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빗》,
미국 중산층의 이기적이고 속물주의 가득한 한 남자의 순진하고 나약하며 외로운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싱크레이 루이스의 장편소설이다. '배빗'은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인 고유명사이지만, 이 소설을 계기로 '중산계급의 교육없는 속물'을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되어 버렸다. 이 소설에서 우리의 주인공 '배빗'은 중산층의 관습과 이상에 일부 반항해 보지만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종래의 인습에 순종하는 그런 인물로 그려진다.
소설의 내용만 간단히 살펴보자. 주인공 배빗은 미국 중서부 상업도시인 제니스에서 부동산 소개업을 하고 있는 중년의 성공한 실업가이다. 시간적 배경은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 초반이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미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경제적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시기이다. 유럽의 귀족계급과 같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특별한 제도가 없었던 미국사회에서 경제적 성공이 사회적 신분을 대변하던 그런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다.
배빗은 자신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실업가라고 우쭐대지만, 그의 삶은 나약하고 우습고 속물적인 외로운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닮고 있다. 자신을 도덕적 인물이라고 떠벌이지만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 남을 속이고 약자를 무자비하게 밟아버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다. 매일 술과 담배를 끊을 거라고 말하지만, 한번도 금주, 금연에 성공하지 못하는 나약한 의지의 인간이다. 그가 속한 클럽, 교회, 정치활동은 결국 그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이웃이나 친구의 사람됨이 아니라 연봉이 그의 가치를 나타내는 유일한 지표가 된다. 한 마디로 속물적 인간을 대변한다.
이런 그에게도 삶의 가치와 존재에 대한 회의가 몰려온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사실 그는 어릴적 법률을 공부에 정치가가 되는 꿈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사회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었고 그의 꿈은 어디로엔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도시생활과는 다른 또다른 삶의 가능성을 느껴보기도 하고, 기존사회의 가치에 대해 반란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 사회적 인습에 순종하는 그런 사람으로 돌아온다. 물론 그는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이상실현을 아들 테드를 통해 실현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인공 '배빗'의 모습은 경제적 이득, 사회의 도덕적 원칙, 잃어버린 자신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시공간적 배경이 우리와는 한참 떨어져 있지만 여러 장면에서 감추고 싶은 내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아마 이것이 위대한 고전의 힘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꿈과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도 해보지 않고, 사회적 압력에 굴복해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배빗의 삶을 통해 다시 느끼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떠오른다. 게츠비나 배빗이나 물질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20년대 미국인을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보다는 <배빗>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사회적 풍자의 형식을 딴 <배빗>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을 지적하는 것처럼 가슴을 후벼파고 지나가기 때문일까?
소시민의 삶을 풍자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미국 중산층의 교양 없는 속물 배빗의 이야기다.
(솔직히 살면서 속물 근성 버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속물 근성 없이 세상을 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속물 근성에 치를 떠는 경우가 생기는 걸 보면
아마도 그 속물 근성이라는 요소는 인생의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배빗은 자기 삶을 위해 그 근성을 버리지도 못하고 살아가기에
좋은 말을 들을 수 없는 인생을 채운 사람일지 몰라도,
외로움을 같이 안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모습에,
전후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했다고 하지만 시대를 거슬러도 변한 것 같지 않은 인간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쓴 웃음을 지으며 읽게 하지만,
이야기가 흐르는 과정이나 결말을 보고서도 그 쓴 웃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1920년대 당시의 미국은 금주법으로 인해 함부로 술을 만들지도 마시지도,공급하지도 못했었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집단이 밀주를 통해 수입을 만들곤 했다. 여기에 경제대공황이 있기 직전의 시대라 중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당시 시대가 정확하게 어떠했는지는 이전까지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지만 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 <배빗>을 통해서나마 어느 정도 당시 중산층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느껴볼 수 있었다. 중산층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묘사와 비교적 큰 사건 없이 대화와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기 때문에 일반 소설이 가질 수 있는 재미는 줄어들었을 지 몰라도 소설의 기능 중 하나인 사회에 대한 묘사나 제대로 된 현실반영 만큼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제목인 '배빗'은 영어사전에도 등재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는데,영어사전에는 '배빗'이 '취미가 저속한 사람,스스로 중산층인 체하는 저속한 실업가',즉 '속물'이라는 뜻으로 나오고 있는데,이 작품에서의 캐릭터 '배빗'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작품 속 '배빗'이 이런 캐릭터인 것이다. 작품에서 '배빗'은 중산층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인 조셉 F.배빗은 부동산 중개업자로,중서부의 허구의 도시 제니스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에 점점 싫증이 난 배빗이 자신을 이해해주는 여성과 몰래 만나기 시작하지만 금새 들통나고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당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적인 것임을 알려줌과 동시에 배빗 캐릭터를 통해 벗어나려고 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중산층의 고착된 구조를 보여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배빗과 아내,배빗과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통해서 배빗과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배빗의 잘못된 선택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과정에서도 싱클레어 루이스는 비교적 담담하고 전개해나가고 있는데,이런 담담한 전개 때문에 오히려 배빗의 행동이나 말이 다른 인물들에 대해 더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배빗이 잠시 외도를 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구조를 통해서는 몸은 그럴려고 했지만 마음만은 그러지 못하고 마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미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어떠한 문학적 기교나 표현 없이 그 시대의 생생한 모습을 비교적 자세하고 선명하게 묘사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90 여 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읽어야 할 세계명작으로 남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당시의 중산층이나 지금의 중산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면 작품 한 편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새삼 느끼게 만든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치있는 명작을 읽게 되어서 조금은 어려운 느낌도 들었지만 기대만큼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2013/9/30
통에서 꺼내든 이 책은 꼭 가벼운 벽돌 같았다. 노랑색이 예뻐서 읽고 싶다가도 손에서 두툼한 두께가 가늠이 되면서 내게 잠깐 왔다가는 책이 되면 어쩌나 싶어 읽기를 주저했다.
책을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얼마 전에 이 책을 소개했다. 고전이라 어렵다는 생각에 흘려들을 수 있었겠는데 그날은 이 책의 작가 루이스에 대한 이야기가 또렷이 들렸다. 그의 아버지와 형들은 의사다. 의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집안에서 루이스는 홀로 글을 쓰는 일을 했다. 후에 미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여하게 되는데 그런 영광스러운 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아버지와 그 가정은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상처로 그의 평생이 불행했고, 끝 또한 안타깝게 마쳤다. 그의 안타까운 삶의 배경을 들으며 라디오에서 소개하는 루이스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사실적인 글을 읽어보고 싶었다.
1920년 배빗은 아내와 세 자녀를 가족으로 둔 40대 중반의 가장이다. 부동산중개인을 하고 있으며 그의 삶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다. 가정 내에서는 배빗은 감정적이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아버지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도덕적인 삶을 지향했으며 자신이 속한 단체 어느 곳에서나 성실했고 열정적이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엔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책의 초반부터 거의 끝까지 배빗은 알 수 없는 불편함에 시달린다. 능력 있고, 완벽한 집을 갖추었으며, 교회, 파티나 협회 등 다양한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그다. 도대체 그의 불편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독자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에게서 눈에 띄게 보이는 말과 행동은 의외로 가부장적이고, 위선적이며, 속물적이다.
이 책을 보려면 당시가 어떤 시기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략적으로 미국의 1920년대는 호황과 불황이 있던 시기였고,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종교와 과학이 대립했으며, 보수와 진보간의 특히 노동자와 사업자의 관계 갈등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배빗]이란 책의 배경으로 당시 미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배빗과 주위의 모든 이들은 호황을 즐기며 단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그 모습을 저자는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배빗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수성가한 스타일이다. 그렇게 성장하며 자신의 지위나 평판이 상위층 사람들과 같이 나아지길 기대했고 그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간다. 가문이 좋고 상류층 위치의 이들에겐 열등감을 느꼈고, 자신보다 상황이 낫지 않은 이에겐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해도 속으로는 비웃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처음엔 내가 왜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중년 남성 배빗의 상황이 여성인 나는 이해가 안 됐고, 갈등과 번민 속에 빠지며 추태를 보이는 그의 모습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 책을 고전읽기책으로 선정한 라디오 방송의 작가들은 대체로 여자들이고 젊을 텐데 왜 하필 이 책이었던 건지, 그들은 이 책에서 독자들이 무엇을 보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소개했을까? 나는 계속 왜 이 책인지 질문했다.
배빗은 친구 폴을 통해 갑작스럽게 자신의 지지대가 없어졌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을 찾으려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정리했다. 더 이상은 남이 보는 시선과 남들이 쥐어주는 판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시각을 믿고 행동해 보기로 한다. 나는 배빗이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고, 남들의 협박에도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려 했던 모습에서 배빗의 용기에 감탄(?)했다. 한편으로 배빗은 그동안 갖고 있던 도덕적이고, 성취지향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자유롭고 솔직해져서 남들이 탈선으로 볼만한 행위들에도 빠져든다.
그의 짊어진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깨닫기까지 얼마나 그가 시대와 상황의 꼭두각시로 답답했을지 헤아려 봤다. 그런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선택을 따라 살아가기에 중년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도시의 힘이란 이름으로 한 인간의 존재를 억누르고 냉정하게 내던지는 사회현실을 루이스는 아래 문장으로 잘 표현했다.
방랑자를 길들이는 도시의 힘은 엄청나다. 도시는 거대한 산이나 해안을 침식하는 바다처럼 냉소적이고 침착한 성격을 유지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의 이면에 본질적인 목적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배빗은 가족을 등지고 산간 오지의 조 패러다이스와 함께 지냈고, 진보주의가 되었으며, 제니스에 도착하기 전 날 저녁까지만 해도 자신이나 도시가 더 이상 예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지 열흘 만에 그는 언제 떠났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p.384-385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고, 유지해야 할 사업이 있었다. 자신을 버티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배빗이 주관을 따른 대가는 실제로 자신의 팔을 자르고 귀를 베어가는 것처럼 그와 가족, 그의 지반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결국에는 이전의 배빗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던 배빗은 마지막에 다른 대안으로 자신의 주관을 표현했다.
이건 책에서 확인하시길.
내가 흔히 알고 있는 권력을 가진 이들,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어하는 정치인들, 보수의 길을 선택하기로 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들도 배빗과 같이 오랫동안 설키고 엮여서 끊을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이다가 그것들을 포기할 수 없는 처지까지 이르러 그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들의 의견과 같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감시의 눈을 발동하고 철저히 소외하며, 최악까지 몰아세우는 한 무리들의 잔인한 행위가 소름끼쳤다. 그런 모습이 지금이라고 없을까? 우리가 잘 아는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그 어느 때보다 누리고 있다고 하나는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모습은 있다. 나와 다른 이들과는 절대 나누고 싶지 않는 자신의 파이를 쥔 그 사람들이 있다. 권위를 향한 그들의 탐욕과 억지 그리고 비상식적인 부분들은 여전하다. 루이스는 그런 면들을 잘 통찰했고, 그 사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은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나도 배빗과 같은 중년에 들어섰지만,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빗을 통해 볼 수 있다. 누군가 내 선택과 신념에 끼어들어서 내 자유가 박탈당했을 때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무언가가 선택되었을 때, 그리고 그게 인생으로 지속되었을 때 인간은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하여도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과 판단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배빗을 통해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 어떤 것이 나의 삶을 통제하기 전에 나 자신을 잃지 않고, 표현하는 행위들을 멈추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속물은 왜 나쁜가. 속물이 되지 않겠다면서 속으로는 속물의 근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속물이 아닌 사람은 절대로 모를 일이다,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지. 또 완전한 속물도 고민을 할 일이 없다. 문제는 어중간한 속물이다. 속물을 경멸한다고 하면서 일정 부분 속물 속성을 끌어 안고 사는 사람. 나 같은 사람.
소설은, 썩 재미있지는 않았다. 기본적인 소개글을 안 보고 배빗이라는 이름이 지닌 뜻조차 모른 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비꼬면서 눈 흘기면서, 측은해 하면서 읽을 수 있었을까. 끝내 호감이 생겨 나지 않았던 이유가 미리 방어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게 결국 배빗 속에서 나를 만나고 말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내가 싫어졌기 때문인 건데.
1920년대가 배경인 소설이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셈이다. 미국에서 그랬다는데 지금의 우리와도 별 다를 게 없다. 이 속성은 본능처럼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하고 우리는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따르곤 하겠지. 나를 남과 구별짓고 싶은 마음은 무엇이고, 또 남들과 같이 만들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 걸까. 잘 산다는 건 어떤 것이고, 어찌하여 잘난 척 하고 싶어지게 된 것인지.
소설을 읽은 내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것, 이 또한 나의 버리지 못한 속물 근성 한 일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