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eview MCMXLIX / 열린책들 17번째 리뷰] 드디어 다 읽었다. 숨가쁘게 읽는 바람에 '책의 진수'를 제대로 음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천일야화>를 '완독했다'는 뿌듯함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이 그닥 벅차오르지는 않았다. 왜냐면 모처럼 완독했는데 그 누구와도 <천일야화>에 대한 담론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아무도 <천일야화>를 완독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주변엔 말이다. 이게 '고전명작'을 완독한 이들의 고독감이다. 누구나 제목만 대면 단번에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렇게나 유명한 고전을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느껴야만 한다. <알라딘과 요술램프>라는 제목만 들어도 그 내용까지 다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작품이 <천일야화>속 이야기의 일부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더구나 8권(버튼판 <천일야화>)의 분량이라고 하면 읽기도 전에 거부감을 표하곤 한다. 이 책은 6권(갈랑판 <천일야화>)으로 분량이 조금 더 적으니 권해봐도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 뿐이다. 막상 읽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고 읽을 수 있는데 왜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사실, 우리 나라에 <천일야화>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이 엮은 10권 분량의 <천일야화>가 먼저 소개되었다. 책 분량의 방대함도 유명했지만 내용이 '난삽한 성행위 묘사'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도 꽤나 유명세를 높였다. 그런 까닭에 <천일야화>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소설로 '청소년필독서' 목록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음에도, 노골적인 성묘사가 가득했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권장도서'가 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도 낯뜨거운 대목이 담겨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도서관'에서 추방시켜야 하고, 청소년권장 도서목록에서도 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것이 뉴스를 장식하지 않았던가. 버튼판 <천일야화>도 딱 그런 분위기였다. 당시엔 뉴스에 오를 정도로 이슈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학교선생님도 <천일야화>를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권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서른살이 넘어서 버튼판 <천일야화>를 처음 접했지만, 2권을 넘기지 못했다. 이건 뭐 이야기속에 야한 이야기, 그속에 또다른 야한 이야기가 멈추지도 않고 계속 이어졌기에 도저히 책장을 넘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럴 정도였기에 그 누구도 당시 <천일야화>를 '완독'했다는 자랑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유명한 책을 알고 있다는 정도로 점잖게 애둘러서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천일야화>는 어른들만 읽을 수 있는 '성인용 고전'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애초에 '버튼판 <천일야화>'가 나오기 전에 프랑스 작가 '앙투안 갈랑'이 엮은 <천일야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버튼조차 '갈랑판 <천일야화>'를 참고해서 자신의 책을 엮었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원본'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갈랑판 <천일야화>'가 뒤늦게 출간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천일야화>는 '야화'라는 이미지로 굳어서 '야한 소설'로 이해하고 있었고, 청소년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건전한 내용'으로 점잖은 '갈랑판 <천일야화>'도 도매금으로 넘겨짚어서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외면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갈랑판 <천일야화>'가 소개된 이후에는 하릴없이 난삽한 낯뜨거운 묘사를 싹 걸러낸 '단행본 <천일야화>'가 많이 출간되었다. 어린이책으로 출간된 <천일야화>도 모두 '갈랑판본'으로 아주 건전하고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학부모들께서 자녀에게 <천일야화>를 읽혀주고 싶다면 책의 저자가 '앙투안 갈랑'인지 먼저 확인하면 된다. 혹시라도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이라고 적혀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성인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기적으로도 '갈랑판본(프랑스어)'이 18세기에 만들어졌고, '버튼판본(영어)'이 19세기에 출간되었다. 애초에 '아랍어'로 적혀 있는 '원본'은 따로 없고, '출처'도 불분명할 정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아랍어'에 정통한 앙투안 갈랑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고, 흩어져 있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천일야화>라는 이름으로 출간을 했고, 이 책을 다시 중동을 비롯해서 전세계로 수출하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은 이런 '갈랑판본'을 참고로 하여, 자신이 직접 찾은 '천일야화'의 이야기를 더하고, 여기에 '낯뜨거운 묘사'까지 잘 버무려서 또 다른 <천일야화>를 내놓았다. 이것이 '영문판'으로 소개된 덕분에 전세계로 빠르게 퍼뜨려졌고, 우리 나라에서는 바로 이 '버튼판본'이 먼저 소개된 셈이다. 그래서 두 개의 '판본'을 모두 읽은 사람은 이 책들이 서로 '같은 책'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딴판'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헤라자드가 샤리아 술탄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이야기 설정은 '같지만', 그밖의 이야기 순서라든지, 심지어 이야기 내용까지 사뭇 다른 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읽어보면 알 게 된다. '버튼판본'보다 '갈랑판본'이 훨씬 읽었을 때 감동이 더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순히 내용이 '점잖치 못하고', '점잖고'의 차이만 보이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서사 방식 자체가 완전 다르다. 버튼판본은 '음담패설'을 읽는 듯 시시껄렁한 시정잡배가 들려주는 분위기가 연출된다면, 갈랑판본은 아버지가 침대맡에서 어린 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사랑스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같은 제목인데도 이토록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버튼판본'은 <아라비안 나이트>(동서문화사)로 검색을 해야 찾을 수 있다. '성인용'이긴 하지만 읽을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감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덜 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야한 고전소설'만 따로 골라서 소개를 해드려도 좋을 듯 싶다. 사드 백작의 소설들이나 <데카메론>을 비롯해서 '버튼판 <아라비안 나이트>'도 말이다. 점잖치는 않지만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많다. 왜 그런 비평을 했는지 '공감'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뭐, 나중의 일이고. 이번 기회에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완독할 수 있어서 기뻤다. 언젠가 <천일야화>를 다시금 소개하는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셰에라자드가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수많은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마치 '온세상 거의 모든 이야기의 원조'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것이다. 강추한다.
천일의 밤이 휘리릭(?)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매일밤 들려준다면 새벽이 오는 것이 못내 아쉽지 않을까? 당대의 유명한 작가들이 <천일야화>를 쓰고 싶어한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형식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이슬람 사회의 모습을 곳곳에서 만날수 있었다.거기에 더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도 비춰지게 만든 놀라운 힘.이것이 아마도 고전의 힘인 듯 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장치들을 거둬내고 읽다 보면 이야기 에서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물론 화려한 마술과 정령들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늘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결말 역시 상투적이란 느낌보다 므훗한 미소가 따라오게 했다.몇 몇 이야기가 살짝 싱겁기도 했지만. 6권에서 만난 '막내 동생을 질투한 두 자매 이갸기'는 그리스 신화를 떠오르게 했다.문득 어느 나라든 신화가 갖는 특징이란 것이 비슷하구나 싶다.결국 사람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이란 것이 닮아있다는 것일 테고.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계속 진행중일 수 밖에 없는 것인 듯 하다.그러니 인간이란 존재가 한없이 약하기만 한 존재인 것인지도. 알면서도 막상 선을 넘지 못하는,그래서 늘 어느 만큼의 고통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거울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면 더이상 전설은 존재하지 않거나,다른 형식의 이야기가 생길테니까.
'날으는 양탄자'이야기가 굉장히 긴 이야기 인 줄 알았는데, '아메드 왕자와 요정 파니-바누 이야기' 편에 실린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천일야화를 통해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정리해 보면 '사랑'과 질투' 혹은 '욕망''종교'등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재미난 점은 사랑 속에 질투와 욕망이 함께 담겨 있고,정치가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사랑에 관해서라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니,재미나게 읽을수 밖에 없었고, 정치를 다룬 장면들,특히 '군주'로서 가져야 할 소명들에 관한 표현 하나하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랑스러운 셰에라자드여! 정말이지 그대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끝없이 흘러나오는구려! 그대는 참으로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해주었고 나의 분노를 누그러뜨려 주었소.나는 그대를 봐서라도 내가 정한 그 잔혹한 법을 기꺼이 포기 하겠소.(...)그대가 아니었다면 내 원한으로 인해 숱한 여인이 희생될 터였기 때문이오" /1937
정치인을 풍자하는 글이라든가 그림을 그린다고 명예죄로 고소할 생각한 하지 말고,왜 글이,그림이 나를 풍자하게 만들었을까를 고민해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드디어 마지막 권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을 줄 정말 몰랐네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사람이 썼을까요
다음은 기억에 남는 문구 입니다.
인도의 술탄은 그의 아내 왕비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르지 않는 기억의 샘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솟아나와 매일 밤 그로 하여금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천진한 오락을 즐기는 가운데 어느덧 천하루의 밤이 흘러갔다.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0533&cid=40942&categoryId=32174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76279&cid=60621&categoryId=60621
마지막 6권을 읽은 다음의 기분은? 어떻게 다 읽었다는 안도감이 앞선다. 과연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컸는데, 생각보다 재미나게 읽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억지나 의무가 아닌 재미를 느끼며 읽어 기분 좋았고. 파울로 코엘료가 ‘연금술사’에서 변주한 이야기도 접하게 되어 원래는 이런 이야기였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고.
6권도 앞선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진 않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고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마치 술탄이 느끼는 그 기분을 마찬가지로 갖게 해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은 이야기도 결국 끝이 나고 그 마무리 이후 어떤 식의 결말을 맞이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도 직접 읽게 되니 조금은 다른 기분이 들게 된다.
마지막 권 끝자락에 넣기보다는 반대로 1권 가장 앞선 자리에 놓는 것이 더 알맞을 것 같은 번역자의 해설은 그런 점 때문에 아쉽긴 하지만 이 이야기가(혹은 앙투안 갈랑이) 어떤 위치-의미가 있는지를 무척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아직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해설부터 먼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천일야화>는 결국 앙투안 갈랑의 작품이며, 아랍 문학의 걸작이 아닌 프랑스 문학의 걸작이다>라고 주장한” 이유와 “동방에서조차 은폐되고 조각나 흐릿한 실체에 불과하던 <천일야화>에 앙투안 갈랑은 명확하고도 결정적인 형태를 부여하여 전 세계 독자들 앞에 내놓는다. 잠들어 있던 <천일야화>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은” 앙투안 갈랑의 탁월한 재능-노력-능력을 잘 알려주고 있고,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 속에서는 넘치는 스릴과 호기심을, 끊임없이 등장하는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 속에서는 순수하고도 솔직한 열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힘차게 뛰고 있었던, 그리고 여전히 뛰고 있는 인간 마음의 진실인” 점을 말하며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도 강조해주며 이야기 자체도 관심 가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어떤 식으로 삶을 얘기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함을 놓치지 않고 있다.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가 지니는 중요성과 특별함을 생각하며 서두르고 급하게 읽은 그의 이야기를 잠시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