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나?>
파일로 밴스에게 찾아 온 한 사건, 검사 친구 매컴이 전하는 소식에 느닷없이 독일어 사전과 가정 동요집을 가져다 달라는 밴스는 '피로 물든 동화'라며 이번 사건의 끔찍함을 예감한다. 죽은 이의 가운데 이름은 코크레인이라며 누구나 알고 있다는 <코크 로빈의 죽음과 장례>라는 오래된 자장가이야기를 꺼낸다.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지?」
「나예요.」 참새가 말했다.
「내가 내 활과 화살로
코크 로빈을 죽였어요.」
그 다음 구절까지 중얼거리는 밴스에게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비숍이라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가 사건을 알리는 편지를 매스컴에 보냄으로써 사건은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첫번째 사건이 발생한 딜러드 교수집에 있었던 이들 모두가 의심스럽고 모두에게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참새라는 이름을 가진 용의자까지 사건현장에 있다.)
계속되는 용의자들의 탐문수색 결과로 모두가 뭔가를 보태거나 빼고 있다는 걸 알게는 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수없는 가운데, 마더 구스의 노래를 이용한 두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계속되는 사건에 투덜대는 검사 친구 매컴을 "조사가 가능하다면 풀 수 없는 난제는 없다"는 멋진 말로 위로를 해주는 밴스의 많은 지식과 증인들의 이야기를 조합하는 날카로움에 '그라면' 아마 한눈에 범인을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게 된다.
멈추지않는 사건은 드디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드러커 역시 우리도 알고있는 "험프티 덤프티"를 이용한 죽음으로 발견되면서 더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밴스까지도 수학자와 체스 선수들로 가득 찬 용의자들 속에 누군가가 악마적인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게되지만 그 중에 누구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비숍이란 범인이 누군지 알수 없는 상황에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생기게된다.
뭔가를 알고 두려움에 떠는 딜러드교수, 그가 끝까지 말하지 않는 사실을 찾아나가던 밴스일행은 <꼬마 머펫 아가씨>라는 동요처럼 사라진 꼬마 숙녀 모팻을 찾으며 범인의 잔혹함에 치를 떨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에 찾아 온 반전으로 범인은 자기 손으로 자기가 만든 범죄의 끝을 내게된다.
1920~1930년 "추리 소설의 황금시대'라 불리던 당시에 '짠'하고 나타난 S.S. 밴 다인의 [비숍살인 사건] 이후로 우리가 알고있는 화살이나 마더 구스를 이용한 추리소설이 나오게 된건 아닐까. 여러 추리소설로 명성을 얻은 그가 사실은 추리소설 쓰기를 싫어했다는 뒷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그의 인생이야말로 소설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엘러리 퀸처럼 필명을 썼기에 저자를 둘러싼 열띤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엘러리 퀸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이 추리소설을 쓴다는 걸 남들이 아는 게 창피했던 것일까?
순수문학작가라는 전력답게 동요가 결국은 살인자의 행동까지 지배한다는 식의 발상이 문학에 흠뻑 빠져있던 그이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역시나"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추리소설을 쓰는 20가지 법칙"으로 유명한 자신의 이야기와는 달리( 16번째에서 사건 자체에 집중할 것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밴스에게서 술술 나오는 멋진 말들도 자신만의 멋진 작품을 쓰고 싶어했던 순수 작가로서의 욕구를 누르지 못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동요에 집착해 사건을 벌이면서 점점 비뚤어져가는 인간을 보여 준 s.s.밴 다인의 [비숍 살인 사건]에서 오랜만에 사건이 아닌 탐정이 범인을 추리해가며 하는 멋진 말에 흠뻑 취해본다. 이것이 아마 고전 추리소설과 현재 추리소설이 다른 점이 아니련가한다.
SS 반 다인이 발표한 파일로 밴스 시리즈는 벤슨 살인사건, 카나리아 살인사건, 그린 살인사건, 비숍 살인사건으로 이어집니다. 그중에서도 역시 비숍 살인사건이 최고작으로 손꼽히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열린책들에서 이 책을 출간했다는 것은, 문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물론이고 문학성까지 검증 받은 작품입니다. 기존 번역도 매끄럽고 잘 읽힙니다. 추천!
반 다인 <비숍살인사건>
미국의 작가 반 다인(1888 ~ 1939)이 탐정 파일로 반스를 만들어낸 계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술평론, 문예평론 등의 일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져서 병원에 약 2년간 입원하게 된다.
그렇게 병원에 있는 동안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서 추리소설을 읽다가 자신도 추리작가로 변하게 되었다. ‘나도 한번 써보자’라고 작정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라면 더 잘쓸 수 있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동안 그가 읽은 추리소설은 약 2000권에 달했다고 한다.
2년 동안 2000권의 소설을 읽는 것이 가능한지의 여부는 일단 제쳐두고, 그는 많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캐릭터와 추리방법을 구상했다. 그가 생각했던 것은 ‘심리분석추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돋보기를 들고 바닥을 기어다니며 물적증거를 찾는 것보다는, 범행현장의 모습을 보고 범인의 심리와 성격을 파악해서 용의자를 추적하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범인에 대한 프로파일링(profiling)을 중시하는 수사방법이다. 그런 주인공으로 파일로 반스라는 인물을 창조해냈다.
파일로 반스는 1926년에 발표된 <벤슨 살인사건>에서 데뷔한다. 그는 180 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단단한 근육질의 체형을 가지고 있는 독신 노총각이다. 친척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서 평소에 미술품을 수집하고 감상하며 소일한다. 펜싱과 포커의 명수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참 부러운 인생이기도 하다.
반스는 우연한 기회에 지방검사인 친구의 요청으로 살인사건 수사에 참가하게 되고 독특한 추리방법으로 범인을 검거한다. 반스가 활약하는 작품은 12편으로 이어지지만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연속살인사건을 다루는 4번째 작품 <비숍살인사건>이다.
동요의 노랫말대로 벌어지는 연속살인
살인범이 연속살인을 감행하면서 피해자를 택하고 살인방법을 정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규칙 또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소설 또는 노랫말 같은 기존의 텍스트를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에서는 희생자들이 '열 명의 작은 인디언'이라는 동요의 노랫말대로 한 명씩 살해당한다. 영화 <세븐>에서 살인범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7가지 죄악에 걸맞는 사람들을 골라서 하나씩 살해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는 성서의 묵시록에 언급된 내용대로 수도사들이 연속으로 살해당한다.
살인범은 왜 특정한 텍스트에 따라서 연속으로 사람을 죽일까. 살인범이 그 텍스트에 집착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의 주변에 그 텍스트에 적당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상심리를 가진 살인범은 연속살인을 연극의 무대처럼 꾸미고 있다. 그 안에서 희생자는 연극의 도구로 전락한다.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지?
"나예요"하고 참새가 말했다.
"내 활과 화살로 코크 로빈을 죽였어요"
<비숍살인사건>에서는 위의 가사로 시작되는 '마더 구스의 노래'에 따라서 연속살인이 발생한다. 동요의 노랫말도 심상치 않지만 그 방법대로 사람을 죽인다면 이건 무척 잔인한 살인이 된다. 비뚤어진 세계에서 피로 물든 동화가 구현되는 것이다.
'코크 로빈'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남성이 화살에 가슴이 뚫려서 숨지고, 얼마후에는 '마더 구스의 노래'에 걸맞게 머리 한 복판에 총을 맞고 살해당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누가 보더라도 동일한 살인범이 노랫말을 따라서 연속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파일로 반스는 이전에도 연속살인을 수사해 본적이 있지만 이런 식의 연속살인은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다. 살인이 연달아 터지면서 반스는 "이것은 완전범죄에 가깝네"라는 말을 한다. 단서가 될 만한 실마리도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수사진을 이끌고 간다는 이야기다. 범인은 무엇 때문에 동요에 따른 연속살인을 저지르는 것일까?
파일로 반스의 심리분석추리
작가 반 다인은 평소에 '6'이라는 숫자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6편 이상의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반 다인은 그 두 배에 이르는 12편의 장편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후반기의 여섯 작품은 전반기 여섯 작품에 비해서 작품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비평을 받는다. 반 다인은 스스로 그의 말을 입증한 셈이다. 그의 작품 제목은 < xxxxxx 살인사건>이라는 식의 제목을 갖는다.
여기서 'xxxxxx'는 한편만 제외하고 모두 여섯 글자다. <벤슨살인사건 (Benson Murder Case)>, '카나리아살인사건 (Canary Murder Case)', 비숍살인사건 (Bishop Murder Case)' 모두 마찬가지다.
파일로 반스는 자신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매번 엄청난 현학적인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이런면을 지루하게 생각할 독자들도 있겠지만 파일로 반스는 그의 지식들을 교묘하게 사건의 해결에 연관시킨다.
반스는 '모든 살인은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야', '현장에서 발견되는 모든 물적증거는 완전히 무시해버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심리를 중시하는 탐정이다. 또한 그는 '그림을 보면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있듯이 범죄현장을 보면 누가 범행을 행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사건의 모든 정황, 범죄현장에서 보여지는 범인의 성향과 심리를 추적해서 범인을 지목하고 검거한다. 그는 <벤슨살인사건>에서 피해자가 왜 가발을 쓰고 있지 않았는지 궁금해하고, <케닐살인사건>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울만한 성향이 아닌 인물에 대해서 고민한다.
<비숍살인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반스의 주변에는 용의자로 꼽힐만한 사람들이 많지만, 반스는 그들의 알리바이나 동기보다는 그들의 성향에 주목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생활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할 수 있어야 정신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시킬 수 있는 인물인가. 용의자들을 바라보는 반스의 관심은 여기에 맞추어진다. 억압된 정서를 조금씩 배출하지 못한다면 노랫말에 따른 연속살인과 같은 잔혹한 연극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파일로 반스의 말처럼, 대부분의 연속살인은 범인만의 기괴한 환상극이다.
배숍 살인 사건/ S.S. 밴 다인/ 최인자/ 열린책들/2011
일본 드라마 괴짜 갈릴레오 교수 이야기를 아주 즐겁게 봤었습니다. 물리학 교수가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을 의뢰받아 물리학으로서 풀어내는 것인데요, 이른바 과학 소설 장르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이런 소설, 이런 드라마 만들은 지는 것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자, 그러한 소설의 어버지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비숍 살인 사건입니다. 사건은 전래되는 민요? 동요? 에 따라 진행되고 작가님은 아주 어렵게도 수학과 과학으로 이를 풀어주고 계십니다. 본인의 현학적 취향, 독자에게 가르침을 하사하며 놀리는 방식은 참으로 밉살스러울 때도 많지만 어쨌거나 이런 것도 글쓰기의 한 방법인지라 뭐라 탓할 수 만도 없더군요. 세상엔 많은 글들이 있으니 이런 방식도 있는 게지요.
아무리 어렵게 썼다 해도 추리 소설은 추리 소설인 것. 하지만 힘들게 추리 하려 하지 마시고 그저 소설을 즐겁게 읽으리라 생각하신다면 큰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활자중독증이 약간 있는 저같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 100% 믿으시면 안되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