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까뮈는 말한다.
“철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삶이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책 속 화자가 보여주는 열등감은 희박한 존재감에서 연결된 듯 하고,
그것은 어느 것하고도 연결되어 있지 않는 소외된 영혼의 느낌이며,
삶이 의미없다는 무의식적 제스쳐가 아닐까?
다르게 얘기한다면, 개개인의 존재감은 각자의 삶의 의미속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나 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존감이 감성적인 팽창과 수축의 반복이 아닌,
우리에게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해답으로는 없는 걸까?
아 그것이였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그 후로 잊지 못할 그리고 삶을 꽉 채워주는 그런 해답말이다.
그 해답은 인류의 숫자만큼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짖는 많은 표정들 중에는
이 지하생활자의 모습과 닮은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소외 (신과 그리고 사회와의 소외) 라는 것이
한 개인의 선택과 그가 처한 개별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소외된 채 자신만의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지하생활자의 모습과 독백들은,
나중에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모태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가 다가간 창녀도 도덕적 우월감에서 다가간 듯 하며,
연민과 혐오감을 (그녀의 상황에 대해) 동시에 느끼지 않았을 까 한다.
진정한 마음이 비어있는 텅빈 친밀감함 속에,
자신의 나약한 존재를 꼭 붙든채 스스로를 내어 줄 수 없기에,
그는 그녀가 용기있게 다가갔음에도 밀쳐낸다.
사랑이란 각자의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며,
자신의 사랑은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자존감과 딱 달라붙어 있는 주인공에게,
나약한 자신과 의미없어 보이는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해 보인다.
자신을 부정하기에, 타인도 부정해 버리고 마는 주인공을 보며,
불행한 자신의 상황속에서 송두리째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고 찾아간 여자 주인공은
지하생활자도 자신의 상황만큼이나, 불행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마력이 있다.
§
어떤 사람은 자신만의 비법서로 감춰 놓기 위해 지금의 내 발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첫 번째로 권하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철학과 문체가 가장 강렬하게 잘 보이는 책이기 때문이다. 제법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이 얼마나 많은 작가들에게 전파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문체도 상당한 침식 작용이 들어와 있다ㅎ. 이 책을 두고 심심찮게 내용이 어렵다고들 하는데-최소한 이 책은 번역문제는 아니다-그렇기에 더 읽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내가 이 소설을 왜 읽고 있지?’ -> ‘나는 소설을 왜 읽는 것일까’ 그간의 독서를 되돌아보게 될 것이며(안 하면 안 되는데;) 오기가 아니라 어떤 반성과 공부의 자세로 -> ‘도스토예프스키는 결국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하며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포기하지 마요!).
이 말은 스포일 것도 같지만(입이 간지러워 말하겠다; 메롱), 다 읽고 나면 ‘결국에’ 라는 건 없으며, 한 줄 한 줄 ‘처음부터’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로써 말하는 ‘문학론’이며, 이 책 전체 내용인 ‘인간론’이다.
듣는 자가 원하지 않았던! 스포를 알려줬으니, 좀 아까워하며 쓸만한 정보도 전하겠다.
이 책의 첫 두 줄 …… 나는 자체적 <내가 뽑은 Best 서문>에 넣었다. 이미 그런 시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왜 하려고 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는 소설을 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모방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기존의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잊고 싶지 않아도 대부분! 향기조차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그것은 인생의 불가항력이자 문학의 불가항력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인간이고, 문학은 계속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지하로부터의 수기』, 제1부 지하실, 첫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어쩌면 이제부터 강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첫 문장에 대해서. 이미 그러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슬쩍 같이 웃으면 될 일이다. 앞에서는 그럴듯한 걸 거론해 대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문학은 혁명의 깃발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부끄러움과 병적인 것에 대한, 인간 탐구이자 집착임을. 지금 이 말도 현상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결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저 첫 문장처럼 작가는 혁명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를 가장 앓고 있는 병자이며, 그의 글은 유언에 더 가깝다. 죽은 작가에게서 독자인 우리가 느끼는 바로 그것, 말이다. (*작가-병자설 어떤 철학자(블랑쇼? 벤야민?)가 한 걸로 아는데, 기억이 안 난다-,-a)
나는 작가란 특권적인 직위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런 식으로 강요받았고 학습되어 있지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면 흠……. 그렇게 생각해도 속으로만 생각하면 다행이고(위선적이지만). 자신을 영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을 '쥐'로, 카프카는 '두더지'로, 로트레아몽은 너무 많아! …… 그렇게 말해왔다. 베르베르가 '개미'를 찾았듯이 당신도 당신의 벌레들과 짐승들을 찾게 되겠지. '고양이'를 선점한 나쓰메 소세끼에게 많은 이들이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이럴 땐 동물도감과 곤충도감을 많이 본 사람이 유리한 걸까, 흠……. 아 참, 사물도 있었지. 천운영의 '바늘' 같은. 많네, 뭐. 걱정 없겠어.
모두가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모두가 그랬으면 한다. 어째서 내가 인간인가를, 어째서 너도 인간인가를 알 수 있는, 제법 괜찮은 길이라고 생각한다(돈은 없고 책만 잔뜩 있는 형국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은 글쎄,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다. 물론 과학자보다는 작가가 더 쉬워 보여서 선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ㅎ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성과 과학을 믿지 않았다. 그것을 행하고 거기서 결론을 도출하는 자가 다름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에 반대하고 그것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훨씬 고달파야 할 것이다. 이론의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결론에서 끊임없이 달아나기를. 건투를 빈다.
§§
창밖에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내가 널어놓은 단 하나의 빨래는 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그만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언제가 끝인지 모르는 미완의 끝이다. 언제나처럼.
*
하나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끌어내게 마련이다. 이것이 모든 의식과 사고의 정확한 본질이다.
*
인간은 항상 어디에서나, 그가 누구이든 간에, 절대적으로 이성과 그의 이익이 지시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욕구, 가장 거친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 자신의 변덕, 때때로 심지어는 광기에 달하는 당신의 몽상, 바로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이익 중의 이익이며 이것 때문에 모든 체계들과 이론들은 끊임없이 와해되어 버린다.
그는 병든인간이며 악한 인간이라고 한다. 호감을 주지도 못한다.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의 증오심은 스스로가 악하지 않고, 못된 인간도 될 수 없기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처음에 말한 악한이라는 말은 장난친 것이었다. 그는 그저 병든 인간인 것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악을 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악이라기 보다는 맹수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타인의 맹수성, 그러니까 탐욕과 허위, 교활함 같은 것들이 구역질 나는 것이다. 그런데, 자존심은 강해서 자신을 약올리는 동료들 때문에 수치심을 느껴, 고작 참새나 놀려주고 있다. 스스로가 모순안에 갇혀있는 것 같다. 그래서 건강하게 발산하지 못하니 병이든 것이다. 생각이 많아서 그렇다.
그는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 자신이 벌레조차 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벌레는 탐욕한 동료들이겠지. 그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승진하지 못하는 그를 비웃는다. 그는 동료들의 허위와 탐욕이 구역질 나면서 돈이 없어서 고생한다. 그는 모든 의식이 병이라고 확신한다. 급기야 자기를 비하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이 약자를 놀리는 것도 쾌락을 얻어내기 위함이다. 자신들의 악함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 동료들간의 합의로 방어선을 구축한다. 그는 그런짓이 부정직하다고 느껴, 부족한 쾌락을 구할 길이 없다. 그의 몸은 쾌락을 원하고 있는데 잔인함과 장난기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그는 위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지하실로 도피해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지식은 풍부해서 우월성은 있는데 거들먹거리고 패거리지으며 살지 못하는 성격인 것이다. 동료들에게 모욕받은 그는 복수할 결심을 한다. 그런데 거리에서 순진한 젊은 여성 리자와 만났다. 그녀는 가난한 여성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겁을 주었다. 몸을 팔아야 할 것이라는 둥. 그녀에게 닥칠 미래의 암담함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녀는 그의 학식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에게 의지하려 한다. 그는 무지한 약자를 놀린 것이었다.
집으로 그녀가 찾아왔다. 그는 별로 부자도 아니고 떠들엇던 것 만큼 훌륭한 사람도 아닌데. 그녀의 방문이 귀찮았다. 그는 계속 그녀를 조롱하고 겁을 준다. 그런데 리자는 오히려 그를 포옹한다. 그의 발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불쌍하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녀를 소유하려고 일부러 놀려댄 게 아닌 것 같은데 여성이 너무 착하기 때문일까. 그녀의 순수함을 질투해서 훼손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사랑 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순수한 여성에게도 질투하고 의심하고 복수하는 남자이다. 그녀는 그를 불쌍해 했는데 그는 리자를 질투했으며 놀리고 탐욕적으로 취했다. 마지막에는 지폐를 주며 동료들의 흉내를 냈다. 받은 모욕을 더 약한 순진한 여자에게 풀었다. 지나친 열등감이며 의심이고 질투심이었다. 피에 순응하지 않았던 그.
책은 1부,2부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1부에서 주인공인 화자는 지하에서 자신에 대해 말을 하는데 혼란스럽기만 하다. 독백이지만 타인과 말하듯이 대화를 한다. 자신을 비하 시키는 말도 서슴치 않으며 또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2부에서 시작이 된다. 1부에서는 화자의 내용만으로 도무지 상황을 알 수 없다 그저 평범하지 않는 무엇인가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음을 느끼기만 했다. 그리고 2부에 가서야 자신이 왜 그런 상황이 처해졌는지(?) 대해 설명을 한다. 한 인간이 사회에 적응 할 수 없는 망상으로 오히려 몽상가로 된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지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뒤로 미뤄지는 친구들 마저도 화자를 무시할 따름이다.
많은 책을 읽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버린 남자. 어느 장교와 다르게 자신은 키가 작고 왜소한 체형에 민감함을 느끼며 그 장교조차도 모르는 결투를 하는 남자. 굳이 왜 그렇게 까지 하는 싶지만 이 남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빨려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현실에서는 어느 것도 변하지 않았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 할 때면 동등한 입장이 아닌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생각하는데 이건 자신의 열등감으로 인한 감정이다. 이야기는 어떤 큰 사건을 주지 않는다 아주 일상적인 내용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 친구가(화자와는 가깝지도 친하지도 않는) 멀리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돈이 있어야 하는데 가불을 하면서까지 그 자리에 참석하지만 자신의 모습은 초라하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무엇을 찾고, 인정 받기 원했던 것일까? 오히려 친구들이 외면하려면 할 수록 더욱더 이들 앞에 나타나고 있다. 읽는 동안 어디든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덕이는 모습으로 나 역시 혼란스럽기도 했었다. 그리고 한 여인(리자)앞에 자신이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결국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면서 다시 한번 무너지게 된다.
이 책은 한 인간이 타인에 대한 지나친 예민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으로 인한 비극적인 삶은 더 나아가 타인과의 제대로 된 대화나 진실한 감정, 사랑 등을 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나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한 지하 생활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물론, 다 읽고 나서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 생활자의 심리를 보면서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었다 어느 식으로든 말이다.
은둔형 외톨이, 아웃사이더 라고 하나요. 사회와 격리되고 사람과 접촉을 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소설로 실존주의 소설로 일컬어지는 작품입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중 그의 작품이 많이 있어서 시간이 나는 대로 구입해 읽고 있는 작품입니다. 지하 생활자의 자아와 타인에 대한 지나치게 예민한 의식의 당연한 결과로 초래되는 비극은 그의 인간으로서의 고독을 말합니다.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 지하 생활자는 타인을 진실로 이해하거나 사랑할 수도 없으며 자신을 이해하거나 사랑하는 타인을 갖지도 못하게 됩니다.
지하 생활자의 삶이 비극적으로 흘러간 원인은 그가 책을 너무 많이 읽었으며 따라서 생각하는 데 필요 이상의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입니다. 독서로 인해 자신의 실제의 삶을 망친 더 큰 이유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는 데 있습니다. 현실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책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으려고 했던 지하 생활자는 이로 인해 현실과 더 큰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삶에 적응하는 것이 더욱더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인으로 생기는 열등감, 열등 의식이 우연히 어깨를 부딪친 장교로부터 자신의 키가 장교보다 작고 나약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나는 곱사등이나 난쟁이처럼 의심이 많고 성을 잘 낸다. 그러나 정말로 나에게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 내 뺨을 때리는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도 나는 심지어 이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다. 아마도 나는 이때 내 특유의 쾌락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물론 절망의 쾌락을 말한다. ---p.17
쥐 내면에서 증오감 같은 것은 아마도 자연과 진실의 인간보다 더욱더 깊이 쌓이게 돌 것이다. 모욕을 준 이에세 이와 같은 증오심으로 복수하려는 혐오스럽고 저열한 욕구는 아마도 그 자연과 진실의 인간보다 이 쥐 내부에서 더욱더 추악하게 용솟음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자연과 진실의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 우둔함 때문에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복수를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쥐는 자신의 날카로운 의식의 결과로 이런 경우 정당성을 부여한다. ---p.21
하지만 이 역설주의자의 <수기>는 이곳에서 끝나지 않고 있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곳에서 중지해도 될 것처럼 보인다.---p197
2부 진눈깨비에 관하여 에서는 그가 이십 대에 경험했던 일들을 들려줍니다. 한 장교와 당구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데, 장교는 길을 막고 있는 그를 물건처럼 집어 들어 옆에다 내려놓은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갈 길을 가버리고 주인공은 이 일로 크나큰 치욕을 느끼고 장교에게 복수할 궁리를 시작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냥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를 비방하는 소설도 쓰고 결투를 신청하는 편지도 쓰지만, 둘 다 거기서 그칩니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동창생들 모임에 참석했던 이야기는 어이가 없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교류가 없었던 동창생들이 환송회를 연다고 하자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될 모임에 왜 나갔어야 했는지 그것도 돈까지 빌려 가며 부득부득 그 자리에 나갑니다. 자리가 당연히 어색했을 것이고 모임에서는 같이 어울리지도 못하고 엉뚱한 행동만 할 뿐이다. 주인공은 그들을 쫓아 유곽에까지 따라가는데, 거기서 리자라는 매춘부를 만납니다.
무슨 말을 해도 뚱한 반응을 보이는 리자의 태도에 주인공은 약이 올라, 그녀의 미래에 대해 온갖 잔인한 말을 퍼부어 그녀를 울리고 맙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며칠 동안이나 리자가 찾아올까 봐 노심초사하다가 하인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데, 바로 그 순간에 리자가 그를 방문한다. 그녀가 그런 모습을 목격한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그녀를 또 증오하게 됩니다. 지하 생활자는 수기를 쓰는 내내 매우 불쾌한 느낌으로 회상하며 본인이 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수기는 문학이 아니라 교화시키기 위한 처벌이며 결국 구석에서의 도덕적 타락과 적당한 환경의 결핍,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지하에서의 자신의 과장된 악의 때문에 인생을 소진했는가에 관한 생각을 합니다. 자신은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시대의 철학도 이념도 모두 경멸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가장 경멸하는 자신을 통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어쩌면 삶으로부터 모두 소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