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인 저에게도 그리스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은 매우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전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카잔차키스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안소니퀸 주연)와 최후의 유혹은 서양영화로도 제작이 될정도로 유명합니다.
처음에는 구입을 망설였지만 읽어보니 종교을 떠나 잘 구입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에 초월적인 존재로써 인간을 죄업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려는 예수
카잔차키스의 다른 책도 모두 읽어보아야 겟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도 같이 보면 훨씬 이책에 대한 이해가 빠를것으로 봅니다.
지난 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서 열린책들에서 나온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30권을 모두 구매해버렸다. 하지만 전집을 구매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집은 전시용이 되었고, 매번 전집을 볼때마다 읽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이게 했다. 심지어 지금은 처음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뭘 읽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올해에 들어 특별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지만, 니코스카잔차키스 전집을 정복하겠다는 다짐이 있었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지금 이 글이다.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도교의 나자렛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의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성경에 관심이 많고, 성당에 다닐지 고민을 하고 있던 나에게 있어, 예수의 생애를 그린 소설은 단물같은 책이었다.
예수는 선지자, 즉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메시아,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혁명가들을 처형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였다. 그가 그러한 배신행위를 하게 됀 배경에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예수의 자신을 메시아로 선택한 하느님에 대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열심당원(이스라엘 해방을 위해 모인 과격주의자 모임)의 십자가를 전달해 주고 그의 처형을 도우면서, 열심당원의 어머니가 예수도 똑같이 십자가에서 처형되리라 하는 저주를 듣고 큰 죄책감에 휩싸인다. 저주는 예수의 눈에만 보이는 환영으로 따라다니며,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세에서 벗어난 사막의 수도원으로 길을 떠난다.
사막의 수도원에 이르는 길에서, 들른 막달라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지옥에 빠진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큰 죄책감과 사랑을 느낀 그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거부했던 메시아의 의무를 받아들인다. 한편 열심당원의 일원으로서, 이스라엘의 배신자인 예수를 죽이기위하여 사막의 수도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대장장이 유다는 그를 만나게 되지만, 그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자신이 실수라도 하여 세상에 도래한 메시아를 죽일수도 있다는 염려에 예수를 지켜보기로, 그래서 예수의 가장 첫번째 일행이 된다. 예수는 물론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인것을 몰랐다. 예수는 자신의 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뿐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부,보부상,구두장이,열심당원 등 우리가 예수의 12사도라고 일컫는 제자들을 얻게 됀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 모두, 뿐만아니라 로마인까지 모두 한 형제이며 서로에 대한 사랑만이 낙원으로 가는 방법임을 설파한다. 하지만 로마에 대한 반발심이 극에 달했던 그 시기에 그들은 배척을 받게 돼고 열심당원이었던 유다는 물론 예수 그 자신도 자신을 의심하게 됀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밝혀 주리라 믿고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게 된다.
세례자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해주면서 일어난 기적을 통하여, 그가 메시아임을 알게되었고 하느님이 이 세상의 종말을 원하고 있음을 전한다. 세상은 이전 소돔과 고모라 시대와 같이 타락했으며, 하느님은 이 세상을 전부 불태워 버리고 그 재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의 거름이 되게끔 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같은 말을 믿지 못하고, 하느님과 대면하기 위하여 홀로 사막으로 떠난다. 그는 사막에서의 시련을 통하여 기적의 권능을 얻고, 자신의 의무가 모세와 같이 두번째 불의 홍수에 대비하여 방주에 태울 사람을 모으는 것이라고 알게 됀다.
방주를 타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필요했다. 아픈 자를 고쳐주는 기적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세상인 천국에 대한 얘기를 해주지만 진정으로 깨어나는 이는 드물었다.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마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권력다툼을 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좌절한다. 그러한 예수에게 하느님은 사막에서 먹이를 찾지못하고 죽은 흑염소의 시체를 발견하게 해준다. 흑염소의 목에는 사람들의 죄를 쓴 목걸이가 가득 걸려있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마다 자신의 죄를 쓴 나무판을 흑염소 목에 걸어 사막에 내쫓아 아사시킴으로써, 흑염소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을 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는 그 시체를 통하여 앞으로의 멸망에 있어, 인간 모두를 구하는 방법은 자신이 모든 이들을 위한 흑염소가 돼는 것임을 알게 돼고, 그 것이 하느님이 자신을 아래로 보낸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는 고뇌한다. 자신의 죽음이 모두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는 하나, 한 사람의 인간인 그에게 있어 죽음은 너무나 무섭고 죽기까지 겪는 고통 또한 견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우둔하고 두려움 많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측은함을 느낀 그는 결심을 하고 가장 믿는 제자인 유다에게 힘든 부탁을 하게 된다. 유다는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지금은 메시아로서 믿어 의심치 않는 그의 스승을 위해 배신이라는 죄업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자신이 원하던데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다.
십자가에 매달려 실신한 예수는 환상을 보게 됀다. 일어나보니 자신의 몸엔 아무 상처가 없고 십자가에 매달린 일은 모두 꿈이었던 것이다. 초록색 날개를 가진 수호천사가 나타나, 예수를 지켜주기 위하여 자기가 왔다고 알린다. 그는 예수를 막달라의 마리아에게로, 이끌어 여체의 쾌락을 맛보게 해주며 속세에서 순간순간의 쾌락이 혹은 행복이 바로 하느님이 말하는 천국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를 마리아,마르타 자매에게 이끌고 예수는 그들과 가정을 이루며, 행복한 인생을 보내게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찾아가게 하고,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인생을 망친 사기꾼 그리고 배신자라고 하며 원망한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며 실신한 예수가 잠에서 깨어나는데,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큰 안심을 느끼며 여기서 소설은 끝나게 됀다.
소설 속 예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려져, 이 책을 예수의 신성을 훼손했다며 당시 기독교에서 금서로 지정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 뿐만 아니다. 예수의 사도로서 순교를 두려워 하지 않던 제자들은 모두 겁쟁이에 사기꾼이며, 오히려 사람들이 배신자의 대명사라고 일컫는 유다가 가장 신념있고 당당한 위인으로 그려져있다. 카잔차키스는 경외의 대상인 예수를 투쟁하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현대인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게 해주었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에 있어, 예수의 이적행위는 탐구의 대상일뿐 경외심이나, 믿음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투쟁하는 한 인간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 세상 사람들의 죄를 어께에 얻고 희생한 그 모습이 더 인간적이고 존경심을 가지게 했다. 카잔차키스는 투쟁하는 인간, 당당한 영웅의 모습을 선망하고 그러한 생각은 소설 속 내용에서 두드러진다. 후반 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보는 환상 속에서, 많은 자식과 가정을 가진 예수는 녹색의 날개를 가진 수호천사, 사탄에게 자신이 세속의 쾌락에 묻혀 살았지만 자신의 날개, 곧 자신의 영혼은 쾌락에 물들지 않았다며, 자신한다. 하지만 이를 본 사탄은 그의 영혼의 존재 여부마저 부정하며 비웃는다. 또한 배신자라고 자신을 욕하는 유다 앞에서 그는 속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날개마저도 떼어버려야한다고 우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환상에 빠지기 전 그는 이땅에서 삶이 의미하는 건 빵을 먹어 그것을 날개로 변형시키고, 물을 마셔서 그 물로 날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날개란 하늘, 곧 천국으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교회를 다니거나 기도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닌 투쟁을 통하여 얻는다고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뭐를 위한 투쟁인가? 자신의 자유를 위한 투쟁, 그리고 약자의 자유를 위한 투쟁,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한 투쟁 등 모든 선을 위한 투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을 읽으며, 처음으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고대 사람들과 달리, 현대인은 안전한 생활에 익숙하기에 죽음은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죽음은 막연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요즈음 하게됀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또한 한정된 삶과 필연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하였음을 알게 돼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의 삶, 죽음에 대한 투쟁을 보면서 방황하던 나는 인간적 동질감을 느꼈고, 나의 나 자신에 대한 투쟁에도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투쟁의 대상을 사회적 약자에게까지 넓혀주어 예수에게 감사하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교를 믿게끔 만드는 건 힘들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실상 해당 종교의 신이 말하는 바대로 살겠다는 맹세이기도 하고, 해당 신의 신성을 인정해 내 마음속에 새기고 온 만물의 양태를 신의 뜻으로 돌리겠다는 맹세이기도 하다. 그런 맹세를 하게 만들어 종교를 갖게끔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결국 "신성"을 어떻게 각자가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본 작품을 그냥 읽는다면 예수의 신성함을 저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들이 볼 때는 아마 이게 무슨 소린가하고 분노를 느낄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성함을 보여준다는 것이 꼭 기적을 행하고, 맨날 좋은 말만 하는 것을 늘어놓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다. 도리어 카잔차키스처럼 신도던 아니던간에 인간적인 예수의 삶에서, 그도 사람의 삶을 살았고 온갖 시련을 겪고서 메시아가 된 것에서 신성함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였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자가 되기까지의 인간적인 고뇌와 성찰에 대한 소설입니다. 당연히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한 하느님의 경건한 아들인 예수님이 아니시죠. 이 글을 쓰고 나서 작가는 카톨릭이나 기독교에게 탄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내용 자체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여 이단으로 몰렸던 아리우스파적인 생각이니 그럴만도 하다 싶네요. 재밌는 것은 저같이 종교랑 별 관계 없는 인간들이 봤을 때는 이러한 시각이 훨씬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플로베르가 그랬잖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냥 하늘에 계시라고, 우리는 여기에 있겠다고. 너무 신성하면 감동이 없거든요.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 하니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카잔차키스의 작품은 시적이고 아름답고 매우 감각적입니다. 이 책에도 여전히 그런 특성이 잘 살아나 있습니다만은 그리스인 조르바나 영혼의 자서전처럼 갓 잡은 생선이 힘차게 펄떡거려 잡은 사람이 어쩔 줄 모를 정도로 버거운 느낌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종교적이다 보니 조금은 정선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책이 남아 있으니 아껴서 또 읽어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