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란 이름은 무섭다.어떤 그림으로 상상을 해보아도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누릅나무였을까... 낯익은 나무 이름이 아니라서 혹 나무가 갖는 어떤 상징성이 있는 건 아닐까,라는 싱거운 질문을 던져 본다.그리고 역자의 설명을 통해 진실(?)을 알수 있었다.
누릅나무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겠으나,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보고 있으려니,자신의 분수 이상으로 욕망을 채워 나중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돼지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한편으로는 앤드루와이어스의 그림처럼 인간의 욕망을 지켜보는 것도 같고.
3막으로 구성된 희곡이다.시간적 배경은 1850년 초여름.서부 개척시대를 동경하는 시미언과 피터 형제.이들은 아버지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조롱 하면서 정작 자신들도 서부로 가서 성공하고 픈 꿈을 꾼다.에벤은 고생하다 죽은 자신의 어머니의 농장을 찾고 싶은 욕망이 있다.그러나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캐벗을 누르고 싶은 욕망이 더 컸던 것은 아닐지...이런 생각은 캐벗과 관계했던 여성들에 관한 묘사에서 느껴지는 부분이였다.특히 캐벗의 세번째 아내이자,에벤의 새어머니로 들어오게 된 애비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정말 사랑해서일수도 있겠고,케벗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컸던 것일지도 모르기때문이다.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언제나 가혹해서,에벤의 마음과 애비의 첫마음이 어떠했을지는 모르겠으나,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도덕적으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근친상간이 벌어진거다.게다가,욕망의 화신은 얼마나 무서운지,서로가 사랑을 하는지,아는지에 대한 확인을 무서운 방법으로 증명(?)하게 되고 만다.에비와 에벤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죽이는 것으로 에비는 에벤을 사랑했음을 증명한다. 인간들의 욕망의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 파멸을 보고 나서야 욕망은 멈추게 되는 걸까 생각해본다.모자간근친상간 이란 설정으로 인해 발표 당시 많은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그러나 작품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근친상간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고 싶었던 건 아니였을게다.욕망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수만가지 중 하나가 그것일수도 있다는 작가의 경고라고 생각하면 될까...
느릅나무들은 집안사람들의 삶과 친밀한 접촉으로 인해 섬뜩한 인간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집을 짓누를 듯 덮고 있다. 에벤은 대문 옆에 서서 소유욕에 불타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애비는 에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남자의 젊음과 잘생긴 얼굴에 그녀의 욕망이 희미하게 깨어난다. 애비는 탐욕스럽게 에벤에게 키스를 되풀이했고 갑자기 에벤은 이상한 공포에 사로잡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캐벗은 에벤을 집어던지고 격한 승리감에 도취된 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