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앞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났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보기에 그는 행동거지가 나와 다르지만 이름과 생김새가 같아서 자칫하면 내가 ‘그’인지 그가 ‘나’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그런 그가 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개인적, 사회적 영역에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가 나쁜 마음을 품고 ‘나’인척 하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니면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나’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그’로 하여금 ‘나’를 대신하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자가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나’는 ‘그’와 분명 다르고 ‘나’는 ‘그’가 대신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2010.5.10. 열린책들)』에서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그와 같지만 다른 ‘골랴드낀 씨’의 등장에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른 ‘골랴드낀 씨’의 부적절한 행동을 인지시키고 자신이 다른 ‘골랴드낀 씨’로부터 당한 부당함을 호소하여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 ‘골랴드낀 씨’가 정의롭지 않다고 느끼는 현재 상황은 외부의 탓이 아니라는데 있다. 주인공 ‘골랴드낀 씨’가 말을 하면 할수록, 행동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그에게 불리해진다. 주인공 ‘골랴드낀 씨’ 입장에서는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니지만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상황이 답답하겠으나, 우왕좌왕 어찌할 바 모르는 그를 바라보는 독자 역시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주인공 ‘골랴드낀 씨’ 못지않게 답답하고 불안해진다.
주인공 ‘골랴드낀 씨’ 앞에 다른 ‘골랴드낀 씨’가 나타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주치의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루쩬쉬삐쯔’를 방문한다.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주치의 앞에서 의미를 헤아릴 수 없고 요점 없는 말을 중구난방으로 늘어놓는가 싶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극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주인공 ‘골랴드낀 씨’의 심리상태는 충분히 의심스럽다. 그런데 더욱 수상한 점은 주치의가 주인공 ‘골랴드낀 씨’에게 약은 옛날에 처방해 드린 대로 계속 드십시오(p.28)라고 한 말이다.
병원에서 나온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올수피 이바노비치’ 집으로 향한다. 독자가 다시 만난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올수피 이바노비치’ 집 앞에서 입장을 거절당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대담하게도 ‘끌라라 올수피예브나’와 춤을 추고 싶은 열망에 초대받지 않은 무도회에 난입한다. 초대받지 않은 무도회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큰 실수인데 끔찍한 혼란을 일으키고 내쫓기고 만다. 이때 주인공 ‘골랴드낀 씨’의 심경을 나타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골랴드낀 씨는 죽임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p.67)
골랴드낀 씨는 지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p.69)
『분신』을 읽는 내내 다른 ‘골랴드낀 씨’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며 불안, 초조해하는 주인공 ‘골랴드낀 씨’를 뒤쫓아 다니면서 덩달아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리고 주인공 ‘골랴드낀 씨’ 앞에 나타난 다른 ‘골랴드낀 씨’의 존재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주치의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손에 이끌려 마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을 확인한 뒤 다른 ‘골랴드낀 씨’는 주인공 ‘골랴드낀 씨’의 분신, 바로 ‘도플갱어’라고 확신했다.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이미 심리상태가 불안정했고 여기에 평생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충격까지 더해졌으니 더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그와 반대되는 인물, 그가 희망하는 ‘나’를 창조해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골랴드낀 씨’는 그의 분신을 비열하다고 표현한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은 주인공의 자아가 분열되어가는 모습을 담은 이야기라고 이해하면 모든 게 선명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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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을 읽고 난 터라 기대를 잔뜩 했는데, 그 기대만큼은 못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인생 걸작이 될 것이라며 장담한 것을 보면
역시 대작가란 놈들은 다 똑같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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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클럽의 에드워드 노튼이 생각났다.
자아가 분열되는 맥락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어떤 기분일까 그곳은 또 어떤 세계일지, 두렵지만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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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굴 기분 나빠! 코미디야, 완전 코미디, 이제 다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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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도선생의 작품을 기대해 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분신》의 주인공인 9등 문관 야꼬프 뻬뜨로비치 골랴드낀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듯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거짓 흥정을 하며 쇼핑을 즐기고 교양과 품위에 대해 신경을 쓰는 속물이기도 하다. 그는 주변인들이 자신을 파멸시키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는 피해망상 환자이기도 한데, 초대받지도 않은 상급 관리자의 만찬에 나타나 망신을 당한 뒤 피해망상은 더욱 커진다. 무도회에서 쫓겨나 거리를 배회하던 골랴드낀이 자신의 분신이 자기보다 먼저 자기 집 침대로 달려가는 모습을 쫓는 환상 장면은 카프카 《변신》에서 불현듯 벌레로 변한 자신을 살피는 그레고르 잠자와 겹치기도 했다. 다음날 직장에서 지난밤 스쳐갔던 분신이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것을 알게 되자 그의 분열 증세는 더욱 심해진다. 이름과 생김까지 같은 사람이 같은 곳에 있는 데도 이상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주인공 골랴드낀 뿐이다. 이는 매우 소설적이면서 또한 현실을 반영하는 은유이다. 같은 공간에 자신과 이름이 같거나 닮은 사람이 있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주인공 골랴드낀은 다른 골랴드낀을 아군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는 말실수를 하고 만다. 다른 골랴드낀은 주인공 골랴드낀보다 한 수 위다. 그가 제대로 못하는 대인관계에 능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 골랴드낀을 직장과 주변인들에게 소외되게 술수를 꾸민다. 다른 골랴드낀의 진짜 음모 때문에 또다시 만찬에서 망신을 당한 주인공 골랴드낀은 철저히 무너진다. 주치의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에게 인도되어 그는 정신병원으로 향하는 마차에 타게 된다. 골랴드낀의 비명과 절규는 또다시 그레고르 잠자의 몰락을 떠올리게 했다. 카프카 《변신》이 레퀴엠이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분신》는 수난곡이었다고 할까.
“이 사람은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가 아니야! 도대체 이게 누구야? 그가 맞나? 그 사람인데! 이 사람은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가 맞아! 다만, 옛날의 그가 아니라 다른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다! 이 사람은 무서운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다……!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저는 …… 괜찮은 것 같아요.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 얌전하고 온순한 언행으로 무서운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의 동정심을 다소 얼마간이라도 얻기를 바라며 우리의 주인공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열었다.
「넌 장작, 등불, 하인까지 딸린 관사를 받게 되는데, 네겐 그것도 과분햇!」 사형 선고처럼 엄하고 무서운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의 대답이 그렇게 울리고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아!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ㅡ 도스토예프스키 《분신》 中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가 맞다 아니다 수차례 논하는 골드랴낀의 저 대사는, 타인을 수차례 가늠하고 자신을 맞추며 사는 모든 시대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타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협화음 같은 골드랴낀 같은 이들은 사회에서 분리된다. 우리는 타인이 만든 우리의 분신을 감당하느라 이토록 힘든 건지도 모른다.
※ 도스토예프스키 다른 출판사 책을 읽다가 열린 책으로 다시 읽었다. 도스토예프스키 화자의 분열적인 수다스러움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중편소설 『분신』이 자기 최고작이라 생각했지만(물론 그땐 그의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에 이은 겨우 두 번째 작품이었지만), 동시대 비평가들과 독자들은 『분신』을 난해한 작품이라며 외면했다(도스토옙스키에게 비관적이었던 나보코프는 『분신』만을 높게 평가했지만).
'분열된 의식' 내지 '도플갱어'라는 주제는 현대에 들어서도 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도스토옙스키는 골랴드낀이라는 이름의 소설 속 주인공을 내세워 인간 무의식의 심연을, 분신으로 인해 점점 사회에서 고립되고 파멸하는 이의 내면을 지진계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골랴드낀은 내성적인 성격에다 주위의 눈치를 보는 인물인데,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이 당시 러시아 관료제라는, 욕망같이 지극히 사적일 수밖에 없는 감정을 철저히 탄압하고 봉쇄하는 거대한 벽 앞에 소심하게 멈춰 서 있는 상태이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특히 이처럼 관등으로 인간 등급이 매겨지는 관료제라는 특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집단 내에서 이 관료제와 사회질서에 편입돼 순응하게 마련이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낀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관계는 지속되지 않는다. 골랴드낀 내면에 숨겨진 분신이 돌출되기 때문에.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욕망, 상위계급에 대한 환상, 관료제라는 억압된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엇갈린 욕구 같은 것들이 분출돼 현시된 제2의 골랴드낀은 처음엔 골랴드낀의 직장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골랴드낀 주변 사람들을 사로잡으며, 심지어는 골랴드낀 본인의 내면으로까지 침잠하면서 그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당시의 금기였던 사회질서, 즉 관료제를 넘어서길 바랐던 골랴드낀 씨에게 그의 분신은 이 모든 걸 대신해 주길 바랐던 하나의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것마냥 보였다. 허나 당시의 금기, 즉 관료제에 대한 질서를 깬 대가는 혹독했다. 결국 골랴드낀은 마지막에 들어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 결말은 마치 하나의 계시처럼 보인다. 도스토옙스키 시대에 만연했던, 관료제에 대한 질식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정신세계의 혼돈은 한 소심한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충분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짤막한 소설 『분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인간의 내적 심연을 탐사하는 흥미로운 심리소설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당시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문제ㅡ한 명의 인간보다는 하나의 집단을 더 중시했던 시대가 불러온 개인의 몰락을 주제로 삼은ㅡ를 다룬 비극으로 읽히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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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분신의 미친 자는 목소리가 너무 크고 말이 많아서 읽는 내내 피로가 쌓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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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아니야, 나는 내가 아닌 거야, 그러면 되지, 뭐.] 그는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저, 저는 아무도 아닙니다. 저는 전혀 아무도 아니에요. 전 제가 아니라고요, 안드레이 필립뽀비치. 제가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고요. 바로 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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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골랴드낀 씨의 불행을 즉시 알아차리고 끔찍해 하며, 골랴드낀 씨가 지금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어 버리고 싶은 사람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랬다! 정말로 그랬다. 더 말해 볼까. 골랴드낀 씨는 지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재가 되어 날아가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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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생의 소설 인물들은 늘 격양되어 있는데 나는 그게 재미있고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