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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다시 영원한 의문이 남는다. 나의 겸손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인가? 내가 잡어먹히게 되었으니 고맙게 됐다는 인사말을 요구하지 않고 나를 그냥 잡아먹으면 안 되는 것일까? 내가 두 주를 기다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누군가가 정말로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이렇게 상상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즉, 어떤 우주적인 조화를 위해 매일같이 어떤 생물이 희생되지 않으면 나머지 다른 생명체들이 살아 남을 수 없듯이, 삶의 가감의 법칙을 위해, 아니면 그 어떤 대조나 그 밖의 것들을 위해 나의 하찮은 삶, 즉 인류를 구성하는 한 원자의 삶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그다지 위대한 것이 아니란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자! 다른 식으로, 즉 끊임없이 서로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이 세계를 형성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나는 이것에 동의한다. 내가 그러한 세계의 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가정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을 만한 것도 있다. 만약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로 하여금 인식하게 했다면, 이 세상의 구조가 오류투성이인 데다가 그러한 오류가 없다면 버텨 나갈 수 없다는 것에 내가 왜 신경 써야 되겠는가? 그렇다고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하고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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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쳤다 라는 말을 이렇게 어렵게 빙빙 돌려 말하는 매력
도선생의 미친사람들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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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고 이걸 어떻게 읽나 싶으신 분들은 그냥 줄거리만 보셔도 됩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양상은 즐겁지만 사족이 많아 중간중간 좀 지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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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다시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고진이 잠잠해졌을 때(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공작은 조용히 상체를 수그리고 그와 나란히 앉았다. 그의 가슴은 몹시 심하게 두근거려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공작은 그를 훑어보았다. 로고진은 마치 공작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그를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공작은 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시간은 흘러 날이 새기 시작했다. 로고진은 간간이 그러다가는 돌연히 두서 없는 내용의 말을 날카롭게 소리 내어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함을 치다가는 갑자기 웃어 버리기도 했다. 공작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로고진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뺨도 쓰다듬어 주었다.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공작 자신은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다리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감정이 끝없는 우수를 동반하며 그의 마음을 짓눌러 왔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다. 마침내 공작은 무기력과 절망의 나락에 빠져 버린 듯 쿠션 위에 누워, 자기의 얼굴을 창백하게 굳어 버린 로고진의 얼굴에 갖다 대었다. 공작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로고진의 두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공작은 자신의 눈물을 의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이상 눈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적어도 여러 시간이 더 경과한 후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때 살인자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열병을 앓고 있었다. 공작은 꼼짝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서, 환자의 비명소리와 헛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떨리는 손을 황급히 뻗어 그의 머리와 뺨을 어루만져 달래 주듯이 쓰다듬었다. 하지만 공작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방으로 들어와 그를 에워싼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만약 슈나이더 교수가 스위스로부터 나타나 예전의 제자이자 환자인 공작을 지금 본다면, 치료차 스위스에 처음 도착했던 공작의 상태를 기억해 내곤, 손을 내저으면서 마치 그 당시처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백치!
사실 부유한 가문 출신에 수려한 용모를 갖추고 교육도 충분히 받았으며 머리가 영리하고 성품까지 착한 편인데도, 이렇다 할 재능이나 특징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어떠한 괴벽이나 자기 사상마저도 없는, 철저하게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안타까울 때가 없다. 말하자면 이러한 경우들이다. 재산은 있되 로스차일드와 같은 부호는 못 된다. 뼈대 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되 가문의 명예를 세워 볼 만한 업적이 전혀 없다. 용모는 뛰어나되 표정이 풍부하지는 못하다. 그럴듯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써먹을 줄 모른다. 지성은 있되 본인의 사상이 없다. 가슴은 있되 관용이 없다. 만사가 다 이런 식이다. p.709-710
백치를 읽고, 결과주의에 반하여 (상) 먼저 읽기
나는 세상이 양면적임을 굳게 믿는다. 이 세상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양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100%, 완벽한, 순수한 따위의 수식을 의심한다. 내가 행하는 이타적인 행동에는 내가 행복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있고, 가장 이기적인 동기 속에도 내 주변 사람들은 챙기려는 이타적 마음이 숨어있는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많은 이들이 결혼 생활을 두고 이야기 하듯) 사랑과 증오가 밀접하게 붙어 있는 것도 그 예시이다. 백치에 나온 대로라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혐오할 수도 있다. 내가 나를 혐오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도 나를 욕해주기를 묘하게 욕망한다. 그러면서도 나를 욕하는 그 사람에게 분개한다. 하지만 칭찬을 받거나 사랑을 받으면 나는 이런 취급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만방에 표출하기 위해 그릇된 행동을 더욱 찾아서 한다. 나를 타락시키는 고통 속에는 행복이 있다. 이중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너무나도 많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이중성을 누구보다 잘 찾아내고 표현하는 작가다.
세계가 이렇듯 이중적임을 인정한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평가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만약 세계가 선과 악의 대립이라면, 모든 소설은 악을 타도하고 선을 지향하는 것으로 끝맺음 될 것이다. 만약 모든 재판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하다면 판사는 필요 없고 그냥 컴퓨터로 재판을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복잡한 곳에 산다. 선과 악은 연결돼 있고,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있는 사건도 있으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얽혀 있는 사건도 있다. 파고 들어가면 가해자가 사실은 이 사회의 피해자인 경우도 많다. 그래서 소설가들은 이 양면적인 세상에서 양면적인 인물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실현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마광수 교수의 작가 정신 하에서라면 세계는 약간 이분법적이다. 진보와 보수가 있고, 기성도덕과 새롭게 창조된 질서가 있는 식이다. 여기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죄악이다. 현재의 잘못된 점을 깨고 나가야 한다. 심지어 마광수 교수는 잘못된 점이 없더라도,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대를 초월해서 아직까지도 꾸준히 읽힐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 시대의 비판에서 머물렀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양면성 앞에서 나약한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민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양면성은 우리 주위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다. 선택이라는 것이 하나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붙잡을 거리가 없다. 무엇을 선택해도 장단점이 있고, 내가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과 내가 반드시 쟁취해야 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기도 한다. 여유롭게 살고 싶어서 고액연봉의 회사에 취직했는데, 회사 일에 허덕이다보니 여유로운 삶이 없다든지 하는 식으로, 모순이나 역설이 실생활에도 난무하고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서 고민한다. 그러다보면 손쉽게 결과주의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다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뭔들 못하겠어, 하며 기본을 망각하고는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백치’ 속 레베제프처럼, 음흉한 간계를 꾸미고 돈에 양심을 팔고 배신에 배신을 일삼을 지도 모른다. 또 그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그의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고통이 켜켜히 쌓여있기 때문이다.
마광수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기존 질서는 썩었다며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다. 이상과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가 모자란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고통받고 고민하는 인간에게 신을 말해주고 그 순간에도 잊으면 안 되는 선한 가치들을 말해준다. 그리곤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희미한 대답을 전해준다. 그건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기독교적 진리이지만, 굳이 기독교적일 필요 없이 자신이 어린(순수했던) 시절 믿었던 올바른 가치관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런 진리라 일컬어지는 이 세상의 가장 선한 부분들을 감동적으로 전해서 각박한 세상을 이겨나갈 힘을 주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미학인 듯하다.
미쉬낀은 실패자에다가 백치이다. 그는 결국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비극을 초래해버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위로 받을 수도 있다. 이소라의 노래를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이소라의 노래는 극한의 우울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지만, 그런 우울이 싫지가 않다. 오히려 노래가 끝날 때쯤에는 그녀가 나와 함께 울어줘서 위로 받았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미쉬낀의 모습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 고민하고 고통 받고 나약했던 미쉬낀, 그는 정말 잘해보려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 했다. 하지만 그가 발 빠르게 움직여서 나스타샤와 로고진이 결혼하도록 돕고 아글라야와 결혼 해서 ‘기존 통념’대로 살았다면, 그것만큼 좋은 결말도 없지만 그것만큼 실망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사랑스러운 나스타샤가 결코 로고진과 함께 행복할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쉬낀은 타인의 고통을 목도하고도 그것을 눈감는 자가 될 수는 없었다. 설령 스스로가 파멸할 지라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렇게 믿는다. 잘 산다는 것은 결과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을 맞지 못했다고 해서 미쉬낀의 나약함을 욕할 수는 없다. 잘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가능성이다. 인간이 그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이다. 마광수 교수는 잘 살기 힘든 사회 환경을 탓하는 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와 상관없이 일단은 지켜야 할 인간적 가치들을 주장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미쉬낀이 의미가 있다.
결과주의로 평가한다면 처음에 느꼈던 대로 미쉬낀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다. 이런 긴 책의 주인공인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의 멍청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좋다. 나는 그저 잘 살고 싶을 뿐이다.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말과 그런 인식이 나는 아쉽다. 나는 착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돈과 욕심과 허위와 가식에 찌들려 살기 보다는 잘 살고 싶다. 그렇게 해서 내가 결과적으로 행복할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잘 산다는 건 결과가 아니니까. 순수는 비극도 희극도 아무것도 담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배부른 돼지를 바라보는 소크라테스의 마음과도 흡사하게 ‘잘 사는’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보고 자랐는데 그것을 배신할 수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내게 준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기존 도덕, 다시 말해 평등과 박애, 사랑과 믿음 등의 진리가 내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것들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잘 살아 보자고 말하고 싶다. 잘 산다는 건 결과가 아니다. 처음에 말했듯이 어려운 책이었지만 마지막은 아름답게 느꼈다고 했다. 마지막 그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실패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고 인간답게 산 최후는 가슴 아프지만 아름답다. 마광수 교수가 주장하듯 그 시대와 마찬가지로 물론 오늘날 이 사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래도 그런 핑계에 나를 맡기느니 한 번 잘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내 중심을 잃지 않고 잘 살아 가는데 도움이 되는 작가다 내 가치관의 핵심 축을 담당하는 작가다 그를 통해 나는 힘들어도 한 번 살아봐야겠다고, 그것도 좀 잘 살아봐야겠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