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애에 채찍질이 포함된(?) 것은 이때부터인 듯하다. 사디즘이라는 말의 어원이 이 책의 작가 사드(Sade, Marquis de)에서 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사드는 채찍을 휘둘러 두 파트너 간의 주종 관계를 규정하고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의식을 통해 더욱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인간의 성적 욕망과 그 실험을 통해 새로운 성문화를 개척한 선구자라고 평가받는 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드는 소설을 통해 19세기 20세기 그리고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성 풍속도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그 이름은 인터넷 주소 란에 스펠링 한 번 잘못 쓰면 불쑥 불쑥 뜨는 음란 사이트에서도 성업중이시다.
하지만 사디즘의 원조격 되는 소설이라고 해서 인터넷에 뜨는 화면 이상의 자극을 원하는 독자는 기대를 버리는 것이 좋다. 생각해 보라. 이 때는 18세기 프랑스였고, 우리나라에서 불과 일이십년 전에도 그랬듯이 여성에게는 순결이라는 이상한 가치관을 미덕으로 가르치던 사회였다. 따라서 혼전 성애에는 파괴와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감수성이 성적 자극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세밀하지 않은 안개처럼 가리워진 행위에서도 충분히 만족스런 새로운 성적 생활로의 가이드라인을 받았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뿌연 안개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마치 대부분의 성애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된 야동을 보는 듯하다고나 할까.
나는 이러한 안개 기법이 18세기에 적나라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은 보지 않는다. 쥐스띤느가 겪은 불운은 참혹하고 참담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수녀원에서 곱게 자라던 두 자매 쥘리에뜨와 쥐스띤느는 어느날 부모의 파산과 파멸로 인해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고, 언니와 동생은 서로 정 반대의 길을 걷고자 헤어진다. 종교와 선의 미덕을 배우며 오로지 신의 뜻에 따라 시대가 ‘미덕’이라 칭송하는 대로만 살고자 했던 쥐스띤느는 시대가 요구하는 미덕을 실행하면 할 수록 점점 더 혹독한 현실 속에 내팽개친다.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하거나 그녀를 갈취하고 약탈하고 범죄에 가담케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에 굴복하지 않고 선행을 쫓음으로써 번번히 더욱 더 인생은 말할 수 없이 짓밟히고 유린된다.
두 자매 중 타고난 아름다움과 음모를 이용하여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은밀하게 남의 재산을 가로채고 살인을 비롯한 여러 범행으로 로르상주 백작부인이 된 쥘리에뜨는 이제 우아하게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는데, 우연히 여인숙에서 살인, 절도, 방화죄로 기소되어 경찰 몇 명에게 호송되어 가는 가련한 여인을 발견하고 그 사연을 듣게 된다. 후에 쥐스띤느로 밝혀지는 소피가 겪는 가혹한 현실은 처음 수녀원 기숙사를 나와서부터가 혹독하기만 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쁘고 어린 소녀에게 던지는 추악한 욕망의 손길은 변함이 없다. 그녀가 믿는 종교와 사회적 관습에 의해 선과 악의 구별이 뚜렷한 쥐스띤느는 몸을 파는 일은 마다하고 처녀성을 지키며 선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라지만, 성적 방어는 지키고자 할 수록 더욱 더 유린되고, 선을 행하고자 할 수록 더욱 흉악하고 참혹한 악의 피해자가 되어간다.
줄거리를 길게 쓸 작정이 아니었는데, 선을 행하려고 할 수록 더욱 큰 시련 속으로 빠져드는 쥐스띤느의 운명을 이야기하다보니 말할 수 없게 길어졌다. 그래더 줄거리는 뒤로 뺀다. (이미 썼으니 아까우므로 살려둠)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주의를 이끄는데, 하나는 이렇게 선을 행하면 행할 수록 불운으로 되돌아오고, 악행으로 큰 돈과 명예를 얻은 사람에게는 그 권력으로 다시 선을 행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그 아이러니를 반복 설정함으로써 우화적으로 우리가 가진 선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했던 점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성폭력에 대한 시각이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쥐스띤느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은 대개 성폭력이라는 단어로 축약되는데, 이것이 사디즘이라는 성애의 한 형태로 발전했다는 점은 여성의 역사 혹은 성의 역사에서 여러 논쟁거리를 시사한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디즘은 두 사람의 동의에 의해 성적 쾌락을 위해 동의된 만큼의 제한 내에서 신체에 가해지는 자극 쯤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쥐스띤느의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한 번도 자신 스스로를 그러한 폭력에 의해 쾌감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한 번도 자신이 동의하에 폭력이 가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장애가 있다고 밖에 보아지지 않는 범죄자들의 엄청나게 잔혹한 범죄일 뿐이다.
오 하늘이시여 ! 미덕에 입각한 행위가 제 가슴에서 우러나오면, 즉시 고통이 그 뒤를 따라야 함이 이미 정해진 뜻이오니까?
섭리의 손이 항상 같은 방법으로 저를 괴롭히는 데 싫증을 느꼈음인지 그 새로운 구렁텅이에서 빼내어 곧이어 또다른 구렁텅이로 저를 처넣었습니다.
초반에는 하녀 일을 시작하는데, 주인이 시킨 도둑질에 협조하지 않자 오히려 그 주인의 음모에 희생되어 갇힌다. 감옥에서는 뒤부아 부인이라는 부인이 사형수가 불을 내고 탈옥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쥐스띤느를 함께 탈옥시키고 선행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자기와 함께 멀리 떠나 행운을 찾아보자고 권한다. 범죄를 암시하는 그 말에 쥐스띤느는 굴하지 않자, 탈옥에 동행한 뒤부아의 세 남자 동료들이 쥐스띤느를 강탈하고자 한다. 서로 먼저 그녀를 취하려고 뒹굴고 싸우는 틈을 타서 도망친 쥐스띤느는 덤불숲으로 도망가 숨어있다가 두 남자의 ‘타락된 장면’을 목격하는데, 목격하는 장면을 그들에게 들켜 나무에 묶이는 수모를 당한 후, 앞으로 자신에게 ‘순종’하면 후회할 일이 없을 거라며,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녀를 데려간 남자는 브레삭 부인의 아들로, 대저택에서 어머니가 가진 재산으로 빈둥거리며 쾌락의 길만을 걷고 있는 아들이다. 쾌락에 빠진 브레삭은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모친 살해 계획을 세워 재산을 함께 나누어가지자며 쥐스띤느를 유혹하여 협조를 구하지만, 선행만이 최고의 가치인 쥐스띤느는 사건을 막기 위해 브레삭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가 들키고 만다. 다시 숲으로 끌려와 나무에 사지를 묶인 채 채찍질 당하고 혹독한 쇠채찍질로 온몸이 살갖이 떨어져나가 피범벅이 되는 쥐스띤느를 지켜보며 더더욱 흥분하고 절정에 이른 브레삭은 쥐스띤느를 브레삭 부인의 살해범으로 꾸미고 쫓아낸다.
채찍질에 다친 몸을 이끌고 의사 로뎅의 집을 찾아 그곳에서 치료를 받은 그녀는 로뎅의 가정일을 돌보아주는 하녀가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지내지만, 그것도 잠시, 로뎅씨와 그의 의사 동료들이 아이를 납치해와서 생체 실험에 쓰려고 지하실에 가두어놓은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를 탈출시킨다. 그 대가로, 발가락을 하나씩 자르고 생 이빨을 하나씩 뽑고, 어깨에 죄수의 낙인을 찍는 브레삭에게 당했던 것보다도 더 잔혹한 육체적 고문을 당하고 쫓겨난다.
이후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숲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을 찾아가지만, 그곳은 그야말로 수도사 네 명이 여성들을 납치 감금하여 성노예로 만들어 쾌락을 갈구하는 타락의 끝판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에서 신부들에게 유린당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긴데, 위에서 언급한 브레삭과 로뎅의 잔혹 행위 부분과 달리 이 곳에서 이루어지는 집단 성행위들은 정염의 불길을 태운다거나 탈진할 때까지 괴롭혔다는 형태로 묘사된다. 물론 채찍질과 육체적 학대도 빠지지 않는다.
새 수도원장이 오며 풀려난 쥐스띤느는 이제 선행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버릴 때도 되었건만, 길거리에서 학대를 당한 남자 달빌르를 돕다가, 그의 저택에 다시 노예로 감금되어 이미 갇혀있던 그의 오랜 정부들과 함께, 발가벗겨지고 바퀴에 묶여 하루 종일 땡볕에서 노동을 하며 다시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처지로 바뀐다. 그의 범죄가 드러나고 다시 풀려날 기회를 얻게 되지만 몸에 찍힌 낙인 때문에 범죄자 신분이 되고, 그녀를 도와주던 재판관에 의해 다시 풀려나 일자리를 찾으려고 여인숙에 투숙하는 동안 초반에 만났던 뒤브레이 부인을 만나고,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한 돈많은 상인을 이용하여 큰 돈을 벌어보자는 제안을 받고 다시 난처해지면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투숙한 여인숙에서 화재를 만나는데, 함께 다니던 아이를 화재에서 구하려고 뛰어들어 안고 나오다가 넘어져 아이는 죽게 되고, 재산을 노린 방화에 살인죄까지 뒤짚어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덕의 결정(結晶)은 인내다.
꾸역꾸역 순간마다 발현되는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고 오래 참는 것.
인내란 참으로 고독한 투쟁.
겉으로는 잔잔한 수면과 같아서 바깥 사람들은 휘몰아치고 있는 내면의 현재를 모른다.
착한 이들이 때로 백치의 표정을 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스로의 얼굴을 무표정의 투명한 거울로 만들어
내면으로 파고드는 타인의 시선을 반사시키기 위해서다.
때문에 바보를 가장함은 내면의 움직임을 조금도 바깥으로 내어주지 않으려는 끈질긴 방어의 욕망이다.
이 모든 고독한 투쟁이 바로 미덕의 실천이다.
미덕은 그렇게 온전히 자기 안에서 자기를 위해 치뤄지는 제의.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어놓는 제의인 것이다.
그런데 왜 참지?
무엇이 그토록 그녀로 하여금 참게 만드는 거지?
신에게 사랑받기 위하여 그녀는 늘 바보같은 미소를 짓는다.
미덕은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면서 실현되지만
그것은 더 큰 신으로 부터의 보상을 바라는 더 큰 자기애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미덕이란 더 큰 자기애적 욕망의 실현을 위하여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는 행위인 것이다.
때문에 여기엔 그 어떤 이타애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미덕은 타인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만을 고양시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목적 없는 욕망이며 오로지 욕망만을 위한 욕망이다.
그래서 도착적이다.
수전노가 돈에 대해 가지는 욕망과 동일하게 도착적이다.
돈은 오로지 물질로 교환되어야 그 가치가 있지만 수전노는 물질을 줄여 돈을 모은다.
물질을 줄이니 삶은 궁핍해지고 사람들의 무시와 비난마저 덤으로 얻지만
돈만을 축적하려는 욕망에 그것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이 돈에다 투사하는 욕망을 그 어느 때든 실현할 수 있지만
수전노는 기꺼이 그 충족을 지연시킨다.
그 지연 때문에 돈이 타인에게 불러일으키는 부러움이 오히려 비난이 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이 있는 한 언제든 그 상황을 전복시킬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미래에 존재할 전복의 가능성 때문에 그는 기꺼이 현재의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전노는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가능성을 먹고 사는 존재다.
하지만 이미 도착이 되어버린 욕망은 한없이 그 가능성의 실현을 지연시킨다.
어쩌면 영원히 그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으로 남아있을 지 모른다.
수전노가 그 도착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건 오로지 그의 죽음을 통해서 뿐이다.
그래서 죽음은 그에게 일종의 구원이기도 하다.
미덕의 욕망도 이와 같다.
수전노가 미래의 실현가능한 가능성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무릎쓰듯이
미덕의 욕망에 빠진 자도 미래에 주어질 신의 보상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수전노가 그 가능성의 구현체인 돈만으로 만족하듯이
미덕의 욕망에 빠진 자도 신의 보상을 확고히 해 줄
그 미덕의 실천을 통해 얻는 자기만족감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사람들이 수전노를 욕했듯, 그렇게 자신을 아무리 바보라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어도 상관없다.
미래를 사모하는 자에게 현재란 그저 사라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부재'의 공간이고
그 공간에 있는 타인들 역시 찰라에 사라질 하루살이의 운명들이니까.
그렇게 타자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애로 뒤덮인 견고한 껍질은 그 어느 것 하나 상처입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이 지나치면 때로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신의 명령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힘들기만 하냐고...
그녀는 사람에게 하소연하지 않는다.
간원의 대상은 오로지 신 뿐이다.
당연하다. 타인은 그저 자신의 미덕을 발휘할 때만 의미있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타자들이 괴롭히면 괴롭힐 수록 겉으로는 아픈 척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타자들의 행동은 자신이 미덕을 실쳔하고 있음의 외부로부터의 확인이며
훗날 신에게 보상을 받을 때 내어놓을 수 있는 근거가 되아주니까.
더 많은 고난은 신으로 부터 더 많은 인정을 받게 한다.
그렇게 '착한 자'들은 스스로 매저키스트가 되어간다.
그리고 그러한 매저키스트적 욕망은 '순교'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순교의 욕망은 역설적이다. 자기를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기애의 극한을 완성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신에게 하는 간원은 자신의 고난을 평가에 고려해달라는 호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고통의 호소 또한 보다 더 큰 자기애적 욕망 충족을 위한 발화인 것이다.
더 큰 쾌감을 얻기 위해 일부러 꾸며내는 신음 소리와도 같이...
그래서 사드는 이 미덕의 화신을 처벌한다. 새디즘을 만든 장본인 답게 아주 가학적으로...
하지만 미덕의 화신, 쥐스띤느는 사드가 가해오는 그 고통을 오히려 더 환호할 뿐이다.
당연하다. 그녀는 이미 뼈 속까지 매저키스트이니까.
고통이 크면 클 수록 신으로 부터의 상급으로 구체화될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는 강도는 더욱 더 커다래지니까...
그렇게 '미덕의 불운'은 새디스트 사드와 매저키스트 쥐스띤느의 교합과도 같다.
사드는 가학이 고조되는 선율을 작곡하고 쥐스띤느는 온 몸으로 그 볼레로를 표현한다.
제목처럼 미덕이 불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를 고통에 빠뜨려 감으로 밖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죽여감으로 밖에는 충족될 수 밖에 없는 욕망...
보다 완전한 충족을 위해선 보다 완전히 스스로를 지워야만 하는,
그렇게 미덕의 실천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그 매커니즘 자체가 미덕의 불운인 것이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불행이 아니라 불운이란 말을 제목으로 썼다.
불운이란 단순히 운수가 좋지 않은 것. 그렇게 운명이 아니라 단순한 상황적인 것.
따라서 마음먹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아니한가.
마치 표층적인 차원에선 고통이었으나 심층적인 차원에선 쾌감으로 받아들였을 쥐스띤느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라도 한 듯...
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한 환멸과 경멸, 혐오감으로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찬 싸드(Marquis de sade)의 냉혹한 눈초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련한 두 발 달린 개체를 짓누르는”, 아직 아마도 그 실체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섭리, 숙명이라는 존재의 괴이한 변덕이라는 우화를 통해 악의와 악덕에 익숙한 인간과 세상의 본성을 싸늘하게 그려낸다. “전체가 썩어버린 사회”에서는 미덕이란 그러한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처럼 "다수의 이익이 인간들을 부패로 이끌어가고자 할 때, 특정인인 자기만 부패하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다수의 인간들과 싸우게 되고 결국 전체 이익에 대항하여 투쟁하게 되는 것”인데, 다수가 걷는 악덕의 길을 걷지 않으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불가피하니 미덕이나 악덕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것이 싸드의 속내였을 것이다.
‘싸드’를 말하면 으레‘싸디즘(sadism)’을 떠 올리지만, 그 가학적 음란성이란 표피성은 결코 본질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도 “쌩뜨-마리-드-부와(Sainte-Marie-des-Bois)”, 즉 “숲속의 신성한 마리아”라는 이름의 그 본성과는 걸맞지 않는 수도원이 대표적 싸디스트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더럽고 모독으로 가득한 시궁창이며, 난폭성과 변태적 도착증으로 똘똘 뭉쳐진 괴물들인 수도사들의 위선과 악마성을 통해 온통 악덕으로 떡칠을 한 인간, 인간 세상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을 대리하는 도구이다. 외설과 음란성에 관심을 집중하는 세상의 시선은 바로 그 금지라는 규범에 도사린 치졸함, 유치함, 폭로적 관능에 탐닉하는 자들의 자기 은폐일 것이다.
소설은 고아가 되어버린 두 소녀의 인생행로를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 보여주는데, 미덕의 화신인 ‘쥐스띤느’와 악덕으로 뭉쳐진‘쥘리에뜨’자매의 삶의 섭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의 결과가 인간세상에서 진실이라고 떠들어대는 것, 소위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길을 덮고 있는 어둠 위에 빛을 던져준다”는 철학의 승리라는 것의 실체라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헛소리인가를 증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큼직한 죄악으로 돌진해서 주도면밀한 매춘으로 귀족들을 갈취하고 살해하여‘로르상주 백작 부인’으로 상류층사회의 일원이 되는 쥘리에뜨와는 달리, 정숙함, 고결함의 미덕을 지키고 고귀한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쥐스띤느의 일생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불행의 연속이다.
고리대금업자의 하녀로서 도둑질을 거절한 끝에 도둑의 누명을 쓰고 잔혹하게 쫓겨나는가하면, 어머니를 독살하려는 동성애에 빠져있는 방탕한 후작의 살해 공모를 거절하자 1백대의 채찍질 후에 버려지며, 선의인 줄 알았던 상처 난 몸을 치유해주었던 외과의사는 몸에 낙인을 찍고 매질을 하여 내치고, 지친 심신을 의지하려 찾아간 수도원의 지엄한 제단은 흉측한 괴물들의 집합소이며, 심한 폭행으로 상처 난 사나이를 구조해준 은혜의 결과는 채찍과 노예생활이란 보상으로 돌아온다. 오직 욕스러움과 피투성이 가시밭길로 점철된 그녀의 인생이란 사실 미덕의 저주이다. 악덕이 선(善)의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어찌 미덕으로 살아 가려하는가!
자신의 쾌락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해하려는 후작의 궤변(詭辯)은 아마 싸드의 역설이자 인간들에 대한 조롱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자신의 유사체(類似體)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한 그 파괴의 괴로움”이라는 두 가지 죄악이라 하겠지만 그건 순전한 환상 일뿐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은 단지“형태의 변화이지 절멸은 있을 수 없으며, 자연의 눈에 모든 것은 평등하며, 단지 물질 덩어리는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재생”할 뿐이라고 말이다. 즉 죽음은 자연이란 다양성의 실현이라고. 게다가“자연에게 하도 중요하여 인간의 파괴에 자연이 필연적으로 노하게 되었음을 증명”해봐라! 그러면 범죄를 인정하겠다고. 어찌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이러한 싸드의 역설적 궤변은 다 죽어가던 놈을 구해줬더니 채찍과 노예노동으로 보상하는 ‘달빌르’라는 위폐범이 하는 말에서 반복되는데, 자신은 “선행, 인정, 따위 등이 재산을 축적하려는 사람에게는 발부리에 부딪치는 돌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아서, “약자들을 희생시키며, 다른 사람들의 신뢰와 어수룩함”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은 현명함이라고 으스대는 것이다. 또한 죄의식이나 회한이란 것은 일종의 환상으로 “너무 나약하여 그것을 감히 지워버리지 못하는 영혼의 천치같은 독백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부를 손에 넣게 되면 모두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고 강변한다.
범죄 역시 “법률이나 국가적 인습을 위반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고, 근본적으로 범죄라 칭할 만한 것은 없으며, 단지 견해와 지역의 문제”일 뿐이라고 설득한다. 현실을 봐라! “세력이 강한 자에게는 법이 미치지 못하고 운이 좋은 자는 법망을 빠져나가”지 않는가! 어찌 보면 ‘신성한 마리아 수도원’의 원장인 수도사 라파엘이나 앙또냉 같은 변태성욕자들이 탐욕의 대상자 “몸에 나타나는 고통스러운 징후를 정성스럽게 포착하여, 그 율동에 자신의 관능적 전율을 조화”시키는 그 가학성과 아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사형을 선고받고 경찰에 끌려 호송되던 길 중에 우연히 만난 로르상주 백작부인에게 쏘피(쥐스띤느)가 들려주는 인생의 곡절과 사연의 형식인데, 미덕이 끊임없이 불행이란 보상으로 되돌아온 얘기의 마무리 끝에 두 여인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다. 18세기, 더구나 세기말의 작품이란 그렇듯이 세상과 삶이 깊은 절망에 휩싸이고 인생의 거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시대의 반항아인 싸드로서는 아마 인간들의 악덕에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동생 쥐스띤느의 죽음을 본 쥘리에뜨의 수녀원 귀의를 설명하면서 그녀의 “기지의 밝음과 품행의 엄격함으로 모든 사람의 전범이 되었다.”고 이것은 마침내 미덕의 기쁜 보상이라고 너스레를 떠는데, 과연 이 말이 싸드의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빈정거림이었는지는 200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세속화된 종교 권력의 파렴치함과 악덕으로 썩어빠진 인간들의 위선과 허영에 앙다문 이빨을 으드득 가는 차디찬 싸드의 분노가 끓어 넘치는 작품이다. 200 여년이 지났건만 싸드의 주장이 호소력 있게 들리는 건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악덕 때문일 것이다. ‘피터 박스올’의‘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의 책’에 선정된 작품이라 했던가? 싸드를 이해하고 인간의 본성, 삶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책이 없을 것 같다...
18세기말 19세초 시대의 반항아로서, 그의 작품은 당시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수많은 저작물이 억압되고 매장된 역사를 지닌 인물 '싸드'. 그러한 그의 사상과 저작물이 빛을 발한 건 20세기 이래인데, 인간 욕망의 긍정과 신성에 대한 부정이 자연스러워진 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사디즘'으로도 익숙한 그의 이름과 사상을 귀동냥으로나 접해보다 처음으로 읽은 싸드의 작품 '미덕의 불운'은 왜 당시에도 그의 작품이 억압되고 금지될 수밖에 없었는 지를 알 수 있게 하는, 현대를 사는 내게 조차 너무나 강렬하고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작품 내 자극성 자체는 그만큼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현대엔 워낙 많다 보니, 그 자체로는 견딜 만 하였고, '사디즘'과 관련된 그의 이름, 귀동냥으로 들은 그의 사생활, 그리고 그가 서술한 '서문'으로도 충분히 '쥐스띤느'의 불행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 그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명저로 꼽히는 문학 작품에 이렇게 노골적이고 잔인하며, 성적인 묘사가 이뤄진다는 점은 현대에도 온갖 불행을 겪는 인물들을 다룬 소설들을 떠올려보면 여전히 파격적이었다. 200년도 더 된 소설이면서 번역된 글임에도 또 얼마나 몰입감이 있는지, '쥐스띤느'를 억압하는 악덕의 인물들이 너무나도 역겹고 가증스러웠다.
하지만, '쥐스띤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의 '정당화' 논리를 깨기란 여간 쉽지 않다. 극단으로 치우쳤을지언정, 분명 악덕의 논리들은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이래, 근대 문명에 이바지한 논리들과 닮은 부분이 있으며, 종교적 미덕과 신성, 섭리에 대한 거부, 그리고 개인의 욕망에 따라 자유로이 사는 삶에 대한 주장 또한 니체 이래 수많은 현대 철학과도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그에 반해, '쥐스띤느'의 미덕이란 그녀가 얼마나 순진하고 순박하고 순수하며 신실한 지를 보여줄 뿐, 그 자체는 '미덕'이라는 이름에 비해 아무런 힘이 없다. 미덕은 그녀를 끊임없이 불행으로 몰고갈 뿐이고, 악덕을 제압하고 몰아내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신실한 쥐스띤느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결말과 '악덕'의 화신처럼 삶을 구가해 온 언니 '쥘리에뜨'의 갑작스런 회개는 더더욱 쥐스띤느가 절대적 가치로 여겨온 '미덕'을 초라하고 우습게 만든다. 여기에 '싸드'의 생애까지 고려 했을 때, '미덕의 불운'은 미덕을 숭상하는 자들이 겪는, 예수가 겪은 것과도 같은 필연적인 '고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미덕' 그 자체에 대한 조롱이라 생각한다.
'신'과 '종교적 섭리'에 기댄 노예와 같은 '미덕'은 '악덕'에 압도될 수 밖에 없다. 싸드가 보기에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욕망'에 기댄 '악덕'은 끊임없이 융성하고 번영한다. 그렇다면, 싸드는 '미덕'을 조롱하고 '악덕'을 찬양한 것일까? 분명 싸드는 개인이 자유롭게 '인간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악덕'을 바라였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소설에서 묘사하는 '깡그리 썩은 세상'은 악덕이 만연하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싸드는 <미덕의 불운>에서 '미덕'을 조롱하고 비판했을지언정, '악덕'을 옹호했다 보는 것은 비약이다. '싸드'가 바랐던 것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긍정이다. 악덕 행위의 근간이 되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악덕으로 인식하는 것은 '신' 따위에서 비롯된 '미덕'이라는 가치에 기초한다. 이는 수많은 신에 대한 논증들처럼, 순환 논증과도 같다. 신과 섭리를 거부하고, 그에 파생된 기존의 '미덕'을 파쇄함으로써 '인간 욕망'에 대한 긍정이 이뤄지고, 이를 기초로 '신성'이 아닌 '인간 중심'의 '미덕'을 세울 때 비로소 '악덕'이 그 자신의 번영을 구가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음을 인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p.7 철학의 승리는, 섭리가 인간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 설정한 궁극적 목표에 이르기 위한 길을 덮고 있는 어두움 위에 빛을 던져 주는 데 있을 것이며,
p.8 따라서 철학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유형의 궤변을 경계함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며, 아직 일말의 선한 원칙을 간직하고 있는 부패한 영혼에게 제시된 불운한 미덕의 예들이, ······ 그 썩은 영혼을 선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줌은 절대 불가결한 일이다.
서문에서 '신', '종교적 섭리'가 아닌 '철학'이 중요함을 밝히는 점, '일말의 선의 원칙'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건대, 싸드는 '인간 욕망'에 기초한 '미덕'과 이를 인도하고 악덕의 궤변을 논파하며 미덕의 가치를 세우는 '철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단 점에서 그가 신성에 대한 부정과 인간 욕망에 대한 긍정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없이 큰 불행들을 겪는 '쥐스띤느'의 미덕을 조롱하는 듯한 싸드의 이야기는 어느 한 지점에서 비로소 '쥐스띤느'의 미덕이 새롭게 느껴진다. 바로 소설 후반부 '뒤부와 부인'과 나누는 대화에서이다. 이 대화에서 뒤부와 부인은 여느 악덕의 인물들처럼 아주 간사한 논리들로 '악덕'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며, '미덕'을 비난하고 쥐스띤느에게 '악덕'을 따르기를 종용하는데, 쥐스띤느는 이를 반박한다.
p. 193 "······저의 의식은 어린 시절부터 부인께서 말씀하신 그 편견들을 극복하는 데 익숙해지지 못하였는데, ······무슨 자격으로 부인께서는, 그 짜임새가 당신의 생각과는 다른 저의 생각이, 당신과 똑같은 사유 체계를 수용하기를 요구하십니까?"
작품 후반부에 이르면 쥐스띤느는, 물론 여전히 '신'과 '섭리'를 이야기하나, 그녀가 따르는 미덕은 더이상 '신'에 기초한 미덕이 아닌, 자신의 욕망에 따른 '미덕'이다. '미덕'의 내용 그 자체가 변화한 것이 아니라, '미덕'의 기원에 대한 그녀의 인식이 재편된 것이다. '신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은 따라야만 하고, 따라서 네가 틀렸다'와 같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뢰와 이분법적 사고의 '미덕'이 아니다. 개인의 삶과 경험에 기초하여, 개인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여 순종하는 '미덕'이다. 다시 한 번, 번영을 이루지 못하든,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개인의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사는 삶을 추구하는 '싸드'의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역자가 해설에서 인용한 '여우 이야기'를 재인용하며, 싸드를 평가해보고자 한다.
p.231 <내가 학교에서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지혜로운 말은 미친 자의 입에서 나온다 하더이다.>
아주 지고지순한 동생과 악락한 언니가 있다. 우리는 동생의 편에 서는 것을 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언니가 되고자 할 것이다. 살인, 사기, 음해 등을 통해 언니는 부유하고 명성있는 자가 되었고, 동생은 선한 처신으로 바보가 되었다. 아니, 사회 속에서 거주할 수 없는 도망자이자 사형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죽음도 벼락을 맞아 죽었다. 물론, 이후 사드는 변화한 언니의 행실을 몇 줄 정리한다. 그러면 끝인 것처럼.
종교의 한계를 여실히 꼬집고 있다. 물론, 내세의 삶은 모르는 것이기에 그저 현실만을 생각하는 자에게는 동생의 처신은 신의 무능함을, 그저 신을 믿는 것은 무지함으로 보이게 만든다. 종교가 당시 그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권선징악은 아직도 많은 장르에서 활용되는 것이다. 즉, 도덕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가? 이 질문을 사드가 던졌고, 지금 세대 속에서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은 쉽지 않다.
읽는 내내 기분이 좋을 수 없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비련한 처지는 그 처지에 맞지 않게 고상한 음색으로 전달된다. 사드의 비현실적인 인물 설정이다. 그러나 내용은 현실적이다. 약간 과장된점도 없지 않으나, 현실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하기 힘들다. 그래서 다가 오는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