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이즈음 나의 일상은 팟 캐스트 듣기와 UMC의 랩으로 바닥까지 치는 암울함을 만나며 '아침을 여는 음악'으로 묘하게도 일치하는 느낌으로 정리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극단적일 수도 있는 바흐의 커피칸타타 BWV 211이 있다. 어수선하지만 나름 머리 속에서 정리되는 것들이 마음으로 들어와 수많은 물음표를 던진다.
이 책을 읽었던 까마득히 지나온 나의 십대 어느 날의 느낌은 그저 뭉뚱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전문학을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자기위안으로 작동했고. 자기미화의 한 부분으로 작용한 힘이었던 것같다. 이 책에서 기억나는 것은 쥘리앵의 죽음 뿐이었고 그 이면에 놓인 것들을 이해하거나 느끼기에는 나의 세상은 너무 작고 단단했다.
주인공 '쥘리앵'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놓인 1830년대 프랑스의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군상들과 현재 이 사회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의 모습과 조우되기 때문이었다. 미스박의 정무수석에 지명된 한 인간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지나온 궤적들은 쥘리엥의 심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나의 상상은 끔찍하다. 철저하게 기획된 출세이기에 그렇다.
한 청년의 개인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부조리한 현실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였나. 만약 쥘리앵의 외모가 주목받지 않았다면 그의 재능과 노력들은 어찌 비추어졌을까. 그의 의지와는상관없이 다가오는 상황들에서 그의 선택을 과연 비난할 수 있는가. 결국 그는 사회의 구조에서 희생당하는 것이 마땅한가. 이런 의문들은 이 시대의 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의 가장이라는 아버지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 현실에서 중시하는 가치로 묵살될 때 한 개인은 어떤 방법을 모색해야 할까.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기만하는 사회구조에서 비껴날 수 없다면 그 구조에서 희생되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나 또한 지나온 그 시간들을 처절하게 지나왔기에 적어도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법치의 의미가 무색한 권력자들의 횡포와 사회의 기득권을 움켜 쥐고 자신들만을 위해 다수의 약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민주주의는 하등의 가치도 없다. 19세기를 지나면서 확연하게 드러난 인류의 시행착오들을 다시 보완하거나 대체할 노력을 하지 않은다면 스탕달의 작가의식은 여전히 현대를 향하고 날 선 눈길을 건네며 우리의 심장을 찔러댈 것이다.
개인적으로 홀로 설 수 없었던 이십대를 꾸역거리며 종지부를 찍고 낯설지만 사회적 시간표를 내 삶에 끌어들이던 '결혼'은 느낌만으로 선택한 감성의 발로였다. 그 느낌들은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렇기에 더 이상은 사회적인 의미가 한 개인을 파괴할 수 없도록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의 선택에는 주체의 힘이 절대적이다. 타자와의 관계 맺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형성되어 지는가에 따라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생각해 보고 그 가치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벗들이 필요하다. 그 벗들은 자신을 올곳이 설 수 있게 해 주는 동력이 될 것이고, 그 힘은 나를 나답게 해 줄 수 있는 시작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작품의 쥘리앵 소렐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으로 다가가는 방법은 출세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에서 강요되는 것일 뿐, 실상 쥘리앵이 바라는 그의 야망은 그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감미로운공상에잠기고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사회적 시선과 상황들은 결국 그를 파멸시키는데 성공했다.
출세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쥘리앵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스스로를 기만해서는 안 되었다. 부당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의 선택은 여전히 사회적 출세에 요구되는 조건들을 자신의 믿음과는 다르게 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스탕달은 이 시대에 주체의지를 잃은 개인의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들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과연 한 개인의 이상과 현실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사실 이 책을 읽은 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중)>을 읽고 두꺼운 책에서 잠시 해방되어 얇고 조금 편하게 넘길 책으로 넘어가려고 생각하던 중이었어요.(아니 고전에서 이게 가능할까?ㅋ) 뭐라도 빨리 이어가야겠다며 가장 빨리 구할 수 있었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는데요. 불륜 이야기라고만 단순히 생각하고 덥석 집어 들었는데, 결국 이 책의 끝을 보고야 말았네요. 네! 단순한 불륜 이야기로 만 보고 시작하시면 안 됩니다! ㅎㅎ
작은 도시 베리에르는 프랑슈콩테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힐 만하다.
이 책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소개된 작은 도시, 베리에르의 시장은 바로 레날입니다. 레날은 왕정파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왕정파는 나폴레옹 시대에 권력에서 한껏 떨어져 있다가 다시 왕정복고 시대가 펼쳐지며 권력을 잡게 됩니다. 이런 레날 시장의 집에 쥘리앵이란 청년(제재소 소렐 영감의 아들)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들어오죠. 문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집 레날부인과 썸을 타다 연인 사이까지 됐다는 겁니다. 레날 시장은 아름다운 아내의 미모에 그녀를 사랑하기보단 그가 가진 권력과 체면에 성을 다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레날부인은 순수한 사랑에 목말라했고, 쥘리앵은 뛰어난 외모와 지적 능력으로 레날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죠. 쥘리앵은 사실 초반에는 레날부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꾼 인물이었어요. 이탈리아 섬 알지 못하는 어느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나폴레옹이 황제로 믿기 어려운 신분 상승을 이룬 것처럼 쥘리앵도 가족들에게도 무시당하고, 가정교사로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현재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했죠. 하지만 레날부인에 대한 사랑은 점차 진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의 점차 대담해지는 사랑은 베리에르에 소문이 나고요. 쥘리앵은 신학교로 도피하게 됩니다. 쫓겨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피라르 신부의 인정과 애정을 받으면서 쥘리앵은 후작의 비서로까지 출세하게 됩니다. 후작의 집에서 머물며 그의 일을 도맡게 된 쥘리앵은 색다른 매력의 도시 파리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자신이 살던 곳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개인적이고 각박한 도시를 경험하면서 외로움을 느낍니다.
전 이 책에서 빅토르 위고가 많이 생각났어요. 빅토르 위고 특유의 위트가 스탕달의 이 소설에서도 보였거든요. 뜬금없이 작품 속에 등장해서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표현은 다른 소설에서도 못 본 특이한 점입니다. 또한, 프랑스라서 그런 걸까요? 최근에 읽은 <파리의 노트르담>의 시대처럼 성당이나 신부의 등장이 잦았어요. 프랑스란 나라에서는 과거 종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 다만 두 작품의 시대는 달랐고요. 빅토르 위고나 스탕달이나 180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라 그렇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봤습니다.
'나폴레옹'이란 인물이 의외로 많이 등장했어요. 도대체 나폴레옹이 어떤 존재이길래? 란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현재도 프랑스 사람들이 애정 하는 위인 중 한 명이 나폴레옹이라고 들었어요. 우리 주인공 쥘리앵도 그의 초상화를 품고 다닐 만큼 존경했고, 그와 같은 삶을 꿈꿨습니다. 프랑스를 잘 모르는 저로선 나폴레옹의 존재감을 새롭게 알게 해준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나폴레옹에 대해선 딱히 더 적지 않겠습니다)
쥘리앵이 나폴레옹을 존경하는 모습과 반대로 그가 전성기일 때 한껏 뒤로 물러났던 왕정파는 나폴레옹에 대한 불만이 컸을 텐데요. 바로 그를 대표하는 인물이 레날 시장이죠. 불같고 꼬장한 그의 성격을 아는 쥘리앵은 한 때 레날부인을 시켜 나폴레옹 초상화를 숨겨야 할 정도였어요. 공화정의 시대에서 나폴레옹의 시대 그리고 다시 왕정복고 시기를 겪은 프랑스는 내외의 전쟁으로 굉장한 분열과 대립이 있었을 텐데요. 또한, 이런 혼란이 가중된 시기에는 신분의 상승을 꿈꾸는 인물과 자신의 권력을 다지고 유지하려는 인물이 충분히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물론 '쥘리앵'입니다. 이런 프랑스 내부의 신분 대립과 갈등을 이 작품에서는 비꼬기도 하고, 거침없이 묘사하며 두 인물을 내세워 잘 보여주고 있어요. 이 책을 단순한 불륜 소설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물들이 완벽한 듯 보이지만, 완벽하지 못한 성정 또한 거침없이 표현해서 인상적이었어요.
인물이 직면한 상황 가운데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해결책이나 행동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갈등하고 표현할 수 없이 쌓인 여러 감정들(두려움, 불안, 탐욕, 위선 등)이 삐죽빼죽 튀어나오는 면면이 어디서 많이 본 모습 같았거든요. 우리 모습과 진짜로 비슷하지 않으려나요? 이런 점 때문에 역시 고전은 고전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요.
레날시장의 경우, 베리에르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저택과 땅을 소유하고 있는 시장입니다. 그는 상류층 집안 출신으로 아름다운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있죠. 보기엔 완벽해 보이지만, 그는 남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입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카리스마 있는 인물도 아니에요. 자기 혼자 소심하게 생각에 빠져 끙끙 앓고요. 소렐 영감(쥘리앵의 아빠) 과의 신경전에서도 확실히 밀려요.
레날부인도 완벽한 미모를 갖고 있고, 세 아이의 엄마로 다복하게 자녀들을 두고 있어 겉보기엔 완벽한 시장댁 부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남편의 사랑이 그녀에게 없었어요. 한없이 외로움을 타는 인물입니다. 그때 쥘리앵이란 인물이 나타나며, 이 여자! 반은 사랑에 미쳐서 삽니다. 쥘리앵과 작당모의를 할 때는 생각보다 빠른 실행력과 비상한 두뇌회전을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도 있긴 했어요. 하지만, 자신의 막내아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려고 하고요. 다시 쥘리앵이 사다리타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와의 사랑에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릅니다.
쥘리앵은 훤칠하며 뽀얀 피부를 가진 지금으로 말할 거 같으면 꽃미남 스타일이죠. 그런데다 그의 명석한 두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자신의 목적이 확고하고, 나름 계획도 있어 완벽해 보이지만,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 어선지 가족들에게 무시를 당한 어린 시절 상처 때문인지 자존심도 강하고 자격지심이 상당해 보입니다. 괜찮은 사람이네 싶다가도, 그의 자격지심의 끝판왕인 모습을 보면 요즘 말로 '찌질하다!'란 평이 절로 나옵니다.
제가 읽은 몇 안 되는 프랑스 소설이었는데요. 프랑스의 당시 전반적인 배경과 역사까지 두루 궁금해지게 하는 책이었어요. 단순한 불륜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갈등까지 인물에 차곡차곡 담아 과감하게 보여준 고전다운 소설이었습니다. 아직 다 읽지도 않았는데, 이 소설에 대해 조급하게 이야기 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적과 흑(하)>가 남아 있어서 더 읽어보고 남은 이야길 더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
I.한 줄 요약
욕망은 진정한 대상으로 곧장 가 닿지 못하고 항상 오조준을 한다.
II.전체적인 소감
[자유롭기 위해 출세를 원했고, 출세하기 위해 위선의 탈을 썼다.
그러나 그 위선의 탈은 쥘리엥의 자유를 박탈했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감옥 안에서 비로소 쥘리엥은 위선의 탈을 벗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
스탕달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듯싶다.
하류 계층의 재능있는 청년이 출세를 위해 질주하다가 추락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구조를 고발하는 소설이다.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지만 현재 대한민국과 무엇이 다른 건지 모를 정도로 우리의 현실과 일치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파리로 온 쥘리엥을 보고 조언해 주는 피라르 신부의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 같은 신분은 대귀족을 등에 업지 않고는 출세할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쥘리엥의 중간쯤 적당히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만약 출세하지 못 할 경우 사람들한테 박해 받을지 모르므로 우러러보게 만들라고 충고한다.
신학교에 뼈를 묻을 작정으로 성실히 일을 했지만 쫓겨날 판이었고 그래서 피라르 신부는 먼저 자리를 내놓았다, 그 당시 저축한 돈도 보잘것없었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라 몰 후작의 호의에 힘입어 그런 곤경에서 벗어났다 그의 지시 한마디로 자신의 앞에 교구하나가 대령되었다
그리고 보수는 과분해서 부끄러울 정도라고 말한다.
쥘리엥이 경거망동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런 긴 이야기를 해준다.
쥘리엥은 기억력이 남달라 성경을 라틴어로 암송할 정도이다.
그의 기억력이 귀족 집안의 가정 교사자리를 마련해 주고 레날 부인과 라 몰양과의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발판이 되었다.
III.인상적인 사건
두 여인과의 사랑 속에서 보여지는 세 사람의 심리 묘사도 인상적이었다.
레날 부인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위한 이유를 찾지만 마틸드는 마음이 움직일 이유가 있어야만 마음을 먹고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최종적으로 쥘리엥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는 레날 부인임을 알게 되고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놓쳤던 행복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토마시가 시골에서 트럭 운전수로 일하면서 느끼게 된 바로 그 자유와 행복이 이것과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피라르 신부의 말처럼 쥘리엥에게는 '천박한 인간의 기분을 거슬러 놓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출세하지 않으면 박해받을 것이기 때문에 출세를 원한다.
천박한 인간의 기분을 거슬러 놓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질주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뛰어난 재능들도 포함한다.
재능은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질투의 원천이기도 하다.
인간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삶을 살기에 자유로운 영혼을 보면 부러워하면서도 질투로 배알이 뒤틀리는 법이다. 뭐 나라고 예외라 할 수는 없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 조건은 바로 의지와 능력의 문제이다. 책임질 수 있느냐라는 능력에 따라서 자유와 방종이 구분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한다.
IV.결론
쥘리엥은 출세를 통해서 남을 지배하거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속한 적들이 침범할 수 없는 산의 정상, 적들의 경멸이든 호의든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이 필요했다
그 곳은 바로 사회의 최상위 계층에 올라야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자유를 갈망했다.
그래서 그는 금전이나 출세가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고래]의 노파가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행위와 같다
자기를 멸시한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 보게 만들기를 원했고 세상을 보아하니 돈 많은 이들을 세상사람들이 경외했기에 돈을 모았던 것이고 노파는 그게 세상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을 모으기 위한 노파의 여정은 다른 사람들과 더 유리된 채 쓸쓸한 최후로 끝을 맺는다.
비극적이게도
<욕망은 진정한 대상으로 곧장 가 닿지 못하고 항상 오조준을 한다.>말과 같이
-르네 지라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가는 중에 그는 위선의 탈을 써야만 했고 이 겉으로 꾸며 보이는 가면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한다.
계산된 행동,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내려 번민하고, 자신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을 의무감으로 하다보니 자신이 추구하던 자유를 모두 잃게 된 것이다.
그냥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잖아 하지만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그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다라는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 욕망하지만 그 욕망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 자유를 끝장내는 것이다.]
삶은 아이러니이다. 무언가를 추구하면 할수록 그것과는 동떨어지게 되는 이런 요지경 같은 세상~
노자가 말한 무위가 이것이 아닌가 살며시 책을 들춰 본다
‘무위(無爲)’로서 어떤 의지나 목적이 없다. 이처럼 도는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 천지만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므로 지치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자기 기능을 발휘하는 생명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세상은 신이 만들었을 리가 없다
광대가 설계하고 원숭이가 만든 시스템임에 틀림이 없다.
나와 당신들은 지금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무언가를 하려 하지 말고 자연스런 흐름에 맡기는 순리에 따라 살고 싶네요
'이걸 또 놈팽이처럼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