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지 오웰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그때 읽었던 책은 1930년대 경제공황의 시기 탄광지대 실업문제를 다룬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1984]와 [동물농장]을 읽고선 오웰을 잊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에 읽었던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하게 [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을 읽으면서 갑작스레 오웰의 글쓰기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인 산문들을 뽑아 모은 [코끼리를 쏘다]를 읽었는데, 산문들을 읽을수록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이나 오웰의 삶의 이력 등이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그의 전작읽기는 아니래도 몇 편의 작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첫 번째로 손에 잡은 것이 오웰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버마 시절]이다.
버마는 미얀마의 옛 이름이다. 예전에 국호가 버마였던 시절 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의 발목을 잡았던 일이 잦아 미얀마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게 들리기도 하는 나라이다. 오웰은 우리식으로 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대영제국주의 경찰로 인도에 근무하는 것이었다. 당시 버마는 독립적인 나라가 아니라 인도로 편입된 한 지방의 명칭이었고, 오웰은 버마에서 인도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했지만 제국주의의 허구와 억압에 회의를 느끼면서 5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간다. 이 작품은 그가 당시의 경험과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을 비판한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은 버마의 ‘카우크타다’라는 읍에서 벌어지는 영국인과 현지인들,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들의 일상의 삶을 통해 제국주의의 허상을 파헤치고 있다. 4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상 버마의 주도(州都) 카우크타다에는 유럽인이 일곱 명 거주한다. 그중 3명은 관리이고, 다른 3명은 목재회사의 주재원이며, 나머지 1명은 한 목재회사 주재소장의 부인이다. 즉 7명의 유럽인 중 1명만이 결혼을 했고, 나머지 6명은 모두 미혼인 셈이다. 카우크타다에는 이들을 위한 클럽이 있는데 현지인들에겐 회원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거창한 곳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필요한 공지사항을 게시하거나, 회의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모여서 술을 마시거나, 잡담을 할 수 있는 공간일 뿐이다. 현지인들은 이들 유럽인들을 ‘푸카 사히브’라 부르는데, 이는 ‘위대한 주인 나리’란 뜻으로 인도의 피식민지 원주민들이 백인 지배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클럽은 인도제국에서 유럽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나 있었고, 그곳의 유럽인들을 푸카 사히브로 만들어주는 상징적인 장치이기도 했다.
서사의 축은 둘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주인공인 플로리와 부모를 잃고 카우크타다에 와서 삼촌 집에 얹혀사는 백인여자 엘리자베스 사이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인 의사이자 교도소장인 베라스와미와 하급 치안판사 우포킨이 벌이는 주도권 다툼이다. 플로리와 베라스와미는 지배인과 피지배인의 관계를 떠나 친구인 까닭에 두 이야기는 끊임없이 서로를 간섭하고, 종내에는 서사를 비극적인 종말로 이끈다. 그들이 만날 때면 정치적인 성격의 논쟁이 자주 벌어지지만 논쟁의 모순은 항상 영국인은 반영국적이고, 인도인은 친영국적인데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다른 영국인들에게는 불편한 일이기도 했다. 푸카 사히브가 현지인과 친구를 맺는다는 것은 스스로 푸카 사히브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베라스와미는 영국인에 대해 광적일 정도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영국인들의 생각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럼에도 그는 현지인일 뿐이었다.
스무 살도 안되어 버마에 와 15년가량 지낸 35살의 플로리는 해가 바뀔 때마다 더 외로웠고 더 비참한 심정이 들었다. 철이 들면서 그는 영국인들과 그들의 제국에 대한 진실을 통찰했고,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자신이 소속되어 살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심한 증오였기 때문이다. 그런 플로리가 엘리자베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희망을 갖는다. 오갈데없는 엘리자베스를 카우크타다로 불러들인 것은 목재회사 주재소장인 삼촌과 그의 부인인 숙모였다. 할 일이 없어 빈곤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는 희망을 안고 이곳으로 왔다. 엘리자베스는 플로리가 원주민들에 대해 얘기할 때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하고, 버마의 관습과 버마인들의 특성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불쾌했지만, 같이 사냥을 하고난 후 그가 청혼하면 승낙하리라 생각한다. 허나 플로리는 소심한 성격 탓에 청혼의 말을 하지 못하고, 엘리자베스는 카우크타다에 처음 파견된 헌병 베랄이 오자 급속하게 그에게로 마음이 기운다. 베랄은 카우크타다에 있는 모든 영국인들을 무시했고, 엘리자베스는 그와 가까워져 매일같이 클럽에서 춤을 추고 승마를 하며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허나 어느 날 베랄은 말없이 떠났고 엘리자베스는 다시 플로리에게 다가간다.
우포킨과 베라스와미와 싸움은 유럽인 클럽에 한명의 현지인을 뽑는 것을 두고 급박하게 진행된다. 플로리가 다른 영국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라스와미를 추천하자, 우포킨은 플로리를 모욕하여 그의 말의 신뢰를 떨어뜨리기로 음모를 꾸민다. 6주마다 한번 거행되는 예배가 교회에서 열리고 모든 영국인과 현지인 신자 몇 명이 참석하여 예배를 보는 도중, 우포킨의 사주를 받은 플로리의 전(前) 정부(情婦)였던 마 홀라 메이가 나타나 플로리에게 사기꾼이라 소리치며 돈을 달라며 난동을 부린다. 서둘러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플로리는 엘리자베스에게 사정을 하지만 그녀는 냉담하게 돌아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플로리는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오웰은 이 작품에서 우포킨과 베라스와미로 대표되는 현지인 관료들의 수탈이나 부패, 혹은 친영국적인 행태 등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현지인들의 반민족적 행위를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현지인들의 친영국적인 행태가 아니라 제국주의 영국의 허구성과 억압성이었다. 그들이 식민지에서 펼치는 제국주의적 통치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착취였고, 그들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현지인에 대한 경멸이었다. 오웰은 버마에서 일어나는 제국주의 통치행태를 목격하고 증오하지만, 그런 정치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곳에서 탈출하지도 못하면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플로리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어쩌면 작품 속 주인공인 플로리는 오웰 자신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플로리의 절망적인 모습에서 산문 <코끼리를 쏘다>에 나타난 오웰의 모습을 연상했다면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일까?
오웰에 대한 호기심에 읽은 작품이지만 읽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오웰이 추구하고자 했던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라는 것에 의미를 둔 나머지 자꾸 오독하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의 세상 또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제국주의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자꾸만 소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읽었던 오웰의 작품 모두가 현재에도 유효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구매하면서 오웰의 다른 책 두 권을 더 구입했었다. 둘 중에 어느 것을 먼저 읽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조지 오웰의 두번째 발표작인 이 소설은 이전작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과 비교했을 때 인물, 사건, 배경 모든 면에 있어 허구의 성격이 보다 짙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역시 오웰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과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 주제는 바로 "제국주의의 허상"이다.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것이 아직은 이 책 하나뿐인데 '조지 오웰의 정치의식과 인간관'이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영남대학교 박경서 교수의 노고가 담긴 귀중한 결과물이기에 30년째 중학영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판매량이 걱정되는 이 작품을 혼신을 다해 번역해주심에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오웰은 1946년에 쓴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나는 결말이 불행하고, 세부묘사와 빼어난 비유가 그득하고, 부분적으로는 소리 때문에 선택한 단어들로 만든 미사여구도 아낌없이 들어간 묵직한 자연주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라고 밝히며 이 소설을 잠깐 언급한 적이 있기에 몹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손에서 태어난 자연주의 소설이라니.
또, 주요배경이 정글숲이 우거진, 아열대의 낭만이 살아있을 미지의 세계 '버마'라니.
오웰은 또 그 천재적인 문장력으로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냈을까?
내용은 어둡더라도 곳곳에 냉소적인 유머도 적당히 깔려 있을 것이고 경치 묘사 하나는 끝내주겠지?
뭐 이런 예상들을 했던 것 같다.
총평부터 말하면 이야기만 두고 봤을 때, 이 소설이 어째서 번역판이 하나뿐인지 알 것 같았다. (응?)
<동물농장>처럼 이런 저런 시대적 배경을 따지지 않더라도 단시간에 후루룩 읽어낼 수 있다거나 각 캐릭터들에 대해 연민,증오,애정 등과 같은 평범한 감정을 이입하거나 해서 단순히 재미로 읽을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때문에 나처럼 오웰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다면 일반독자들은 굳이 이 소설을 찾아 읽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자취를 좇는 과정에서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므로 그 사실만으로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버마라는 나라와 영국,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었기에 후반에 배치된 작품해설을 먼저 읽었는데 그것이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인물과 그들 각각의 행동, 그리고 사건 하나 하나에 의미를 찾으며 집중할 수 있었달까.
처음에는 남자주인공인 플로리가 오웰이 제국경찰 시절의 본인 모습을 투영한 캐릭터가 아닌가 했지만 (일부 녹아 있기도 하겠지만) 최종적으로 드는 생각은 플로리 자체가 제국주의라는 하나의 대상을 은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야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기에 취향,지성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버마에서 몇 안되는 유럽인, 게다가 버마에서는 쉬이 마주치기도 힘든 '백인여자'라는 이유로 플로리가 아내로 맞으려 무던히도 애썼던 엘리자베스라는 인물도 있다. 그녀에게서는 상황에 따라 자기 잇속만을 챙기며 처신을 달리하는 모습에서 모양새야 어떻든 정신승리를 통해서라도 제국주의를 합리화시키려 드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또한 플로리의 정부인 버마 여인 '마 흘라 메이'는 결과적으로 플로리를 죽음으로 내모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지만 그의 사후 매음굴에서 일하며 한 때 유럽인의 정부였던 시절, 동족을 하인으로 부리며 안락한 생활에 빠져 지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버마인이면서도 버마인을 폄하하는 의사 베라스와미와 결은 다르지만 개인적 영달을 위해 기꺼이 매국의 길을 택하는 부류와 닮아있다.
그런 면에서 플로리의 죽음은 '제국주의'라는 정치 사상의 죽음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 역자는 미국의 문학 비평가 '어빙 하우'라는 사람의 말을 빌어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갈등하는 주인공 플로리의 죽음이 '개인의 이상이 정치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절되고 그 결과 개인이 소외되고 희생되는 모습을 주로 다룬다'는 측면에서 전형적인 정치소설의 특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 소설에 대한 최종 정리는 고세훈 고려대교수가 쓴 <조지 오웰 -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라는 책의 2장에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나와 있기에 함께 읽으면 좀 더 명료해질 것 같지만 이 책에 실린 박경서 교수의 맺음말 중에서 간결하게 정리된 것이 있기에 옮기며 이만 리뷰를 마무리해야겠다.
결론적으로 <버마시절>은 버마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영국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인 동시에, 그러한 제국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탐색하는 날카로운 시선이다. 즉 피지배자들은 물론 지배자 자신들조차 자기 파멸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죽어 가는 플로리처럼 제국주의라는 정치 메커니즘에 항거를 하는 이든, 혹은 클럽 회원처럼 그 메커니즘에 봉사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든, 거기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파멸하거나 타락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제국주의라는 현실 세계는 지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그 본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예쁜 표지. 버마가 아시아 국가인 건 알았지만 정확히 위치가 어디인지 몰랐는데 중국 아래쪽 국경과 맞닿아 있었고 인도와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소설에서 계속 버마를 두고 인도정부를 언급해서 완전히 붙어 있나 생각했었는데 정작 지도에서 찾아보니 인도와 버마 사이에는 방글라데시가 떡하니 끼어있어 붙어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이 책의 해설에는 1886년 1월 1일부로 영국이 하나의 나라였던 버마를 영국령 인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다고 나와 있다. 다시 말하면 소설에서 지칭하는 '버마'는 국가명이 아닌 지역명이었던 것이다.(오! 놀라워!)
*나중에 다른 출판사에서 <버마시절>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그 때는 제국주의고 뭐고를 떠나 오웰이 말한대로 지극히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소설'로 읽어보고 싶다. ㅎㅎ
시작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대영제국의 경찰로 버마에서 제국주의 앞잡이로서의 삶을 살아 본, 조지 오웰이 쓴 <버마시절>에서 나오는, 서른 다섯 살의 노총각 목재상인 플로리는 유일하게 원주민인 버마인에게 동정적인 백인이다.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진화론에 근거를 둔, 개발을 통한 문명화 논리에 의해 <민족개조론>을 저술한 춘원 이광수나, 독립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우남 이승만처럼, 버마인 의사이자 카우크타다 읍(邑)의 교도소장인 베라스와미는 당신은 사업하러 이곳에 오셨다고 말했지요? 당연합니다. 버마인들이 스스로 무역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계와 배를 만들고 철도와 도로를 건설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지요. 만일 영국 사람들이 이곳에 없다면 버마 정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즉시 정글을 일본에 팔아먹을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정글을 송두리째 오려낼 것이니 황폐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죠. 대신 당신들의 손에 맡기면 정글은 실제적으로 좋아지죠. 그리고 당신네 사업가들은 우리 국토의 자원을 개발하고, 관리들은 우리를 문명화시켜 당신들 수준까지 끌어올리죠. 이것은 자기희생의 빛나는 기록입니다.1)라고 말하며 영국의 식민통치를 옹호한다.
플로리가 버마에서 “백인 나리”로 생활하였는데, 젊음을 낭비하고서야 비로소 그의 허약한 지성은 조국(祖國)의 행태가 분명히 자비롭긴 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약탈인 전제 정부2)임을 깨닫게 되었다.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수많은, 나약한 지식인처럼 그도 다른 백인들과의 형식적인 유대관계를 끊고 홀로 버마인과 살아갈 용기가 없었기에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단지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의 작가인 다케야마 미치오[竹山道雄]는 <버마의 하프>에서 미즈시마 상병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인간상을 그려냈다.
미즈시마 상병은 수염이 짙은 다른 일본인과 달리 버마인처럼 수염이 옅어서 버마인 승려 흉내를 내면서 자주 정찰을 다녔는데, 종전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고 옥쇄(玉碎)하려는 다른 부대를 설득하러 갔다가 부상을 입고 식인종 부락에 의해 구조(?)된다.
다행히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식인종의 입으로 사라질 위기에서 벗어난 미즈시마 상병은 아내가 될 뻔 했던 식인종 추장 딸이 건네 준 고승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포로수용소로 되돌아 가는 길에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일본군의 시체와 유골 등을 보고 고민에 빠진다.
외로움을 대하는 두 사람의 자세
<버마시절>의 플로리는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버마인 정부(情婦)를 두고 백인으로써 특권을 누리는 것에 대해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출세지향적인 버마인 하급 치안 판사 우 포 킨의 사주를 받은 버마인 정부(情婦)가 벌인 소동으로 결혼을 생각했던 엘리자베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엘리자베스가 출현하기 전의 외로운 상태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 그는 다시 이곳 – 오래되고 비밀스러운 삶 – 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끝장난 뒤, 예전에 속했던 곳으로 말이다.
이러한 생활을 참을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도 잘 참아 왔다. 외로움을 달래 주는 것들이 있다. – 책, 꽃밭, 술, 일, 매춘부, 사냥, 의사와의 대화.
아니다. 이제 이런 것들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의 몸 속에서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고통을 감내하는 힘, 무엇보다 희망의 힘이 엘리자베스가 온 이후 새롭게 솟아올랐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살아왔던, 그럭저럭 지낼 만한 정도의 무기력도 사라졌다. 그러므로 지금 고통을 당한다면 앞으로는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의 나날이 될 것이다.3)
본디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한번 가졌던 것을 빼앗기면 더 큰 박탈감에 시달리게 되는 법이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앞두고 행복했던 플로리도 엘리자베스로부터 버림받자 더 이상 외로움을 견딜 힘이 없어 권총으로 자살하게 된 것이다.
반면, <버마의 하프>의 미즈시마 상병은 포로수용소로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일본군의 시체와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버마 곳곳에 팽개쳐진 일본군의 시체와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앞으로 영원히 서툰 버마어로 버마인 사이에서 외톨이로 남는 것을 감수한다.
어쩌면 <버마시절>의 플로리보다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미즈시마 상병에게는 플로리와 달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다. 그는 단지 버마에서 죽은 일본군의 시체와 유골을 수습하는 데 그쳤을 뿐, 더 이상 적극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일본의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버마시절은 오웰의 버마에서의 경찰관 노릇을 하면서 겪었던 상황에서 얻은 경험을 담은 책이다. 오웰의 소설답게, 비록 해피앤딩은 아니지만, 메시지를 던진다 “변한 건 하나도 없다.”고, 단지 플로리(주인공)만 사라졌을 뿐이다. 플로리의 하인들 역시 주인의 비극 속에서 비슷한 비참함으로 마감하는군요. 그의 제국의 경찰 노릇을 한 것에 대한 반성인지 아니면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인지는
어떻게 보면 이 글은 아주 간단한 식민지 이야기입니다. 영국령인 버마에서 영국인들의 삶과 버마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의 삶이라고 해야 하나. 그 속에서 개인들의 욕망과 음모 그리고 사랑을.
백인나리들의 버마에서의 삶, 어떻게 보면 이들도 조국에서는 2등 시민에 지나지 않은 사람들 아닐까? 그들끼리 버마의 상황을 불평과 욕을 하면서, 나름 버마인들을 부리며 잘 누리고 생활한다. 하지만 변화된 정책, 폐쇄된 백인사교클럽에 현지인을 받아들이라는 국장의 권고로, 사건은 시작된다. 거기에다, 우리로 치면 친일의 앞잡이 비슷한 현지인 관리 중국계 버마인, 우 포 킨의 권력욕과 그에 따른 음모와 병원장 인도인 베라스와미와의 경쟁에서 많은 사건들은 일어난다. 버마에서의 인도계와 중국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을 비유한 것인지는.우 포 킨과 베라스와미의 목표는 이 백인사교클럽의 회원이 되는 것이라니, 우리가 보기에는 별 것 아니지만, 식민지 피지배자가 지배자와 같은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기에 그들의 꿈이자 희망이다.
백인나으리들의 규칙을 보라. 1, 우리의 특권을 고수하자! 2. 겉으로도 부드럽지 않은 강인한 모습을 보이자! 3. 우리 백인들은 뭉쳐야 한다! 4. 그들은 한 치를 주면 한 자를 달라고 한다! 5. 단결하자!을 보라. 이 당신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조금 삐딱한 플로리, 백인나리인데, 현지인 베라스와미와 친교를 갖고,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그에게도 나리의 위치는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플로리는 영국을 비난하고 베라스와미는 영국을 칭찬하고, 왜 플로리는 이 지배적인 제도가 마음에 들지가 않고, 현지인들을 조금 이해해가기 시작했기에, 다른 백인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그도 나름 편안한 삶을 살았으나, 어느 날 지옥 같은 이곳을 찾아온 천사 같은 엘리자베스 때문에 많은 사건이 벌어진다.
예술가 흉내 내는 어머니와 파리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엘리자베스는 엄마의 죽음과 숙모의 권유(버마로 와서 결혼)로 지금보다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머나먼 버마로 왔다. 그녀는 어머니로 인해 예술이나, 문학, 철학 등이 죽으라고 싫다.
플로리는 엘리자베스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그녀를 버마연극, 현지 시장 등을 보여주지만, 이것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유럽의 삶을 원하는 그녀에게는. “아름답다고요? 너무 흉측해서 도저히 볼 수가 없어요. 저 사람들은 정말 야만인들이예요!” 그녀는 원주민들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플로리의 예술적인, 문학적인 생각들이 더 싫다.
베라 스와미 경쟁에 불을 땅긴 우 포 킨과 자신이 영웅이 될 반란의 음모를 점점 진행시킨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우 포 킨의 부인과 나누는 대화에서 우 포 킨의 모든 악행은 불탑을 만들면 이 모든 죄가 사라진다니. 우매한 믿음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
플로리와 엘리자베스에게 가시가 된 정부 마 흘라 메이와 음모가 그들을 기다린다. 엘리자베스는 사냥에서 플로리의 남성다움과 영웅적인 모습을 보며, 다시 사랑의 싹을 터 오르지만, “그가 과연 청혼을 할까? 그가 너무 질질 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하지만 그녀를 흔들리게 하는 젊은 남자의 베랄중위의 등장과 더 나은 조건에, 숙모의 충고로 플로리를 멀리하고, 베랄과 즐거운 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베랄은 바람둥이, 거기에다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는 이 아가씨를 사랑하게 될까?
마침내 클럽의 회원선출로 백인나리들과 대립하는 플로니는 베라스와미를 추천한다. 또 다른 사건, 맥스웰이 시체로 발견된다. 백인나리가 살해 당하다니. “백인이 살해된다면 그것은 끔찍한 행위로 신성 모독에 비견되는 일이 된다.” 곧 이어서 우포킨이 조작한 반란이 일어나 원주민들이 클럽하우스를 포위한다. 백인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위험을 무릅쓰고, 플로리는 클럽하우스를 탈출하여 경찰들에게 진압을 명령한다. 이 일로 유럽인들에게 영웅이 된다. 폭동 진압의 영예를 얻으려던 우 포 킨은 플로리로 인해 좌절한다. 그에게 복수를.
떠나버린 베랄. 엘리자베스는 이제는 누구를 잡아야 하나. 6주마다 거행 되는 예배에 참석한 플로리는 희망에 부풀지만, 그에게는 그가 뿌리 씨앗이 돌아온다. 우 포 킨의 사주로 교회에서 추태를 부리는 메이, 그는 얼굴의 모반을 감추려고 그렇게 노력하면서도, 자신에게 가장 큰 모반인 메이를 방치한 것이다. 엘리자베스에게 버림받은 플로리 “이 세상에서 당신을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는 것만 알아줘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에게는 어떤 길이 남았는가? 마지막 선택, 자살(죽음).
그 후 베라스와미는 보조의사로 강등되고, 우 포 킨은 클럽의 회원으로 선출되고, 출세했지만, 그는 그의 탑을 쌓지 못했다. “그는 죄를 사하는 탑의 벽돌을 한 장도 쌓지 못한 채 뇌졸증에 걸려 말 한마디 못하고 죽어버렸다.”. 엘리자베스는 결국 돈 한 푼 없이 결혼도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지만, 맥그리거의 청혼을 받고, 결혼하여 “마님”의 직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버마의 그 당시의 모습과 사람들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이해하기 너무 힘든 삶인가? 아니면 철저한 계급적 관념으로 그들의 눈을 가려버린 것인가? 제국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가 아니면, 편의와 교육이 만든 산물인가? 이런 삶 속의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한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지도, 발전하지 못한다. 개인의 방황(제국주의)와 사람들인 대한 번민(인도주의, 사랑)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생각이고, 바라는 만큼밖에는.. 그의 업보로 인한 파멸. 부끄러움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나.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가? 이보다 더한 사람도 수많은 것 인데, 양심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유는 무얼까 궁금하다. 사랑이 사라지고 현실만이 남는다. 현실은 계속된다.
오웰의 제국주의에 대한 메시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우리는 과거의 제국 같은 보이지 않는 손들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또한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원주민들의 모습,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동양인에 대한 생각이었으리라. 오웰은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그의 수많은 경험과 실천을 바탕으로 한 쓴 글이고, 사태를 보는 그의 탁월한 눈이 우리를 이끌 수 있을 것 같다. 쉼 없이 달리는 글속에 파묻혀 시간을 잃어 버렸다.
과거의 글들도 다시 보자. 주옥 같은 글들이 많이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