽도 종종 우리말 어법에서 벗어나는 문장들이나 오타가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시간 날 때 킥킥대며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고전이라는 이름은 아무 책에나 갖다 붙이는 찬사가 아닌 만큼,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우리 자신과 이 사회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책의 저자는 에라무스이다. 그는 유럽 최고의 지성이라 평가 받는다. 에라스무스는 최고의 지성인 답게 당대에 많은 글을 쓰고 출판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그의 글이 그의 시대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는듯하다. 그남아 현대에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 이 "우신예찬"이란 책 들수 있겠다.
이책은 풍자문학이다. 우신(어리석은 신)의 입을 빌려 에라스무가 세상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다. 저자는 이책에서 어리석음을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그런데 그 의미가 정확히 나누어져 있지 않고 그 용도와 쓰임이 뒤죽 박죽이다. 왜이렇게 일관되고 논리적이지 않게 글을 전개하냐고 에라스무스에게 묻는 다면 그는 우신(어리석은 신)에게 논리를 기대하것이 어리석음이라고 대답할것이다.
이책에서 어리석음 크게 세가지 용도로 쓰인다. 첫번째 진짜로 어러석음이다. 세상은 어리석음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고 우신의 자화자찬한다. 두번째 용도는 지혜로워 보이나 실은 어러석어 보이는 것이다. 주교, 교황, 학자, 군주, 변호사 등 소위 지성인, 엘리트들이 지혜로워 보이나 실로 어리석은 자들임을 풍자한다. 마지막 어리석음은 어리석어 보이나 실은 지례로운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주여 저는 어리석은 자이옵니다"라고 기도 할때 주님은 이런 사람을 지혜롭게 여기신다. 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실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이다. 신양성서 멸망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어 보인다고 했다. 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 어리석음이다.
당시 이 우신예찬은 실제로 사회에 큰 파장을 준듯하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 특정인을 비하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고 여러차례 변명을 해야했고, 이책을 불어로 번역한 사람을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에라스무슨는 우신예찬을 쓴걸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이라는 보물을 남겨주어 감사하다. 이책을 읽는동안 그의 익살스런 글 솜씨로 인혜 실소가 터져나오기 다반사 였다. 또 우신의 입을 통한 풍자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느꼈다. 그러나 나 또한 우신의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삶도 때론 어리석음에 의해 지탱되고 내가 지혜로운줄 알고 아는 행위가 실로 어리석을수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리석음을 미워할수 없음은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들을 지혜롭게 하시며, 그 또한 어리석음을 입고 이땅에 친히 오셨기 때문이다.
서양의 역사를 지탱해 온 정신적인 지주는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중세시대, 우리가 늘 영화나 소설류에서 아주 칠흑같이 어둠으로 가득한 종교의 광기와 무조건적인 신앙에 억눌린 모습으로 알고 있던 그 시대에 에라스무스는 "감히" 종교에 대해 아무런 의심없이 맹신하는 자들에 대하여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것도 대놓고 했다기 보다는 아주 우아하게 유머를 버무려서.
그 때나 지금이나 종교의 행태는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고 있는게 현실이다. 같은 신을 신앙하면서도 서로 죽일듯이 달려드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 개신교의 영향이 큰데, 자꾸 갈수록 신에 뜻에 따라 사는 삶을 묵상하는게 아니라 열심히 교회에 나가서 헌금하고 목사의 말을 신의 뜻으로 오해하여 그 말에 복종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저급한 믿음에 맹목적으로 메달리는 행태가 갈수록 늘어나며, 일부 대형교회는 드디어 세습화를 공식적으로 인정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니 에라스무스가 지금 우리나라를 본다면 "우신예찬"급으로 풍자와 조롱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화가 났겠지.
본 작품은 종교와 신앙과 인간과의 현명하고도 이성적인 관계를 고찰한 것이다. 따라서 교양서적으로 고전으로 가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을 진정 그리스도를 신앙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필독해야 할 작품이라는 것이다.
우신은 어리석음을 대표하는 여신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은 사람 중에서도 특히 여자가 더 어리석다고 생각하여 그냥 신이 아니라 '여신'으로 지정한것 같다)
스스로를 우신으로 칭하고는 자신의 훌륭함을 피력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당시대를 비판하여 인기가 좋았는데, 특히 신분사회에서는 절대적 존재인 군주, 귀족, 성직자를 조롱하는 부분이 꽤 직설적이어서 금서로 지정되었었다.
현 시대에도 극공감이다.
- 우신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하여 진실을 보지 못하고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것에 좋아하므로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수 있다고 한다.
냉정한 진실보다는 달콤한 거짓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므로, 그런 허상에 빠질수 있게 해주는 내(우신) 덕분이다.
서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으며 때로 아첨에 속고 때로 알고도 눈감아 주고, 때로 어리석음의 꿀맛에 이끌리기도 하는 마당에 만약 이럴수 없었다면 ... 진작 파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
현명하다면 결혼생활의 불편함,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노고를, 양육의 번거로움과 고통을 알고 있음에도 누가 결혼을 할것인가, |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합니다만 ,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습니다. |
- 군주가 해야 할 의무를 모른채 태평하게 즐거움을 쫒아 행복해 하는것도 어리석음 덕분이며,
귀족들은 부끄러움을 모른채 아부에만 능한것도,
성직자 또한 고난은 모두 예수그리스도에게 넘기고 자신은 신나게 전쟁만 해댈수 있는것도 어리석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군주들은 나 우신의 도움을 받아 모든 근심걱정을 신들에게 맡겨두고 염려와 고민을치워둔 채, 영혼에 불쾌감이 들지 않도록 듣기 좋은 말만을 하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사냥하고, 명마를 사육하고, 행정과 군인 요직을 판매하고,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의 금고를 채울 방법을 매일매일 고안하고 아무리 불공정한 일일지라도 명목을 바꾸어 공정하게 포장하는것으로 자신들이 군주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고 믿습니다. |
그럼 궁정귀족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대부분은 더할수없을 만큼 알랑거리며 비굴하고,어리석고 천박합니다. 군주를 부르며 <근엄하시고 존엄하시고 위대하신>등의 굉장한 호칭을 줄줄이 엮어 넣을줄 앎에,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함에, 이런 아부를 멋들어지게 해냄에 즐거워합니다. 나 우신조차도 때로 이들이 허풍 허세를 칠때면 역겨움을 느낄 정도인바, |
하지만 오늘날 이들은 스스로의 만족에만 매달려 매사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과업들은 예수그리스도에게 혹은 거느린 수사들에게 혹은 소위 보좌 사제들에게 맡겨둔 상태입니다. ... 그리스도의 교회는 피로 세워졌으며, 피로 굳건해졌으며, 피로 성장하였으며, 이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자신들이 칼을 들어야 할것처럼 교황들은 전쟁을 불사합니다. |
- 반면 지혜와 철학은 가난하고 찌질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고 갑분싸 능력까지도.
지혜는 사람을 소심하게 만드는 바 결국 지혜로운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와 헌된 희망 가운데 천대받으며 각광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것을 여러분은 보았을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돈을 굴리며 , 국가의 통솔에 참여하여 손쉽게 모든 면에서 성공을 구가합니다. 만일 군주들의 마음을 얻어 금은보화로 치장한 흡사 신들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면, 이런 면에 있어 지혜만큼 쓸모없는 것이 무엇이며,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머무는 것보다 더한 저주는 무엇입니까? |
철학자를 식사에 초대할라 치면, 그는 무거운 침묵 혹은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질문공세로 잔치를 망쳐버립니다. 또 합창 가무단의연주에 초대하면 철학자는 마치 낙타가 춤추는 꼬락서니를 합니다. 또 국가적 축제에 초대하면, 예의 심각한 표정으로 백성들의 즐거움을 방해하며 치켜뜬 눈을 어쩌지 못해 현자 카토 처럼 극장에서 쫒겨나게 될것입니다. 또 대화에 끼워줄라 치면 그는 갑자기 속담에 나오는 늑대처럼 모두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
- 나의 은혜로운 어리석음 덕분에 어리석은 너희는 행복하다.
옛말에 <같이 마시고 다 기억하는 놈을 나는 증오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 , 안녕히! 박수치라! 행복하라! 부으라, 마시라! 나 우신의 교리에 탁월한 여러분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