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다름은 틀림과 종종 혼용된다. 그 만큼 우리들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름은 다양성이 인정되며 그 자체로 존중받는다. 그러나 틀림은 조금의 여지 없이 나쁜 것, 잘못된 것으로 다루어진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태연히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는 주인공 뫼르소. 화창한 하늘을 보자 어머니 일만 아니었으면 산책하기 참 좋은 날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동안 피곤했는데 오랜만에 집에 와서 참 좋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는 어머님의 장례 직 후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긴다. 그의 이런 모습은 분명 불편하고 이상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다. 장례 중이지만,다른 사람이 권한 담배와 커피 한 잔 거절하지 못할 수 있다. 어머님의 장례와는 별개로 오늘의 날씨는 참 좋다고 느낄 수 있다. 피곤한 장례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을 것이다. 어머님의 일은 이미 돌아가셨고 나는 살아있으니, 나는 전처럼 데이트도 하고 직장도 다니 다니며 원래 나의 삶을 다시 살아간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당연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도 불편하다. 왜 그럴까?
뫼르소와 우리가 다른 점은, 그는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자신의 감정에 더 충실하며, 솔직하며, 현실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눈물이 나지 않으면 나지 않는 대로, 주변 상황이 어떻든 지금 나의 감정에 집중하여 딱 그만큼만 표현한다. 이는 잘못된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모습은 아니다. 이 사실을 뫼르소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거짓행동이나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다르다는 것은 곧 틀림이 되어버린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에게 사람들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매우 위험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낙인 찍는다. 살인 사건 자체 보다는 뫼르소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도대체 어떻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런 행동을 보일 수 있는지가 재판의 핵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사람들앞에서 뫼르소는 굳이 자신을 변명하려,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행위에 이유와 설명을 붙여야 하는 재판장에서 그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한다. 말할 법한 이유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뫼르소에게는 그것들이 이유가 되지 않았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행복한 마음으로 판결을 받아들인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을 만끽하며, 그의 마지막 순간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기를 기도하면서.
과잉 감정, 뻔하고 과장된 표현들에 익숙한 나에게 뫼르소는 참 특이한 인물이었다. 사건, 이야기 전개와는 별개인 듯 한 주인공의 생각과 시선들. 냉혈한 같기도 하지만 주변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들을 보면 그렇게까지 유별나거나 괴팍한 것 같진 않았다. 사람을 죽인 죄는 분명하지만, 전형적인 악인이라기인 뭔가 부족하고... (과연 이 세상에 전형적인 악인이라 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담담하고 건조한, 솔직하면서도 낯선 문장들이 참 신선했다.
읽고 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계속 뫼르소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유명한 작품이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나 궁금해서 찾아보기도 했는데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리뷰도 참 많았다. 그 중 전문가의 해설을 보니 어찌나 어렵던지... ㅠㅠ) 이 책은,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 나 자신의 마음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야기를 쫓아가느라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지 못해 아쉽다. 나의 생각의 깊이가 더 깊어졌을 때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이방인』을 두고 페이거니즘의 세계를 느낀다면 그거야말로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위의 도덕을 강요하는 인간들, 전통적 가치의 옹호자들에 의해 사람 한 개個가 검토되고 남이 나를 대신하는 소외감. 카뮈가 「사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릴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사회 질서란 이름으로 소외당하는 이방인의 삶의 진실성을 자각하게 한다.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진실성과 허위의 문제를 그 전체적인 넓이 속에서 취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달리 말하면 허위의 도덕을 무시한 작용은 본질적으로 사회로부터 거부당한다는 거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혹은 잘 모르지만 응당 그러한 척, 서로 사회적 관습의 교환을 바라는 여러 가지 집단의 구성원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사회다. 그러나 자기에게 성실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사람, 자신만이 스스로에게 유일한 벗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 대한 가치부여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과 자신의 괴리를 진실되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부조리하고 병균 같은 이방인으로 각인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강한 인간이 아니에요. 어느 누구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서로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있어요. 다만 그밖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체념하는 거죠. 그러니까 선배님 말대로 남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ㅡ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어째서 하루키의 작품 한 대목을 떠올려 냈는지는 (잘)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스런 감성>이 <자연스런 자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은 안다. 왜냐하면 문학의 세계에서는 아주 단순한 묘사,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는 터무니없는 텍스트라 할지라도, 모든 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여지기 이전에 이미 저들 스스로도 생각해왔을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정한 0℃, 물이 얼게 된다는 그 0℃가, 어째서 0℃인가, 그것은 편의상 <그것이 편하고 깔끔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떠한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적 기준이나 통념을 바꾸면 대체 어느 정도 차가워야 0℃에 가깝고 어느 정도나 기온이 올라가야 일(열)사병에 걸릴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그러니까 저 특권자들이 만든 인간 피라미드가 0℃ 밑의 차갑고 성실한 삶을 (부조리한)도덕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결론은, 뫼르소처럼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ㅡ 당사자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ㅡ 우리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어야만 한다는 거다. 사람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모든 삶이 어쨌든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법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삶도 전혀 싫지 않다(p.63)고, 그리고 삶이 그다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어쨌든 죽는 것은 항상 나였다, 다만 추론을 하면서 그 대목에 이르렀을 때 약간 곤란했던 것은, 앞으로 살 수 있을 20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어마어마한 흥분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p.159), 당신(사제)이 말하는 신, 사람들이 선택하는 저마다의 삶, 그들이 고른 운명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뭐가 중요할까, 유일한 하나의 운명이 하필 나 자신을 뽑아들어야 했고, 그럼으로써 나와 더불어 무수히 많은 특권자들까지도 한꺼번에 자동으로 선택했는데(p.169), 하고 담담하게 때로는 격노하여 내뱉는 뫼르소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p.s 소설 속에서는 뫼르소의 외모가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죽은 어머니의 친구였다고 하는 토마 페레의 생김새는 굉장히 세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건 우연일까 의도된 것일까.
읽는 내내 갑갑함이 몰려 온다. 뫼르소는 자신의 삶에 퇴로를 만들지 않는다. 물론 뫼르소 잘못이 아니다. 뫼르소는 단지 스스로에게 솔직할 뿐이다. 삶을 포장하는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도덕과 법과 겉을 포장하는 관습?이 가지고 있는 그 부조리에 희생을 당할 뿐이다.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서 부조리와 싸운다고 해야 할까? 이 또한 부조리가 아닌가?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가 뭔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은 부조리에 대한 예시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하여 부조리가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부조리 혹은 삶의 부조리가 웬지 갑갑함과 씁쓸함을 준다.
나는 내 삶을 열심히 살아 왔을 터인데, 끝을 모를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을 터인데 살면살수록 밑으로 가라앉을 뿐, 희망은 점점 멀어질 뿐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뫼르소의 사형대. 내가 뫼르소와 다를 게 뭔가. 부조리다. 살아갈수록 가라앉는 것, 삶.
"그처럼 죽음에 가까이 이르러서 엄마는 자신이 자유롭게 해방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진정 아무에게도 엄마에 관해 울 권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나 또한 엄마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다. ...나는 기호들과 별들로 가득한 밤 앞에 서서 처음으로 세상의 애정어린 무심함을 향해 나 자신을 열었다. 세상이 그처럼 나와 닮았다는 것을...나는 내가 행복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이 혼자라는 걸 보다 덜 느낄 수 있길."
내 미래의 깊은 곳으로부터, 이제껏 내가 살 아온 이 터무니없는 생애 전체에 결쳐, 아직 오지 않았던 세월을 거스르는 어둑한 바람 이 내게로 불어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 큼이나 실감 나지 않는 저 무수한 세월과 함 께 내게 약속된 모든 것들이 그 바람에 쓸려 가며 다 같은 것이 되어 버려.
고등학생이고 학교 독후감 제출할려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재미 있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었네요.그냥 보그냥 보기엔 주인공인 뫼로소가 이해가 안가지만 카뮈의 철학을 공부하고 나니 핵 공감이 갑니다 이 책을 계기로 철학에 대한 흥미가 생겨서 더 많은 공부를 해보고픈 생각이 듭니다.철학에 관심있는분들과 저같은 고등학생 여러분께 완전 추천드립니다. 강추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