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는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뜻인데, 즉 그동안 벌려놓은 수많은 갈등 해결과 결말이 개연성을 가지고 주인공들에 의해 직접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난데없이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 해결한다는 냉소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가장 먼저 쓰였는데, 여전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에서도 차용되고 있다. 십여년 전 쯤 진중권이 심형래의 디워를 까다 까다 언급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대 액션물들 대다수는 위기를 모면하는 효과로 부분적으로라도 데우스엑스 마키나를 활용하지 않고는 존재 기반마저 흔들리지 않을까 싶다.) 무슨 영화 평에 수천년 전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언급하나 싶어 원본을 찾아보니 이렇다.
“사건의 해결은 플롯(이야기) 그 자체에 의하여 이루어져야지, 메데이아나, 또는 일리아스에서 (희랍군의) 출항에 관련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계장치에 의존해서는 안됨이 명백하다(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4b[1]). “
또한, 희극시인 안티파네스 역시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작품을 총체적으로 구성할 능력이 없는 시인들의 궁여지책에 불과하다.[2]고 했다.
브레히트도 냉소적인 면에 있어서는 약간 진중권 삘이 나는 당대의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비교불가능한 큰 차이가 있는데 진중권은 말(비평)만 하고 예술을 하지는 않지만, 브레히트는 직접 창작활동 자체로서 시대와 예술을 조롱하고 비판했다는 점이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직접 사용하므로서 그것의 사용 의도를 조롱하고 비판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지목되어 그의 모든 저술의 출판이 금지당했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망명해야 했던 다수의 좌파 작가 중 하나였을 뿐인데 말이다.
원래는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John Gay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를 개작한 것인데, 몇 번의 개작을 통해 탄생한 「서푼짜리 오페라」는 인물 간의 관계와 극의 진행의 세부 사항은 거지 오페라와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또한 오페라가 아닌 〈음악과 노래가 있는 연극〉이라는 형식으로 창작되었다. 즉, 이야기의 전체 스토리는 존 게이, 극 중 음악의 가사는 자작시와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비용Francois Villon의 시, 그리고 음악은 클래식 오페라 작곡가가 실용 음악가 쿠르트 바일의 음악 이런 것들의 조합으로 탄생한 것이다.
소설도 아니고, 일반 연극 대본도 아니고, 더욱이 음악이 있는 연극의 대본인데, 이 책의 독자는 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본을 읽는다. 연출과 연극 배우와 무대와 조명과 그리고 음악 이 모든 것의 효과가 내는 극적인 분위기를 전적으로 상상력에만 의지해야 하므로, 실제 극이 올랐을 때 느끼는 감동을 비슷하게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특히 시에 붙인 음악이 주는 효과는 텍스트에만 익숙한 독자가 어찌할 수 없는 요소다.
다행히도, 독일에서 상영된 듯 보이는 제법 큰 규모의 연극 녹화 동영상과 1930년대 만들어진 영화 동영상을 찾아서, 그토록 궁금했던 가사의 음들과 노래 실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확실히 음악과 연결되니 작품을 이해하고 느끼는 폭이 훨씬 풍부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오페라와도 형식이 조금 다르고, 연극과도 조금 다른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연극에서도 브레히트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관습과 전통을 깨고 낯선 것들을 시도하는데, 작가 해설에 의하면 그 중 하나가 노래의 역할이라고 한다. 기존 연국에서 노래는 인물의 개성을 강화하고, 심리적 정황을 묘사하고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기여한다면,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새로운 극의 형태를 서사극이라고 했던 모양)의 기능은 극적 사건을 중단하고 정황을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후렴구와 민중시 같은 사실적이고도 풍자적 묘사의 가사는 짧은 극중 대사들이 담을 수 없는 당대의 상황과 모순, 갈등을 설명한다.
대사집 만으로도 전체 내용을 따라가기에는 큰 무리가 없고, 딱딱하다는 독일인에 대한 편견이 불식될 수 있을 만큼 풍자적인 내용이다. ‘런던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거지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 피첨 부부와 그의 딸 폴리, 런던에서 가장 잔인한 갱스터의 두목 맥, 런던에서 가장 엄격하고 무섭다는 경시청장 브라운, 그의 딸 루시, 피첨 부부에게 고용된 거지들, 맥에게 고용된 갱스터들, 창녀들이 등장하는 액션 코미디, 로맨스를 두루 갖춘 극이다. 맥과 폴리 루시의 삼각관계, 피첨과 거지 사이의 약탈관계, 범죄자 맥과 경시청장 브라운의 결탁 관계에 창녀와 기둥서방 사이의 약탈과 폭력과 순애보까지 깨알같이 표현하는 이 새로운 (실용)음악 연극이 당대에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 수 없다.
노래에 의하면 강도, 강간, 살인을 서슴지 않은 맥은 창녀들은 물론이고 지체높은 ‘아가씨’로 묘사되는 폴리와 루시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데 본인이 감옥에 갇혀도 그를 두고 경쟁할만큼 경쟁력있는 남성일 뿐만 아니라, 브라운 경장 역시 그의 투옥을 마음아파 하고 헌신적(?)으로 그를 돕는다. 하지만 창녀들의 배신으로 두 번째 감옥에 들어가게 되자, 더는 사형 집행을 미룰 수 없게 된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그가 얼마나 악인인지 알기에 뭐 주인공이긴 하지만 공개 처형되는 것도 즐거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브레히트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연극은 현실과 다르기에 연극이지 않은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 때 등장하는 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난데 없이 개입한 신은 다름아닌 여왕이다. 여왕의 메신저는 맥의 처형을 중단시키고 뜻하지 않은 귀족 작위까지 받게 된다. 얼마나 기교적이고 날카로운 조롱인가.
현실에서 사회적인 불공정함이나 부당함을 해결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러니 현실과 같은 극을 만들다 보면, 불공정함과 부당함에 무게를 실어 스토리를 진행시켜 봤자, 결국 우리가 사는 삶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를 해피엔딩으로 만들 수 있는 건 현실에 없다. 마술적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가능한 그 이야기가 현실이 아닌 극과 소설 속일 때 뿐이란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브레히트는 그것이 예술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현실의 삶에서 말을 타고 오는 구원자는 없다. 가난한 이가 구원되는 일도 없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것을 나누는 것, 왜 아니겠어?
모두들 선하면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으리.
누군들 하느님의 광명 속에 살고 싶지 않겠어?
선한 인간이 되는 것?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별에서
식량은 빠듯하고 인간은 야비하지.
누군들 평화 속에 조화롭게 살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 그렇질 않아.
폴리와 피첨 부인 유감이지만 그 말이 맞아요.
세상은 가난하고, 사람들은 악해요.
피첨 유감스럽게도 내 말이 맞지.
세상은 가난하고, 사람들은 악해.
누군들 지상에서 파라다이스를 꿈꾸지 않겠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 그걸 허락하나?
아니, 상황은 그걸 허락하지 않아.
너를 몹시 걱정하던 네 형제.
고기가 부족해지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성실하게 사는 것,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너를 걱정하던 네 부인
네 사랑이 충분하지 않으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감사하며 사는 것.
누가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너를 걱정하던 네 아이
노년에 빵이 부족해지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인간적인 것.
누가 그러고 싶지 않겠어!
[1]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1998. [2]에서 재인용
[2] 필록테테스 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준석, 서양고전학연구 26, 2006.12, 41-55 (15 pages)
거지들을 회유와 협박으로 묶어 거리에 내보낸 후, 그것을 통하여 사욕을 채우는 악덕 업주 피첨, 노상 강도단의 두목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개인의 욕정을 채우기 위하여 여자들을 울리고 다니는 매키스, 그런 강도에게 정기적으로 상납받으면서 그들의 뒤를 봐주는 경찰서장 브라운, 필요에 따라 배신을 하며 이합집산하는 창녀들과 밑바닥 인생들의 삶... 어쩌면 지금의 현실과 그리도 닮아 있는지, 사악한 현실의 축소판으로서 이 희곡의 무대는 과히 충격적이었다. 개인의 사랑 놀음이나 복수같은 것을 소재로 하는 전통적인 희곡과는 세상을 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작품이다. 하긴 셰익스피어 때만 해도 이렇게 세상이 타락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런 끔찍한 캐릭터들이 탄생하기가 어려웠으리라.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있던 브레히트의 자본주의에 대한 경멸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희곡의 대사는 몹시 과격하다. "우선 처먹고 난 다음에야 도덕"이라든가 "은행을 세우는 것에 비하면 은행을 터는 것이 뭔 대수요?" 라는 반문은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는 지금의 은행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니컬한 풍자였고 "매 순간 인간을 괴롭히고 벗겨 먹고 덮치고 목조르고 먹어 치우며 살자. 자신이 인간이란 걸 까맣게 잊어 버려야만 인간은 살 수 있다네" 라는 대사에서는 밑바닥 인생들의 세상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에 섬뜩한 기분까지 들었다.
여유있는 사람들만 즐길 수 있었던 예술의 한 쟝르로서, 현실과 꽤 동떨어져 있던 연극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한복판으로 불러낸 의미있는 작품이고 서사극이라는 형태로 현대 희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브레히트의 작품을 불온시해 온 당국의 배려(?)로 88올림픽 때에야 해금되었다. 아직 공연을 보지 못했는데 꼭 한 번 보고 싶다. (2012. 11.2)
이 세상을 살기에 인간은 만족을 모르네. 그런고로 그의 온갖 노력은 단지 자기기만일 뿐
내가 읽어 본 첫번째 희곡이다. 소설의 형식과 흐름에 익숙한 나로썬 인물의 대사만으로 그것도 장이 쪼개져서 마치 영화 속 점프 컷처럼 부분 부분만 보여주는 방식의 서사에서 큰 재미를 찾지는 못했다. 어쩌면 희곡은 연극을 먼저 본 후에 읽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희곡이 연극으로 공연되는 걸 봤다면, 굳이 이 희곡을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물론 아주 엉망인 작품은 아니다 계속 생각나게 하는 부분들이 있긴 하다).
롤랑 바르트를 읽는데 하도 브레히트, 브레히트 거려서 안 읽을 수가 없었다. 친구가 재밌다고 뭐 보라해도 보통 시큰둥한데, 나랑 전혀 관계도 없는 인간이 주문이나 레시피 외우듯이 자꾸 뭐를 반복하면 오히려 흥미가 간다니 참.....
책은 만족스러웠다. 거지의 다섯 가지 유형이었나, 그 부분에서는 진짜 포복절도했다. 교통사고로 팔이 잘리고 항상 웃는 유쾌한 유형이었나? 그런 내용은 정말로 이런 종류의 책 아니면 웃기게 다룰 수 없는 주제다.
못 접하던 새로운 형식은 늘 흥미롭다. 끝
불온한 명성에 비해 그의 희곡은 그리 과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의 전개에 있어 상당히 대중적인 흥미를 일으켰다.
서푼짜리 오페라에선 모든 인물이 서로를 속고 속이며 비루한 밑바닥 삶을 연명해 갔다. 갑작스런 결말의 전환은 과연 브레히트의 의도대로 극의 몰입에 철저한 장애를 일으키며 거리두기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너무 깬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억척어멈과 자식들로 정해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삶을 살아가는 교활함과 간사함,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현실 등등 억척어멈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무력한 소시민인 우리 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하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나건, 자식이 죽어가던 우리들은 어떻해서든지 살아가야 한다. 역사를 구성하는 주체는 카트린과 같은 영웅 뿐만 아니라 억척어멈과 같은 소시민을 모두 포함하는 인간 자체일 수 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다만 시지프스 처럼 그리고 억척 어멈처럼 마차를 계속해서 끌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