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대니얼 호손과 주홍글자에 대한 깊이있는 비평이나 소개는 여러 번역본의 소개글이나 번역 후기에서 읽으실 수 있을 테니 개인적인 소감만 몇글자 적고 말려 한다.
헤스터 프린이 풀어갈 수 있을 깊은 이야기들이 더 있을 듯 했는데 딤스데일 목사가 회개하고 죄의식을 해소하는 과정을 카타르시스를 느끼라며 던져주고 일단락 될 줄은 미쳐 몰랐다.
소설의 서술방식도 옛소설이라 그런지 정언적인 정의가 남발되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거북했다. 물론 내가 읽은 번역본의 번역가를 탓할 문제일지 나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편하게 읽히는 문장은 아니었고 작가의 서술 방식이 참 익숙치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대에서는 그리 큰 윤리적 문제로 치부되지도 않을 문제로 천형이라도 되듯이 형벌을 앓아야 하는 내용도 적잖이 거북했다. 하지만 그 시대 나름의 도덕율과 가치관이 있으니 옛소설은 옛 사고 방식을 대응해 읽어내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불륜이 이토록 큰 천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있었듯 고작 20~30 여년 전만 해도 동성애는 질병과도 같은 처우를 받지 않았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선되는 가치관도 있겠지만 당시대에 절대악처럼 치부되는 도덕율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이 시대 나름의 가치로 인해 이 시대 나름의 주홍글자를 새기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자신이 천형을 앓아야 하던 지역으로 연어처럼 돌아와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내던 헤스터처럼, 이 시대에도 자신의 주홍글자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헤스터가 간음(adultery)의 A에서 angel의 A로 거듭나듯 되살아날 수 있을 시절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예스24의 북켄드 반기결산 선물로 받은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자>입니다. 청교도적 윤리의식이 강하던 미국 초기 이민사회에서 엄금하던 간통죄를 다루고 있어 이미 간통죄가 사문화되고 있는 요즈음 간통에 대한 사회적 규제라는 시각으로만 좁혀 본다면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초에 활동한 작가가 발굴한 18세기의 사건을 토대로 하여 쓴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18세기 미국 이민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쌍벌죄로 처벌했던 간통죄의 특성상 증거가 들어날 수밖에 없는 여성이 상대남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을 닫는 경우, 특히 그 상대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면 어떤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같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린책들에서 펴낸 <주홍글자>에는 ‘세관’이란 제목으로 된 긴 서문이 붙어있습니다. 원래는 하나의 독립적인 자전적 에세이로 쓰인 글이 장편으로 확대된 주홍글자의 서문으로 의미가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작가관을 비롯하여 주홍글자가 탄생하게 된 배경 등을 포함한 호손의 삶의 궤적을 담고 있어 특별한 의미를 둘 수 있겠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는 자기 책을 어딘가에 던져 놓고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을 다수의 독자가 아닌, 동창이나 죽마고우보다도 자신을 잘 이해해 줄 소수의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하고자 할 것(8쪽)”이라고 요약한 작가관에 공감하는 바가 있습니다.
호손은 보스턴의 세일럼에서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 시인 엘러리 채닝, 수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시인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코트의 부친인 교육자 아모스 브론슨 올코트 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그의 작가세계를 완성해갔다고 합니다. 그가 근무하던 세관의 창고구석에 처박혀 있던 서류더미에서 세관검사관 조너선 퓨가 보스턴에 관한 일들을 정리한 자료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여러 편의 작품을 구성하였고, <주홍글자> 역시 퓨가 기록한 헤스턴 프린이라는 여성의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는 것입니다. 헤스터 퓨린은 매사추세츠주의 초창기 시절부터 17세기 말엽까지 살던 인물이었는데, 호손은 남편이 유럽으로부터 건너오지 않은 상황인 유부녀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로 간통죄가 들통나게 되어 처벌을 받게 되는 시점부터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상대를 밝히라는 재판관과 교회측의 강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헤스터는 입을 봉하고 마는데,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이의 미래를 고려했음인지 가슴에 주홍색으로 A자를 새겨 넣고, 형틀 위에 세시간 동안 서서 시민들에게 사건결과를 알리는 처벌과 함께 마을 변두리로 물러나 생활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고 제3자적 입장에서 생각해보더라도 체면이 말이 아니고 시민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명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녀는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여유가 생기는 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결국은 그녀의 가슴에 달린 형벌의 표지가 오히려 그녀 스스로를 구원하여 고결한 경지에 이르도록 만든 동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헤스터가 삶의 위기를 오히려 긍정적인 사고로 전환하여 청교도적 윤리로 편협한 사회에 의연히 맞서는 여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두 사람의 남자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그녀가 형벌을 받는 날 슬그머니 나타난 그녀의 남편은 본명마저도 감추고 로저 칠링워스라는 이름으로 의사로 활동하면서 헤스터의 상대를 찾아 복수하려는 일념을 키워가는데, 결국 그의 삶까지 피폐해지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이야기의 중반이 넘어서야 밝혀지는 헤스턴의 상대는 젊은 목사 딤스데일 역시 헤스터가 형벌을 받은 다음부터 생긴 마음의 고통이 점차 커지면서 몸도 같이 사그러드는데, 로저는 그의 곁에서 치료를 담당하는 한편으로는 심증을 굳히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종국에는 강론을 통하여 “여러분이 존경해 마지않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사람은, 그야말로 타락한 자요 위선자입니다.(180쪽)”라고 고백하기에 이르지만 시민들은 오히려 그의 자아비판을 칭송하기에 이릅니다. 새로운 총독의 취임식날 축하기도를 봉헌한 다음 딤스데일 목사는 헤스터가 섰던 처형대에 서서 헤스터와 그녀의 딸 펄을 불러올리고 시민들에게 진실을 고백합니다. “저를 성자처럼 여겨주신 여러분! 여기 있는 저를, 이 세상의 죄인을 보아주십시오! 마침내-정말이지 마침내!-7년 전에 섰어야 하는 이 자리에, 지금에야 섰습니다. 이곳에, 이 여인과 함께 섰습니다. (…)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글자를 보십시오! (…) 그 낙인은 이 남자에게도 찍혀 있습니다.(314쪽)” 힘든 고백을 마친 딤스데일 목사는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에 가두어 둔 사람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당당하게 죄값을 치룬 사람의 인생이 비교되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간통죄와 그 처벌에 관한 시각을 넘어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같이 올리는 사진은 지난 6월 보스턴 방문길에 본 킹스 채플입니다. 헤스터가 갇혀 있는 감옥이 킹스채플 근처 어디에 있었을 것이라고 호손은 밝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