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 청년의 군 입대 성장기 혹은 연애소설이라고 단순하게 정리하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 영리하고 나름 복잡하다. 역사적 사건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반란의 주동자이자 실존 인물인 뿌가쵸프를 미워할 수 없게 묘사한 소설의 마지막에는 '~카더라'로 끝내면서 교묘하게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현대 소설에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 몇몇 작품들이 있는데 제목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 의해 어느 연대의 중사로 등록된 뻬뜨루샤는 열일곱 살이 되어서 마침내 군 입대를 하기에 이른다. 군복무를 하게 되어 뻬쩨르부르그에서의 화려한 삶과 자유를 상상하면서 기뻐했는데, 그의 희망에 찬 상상은 보기좋게 날아갔다. 아버지는 아들을 제대로 사람 만들어보겠다는 취지에서 오렌부르그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뻬뜨루샤의 낙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옛 동료인 안드레이 장군은 오랜 친구의 뜻을 존중해 그의 아들을 끼르기즈 까이사쯔끼 초원에 접경한 외딴 요새인 벨로고르스끄로 배속시킨다. 산 넘어 산이다. 만사 포기한 뻬뜨루샤의 군 입대는 시작부터 좌충우돌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변곡점을 찍게 될 결정적 인물을 외딴 요새에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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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중반부까지는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진행이 되는데, 등장인물들의 인연이 후반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소설은 1773년부터 2년에 걸쳐 실제로 일어났던 뿌가쵸프의 농민 폭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서 썼듯 실제 사건을 소재로 당시 서민들의 피폐한 삶을 에둘러 서술하는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인의 삶이 지향하는 소박한 만족과 행복이다.
풍자소설에 가까운 작품은 백성의 처지나 군사력을 따져가며 현실적인 대안없이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원론적인 내용만 반복하면서 봉쇄령을 고집하는 러시아군 장교들과 제 말이 맞다고 헐뜯기에 바쁜 까즈끄 장수들의 모습에서 당시 사회 지도층을 꼬집고 있다.
입대와 함께 화려한 삶을 기대했건만 오지로 발령이 나면서 가득했던 불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진다. 위기와 고난을 이겨내는 동안 뻬뜨루샤가 열망하는 것은 출세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귀향하는 것. 작가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폭정과 농민 폭동으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을 서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뻬뜨루샤의 깨달음을 통해 역사라는 거대한 굴레 안에서 미미하게만 느껴지는 민중 한 명 한 명의 삶이 갖는 소중함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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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가 함락되고 사령관과 부관은 살해 당했고, 남은 군사들은 무기를 빼앗긴 채 허수아비가 되었다. 뻬뜨루샤는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조국 수호에 기여해야 하는 군인으로서의 의무도 이행해야 하고, 사랑하는 여인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뻬뜨루샤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이러한 딜레마는 의외로 쉽게 답을 찾는다. 뻬뜨루샤가 화를 면하게 된 것은 오래 전 눈보라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에게 대단치 않은 호의를 베푼 덕분이었다.
뿌가쵸프는 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유사시에는 아주 쉽게 그의 목에 칼날을 내밀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우리는 온갖 핑계를 대며 칼자루를 수시로 바꿔쥐는 쉬바브린이나 폭도들과 비슷하게 처세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죽은 고기를 쪼아먹는 까마귀가 아니기를.
한마디로 작가는 반복되는 상황을 통해서 인생은 새옹지마이자 역지사지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할지를 고찰하게 한다.
까자끄 인들은 뻬뜨루샤가 첩자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모두들 그를 사형해야 한다고 난리다. 그러나 뿌가쵸프는 눈보라가 친 그날, 뻬뜨루샤가 사준 술 한 잔과 추위를 막을 토끼 가죽 외투를 잊지 않고 (그의 입장에서) 선처를 베푼다.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나눈 선의는 잊되, 받은 선의는 잊지 않는 것. 아마도 우리는 이와 반대로 기억하고 행동하기에 많은 부분에서 무언가 억울해 하고 불만이 커져가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 뿌가쵸프와 뻬뜨루샤의 시선이 마주치고, 뿌가쵸프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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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반지를 받겠어요. 지금 당신은 그리뇨프를 닮았어요.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 같은 눈빛이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리뇨프보다는 푸가초프가 되기를 원하는 마리아랍니다. 그러니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 너무 사랑하지는 마세요.
-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문학동네)」에서
이정희는 김해연에게 그가 그리뇨프보다는 푸가초프가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뇨프와 푸가초프는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열린책들)』에 나오는 인물들인데 「밤은 노래한다」를 읽을 당시에는 이정희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고 대신 뿌쉬낀의 장편소설 『대위의 딸』을 읽어보겠노라 생각했을 뿐이다. 『대위의 딸』을 읽고서 위 문장을 다시 보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정희의 처연함이 느껴졌다. 이정희는 김해연이 푸가초프를 닮길 원했던 게 아니다. 그녀는 김해연에게 푸가초프의 삶을 선택한 스스로의 결심을 알렸던 것이다. 그녀가 김해연에게 원하는 모습을 말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정작 푸가초프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 사람은 정희였다.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 너무 사랑하지는 마세요’라고 속삭이는 이정희의 말을 손에 꼭 쥐면, 그 슬픔이 눈물처럼 흐를 것만 같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은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나서 구입했다. 이정희가 김해연에게 했던 말만으로 『대위의 딸』이 연애 소설이며 대위의 딸을 사랑하는 인물은 당연히 ‘그리뇨프’일 거라고 짐작해버렸다. 소설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은 소설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대위의 딸과 그리뇨프 사이에서 꽃피운 사랑이 궁금한 게 아니라 사랑에 목숨을 건 ‘그리뇨프’의 반대쪽에 서 있는 인물인 ‘뿌가쵸프’가 궁금했다. 뿌가쵸프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위의 딸』은 ‘뾰뜨르 그리뇨프’라는 귀족의 자제가 군대에 들어가 미로노프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뿌가초프 반란군의 습격으로 벨로고르스끄 요새를 빼앗기자 오렌부르그로 가서 요새를 되찾을 길을 모색하다가 요새를 빠져나오지 못한 마리야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다시 벨로고르스끄 요새로 향하는 이야기가 큰 줄기다. 뿌가초프는 그리뇨프와 마리야의 사랑을 이뤄주는 매개체 역할로 등장하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뿌쉬낀이 뿌가초프의 반란군 이야기를 위해 연애소설을 차용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뿌가초프 반란이 역사적으로 가진 의미에 비해 소설에 등장하는 뿌가초프는 음식의 풍미를 살리기 위한 양념처럼 재미를 위해 등장시킨 인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설정은 ‘반란의 주역이자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성을 뒤흔들어 놓은 당대 최고의 정치범을 안전하게 소설 속에 형상화시키기 위해 가정소설과 연애소설을 방패로 삼은 것(p.220)’이다.
뿌가초프 반란의 진압이 가지는 의미는 민중이 활발하게 일어서던 시대는 가고 참고 순종하는 시대가 온 것이라고 말한다. 대규모 농민, 농노의 반란으로 확장되었으나 끝내 괴멸되고 만 뿌가초프의 반란을 살펴보며 이반 투르게네프의 「무무」가 떠올랐다. 농노제의 폐해가 잘 나타난 소설이 바로 투르게네프의 「무무」이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민생단 사건’을,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을 읽고선 ‘뿌가초프의 반란’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노란색 바탕 위에 농도가 다르게 그려진 여인의 형상, 그리고 빨간색 하트,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 눈길을 달리는 말 두 필이 끄는 마차. 그림은 눈보라를 헤치고 달리는 마차는 마샤를 향하는 것이라 말해준다. 책표지 그림은 화사하고 따스하고 사랑스럽다. 아름다운 표지이다.
<대위의 딸>은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를 읽고 읽어보고 싶은 유일한 책이었다. 이야기는 아기자기하고 동화적이며 수목드라마를 보는 듯 긴장감과 함께 연인이 이어지길 바라는 간절함 속에 읽게 된다. 무참한 전쟁이 생략된 덕분일 것이다. 실상은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립이 얼마나 끔찍했겠는가.뿌쉬낀은 참혹한 전제정치에 대항한 뿌가쵸프의 반란, 그로인한 내전이라는 비극을 유쾌하게 그려내면서 독자에게 러시아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게 한다. 내가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은 좀 더 알고 싶다 였다. 빙그레 웃음지으며 <대위의 딸>을 재미있게 읽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로맨틱 드라마는 이 <대위의 딸>에서 시작되었나 보다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뿌쉬낀이 생략한 반란과 내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의 독서>를 읽은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그 내용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대위의 딸>을 읽고 <청춘의 독서> 5장 <대위의 딸>을 다시 읽으며 이 책의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그렇지만 <대위의 딸>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다. 연애소설로 위장한 역사소설이며 정치소설이다. 푸가초프의 반란과 참혹했던 내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농노제도와 차르의 전제정치를 통렬하게 비판한 혁명적인 소설이다."(<청춘의 독서> 99쪽)
"그는 <대위의 딸> 곳곳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진보적 견해를 매우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노출시켰다."(<청춘의 독서> 105쪽)
"푸시킨은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가 실시되던 동토 러시아에서 인간의 자유를 노래했다."(<청춘의 독서> 112쪽)
<청춘의 독서>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위의 딸>의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뿌쉬낀의 삶과 당시 역사의 이해가 없다해도 보편적 인간존엄에 대한 작가의 의지는 읽혔겠지만 그 혁명성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는 미로노프 대위의 딸입니다."(<대위의 딸> 182쪽)
이야기는 뾰뜨르 안드레이치를 중심으로 그려진다. 배 속에서부터 근위대 중사로 등록되어진 그리뇨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반 군대로 배속된다. 그리뇨프는 요새로 가던 길에 만난 나그네에게 길을 안내해준 고마움에 대한 작은 성의를 베푼다. 그 나그네는 반란을 일으킨 뿌가쵸프였고 요새가 함락된 후 그리뇨프는 살아남게 되지만 반란군이 진압된 후에 반란진상조사 위원회에 소환되었다가 시베리아 종신 유배형을 받게 되는 이야기다. 여지껏 유쾌하게 흘러오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가 싶더니 마샤(마리아 이바노브나)가 나서서 그리뇨프를 구해내는데, 만약 마샤가 미로노프 대위의 딸이 아니었더라고 예까쩨리나 여제의 마음을 살 수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마샤의 '대위의 딸'이라는 것은 명예이지 거창한 신분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그리뇨프와의 첫 만남에서 대위의 부인 바실리사예고로브나의 딸의 처지를 한탄하듯 하는 말은 그들의 가난한 형편을 드러내고 마샤는 그리뇨프가 보는 데도 그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눈물을 흘렸었다. 하지만 이야기 속 그들은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 반란군 뿌가쵸프가 요새를 함락시킨 후 사람좋은 미로노프 대위 부부의 처형이 끔찍한데 이를 제외하면 뿌가쵸프는 굉장히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뇨프는 마샤의 활약으로 풀려난 후 뿌가쵸프의 처형을 보게 되는 데 그리뇨프를 발견한 뿌가쵸프는 고개를 숙여 보인다. 뿌가쵸프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벌인 반란에 대해 회한이나 후회같은 것은 없는 농노의 해방을 위한 정당한 일이었음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되었는데 이는 작가가 뿌가쵸프를 자신의 이야기 속에 그려내는 모습을 통해 혁명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대위의 딸>은 등장하는 인물의 캐릭터가 모두 살아움직이는 듯 생생하고 제 역할을 맡고 있어 유기적으로 엮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을 갖고 있다. 그저 동화적이고 시대배경을 생각하면 환타지처럼 보이기까지하는 이 이야기는 기계장치의 신에게 의지하듯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뇨프의 발자취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전진하고 사건은 해결되어 나간다. 철 없는 그리뇨프를 사람을 만들고자 시골 요새의 군대로 보낸 아버지의 뜻대로 그리뇨프는 이 여정을 통해 점점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위의 딸>은 전제정치에서든 반란군체제 아래서든 개인 삶의 자유와 인간존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어떤 대의명분이든 그 위에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느껴졌다.
차르 니꼴라이1세는 뿌쉬낀의 삶에 들러붙어 끈질기게 괴롭혔다. 뿌쉬낀에 대한 집착적인 검열, 검열, 검열. 이렇게 검열을 받으면 때려치울 마음도 들 것 같은데 나같은 범인이 아니기에 검열도 뿌쉬낀의 창작열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차르는 뿌쉬낀의 미모의 아내를 넘보기까지 하고 뿌쉬낀을 시종보로 임명해 인간 존엄을 모욕한다. 차르 옆에서 교태를 감추지 않는 어린 아내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이었겠는지... 이쯤되면 작가고 뭐고 다 집어치우겠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그리고 38세에 맞은 어처구니 없고 허망한 죽음은 21세기의 독자에게도 놀라움과 한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뿌쉬낀은 살아생전의 명성만큼 풍족한 삶을 영위한 것이 아니라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은 받았지만 부모의 무관심 속에 자랐고 결혼 후에는 빚에 쪼들려 살아야 했다. 그 가운데 지독한 검열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끊임없이 했고 3년 동안 공을 들인 <대위의 딸>을 죽기 1년 전에 완성했다고 한다. <대위의 딸>에 대한 감동은 주저없이 뿌쉬낀의 다른 작품을 선택하게 할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너무나 유명한 시의 작가가 바로 푸쉬킨이다. 그가 바로 이 <대위의 딸>의 저자이기도 한데, 아마도 러시아식 발음을 살리는 의미로 뿌쉬낀이라고 한 듯 하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표기가 모두 그렇게 되어있다. <대위의 딸>은 내가 언젠가 분명히 한번쯤 읽은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읽은 것 같지 않은 것이 바로 너무 어린 나이에 감당하지 못하는 고전들을 접했던 부작용 중의 하나가 아닐까...^^; 아뭏든 그런 저런 이유로 <대위의 딸>을 다시금 구입하게 되었다. 여러 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의 작품이 나왔지만 특별히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제본방식 때문이었다. 누군가 이야기해주기를 열린책들에서 나오는 책들은 아직도 실로 하나하나 꿰어 제본한 것들이라 요즘 많이 사용되는 접착제 제본에 비해 훨씬 견고하고 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장본임에도 그리 무겁지 않아 가지고 다니기에도 좋았다.
<대위의 딸>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뿌가초프 반란을 배경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어찌보면 주인공 남녀의 로맨스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 역사적 대사건을 차용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삶 자체가 중심이 되고 있다. 뾰뜨르 그리뇨프라는 귀족의 철없던 아들이 변방의 군대로 가는 길에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게 되는데, 그 때 한 농부가 나타나 길을 안내해주고 뾰뜨르는 그 농부에게 토끼털 외투를 선물하게 된다. 이후 뾰뜨르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사령관 미로노프 대위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 집 마리야를 사랑하게 되는데, 마리야를 사랑하던 또 다른 남자 쉬바브린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던 중 뿌가초프의 반란군이 요새를 함락시키고 사령관 부부도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목이 매달린 찰나 뿌가초프가 바로 자신이 토끼털 외투를 선물한 농부였음을 알게 된다. 뿌쉬낀은 설사 우리가 뿌가초프 반란이 어떤 사건이고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이 소설을 읽는데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극적인 묘사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뿌쉬낀의 이러한 태도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만큼 뿌가초프 반란은 러시아 역사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작가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간에 독자로서는 어려운 러시아 발음의 등장인물들 이름 외우기도 힘든 상황에서 복잡한 역사적 사건의 이해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 하나를 얻은 셈이 되었다. 군데군데 가미된 코믹적 요소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뿌쉬낀의 삶의 자세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격변의 혼란으로 들끓는 사회,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감정의 격렬함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는 시대라면, 이를 말하는 문장이 평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뿌쉬낀’의 이 소설은 지극히 사적인 술회에 녹여 무덤덤하기까지 할 정도로 감정의 파고를 노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비판과 힐난의 목소리를 감지케 하는 것은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요란하게 지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깨어있는 지성을 말하는 세련됨이랄까?
19세기에 써진 이 소설은 18세기말(1770년대)의 크고 작은 민중 폭동과 반란이 빈번하던 러시아가 배경이다. 특히 실존 인물로서 황제를 참칭했던 “뿌가초프”라는 반란군 두목을 등장시킴으로써 리얼리티 문학에 다가가지만, 결코 사회성을 앞세우거나 참여 문학적 색채를 띠는 것은 아니다. 외려 낭만적이라 할 만큼, 개인의 연대기와 연애담과 무용담에 가깝다. 그럼에도 작가의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의식은 저변에 도도히 흐른다.
귀족 가문의 자제인 “뾰뜨르 안드레예비치 그리노프(애칭: 뻬뜨루샤)”는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군에 입대하고, 소위보가 되어 변방 요새에 배치된다. 방벽은 물론 이렇다 할 군사장비나 병력조차 지니지 못한 허름한 요새이지만 사령관인 미노로프 대위, 그의 아내 등과 가족적 친밀감을 높이면서 점차 임지에 적응해 간다. 한편 소설의 제목인 대위의 딸, 즉 요새 사령관의 딸인 “마리야 이바노브나(마샤)”는 뾰뜨르와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만, 뿌가초프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요새의 침탈과 함께 부모를 여의고 고립되는 상황에 이른다.
뿌가초프와의 우연한 지난 인연의 덕으로 생명을 부지한 뾰뜨르는 이들의 지배에서 벗어나지만 감금상태에 있던 마리야의 구원의 호소편지는 다시금 청년장교를 반란군의 점령지로 향하게 하고, 귀족 등 지배계급에게 잔인함과 공포의 인물로 인식되는 뿌가초프를 향하여 당당히 연인의 구원을 위한 도움을 요청한다. 반란군의 수괴이자 폭도로 불리지만 뿌가초프는 자신의 적일 수 있는 귀족가문의 청년장교 뾰뜨르에게 신의와 정의를 보여주고, 선의를 베푼다. 당대 기득권 계층인 귀족들에게는 폭도이지만, 민중에겐 결코 극악한 폭도의 무리가 아님을 우회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란군이 진압되었을 때, 뾰뜨르에게 반란군의 두목과 내통하였다는 혐의가 되어 유형 판결을 받게 하는데, 예카쩨리나 여제(女帝)의 폭력정치가 횡행하던 시절 무능한 귀족들의 위선과 허영, 파렴치함이 어떻게 권력이 되어 작동되는지를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뾰뜨르의 유형판결 소식은 그의 부모에 의탁하여 보호를 받던 마리야에게 전해지고, 뿌가초프와 뾰뜨르의 관계에 얽힌 사정을 잘 알던 그녀는 무죄를 청원하기위해 여제가 있는 도시로 향하고, 공원에서 마주한 우아한 여인과 뾰뜨르의 사정을 얘기하게 된다.
아마도 이 소설의 중립적인 기운, 치열하지 않음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마리야가 만난 여인이 바로 예카쩨리나 여제라는 것이고, 그녀가 뾰뜨르를 사면하는 것인데, 민중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기성권력의 모습을 통해 정치권력의 변화를 기대하고자 하는 작가 염원의 반영이지 않았을까싶다. 서슬 시퍼런 권력의 감시와 검열을 인내하면서 시대와 역사의 당위를 말하려 했던 뿌쉬낀의 모습이 투영되는 듯하다. 또한 연애소설이자 자비와 용서의 역사를 사적 수기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이 작품은 세상을 향해 말하는 방식, 변화의 제안 방식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