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말에 친구가 빌려준 문고판 책으로 처음 접했다. 나는 책 속으로 정신 없이 빠져들어 단숨에 읽어내려갔는데, 그 때의 감동을 되살리고자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라는 것과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연애 이야기였다는 것 외에 그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두번째 읽으면서 이 책이 이런 책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금은 지루하고 덤덤히 책을 읽었는데, 25년 전엔 이 책이 왜 그렇게도 재밌었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난 이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좋은데 특히 모렐 부인이 좋다. 사랑으로 결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는 것은 실망 뿐이지만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지 않음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부인으로서의 예의를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따뜻한 여자이다. 지극한 모성으로 궁핍함 속에서도 사랑으로 세 아들과 딸 하나를 키운다. 장남에 대한 기대와 집착을 작가는 특별한 듯이 이야기하지만 그 정도의 기대와 집착은 어느 어머니라도 갖을 수 있는 정도라고 나는 생각된다. 자식의 인생을 자기 것인냥 뒤흔들어 놓는 막장 드라마 속의 어머니가 전혀 아니고 윌리엄과 폴이 의논을 해올 때 자신의 의견을 조용히 말하는 어머니일 뿐이다. 장남 윌리엄의 죽음으로 그 기대와 집착이 폴에게로 넘어가는데 폴의 첫번째 연애 상대인 미리엄에 대해 조금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표현할 뿐이고 폴이 미리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때는 그녀를 받아드릴 마음도 조금은 갖는다. 미리엄과 결혼할 수 없다고 그 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폴 자신이다. 어머니에게 강하게 의지하는 것은 폴 쪽이었는데 그렇다고 매사에 어머니 말을 듣는 것도 아니고 자기 좋을 대로 하고 다니며 어머니의 싫은 소리에 짜증을 내기도 한다. 모렐 부인의 남편과의 불운한 결혼 생활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자식들을 그런 대로 자기 몫을 잘 해내는 사람으로 훌륭히 키워낸 그녀의 삶은 충분히 성공적인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렐 부인이 가족들을 위해 집안 일들을 하는 묘사 부분들이 좋았는데 그들의 삶을 가깝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폴은 미리엄과 헤어진 후 클라라와 연애를 하지만 클라라는 별거했던 남편에게로 돌아가버리고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홀로 남겨진다. 폴은 어머니와 정신적인 유대관계가 깊었고 그런 만큼 어머니의 죽음이 그를 황폐하게 만들지만 작가는 마지막에 그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독자에게 폴의 미래가 희망차리라는 기대를 주며 끝을 맺는다. 모렐 부인의 삶과 윌리엄의 짧은 생애와 폴의 두 번의 연애사가 주 내용으로 연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시시각각의 감정의 변화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독자가 아주 가까이에서 그들과 호흡하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폴은 어머니를 사랑했고 결혼하고 싶은 만큼은 아니지만 그 나이에 맞는 사랑을 했다. 아직은 젊은 청년인 폴이 앞으로는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떻게 살아나갈지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가 기대가 되는 이야기다. (왜 엔터키가 안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