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교를 믿게끔 만드는 건 힘들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실상 해당 종교의 신이 말하는 바대로 살겠다는 맹세이기도 하고, 해당 신의 신성을 인정해 내 마음속에 새기고 온 만물의 양태를 신의 뜻으로 돌리겠다는 맹세이기도 하다. 그런 맹세를 하게 만들어 종교를 갖게끔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결국 "신성"을 어떻게 각자가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본 작품을 그냥 읽는다면 예수의 신성함을 저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들이 볼 때는 아마 이게 무슨 소린가하고 분노를 느낄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성함을 보여준다는 것이 꼭 기적을 행하고, 맨날 좋은 말만 하는 것을 늘어놓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다. 도리어 카잔차키스처럼 신도던 아니던간에 인간적인 예수의 삶에서, 그도 사람의 삶을 살았고 온갖 시련을 겪고서 메시아가 된 것에서 신성함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를 메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예수에게 최후의 유혹이 찾아 온다.
의식이 희미해져 정신을 잃은 그가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존경받는 노인으로 살았음을 알아차리고 기뻐한다. 가정생활의 기쁨을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려했던 젊은 시절의 그는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육체의 행복을 버리고 영혼의 자유만을 갈구했더라면 노년의 이 안락함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영혼만은 세속의 쾌락에 물들지 않았음에 만족하는 예수.
빵을 먹고 물을 마셔 날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젊은 시절의 예수, 이제는 그런 날개는 떼어 버려야 한다는 늙은 예수, 그리고 젊은 시절 그의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해 배신자를 자임했던 유다와 제자들의 원망, 저주. 예수는 괴로워하며 또 다시 실신하여 쓰러진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예수는 아직도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고통받는 자신을 발견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최후의 유혹은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두려움과 희망, 모두를 배제하고 싸워야 하는 투쟁이다.
-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