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극의 아버지라는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다.
타이런과 메리는 아일랜드 혈통의 수려한 외모를 지닌 초로의 부부이다. 큰 아들 제이미와 작은 아들 에드먼드도 함께하는 단란하고 번듯해 보이는 이 가족의 평화로운 아침 일상은 금새 그 균열을 드러내 보이고야 만다.
한 때는 재능있는 연극배우였던 타이런은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영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부른 싸구려-_-;; 돌팔이 의사 덕에 아내 메리는 몰핀 중독에 빠져 정신줄을 놓아가고 있고, 막내 아들 에드먼드는 폐결핵이 진행되어 요양원에 가게 되지만 이마저도 아주 싼 시립요양소를 갈 처지이다. 큰 아들 제이미는 더욱 비뚤어져서 방탕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
행복을 연기하는 이 가족이 책장이 넘어갈수록 안쓰럽고 애처로워지기 시작하면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가 누굴까..?'라고 몇 번 생각을 해보았다. 메리냐 에드먼드냐.. 회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메리가 더 불행하게 느껴지다가도 마음 여린 에드먼드가 안쓰럽기도 하고.. 차라리 미움받더라도 제이미처럼 본능과 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면 에드먼드가 좀 덜 아프지는 않을지.
인물의 외양 하나하나를 다 묘사한 지문 덕에 글을 읽고 나면 이들의 생김새나 표정,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또한 지문 디렉션이 매우 정교해서 인물의 감정을 배우가 잘못 읽어낼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씨의 대본이 연극체로 대사량이 많고 지문이 많다고들 이야기를 하는데 읽다 보니 느낌이 비슷한 건 같기도 --;;;)
이 책을 읽으며 뮤지컬 'next to normal'을 떠올렸다. 정상인 듯, 정상 아닌 -_-; 가족들의 이야기. 다만 최신의 뮤지컬인 next to normal은 정상이 아니라해도 그대로도 행복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면, 밤으로의 긴 여로는 속은 썩어 문드러져 있으나 그걸 드러내지 않는 이른바 쇼윈도 가족의 허상을 고발하는 데 힘을 쓰고 있다. 씁쓸한 이야기는 실낱같은 희망도 주지 않는 비극으로 끝나야 제 맛. 가끔은 쓴 약 삼키듯 괴로운 그 느낌을 가학적으로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단란한 가족이라는 허상이 이리 철저하게 붕괴되는 이야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희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
메리 : (손을 뻗어 남편의 팔을 잡고 애원하듯) 제발요, 조금 더 있어줘요, 여보.
적어도 애들 중 하나라도 내려오고 난 다음에 가세요. 모두들 내게서 너무 빨리 떠나가려고 해요.
타이런 : (씁쓸하고 슬픈 어조로) 우리는 떠나는 건 당신이잖소, 여보. (p. 97)
타이런 : 메리! 제발 과거는 잊어버려!
메리 : (이상할 정도로 객관적이고 차부하게) 왜요?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과거가 현재 아닌가요? 미래이기도 하지요.
우린 모두 벗어나려 하지만 인생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아요. (p.102)
타이런 : 좀 더 정신을 차리고 무모한 짓을 말아야 -
에드먼드 : 정신같은 건 지옥에나 가라지! 우린 모두 미쳤어요. 정신을 어디다 쓰게요? (p.159)
현실세계에서 생계형 범죄로 잡혔다는 기사, 일가족이 집단으로 자살을 하는 등의 안타까운 가족들의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러한 소식이 담긴 기사의 댓글과 반응들을 바라보면, 동정하는 이들도 있고, 가족구성원으로서 가정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과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사연은 그들밖에 모른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들이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는 한, 가족구성원으로서 얼마나 힘들었고, 이 책임에 대해서 회피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의 가족들을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비난을 받아야할 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면, 참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인 메리도 마약중독자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어려운 형편에 직접적으로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모르핀을 투여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마약에 취하게 된다. 어려서 병에 걸려 죽은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아들 에드먼드가 폐결핵에 걸려서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약투여 없이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메리의 모습에 아버지인 제임스는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항상 과거의 영광에 취해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항상 술에 취해서 산다. 아버지의 모습과 어머니의 마약투여 모습을 본 장남인 제임스 타이런 2세는 알콜중독자 및 패륜아가 된다. 안타깝게도 폐결핵에 걸려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에드먼드는 정말 손쓸 도리가 없다. 가족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참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이 작품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극의 전개를 기대하면 안 된다. 가족이 왜 불행하지에 대해서 서로 탓을 하면서 극이 전개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탓을 하고, 장남은 어머니와 아버지 탓을 하고, 차남은 아픈 자신의 몸을 탓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한다.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나면 기계가 고장나듯이, 가정이 한번 불행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불행을 되돌릴 수 없다. 내가 가족의 한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거창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 안부는 잘 전해드리고 있는지, 형제와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지 등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해야한다. 가정이 행복해질 수는 없더라도, 불행이 닥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