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편 및 단편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표제작인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대해 쓴다.
작품의 첫 문장이다. 여기서 19xx년은 1차대전의 불길함을 나타낸다고 하고, 아센바흐라는 이름 역시 어떤 조짐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이 첫 문장은 제목에서도 직접 나타내고 있는 것과 같이 죽음 혹은 불길함을 암시한다고. 대충 읽으면 뭐 첫문장부터 중언부언하나 싶은데, 구스타프 아센바흐 가운데 폰이 붙은 건 귀족 작위가 붙었다는 그런 의미로서, 작품 내내 흐르고 있는 거짓과 속임수라는 의미와도 통하는 게 있다. 원래는 귀족이 아니었는데, 글을 잘 써서(?) 귀족 작위를 받은 뭐 그런 뜻으로 이해했다.
50번째 생일 이후 공식적으로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우리 대륙에서 몇 달 동안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던 19××년** 어느 봄날 오후 뮌헨의 프린츠레겐텐 가에 위치한 집을 나와 혼자 꽤 멀리까지 산책을 갔다 (박종대 역)
구스타프 아센바흐, 또는 50회 생일 때부터 공식적으로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로 불린 그는, 유럽 대륙에서 몇 달 동안 불길한 조짐을 보여 온 19××년[1] 어느 봄날 오후, 뮌헨의 프린츠레겐텐 가에 있는 자신의 집을 나와 혼자 꽤 멀리 산보를 했다 (홍성광 역)
매일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날 문득 삶에 브레이크를 거는 어떤 순간들이 올 때가 있다. 이 책이 쓰여진 100년 전에는 사실 TV나 영화 인터넷과 같은 매체가 끊임없이 소비를 부축이고 자극하는 때가 아닌지라, 일탈을 꿈꾸는 일도 흔치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도시 바이에른에 살고 있는 성공한 작가 아센바흐가 베네치아로 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길에서 이방인인 듯한 이국인을 보고 나서다.
그것은 떠돌아다니는 불안감 같은 것이자, 먼 곳에 대한 청춘의 갈망이자, 생생하고 새로우면서도 오래 전에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 현대문학 단편선 토마스만 편
발작처럼 일어난 훌쩍 떠나고 싶은 격정적인 욕구는 그를 성공으로 이끈 그의 자기규율과 이성에 의해서도 억제되지 않고,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떠나기에 이른다. 그동안 감정을 가혹할 정도로 억누르고 차갑게 식혀온 아센바흐가 그것도 이성보다는 감성이 억제보다는 충동으로 더 잘 표현되는 베니스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향후 그곳에서 있을 사건을 예건하는 전조로 보인다.
여행길에 오른 후, 아센바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몇몇 사소한 사건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 중 가장 강렬하게 그의 심리를 설명하고 소설의 주제와도 관통하는 부분은 염색과 화장으로 교묘하게 나이를 감춘 늙은이가 젊은이들과 함께 호탕하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는 그 늙은이의 추한 기만에 경악을 느낄만큼 혐오하는데, 결국 그 모습은 작품 내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훗날 그가 타지오를 욕망하면서 결국 그 늙은이와 다를 바 없이 염색을 하고 화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베니스에서 맨 처음 마주친 곤돌라 사공 역시 공용 보트를 이용하려는 그를 속여 직접 리도로 향하는데, 후에 면허증이 없는 가짜임이 드러난다. 가장 커다란 거짓말은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는 도시의 침묵이다. 호텔 지배인, 악사,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작정을 하고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콜레라 발생 사실을 적극적으로 숨긴다. 즉 작품 전체에는 아센바흐가 마주하고 있는 거짓과 속임수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아센바흐는 그것을 알아차리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오히려 그 거짓에 묘하게 끌려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거짓으로 가득찬 베니스에서 그는 예술적이고 충동적인 욕구를 발견한다. 그 가장 중요한 핵심에 타지오가 있다. 호텔과 해변에서 그는 여자들에게 둘러쌓인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매일 만나는데, 그에게 끌리는 욕망은 동성애적이고 말초적인 것인지 단순히 아름다움에 끌리는 예술적인 것인지 독자로서는 알 수는 없으나,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시에서 그것을 모르는 척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분명 스토커인데,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눈길만 스칠 뿐인, 스토커임을 증명할 길도 없는 난해한 스토커이다.
암시와 상징이 곳곳에 깔려있지만, 실제로 타지오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주치고, 소년을 몰래 따라다니고 관찰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의 불안한 내면을 따라 읽을 뿐이다. 알고 보면 별 내용도 없는데, 토마스 만의 소설 중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듯하고, 읽으면 읽을 수록 그 속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듯해 박종대 버전으로 한 번 더 읽으려고 했는데, 다른 읽을 것도 많고 해서 여기까지.
토마스 만의 중단편소설집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는 1세기 전 유럽사회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표제작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등 8편의 중편과 단편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이들 작품들을 통하여 ‘예술가와 시민, 예술과 견실한 삶, 정신과 자연의 갈등과 조화라고 하는 토마스 만의 주제 의식이 더욱 깊어져 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라고 출판사에서는 안내합니다.
이런 설명은 첫 작품「글라디우스 데이」에서 실감하게 됩니다. 뮌헨의 한 화랑에 걸려 대중의 화제가 되고있는 마돈나의 그림이 허접한 것이라고 믿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중세 네덜란드의 화가)를 등장시켜 그 그림을 내치라고 요구합니다. 예술이 아니라는 이유입니다. 그는 “예술이란 존재의 깊디깊은 곳까지, 수치스럽고 비탄에 가득 찬 존재의 심연까지 속속들이 자비롭게 불 밝혀 주는 성스러운 횃불입니다. 예술이란 구원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활활 타오르다가 온갖 치욕과 가책과 함께 사르라지기 위해 세상에 지펴지는 성스러운 불입니다!(24쪽)”라고 말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시빗거리가 되었던 패러디 그림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신의 검이라는 의미의 ‘글라디우스 데이’는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보탄의 검 노퉁을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아인프리트 요양원에 입원한 여자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트리스탄」 역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는 것처럼 작가는 바그너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당시 유럽사회에서 유행하던 요양병원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토니오 크뢰거」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보았습니다만, 당시에도 국가간의 경계가 모호했던 것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그리고 덴마크 등지로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국가간을 여행하면서도 여권을 소지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을 그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함부르크에서 덴마크로 가는 뱃길의 분위기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바다는 불꽃 모양의 뽀죡하고 거대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솟아올랐다가, 거품으로 가득한 깊은 골짜기들 옆에 어디에서 있을 것 같지 않은 톱니 모양의 형상들을 치솟게 했다. 그리고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두 팔을 휘둘러 미친 듯 날뛰며 물거품을 사방ㅇ로 내동댕이치는 것 같았다. 배는 힘들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위아래로 마구 흔들거리고 요동치며 신음소리를 토하면서 배는 광란의 바다를 뚫고 나아갔다.(149쪽)”
토마스 만은 1905년과 1911년 두 차례 베네치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에게 베네치아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의 느낌을 「베네치아의 죽음」에 담았다고 합니다. 「베네치아의 죽음」의 주인공 아센바흐는 건실한 독일계 아버지와 보헤미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느날 베네치아로의 여행, 즉 아버지의 세계에서 어머니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죽음의 세계’와 마주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곤돌라와 사공은 죽은 자를 저승으로 건네주는 뱃사공 카론을 은유합니다. 또한 그가 뒤쫓는 미소년 타치오는 바로 ‘죽음’ 그 자체인 것입니다.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처음 타보거나 오랜만에 다시 타보는 경우 일시적인 전율, 은밀한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담대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담시(譚詩)가 유행하던 시절부터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다른 물건들하고 있으면 그냥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도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물이 찰싹거리는 밤에 소리 없어 지질러지는 범죄적인 모험을 생각나게 할뿐더러, 더욱이 죽음 그 자체, 관대(棺臺)와 음울한 장례식, 말없이 떠나는 마지막 여행을 생각나게 해준다.(249쪽)”
한편 아센바흐가 느낀 베네치아 골목의 분위기는 작중에서 벌어지는 콜레라의 유행, 즉 죽음의 전조를 시사하는 듯합니다. “골목마다 역겨울 정도로 후텁지근했다. 공기가 너무 텁텁해서 가정집이나 가게와 음식점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들과 끈적끈적한 증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향수냄새와 그밖의 많은 다른 냄새들이 자욱하게 떠돌면서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담배 연기도 제자리에 맴돌며 금방 날아가지 않았다.(265쪽)” 만은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모습을 지나치게 괴기하게 그려낸 것 같다.
추천도서여서 읽게 되었는데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여러 단편들이 있었는데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리고 50대 작가의 사랑의 대상이 14살 소년이라는 점이 참 신선했습니다. 다른 후기를 보며 사람들이 죽음과 사랑에 대해 어떤 해석을 하고 있는지 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영화화도 됐다고 하는데 영화도 한 번 봐야겠습니다!
독일적 문학의 정취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토마스 만의 단편선이다. 특히 토니오 크뢰거를 비롯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등 다양한 단편들이 있어 토마스만의 여러 색채를 느낄 수 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괴테의 영향을 깊이 받은 그의 글에서는 한 개인의 실존적 고민과 함께 그 개인이 사회 속에서 겪는 여러 갈등들을 담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술, 종교,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비판을 서슴없이 하며 그 당시 유럽 문화에 대한 토마스 만의 비판의식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북유럽 곳곳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토마스 만의 문장 자체가 주는 심미적 요소까지 함께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