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 프란츠 카프카 | 열린책들 |
프란츠 카프카라고 하면 제일 먼져 떠오르는 책이 있습니다. "변신" 입니다. 어느날 문득 벌레로 변한 사람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된 밈으로 어느날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꺼야? 라는 질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소송은 프란츠 카프카가 죽고 원고를 모아서 책으로 출간을 했습니다. 완성이 되지 않은 미완성의 책이라고 할까요? 미완의 책이라는것을 모르고 읽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재미 있었졌다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고전은 이래서 어려운가?라는 생각을 할때 쯤 미완성이라는것을 알았지요.
처음 시작이 강렬합니다.
누군가 요제프 K를 모함했음이 분명하다.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으니 말이다. 그에게 방을 세놓은 그루바흐 부인의 가정부는 매일 아침 8시면 그에게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이날따라 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체포 되었다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누군가 그를 고발했거나? 나도 모르게 죄를 저지른것이겠지요? 이 궁금증을 알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왜?라는 단어에 끝은 알수 없습니다. 요제프 K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인지? 문제를 즐기는 것인지 알수 없는 묘한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답답함을 느끼게 하죠. 이 사람 왜 이러지? 그리고 판사?라는 사람은 왜 이러지? 변호사는 일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나? 요제프 K는 문제보다 여자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질문에 질문이 생깁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대체 내가 왜 체포된 건지 말입니다. 그 감독관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그 사람이 앞서 말한 그 숙녀의 안락의자에 앉아 문자 그대로 멍청하게 거드름을 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신사 여러분, 사실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체포해 놓고 그걸로 만족한 거죠.
그 사람은 게다가 쓸데없는 일까지 벌였습니다. 뭐냐 하면 방금 말한 그 숙녀의 방에 내 은행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 셋을 데려온 거죠. 그 친구들은 숙녀의 사진이나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제멋대로 흩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단 직원들을 데려온 데에는 물론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하숙집 여주인과 그녀의 가정부와 마찬가지로 내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려 나의 사회적 체면을 손상시키고 특히 은행에서 내 위치를 흔들어 놓으려 한 거죠. 하지만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격이 순박한 하숙집 여주인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녀의 이름을 알려 드리죠. 그루바흐 부인이라고 합니다.
요제프 K 왜 체포된 것인지? 그리고 체포 되었다고 하지만, 곧 자택에서 풀려 납니다. 그리고 법원에 출석하라고 합니다. 법원은 집의 옥상에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흘러가죠. K에게 방문한 사람에게 법원에서 일하는 화가 찾아갑니다.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 가지만, 그림만 사가지고 옵니다.
일반인에게 뜬금없이 체포 되거나, 소송장을 받는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퀴벨레가 된다면? 이라는 질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알수 없는 사람에게 소송을 당한다면? 누가 소송을 걸었는지도 모르고? 어떤 소송인지도 모르는 소송을 받는다면?
책속의 소송은 책속에만 있지 않은거 같습니다. 최근 돌아가는 법정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면, 하나의 소송이 1년 또는 2년3년을 넘어가게 됩니다. 끝도 없는 소송이 이렇게 오래 간다면? 일반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될겁니다. 가진자들의 횡포가 되겠지요? 요제프 K는 은행에서 그래도 높은 제법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친척이 소개해 줄 수 있는 변호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소송인지는 책이 끝날때 까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알 수 없는 소송을 당한다면? 갑자기 체포가 된다면?
너무 나도 당황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예전 권력자들은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 넣었습니다. 지금도 권력자들은 죄에서 빠져나가고 힘 없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탈출한 사람들이 한 말이지만, 우리는 공감 할 수 있는 단어일 겁니다.
반드시 이달이어야 했다. 영화 [아메리칸 크라임]을 경악하면서 보고 난 이후 법정 스릴러의 대가 존 그리샴을 닥치는 대로 읽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마지막은 카프카로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 정도의 상처는 없지만 법을 믿지 않는다. 아니, 법이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줄거란 달콤한 희망을 더이상은 믿지 않는다. 법정 범죄물과 카프카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의식의 흐름처럼 떠밀려온 독서기가 중요할 뿐. 존 그리샴의 소설은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The firm, 1991)>에서 시작한다. 그의 출세작이면서 1993년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야망의 함정]을 낳았다. 10년 후의 이야기를 담은 동명 드라마가 제작되었는데 이 드라마는 정확히 영화의 결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만하면 텍스트의 무한확장을 제대로 체험했대도 과언 아니다. 이전에 <타임 투 킬(A Time To Kill, 1989)>은 그의 처녀작, 이후 <펠리칸 브리프(The Pelican Brife, 1992)>는 줄리아 로버츠와 덴젤 워싱턴 주연으로 1993년에 영화가 되었다. 물론 전작의 영화화는 좀 더 훗날 1996년도. 이후 <의뢰인(The Client, 1994)>, <가스실(The CHAMBER, 1996)>, <사라진 배심원(The Runaway Jury, 1996)>, <레인메이커(The Rainmaker, 1997> 등이 영화화 되었고, 작년에는 소설 <고백(The Confession, 2010)>이, 올해는 소설 <소송사냥꾼(THE LITIGATORS, 2011)>의 번역본이 출간됐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10년여간의 변호사 생활로 얻은 다양한 체험을 법정 스릴러에 녹여내며 출간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이 아니면 영화를 달라, 우스갯소리가 통할 만큼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많다.
우리나라 법정 드라마는 많지 않다. 재미로 다루기에 사법부가 지나치게 기득권을 갖기 때문에 미국보다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 듯하다. 배심원제가 자리잡은 미국과 아직은 법전에 기댄 법관의 의견을 더 중시하는 한국의 사법제도의 차이를 모르지 않지만 범죄 스릴러가 경찰 수사물로만 그려지는 점은 많이 아쉽다. 물론 배심원제 탓만은 아니고 이 제도의 헛점 또한 없지 않다. 정확하기 위해 제3자의 일반인들을 통해 죄의 유무를 따지자는 건데 이게 어디까지 객관성을 획득할지 알 수가 없다. [Law & Order]는 대형 시리즈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범죄 전담반]으로 더 익숙하지만 사실 이건 스핀오프 시리즈 중 하나다. SVU, CI, LA, UK는 전부 스핀오프 시리즈지만 오리지널 시리즈는 시즌 20으로 2010년 종료된 [범죄전담반]이다. 이후 [저스티스], [보스턴 리갈], [해리스 로우], [페어리 리갈], [데미지스] 등이 나왔지만 늘 첫 정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영화 [의뢰인]과 [부러진 화살] 같은 법정물은 나올 때마다 뜨거운 감자이며, 숨겨져 있는 사법재판 과정과 진실 규명에 기대를 갖게 한다. 발로 뛰는 경찰 위에 검찰이 있다면, 상명하복 관계를 최대한 이용하는 행정부 소속 검찰에 대응하는 사법부가 있다. 진실 규명과 다수 국민과 소수 억울한 자들의 보호가 목적인 점에서 소속 다른 두 기관이 동등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예를 들어, 개인의 자유와 다수의 행복을 논할 때 법조인은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카프카 또한 법 앞에서의 인간의 부조리, 심판자의 자리에 있다고 믿는 인간이 심판 당하는 자의 위치에 서도록 묘사하면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의 구속과 억압에 한없이 무력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편적 물음표로 승화시키며 관습과 체제 앞에 진실이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한낱 보잘 것 없는 개에 불과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는 마흔 살에 악화된 폐결핵으로 죽었다. 카프카는 당시 체코에서 소수민족이었던 유대인이었고 아버지와도 갈등을 빚었으며 글을 쓰고 싶어했으면서 공부를 관두지 못해 법학 박사학위를 땄다. 너무 일찍 죽었기에 그가 남긴 어떤 작품에 대해서도 그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다. <소송> 또한 그의 사후에 출간된 소설이며, 그가 남긴 세 편의 장편소설 중 하나다. 실존철학에 대해서만큼은 사르트르와 카뮈가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가 조금만 더 번듯한 작품을 많이 내고 조금만 더 번듯하게 긴 인생을 살았다면 실존과 부조리의 수사 앞에는 카프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놓였을 것이다. 체코 출신이면서 독일어 사용을 강요당한 유대인 카프카가 아니라. 그는 장남을 번듯하게 키워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독일인 학교에 다녔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공용어는 독일어였고,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중이었으므로 학교에서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여기와 저기에 속했지만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의 이방인적 고독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붙박혀있다. 완벽한 독일어를 쓰기 위한 피나는 편승과 자국민(체코인)들이 느끼는 배신감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그는 결국 독일어로 써내는 작품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 경계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행간 사이를 빙빙 도는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쓴 많은 문서들은 유언에 따라 소각되었다. 우린 그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최소한에 기댄 유추조차 할 수 없다. 떠도는 의미들을 붙잡고 유령처럼 상상한다. 카프카적으로. 카프카답게 카프카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어렵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것들이 옳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하다. 사회적 모순 한 번 겪지 않고 자라나는 청춘이, 꿈나무가 어디 있으며, 어른은 완전하게 땅에 붙박은 존재인가. 아니다. 카프카의 고민은 여전히 그만의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한 <소송>은 읽혀야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이토록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어째서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에 시달렸다. 그는 희생자였을까, 승리자였을까. 항간에 그가 남긴 문학사적 자취가 웬만한 독일 작가를 능가한다고도 한다. 카프카를 독일인으로 처음 아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그는 성공한 셈일까. 스스로는 행복하다 여겼을까. 대답은 들을 수 없지만 그는 여전히 궁금하게 한다. 우리에게 늘 카프카적인 생각을 하도록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으니. 대단하다. 릴케-카프카-쿤데라로 이어지는 체코 현대문학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18년에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후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경계에 세 문인이 나란히 연대기순으로 존재한다. 언젠가 동유럽에 가게 될 날이 온다면 세 명의 작가를 마음에 담고 카를교를 열 번쯤 건너야겠다. 동양의 작은 여자아이에게 프라하는 붉은 눈물을 흘린다고, 미치도록 슬프다고, 내 딸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거라고 말해야겠다. 오늘은 어제와 다를 거란 기대와 희망 속에 산다. 기대와 희망이 한순간에 후회와 절망으로 바뀔지라도 변화를 희망하는 건 보편적 진리다.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며 K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는 순서는 어째서 악의 계수가 클수록 먼저이지 않은가를 원망했을까. 형태 없는 제도와 체제, 권위주의 속에 희생되는 자기를 반성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이 자랑스러웠을까. 이유 없이 심판자가 되고 이유 없이 심판을 당하는 인간들은 누구나 이중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실체 없는 경계에 있다. 오늘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존재를 확인하고 검사 받는다. 일련의 절차에는 오류가 없을 거란 믿음으로. 강력하게 존재의 존재와 삶의 삶을 가만히 놓는다. 여전히 정확하게 놓여야 할 위도와 경도를 알 수도 없고 알 수 있으리란 희망도 없지만 모든 삶이 부서지기 전에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 카프카다. 변신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도 없고, 좁은 성 안에 갇혀 누군가를 심판하려 하지만 되려 심판 당하는 어리석은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한 것은. 이 순간 카프카적으로 사고를 전환하라고 강요하는 건 카프카가 아니라 실존이다.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이는 생각해야 하므로. 그게 옳다는 걸 미래의 딸에게 전해줘야 하기에. 그는 죽어버림으로서 작품과 말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지만 나는 살아서 더 많은 말을 하고 더 많은 뜻을 전해야겠다. 가능하다면. 그러면 이 리뷰는 대체 정체가 뭘까. 나는 요제프 K의 대변인인가, 카프카의 대변인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모르면서 말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걸까.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가고 상상하는 만큼 움직인다. 왜 죄인이 됐는지, 왜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무엇이 죄고 또한 죄가 아닌지 카프카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말하지 않아서 우린 몰라야 할까. 짧고 쉽고 간결한 문장 행간에 든 엄청난 활자들의 의미가 밤잠 자는 도중 나를 덮칠까봐 겁난다. 오늘밤 나는 혼자 자야 한다.
고민 끝에 열린책들 것으로 구매. 아주 아주 만족!
요즘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를 모으고 있다.
갠적으로 펭귄 클래식보다 요즘에는 열릭책들 시리즈가 더 맘에 든다
일단 양장이라는 점
너무 단단하지 않고 적당히 무른 양장이라는 점
가볍다는 점
뭔가 자꾸 소장하고 애장하고 싶다는 점
이것이 다가 아니다
디자인만 좋다면 이걸 구매할 필요가 없다
역시 그래도 본질은 책이니까
번역이 가장 마음에 든다
민음사, 펭귄을 두고 고민했는제
때에 따라 다르지만 이번에는 열린의 승
*
나는 사라지고 죄와 굴욕만 남았다는 어느 출판사의 서평이 인상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체포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상황과 감정을 대입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때문에 읽는 내내 어딘가 갑갑하고 거북스러웠다
*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당국이 하는 일은 빼앗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 마지막 과오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그게 누구든 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주기를 거절한 자가 져야 하지 않을까. 그의 눈길은 채석장과 인접한 건물의 꼭대기 층에 가서 닿았다. 빛처럼 번쩍하며 그곳에 있는 창문의 양 날개가 활짝 열리더니, 한 사람이 멀고 높은 그곳에 여리고 희미한 모습으로 나타나 몸을 앞으로 쭉 내밀고서 양팔을 활짝 펼쳤다. 저게 누구지? 친구인가? 좋은 사람인가? 동정을 느낀 사람인가?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한 개인인가? 모든 사람인가? 아직 도움이 가능한가? 까먹고서 제기하지 못한 이의 같은 것이 아직 있을까? 분명 그런 것이 있을 거다. 논리가 아무리 요지부동이라 해도, 살고자 하는 사람을 당하지는 못한다.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판사는 어디 있는가?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상급 법원은 어디 있는가? 그는 양손을 쳐드록 손가락들을 활짝 펼쳤다.
그러나 한 신사의 양손이 K의 목을 눌렀고, 그사이 다른 신사는 칼로 그의 심장을 찔러 두 번을 돌렸다. 꺼져 가는 눈빛으로 K는 두 신사가 바로 그의 코앞에서 서로 뺨을 댄 채로 결정적인 순간을 지켜보는 모습을 보았다. "개 같다!" 그가 말했다. 치욕은 그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