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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 쉬지 않고 일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기 힘든가
EBS 자본주의 제작팀 저/EBS MEDIA 기획
우선 작은 혼란부터 매듭짓는 것이 옳겠다. 나는 『천일야화(千一夜話)』와 『아라비안 나이트』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는데, 전자인‘앙투안 갈랑’의 번안 작품과 후자인 ‘리처드 버턴’의 번안 작품을 비로소 분별하게 되었다. 아랍의 원작 제목은 <1001의 밤>으로 알려졌으며, ‘1001’이라는 숫자를 설명하자면‘끝없는’ 혹은 ‘무한한’ 이라는 의미를 아랍문화권에서는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원작을 최초로 서구세계에 알린 작품이 바로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千一夜話)』이며, 이후 리처드 버턴이 다시금 각색 번안한 작품이 『아라비안 나이트』이고 보면 그 본류가 같은 것이지만, 번안자의 해석의지가 반영되어 구성과 이야기에서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야기의 구성은 1001일 동안 계속되고 있는데, 그런고로 이 상징적 숫자는 아마 영원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말하는 새삼스러움은 지양(止揚)하여야겠지만, 이야기들마다 무수한 허구의 상상력으로 넘쳐나는 데에는 감히 격찬을 자제할 수 없게 한다. 특히 수많은 매일의 이야기들이 완벽한 하나의 통합된 작품으로 엮이는 솜씨는 정말 기막히다고 할 밖에 없다. 전혀 다른 이야기 구조와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매일의 이야기들이 어떤 단절이나 거북함 없이 연결되는 것에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만 같으니 말이다.
화자(話者)는 그 유명한‘셰에라자드’이다. 피겨 스케이트장에 울려 퍼지던 김연아 선수의 배경곡인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곡에 모티브가 된 바로 그 인물이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12~3세기의 페르시아 제국 사산 왕조다. 셰에라자드가 왜 제국의 칼리프인‘샤리아’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의 이유가 흥미롭다.
우애가 깊은 샤리아와 동생‘샤즈난’이 자신들의 왕비가 그들이 부재중에 벌이는 부정(不貞)을 목격함으로부터 야기된 일종의 여성의 정조(貞操)대한 복수가 발단이라 할 수 있다.
시종들과 벌이는 왕비의 난교 장면을 목격한 칼리프의 서슬 시퍼런 여성에 대한 불신이 그것이다. 왕비를 처형한 샤리아는 이후 매일 밤 자신과 동침하는 처녀를 다음날 처형하는 방식으로 부정에 대한 복수 행위를 지속한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신음과 원망의 목소리가 높아지지만 어느 누구도 제국의 절대지존인 칼리프, 샤리아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에 대해 연민과 슬픔을 가진 재상의 여식인 셰에라자드는 칼리프의 왕비가 될 것을 자청하고, 샤리아의 침소에 든다. 그리고 다음날 죽게 될지도 모를 운명의 여인으로서 샤리아에게 자신의 여동생‘디나르자드’와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 받는다.
결국 살아있는 순간의 마지막에 들려주는 것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려주는 것이고, 이 이야기를 같이 듣던 칼리프 샤리아 역시 그 이야기에 매혹되어 셰에라자드의 처형을 하루씩 미루게 되는 구조를 지니게 된다. 셰에라자드의 처형이 미루어지는 것은 곧 제국의 처녀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즉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자체가 이미 생명의 구원이 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야기들이 내재하고 있는 온갖 삶의 교훈과 지혜들이 발산하는 그 풍요로운 아름다움과 덕성은 구원 이상의 가치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신바드나 알라딘, 알리바바 등이 1001일간 펼쳐지는 방대한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진정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연속인데, 이들 유명세를 탄 이야기들 이상의 즐거움과 탄탄한 구성의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질투와 배신과 탐욕이 어우러져 정의의 세계를 더욱 극대화시키는「세 탁발승과 다섯 아가씨 이야기」, 호리병 속에 갇힌 거인정령의 이기심이 다시 자신을 가두게 된다는 우주적 진리의「어부 이야기」, 협력과 화해와 용서, 그리고 배려, 사랑의 모습들이 수놓인「상인과 정령」과 같은 커다란 범주의 이야기 속에 다시 작은 범주의 이야기들이 놓여있고, 바로 매일 지속되는 이 이야기들이 마치 드라마 연속극이 감질나게 다음회로 미루어지듯이 이야기의 다음을 보지 않을 수 없게 할 만큼 기대와 호기심을 연속적으로 자극하며 끝이 없을 듯 계속되는 구조이다.
당대의 이슬람과 이교(異敎)를 비롯해 풍부한 관습과 풍속을 볼 수 있는데, 근친혼에 대한 터부, 여성의 재혼에 대한 의외의 관대함, 그러나 여성의 부정에 대한 엄격함, 신의와 배신에 대한 강경함, 시샘과 질투, 투기에 대한 처벌, 종교적 권위에 대한 지고함, 형제애, 우애, 가족애, 연인의 사랑 등이 마술과 초현실의 세계를 오가며 풍자와 비극, 숨겨진 삶의 긍정성과 진실들을 풀어 헤친다. “당신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었으니...”와 같은 단순한 문장이 품고 있는 삶의 원리를 자각하는 것, 역으로 그 단순동일의 인간 삶의 범주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금기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 그 욕망의 무절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수백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지펴내고 있다. 이제 69일째 밤의 이야기인 1권을 마치면서 도저히 2권, 3권...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지펴진 읽기의 욕망을 끊을 수가 없을 것 같기만 하다...
[My Review MCMXLIV / 열린책들 12번째 리뷰] 우리에게는 '아라비안 나이트'로 익숙하지만 원제는 '천하룻밤 이야기'라는 뜻으로 <천일야화>로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에 논란거리가 하나 있다. '천일'이 千一(1001)을 가리키는 것인지, 千日(1000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어깃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왜냐면 당시 '아랍세계'에서 1000이라는 숫자나 1001이라는 숫자는 그저 '많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수많은 날동안 들려준 이야기'라는 뜻으로 이해하지, 꼭 정확한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천일야화> 속에는 말그대로 엄청난 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단 한 사람의 '서술자(세헤라자드)'에 의해서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전하는 이야기에는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단 한 명의 서술자'에 의해 전해졌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한데' 모은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샤리아 왕의 엽기적인 행각을 멈추게 하려는 세헤라자드 왕비의 지혜가 <천일야화>의 핵심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 책은 18세기 초 프랑스 작가인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다. 이외에도 19세기 영국 작가인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이 쓴 <천일야화>도 있다. 이 두 버전은 각각 다른 소설이라고 불릴 정도로 색다르다 하겠다. 분명 '아랍어로 쓰인 원작'이 존재할테지만, 이를 각각 '프랑스어'와 '영어'로 뒤쳐서 소개할 때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갈랑의 <천일야화>'는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야한 이야기는 걸러내고 교훈적이며 이국적인 정취를 최대한 살려서 썼다면, '버튼의 <천일야화>'는 그야말로 도색(桃色)적인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아서 그야말로 야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천일야화>를 기본적으로 두 가지 버전으로 즐길 수 있지만, 어느 것이 더 원작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나는 '앙투안 갈랑의 책'으로 꼽고 싶다.
애초에 '야한 이야기'는 원작에 담긴 핵심요소다. 왜냐면 샤리아 왕이 자신의 아내가 저지른 난잡한 불륜 때문에 분노했고, 그 때문에 온 왕국의 처녀를 왕비로 삼은 '첫날밤'을 치르고 나서 처형을 해버리는 일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왕의 아내가 정절을 지키지 않은 죄를 애꿎은 왕국의 처녀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는 분명 '샤리아 왕의 명백한 잘못'이다. 이에 세헤라자드 왕비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왕국의 처녀들을 처형하는 '왕의 잘못'을 스스로 깨우치려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그렇다면 세헤라자드 왕비가 이야기를 들려준 것만으로 샤리아 왕이 처형을 미룬 까닭은 무엇일까? 단순히 '이야기'가 재밌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깨닫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의 정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내가 부덕한 짓'을 저지른 것이 핵심이고, '남녀의 성행위, 그 자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자 행복이고,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랍어로 적혀 있는 '원작'에서는 가감없는 성묘사가 드러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 작가인 버튼은 <천일야화>에 담겨 있는 본질적인 '교훈'은 쏙 빼놓고 원색적이고 말초적인 '야한 이야기'만 골라서 노골적으로 추려놓았다. 이런 식이면 애초에 샤리아 왕이 세헤라자드 왕비를 살려줄 이유가 사라져버린다. 아내의 불륜으로 분노한 왕을 달래기 위해서 '야한 이야기'를, 그것도 '천하룻밤'동안 주절댄다고? 네 년의 더러운 생각보따리를 다시는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도록 단칼에 목을 자르리라고 말할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이는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행위 묘사'를 노골적으로 강조하여 '영어'로 뒤쳐낸 오류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프랑스 작가인 갈랑은 <천일야화>에 담긴 핵심요소인 '잘못의 깨달음'에 주목해서 매일밤마다 세헤라자드 왕비가 샤리아 왕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를 전하려는 끝없는 노력이 아주 잘 담겨 있다. 그렇기에 점잖은 문화(?)를 가진 프랑스 국민들에게 노골적인 성묘사는 과감히 삭제하고, 내용을 축약하여 '건전한(?) 내용'만을 골라서 전달하려 했다. 이런 갈랑의 노력을 후대 작가인 버튼도 간파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원색적인 성묘사만 골라담아 추려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허나 버튼의 '야한 버전'도 읽는 맛이 있기는 하다. 건전한 성생활을 즐기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해..쿨럭
각설하고, 갈랑의 <천일야화>는 모두 여섯 권으로 되었으며, 그 첫 번째 책에는 <상인과 정령>, <어부 이야기>, 그리고 <세 탁발승과 다섯 아가씨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각각의 이야기는 모두 별개의 이야기지만, 이야기속의 이야기, 다시 말해 '액자식 구성'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단 하나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 이는 세헤라자드 왕비가 매일밤 '동트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해가 뜰 때까지 이야기를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세헤라자드 왕비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끊어서 한 까닭은 그렇지 않으면 '날이 밝는대로' 샤리아 왕의 아내는 처형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샤리아 왕의 분노로 인한 '법령'이며, 그 집행 또한 샤리아 왕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왕의 분노와 의지를 꺾게 만든 것이 바로 '호기심'이었다. 바로 이 호기심이 '이야기에 담긴 힘'이라는 걸 세헤라자드 왕비는 간파하고 있었고, 이 힘을 통해서 잘못된 법령을 바로 잡고, 다시금 현명하고 사려 깊은 국왕으로 되돌리기 위한 '여인의 지혜'가 발휘된 셈이다.
이처럼 '남녀의 구분'이 명확했고, '왕의 군림'이 강력했던 시절에도 단 하나뿐인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지혜'뿐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교훈은 전세계 '옛이야기'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지혜는 인류의 유산'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글을 통해 배움을 익히고 연구하는 방법으로 세대를 거듭하며 전승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혜와 교훈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속에 녹여내어 스스로 깨우치도록 만들기 때문에 더욱 유익할 수밖에 없다. <천일야화>속에도 명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샤리아 왕은 하루 업무를 진행하기에 앞서 세헤라자드 왕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얻은 '지혜'로 왕국을 현명하게 통치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처음엔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단순한 호기심'에 처형을 하루하루 미루지만,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면서 그 처형은 한달두달 자꾸 미뤄지게 된다.
자, 그럼 계속되는 <천일야화>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다음 리뷰에서 다뤄보겠다.
내기억에 가장 인상깊었던 천일야화는 어릴때 인형극으로본것이다. 어릴때 너무나 신기한 아랍의 이야기들이 가득한 인형극이라 오랜동안 기억에 남았었다.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천일야화를 읽다보니 내 기억속에 이야기와 다른 부분들을 확일할수 있었다. 특히 천일야화는 아랍문학으로 저자가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로 보면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쯤에 해당될것 같다. 앙투안 갈랑은 프랑스의 유복한집안에 태어나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등을 공부했고 능력을 살려 대사의 비서관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아랍의 설화 천일야화를 번역해 1704년에 유럽에소개를 한다. 그런데 앙투안 갈랑은 자신의 번역에대한 자부심이 대단한것같다. 왜면 책의 서문과 본문을 읽다보면 번역에대한 아랍과 유럽의 문화적 차이에대한 해석에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페르시아의 사산왕조에 우애가 좋은 태자와 왕자가있었다. 왕이죽고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게된다 태자는 자신의 왕국을 둘로나누고 동생에게 통지를 하게한다. 세월은 흘러 형 샤리아왕은 동생이 보고싶어 동생 샤즈난은 형의 초대를 받아들여 여행을 떠나기로한다. 샤즈난은 여행첫날밤 사랑하는 아내가 보고싶어 몰래 왕궁에 들어왔다 자신의 신하와 부정을 저지르는 왕비를 발견고 샤즈난은 두사람을 처단한다. 형 샤리아왕은 동생을만나 기쁨을 나누지만 우울해하는 동생을위해 사냥을 제의하지만 동생은 왕궁에 남고 우연히 형수인 왕비의 부정을 보고 세상에 모든 여자는 부정한 여자라는 생각을한다. 문제는 동생 샤즈난이 샤리아왕의 성화에 자신이 본걸 말하고 두사람은 확인까지 한다. 샤즈난은 자신의 왕국으로 떠나고 샤리아왕은 다시는 여자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왕비를 맞이하여 하룻밤을 보낸뒤 죽이기 시작한다. 신하와 여자들은 공포에 떨게되고 재상의 딸 셰에라자드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왕비로 보내달라고 한다. 샤리아왕과 셰에라자드는 첫날밤을 보내게되고 이때부터 천일동안 셰에라자드가 샤리아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가 궁금한건 천일동안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대단한 모험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비슷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천일동안 들려주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아직 알지 못한다 천일동안 이야기를 다 들은 샤리아왕이 셰에라자드를 어떻게할지 너무너무 궁금해진다. 천일야화는 단순한 재미를위한 이야기라고 치부할수 없다 신비한나라 아랍의 문물과 그들의 문화를 들여다볼수있는 귀한 자료라 할수 있다.
필자가 지도하는 <서사분석 실습과정> 수강생들과 천일야화를 읽고 토론했다. 그동안은 천일야화에 관한(about) 이런 저런 소문을 들었다면 이번 기회에 천일야화를 통과하여(through)보기로 했다. 함께 본문을 읽으며 구조를 분석하는 가운데 이야기 이면에 흐르는 삶의 철학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다. 천일야화는 이야기 이상의 삶에 대한 철학, 특히 이야기와 삶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발견한 내용들을 여기에 적어두고자 한다.
1. 부분이 전체의 구조를 반복하는 프렉탈 구조
자연세계에는 프렉탈 구조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눈송이의 모양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면 부분이 전체의 구조를 꼭 닮아 있다. 그 부분의 부분 또한 전체적인 구조를 무한히 반복하는 신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프렉탈 구조라고 부른다. 천일야화의 텍스트 구조는 프렉탈 구조를 닮아있다. 본문에서 일차적인 화자는 셰에라자드이고 1차적인 수화자는 동생 디나르자드이다. 물론 2차적인 수화자는 자신의 아내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결혼한 후에 하룻밤을 자고 처형하는 샤리아 왕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왕과 결혼을 자처한 셰에라자드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왕의 마음을 변화시켜 제국의 뭇 처녀들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 또한 구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왕의 나쁜 결정에 대해서 직접 대놓고 훈계를 한다면 더 큰 반발을 사고 말 것이다. 셰에라자드는 지혜로운 여인이어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왕을 설득하는 대신 이야기의 화자의 입을 빌려서 은근하게 자기 욕망을 표현한다. 그런데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화자들의 운명 또한 꼭 자신을 닮아있다. 그들 또한 억울한 일을 당하여 죽음에 직면하는 데 그럴 때 마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위기에 처한 등장인물을 돕는 또 다른 화자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처형자의 마음을 돌이킨다. 이렇게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서너 겹 정도 깊이로 들어가면 하나의 서사 단위(클러스터)가 완성되고 다른 날에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2.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통한 설득전략
세상의 모든 여인을 불신하고 결혼한 다음날 아내를 처형하는 샤리아 왕과 셰에라자드는 자원하여 결혼한다. 하지만 그녀가 순교자가 되거나 다른 처녀들을 위한 희생양이 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왕을 변화시킬 자신과 용기는 물론 치밀한 전략과 기술을 지닌 여인이다. 그녀는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셰에라자드는 왕과 결혼하면서 동생 디나르자드와 마지막 밤을 함께 지내고 싶다고 요청한다. 여인들에 대해서 마음이 굳게 닫힌 왕이었지만 왕비의 마지막 소원마저 물리칠 만큼 모질지는 않았다. 셰에라자드는 동생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나 맡기는데 새벽녘이 되면 먼저 일어나서 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하여 공식적인 수화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일야화는 다음과 같은 후렴구가 1001일동안 지속된다.
“이 대목에서 밝아 오기 시작한 아침의 빛은 셰에라자드에게 침묵을 강요했고, 디나르자드뿐 아니라 샤리아게도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은 강한 욕망을 남겨 놓았다. 그래서 이 왕은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은 강한 욕망을 남겨 놓았다. 그래서 이 왕은 다음 밤에 계속하여 듣겠노라고 마음먹었다. 다음 날, 디나르자드는 어제 시작한 이야기를 어서 듣고 싶은 마음에 일찍부터 잠에서 깨어나 왕비에게 말했다. ‘언니! 제발 부탁이에요! 만일 자고 있지 않으면 아무개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 주세요.’ ‘곧 알게 될 거야!’ 셰에라자드가 대답했다. ‘그러니 내 이야기를 들어보렴.’ 그리고 즉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 이런 이야기의 구조를 만듦으로 인해서 샤리에 왕은 왕비인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직접 대면해서 듣는 대신 두 자매가 하는 이야기를 관객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 셰에라자드의 탁월한 지혜가 있는 것이다. 권위 있는 사람들일수록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왕비의 불륜을 목격하여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 대해 철저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샤리에 왕에게는 더욱 그렇다. 셰에라자드는 왕의 이러한 심리를 이미 꿰뚫어보고 간접적인 소통의 구조를 만들어 왕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라는 옛 속담처럼 누군가 천 날하고도 하룻밤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내면에서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바로 이점이 셰에라자드의 아버지와 그녀가 차별화 되는 점이기도 하다. 왕의 아내를 매일 구해다 주는 악역을 담당해야했던 대재상은 자신의 딸이 왕과 결혼하겠다고 자원했을 때 그녀를 설득하려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딸의 마음을 전혀 돌이킬 수 없었다. 아예 너를 설득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전제하고 직접적인 대면관계에서 이야기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야기가 재미 있어도 대놓고 윽박지르는 용도로 활용한다면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셰에라자드의 전략은 효과가 있었을까? 갈랑의 <천일야화> 1936쪽(6권)에 보면 결말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술탄은 그의 아내 왕비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르지 않는 기억의 샘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솟아나와 매일 밤 그로 하여금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천진한 오락을 즐기는 가운 어느덧 천 하루의 밤이 흘러갔다. 이 오락은 여인들의 정절에 대한 술탄의 고약한 편견을 누그러뜨리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정신은 몹시 온화해졌다. 이제 그는 셰에라자드가 얼마나 훌륭하고 지혜로운 여인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또한 그녀가 보여 준 용기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다음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두 사람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옛 이야기의 결말과 같다.
3. 이야기가 곧 삶의 본질이다.
천일야화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야말로 삶이 지속될 수 있는 원동력임을 어떤 철학적인 사상보다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셰에라자드의 운명은 그녀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에 달려있다. 그처럼 많은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지어낼 수 있었을까? 본문은 두 가지 힌트를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첫째는 그녀가 대단한 독서가임을 알려준다. 동서양의 책을 서책을 두루두루 섭렵했다는 것이다. 즉 독서의 힘이다. 둘째는 그녀의 가정교육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인 대재상이 셰에라자드를 설득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본래 건강한 집안은 이야기가 풍성한 특징이 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내 삶의 이야기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면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모두 억울한 일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이야기 하는 능력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한다는 점이다. 이는 셰에라자드 자신의 이야기 이자 오늘을 천일야화를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4. 주된 공간의 상징적 의미
천일야화의 공간을 살펴보자. 거지적인 관점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인데 구체적으로는 인도다. 왜 인도일까? 인도는 인류의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로 유구한 역사와 다양한 신들이 존재한다. 그 신들에 얽힌 수 많은 신화들이 존재한다. 즉 이야기가 풍성한 나라이다. 오늘 날 헐리우드와 필적할 만한 곳이 발리우드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다시 인도에서 술탄이 거주하는 궁궐, 궁궐에서도 왕이 잠을 자는 침실로 좁혀진다. 만약 집이 한 사람의 내면 세계를 상징한다면 침실은 무의식의 영역을 상징할 것이다. 의식의 세계는 자아와 초자아의 감시를 끊임없이 받기 때문에 강력한 자기방어기제가 작동한다. 따라서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감추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표현해야한다. 하지만 침실은 그럴필요가 없는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이다. 옷을 입어도 되고 벗어도 괜찮다. 셰에라자드가 왕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선택한 공간이 바로 침실, 즉 왕의 무의식의 세계다.
샤리에 왕의 나쁜 습관을 변화시키는 데는 정치적인 접근도 있을 것이고 그를 시해하는 극단적인 방법도 있을 것이다. 데모를 하거나 국제적인 인권단체의 힘을 빌려서 압력을 넣는 것은 어떨까? 물론 그런 방법도 가능하겠으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영화 <인셉션>이 생각난다. 사람의 무의식에 접근하여 어떤 생각을 심는다는 내용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꿈의 세계로 들어가야한다. 꿈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장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셰에라자드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안다. 천 하루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내밀한 침실에서, 완전히 방어기제를 해제하고 들었다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 이영식
http://www.bibliotherapy.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