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시인의 삶에 대해서 궁금하던 때가 잠시 있었다. 읽는 것조차 멀미나고 현기증이 나는 기형도와 이상의 시집을 사서 품에 끼고 다녔다. 가을날 흐드러지게 떨어진 낙엽벤치에 누워 그들의 시집을 펴 들었다. 시 한편, 시 두 편…….
분명 한글인데 라틴어 보다 더, 그 옛날 고어(古語)보다 더 괴기하고 난해했다. 읽는 척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순전히 ‘걔가 지나가다 봐야 하는데~’라는 생각뿐이었다.
기형도와 이상의 시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후 십 여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읽은 시인은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당장 이름이 기억나는 시인은 송경동, 정호승, 김용택 정도다. 대중적이고 다소(?) 이해하기 쉬운 시를 쓰는 시인들이다. 얼마 전 시인이자 평론가가 쓴 「문학의 아토포스」라는 책을 읽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보다」와 소설가 이기호의 장편「차남들의 세계사」도 읽었다. 시인과 소설가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다. 시나 소설을 쓰지 않는 사람들보다 민감하고 예민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야 예술가다. 엄혹하고 숨이 막히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 청량한 시적 감수성과 따스한 소설적 순수성을 제공해야 하는 그들이, 더 무겁고 힘들고 아픈 이야기를 펼쳐 놓고 있는 것이다. 이기호 작가는 내가 자주 듣는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소년이 온다」를 쓴 한강과 자신·자신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힘들고 아팠던 현대사의 단면을 계속해서 예술가들이 되새기고 끄집어내는 숙명을 토로했다.
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시를 쓰거나 소설을 끄적이지도 않지만 그의 고백이 진심으로 여겨졌다. 가볍고(물론 쓰는 것 자체는 힘든 일이겠지만) 말랑말랑한 소재와 내용의 소설을 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일 터.
미안하지만 우리는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계속해서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노래해 달라고, 그래도 써 달라고.
이 책을 진작 사 두고도 묵혀 두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첫 번째, 시집이고. 두 번째, 월트 휘트먼이 이렇게 유명한 작가인 줄 몰랐던 나의 무지다.
“키가 6피트로 자라고..... 1855년에 36세의 남자가 되었고.... 그리고 어찌 되었든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모두 똑같이 놀랍다.” (p.241)
<나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배우는 사람>에 등장하는 시 구절이다. 일단 나와 동갑인 나이에 영미문학을 가로지르는 이 책, 「풀잎」을 썼다는 것에 질투와 절망이 교차되었다. 거의 매번 경험하게 되는 바다. ‘이 작가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등단을 했구만. 이 칼럼리스트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데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하면서. 더군다나 키가 6피트로 자랐단다.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키가 자라다니?!
월트 휘트먼을 들어 본 사람이나, 이 시집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아니면 시에 어느 정도의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 챘겠지만 휘트먼의 시는 자유시의 형식이다.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와 중간고사 멀리는 수능을 위해 시를 쪼개고 분해하며 공책에 필기하며 배웠던 그 시의 형식. 일반적인 서정시가 대체적으로 행과 연, 운율과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휘트먼의 시는 이 모든 규칙성과 일반성을 깨뜨린다. 1855년 처음 출판한 「풀잎」을 189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4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계속 수정 보완하여 작품을 다듬었다고 한다. 집념과 성실함에 입이 떡 벌어진다.
“지구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떠들썩한 사람들이 풍부한 크기와 대기에 맞게 길들여져 질서 정연해 보인다.” (p.7)
“시인들은 자유의 목소리이며 자유를 개진한다. 시대에서 나온 그들은 위대한 사상에 값한다.” (p.26)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에 잔잔한 세상에 전복을 일으킨 청년의 시는 혁명적인 시의 형식만큼이나 내용 또한 전복과 혁명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과 평등, 사랑과 자연에 대한 찬양과 고무가 가득하다. 기존의 틀과 구조를 깬다는 것은 큰 용기와 끈기를 요구하지만 휘트먼은 쉬운 길로 작업을 하지 않았다. 나 같으면 과격한 어조와 단어로 문장을 만들어 내 읽기만 해도 치가 떨리고 온 몸이 저려오는 시를 썼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하수(下手)다.
시인들은 자유의 목소리로 자유를 개진하는 사람들이라는 정의가 와 닿는다. 19세기 말, 북미는 열강의 각축장이자 각종 이념과 인종문제 등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불과 몇 년 후 끔찍한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사회가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것처럼 이 책이 출간되던 상황도 그랬으리라 짐작된다.
휘트먼은 자유과 시인으로서의 사명, 참여를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는 남북전쟁 시 북군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나는 단 한 사람도 무시하거나 떨쳐 버리지 않을 것이다.
첩과 식객, 도둑 모두 이곳에 초대받는다.... 도발적인 입술의 노예가 초대받는다... 성병 감염자가 초대받는다.
그들과 다른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을 것이다.” (p.74)
“나는 육체의 시인이다.
또 나는 영혼의 시인이다.
천국의 기쁨이 나와 함께하며, 지옥의 고통이 나와 함께한다.” (p.78)
“월트 휘트먼, 미국인, 불량자들 중 하나, 하나의 우주,” (p.83) <나 자신의 노래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무시하거나 떨쳐 버리지 않겠다는 말은 100년이 훨씬 지난 후 미국 대통령이 한 유명한 선거문구 중 하나였다나. <나 자신의 노래>는 100페이지 넘는 긴 시다. 시라기 보다는 웅변이나 산문에 가깝다. 형식은 그렇지만 또 내용은 시다. 아름답고 충분히 서정적이다. 감성적이고 시의성을 담보한다. 1855년, 한 복판에서 시인의 독백은 충분히 혁명적이다. 첩과 식객, 도둑 모두 그의 시 안에서 조응한다.
그의 시에는 자연과 생물에 대한 예찬도 가득하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북미에서만 자생하는 듯 한 생물들에 대한 소개와 사랑으로 가득하다. 사람과 자연, 자연과 생물을 구별하지 않는다. 일개 시인 주제에 천국과 지옥을 아우른 다는 교만하고 오만방자한 허세가 허투루 들리지는 않는 이유다. 이 책에 실린 시 전체에 흐르는 주제다. 휘트먼이 일관되게 그려 낸 것은, 바로 인간 개개인의 자아에 대한 찬양과 평등한 존재로서의 개인들이 이루는 사회에 대한 믿음이었다(번역한 분의 의견) 맞는 말이다. 개인을 존중하면서 그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에의 의지 또한 존중하는, 그래서 우주에 속한 모든 생명과도 화해하고 평등하게 삶을 영위하는 것.
동시에 현실에 대한 참여도 놓지 않는 쎈스!!
“재빠른 양키 쾌속선을 찾으라... 너 검은 배에 실을 짐이 여기 있다.
닻을 올려라! 네 항해를 시작하라!.... 보스턴 항으로 곧장 키를 잡으라.
자 다시 대통령의 사령관을 부르라, 그리고 행정부의 대포를 끌고 오고,
의회에서 고함꾼들을 데려오라, 다시 행진하고 보병들과 기병들로 그것을 보호하라.“ (p.233) <보스턴 발라드 중에서>
휘트먼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을 지지했다.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미국남북전쟁의 양 주체가 어느 쪽이 선이고 악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기도 싫고.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휘트먼의 자세에 주목한다. 시대를 사는 예술가들 중 상당수는, 특히 한국의 예술가들 중 상당수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해는 간다. 엄혹하고 무서웠던 군사독재시절을 아직 떨치지 못했고, 독재 청산은커녕 김구 선생조차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친일파가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목소리 내봐야 별다를 것 있겠냐 라는 자각이 우선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술가들이 나서주지 않으면 대중은 지향할 푯대가 없다. 먼지처럼 부유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하는 새에 옷에 묻던지 TV브라운관에 사뿐히 내려앉듯이 가만히 있어야 한다. 무서운 말. 가만히 있어라.
정치적 이념이나 지향점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책임을 져야 한다.
“잠자는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과 아프리카 사람들이, 여자가, 아버지가, 학자는, 폐병환자의, 류머티즘에 걸린 관절이, 그들의 밤의 기운...” (p.198-199) <잠자는 사람들 중에서>
<잠자는 사람들>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주어 중 일부만 발췌한 것이다. 시적 전복을 이룬 시인이 꿈꾼 세계가 16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요원하다는 것을 무덤 속 휘트먼이 안다면 땅을 치며 통탄할 일이다. 바로 얼마 전,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대규모 움직임이 일어난 곳이 바로 휘트먼의 조국, 미국이니 말이다.
미안하고 실례되지만 한국의 많은 시인과 소설가를 아우른 작가, 예술가들의 현실참여 내지는 현실을 꿰뚫고 비판하는 내용과 소재의 작품이 만개했으면 좋겠다.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활동조차 감청되고 사찰되는 세상이다 보니 나와 같은 일개 서평가조차 서평을 쓰면서 표현과 단어 선정에 고민을 해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그대들께서 넘어지지 않고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목소리를 내주기를 기대한다.
현대시부터 먼저 공부하게 되었던 나는
우연히 휘트먼의 산문적 시쓰기가 현대시적 효시였고
여러가지 그의 시적 기법이 현대시의 아버지로서의
그의 입지를 굳혔다고 알게 되었다.
그 후에 거꾸로 19세기 미국시를 공부하다가
기말페이퍼로 휘트먼에 대해 쓰게 되었다.
원래 수학이 전공이었던 나는
휘트먼의 풀잎을 수학과 과학적인 사실과 연관시켜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되었던 대체의학쪽 연구자인
여상훈씨의 논문을 보고
휘트먼이 보여주고자 했던 불멸의 진리와 우주의 에너지 보존법칙을
연결하여 써봤다.
거의 실험작인 느낌이 강하지만
만약 문학을 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도
다가갈 수 있다면
학제간의 연구가 자못 흥미로와 질거라는 발칙한 상상을 해봤다.
아래는 내가 페이퍼로 낸 휘트먼에 관한 내용이다.
http://blog.yes24.com/document/7048368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