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 상권을 읽었다. 꼭 읽어보라고 하는 소설이었기에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었다. 총 세권으로 나뉘어졌고 이번에 상권을 읽었다. 상 권에서는 아직 어떤 내용의 진척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내가 모르는 것일까? 하여튼, 소설은 다소 지루하면서 일상을 그리고 주인공 한스가 겪는 사소한 감정까지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한스는 조선소에 임시직으로 취업이 된 상태이고 3주 기간의 시간이 있어 친척인 요아힘이 스위스 요양원에 입원하고 있어 만나러 가게 되었다. 고도가 높기에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힘들기도 하다.
한스가 잠시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여러 환자들을 보게 되는데 그 중엔 여기에 너무 오래 입원한 한 남성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죽음만이 이 세상과 작별이라는 남자를 보고 한스는 문득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정말 요양원에서는 햇살을 쬐고 체온을 재고, 밥을 먹고 강의를 듣는 일들 외에는 하는 것이 없다. 환자로 들어왔지만 오히려 낫기 보다는 더 병이 들것만 같다. 한스는 처음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반항적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이탈리아 환자인 세템브리니를 알게 된다. 처음부터 한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남자로 아버지가 문학자로 자존심이 쎈 남성이다. 처음에는 반감을 가졌으나 시간이 흐러면스 한스는 오히려 이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한스는 어떤 인물인가? 어릴 적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렸고, 할아버지에게 맡겨졌으나 할아버지 역시 병환이 있어 오래 있지 못했다. 그러나, 어릴 적 이미 부모님을 여의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한스는 왠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이외에도 한스가 산책을 하면서 갖는 생각과 세템브리니의 생각은 이 책의 전체를 차지한다. 그런데 어찌 이 부분이 쉽지가 않았다. 다만, 간간히 저자가 말하는 생각을 이해 할 뿐이었다. 또, 한스가 어릴 적 학교에서 만났던 아니, 본인 혼자서 친구라고 생각한 프리비슬라프와 닮은 쇼샤 부인을 이 병원에서 보게 된다 . 하지만, 한스의 착각일 수도 있으며 상 권에서는 아직 쇼샤 부인이 프리비슬라프인지는 확실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요양원에 입원한 여러 환자들이 등장하고 이로 인해 한스는 불편함을 내포이기도 하며, 이들로 인해 불쾌함을 갖기도 한다. 또, 어떤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은데 무려 페이지가 500페지가 가까운데 중반을 넘어서부터 세템브리니가 말한 삶과 죽음에 대해 말을 하면서 뭔가 집중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스가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데 한스는 자주 추위를 느끼고 한번은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 잠을 잔 적이 있었다.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 의사는 한스를 보고 빈혈이 있다고 했었는데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원래부터 건강체질이 아니었는데 열이 오르고 내려가지 않아 결국 체온을 재고 높은 열로 한스는 이제 손님이 아니라 환자로 요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요양원이 있는 곳은 날씨가 한달안에 겨울과 여름이 오고 간다. 이런 날씨 속에서 환자들이 과연 병세가 나아질까? 의사인 베런스는 이곳에 있는 이유가 본인 역시 약하기도 하며 아내의 죽음 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베런스라는 인물에 대해 아직 자세한 내용이 없어 앞으로 어떤 인물로 나올지 궁금하다. 그리고 한스는 몸이 건강해져 무사히 도시로 내려갈 수 있을지....상 권은 궁금증만 남겨 놓았다.
"죽음을 관찰하는 강하고 고귀한 방식은 게다가 종교적이기도 한 유일한 방식은, 말하자면 죽음을 삶의 일부분이자 그 부속물, 삶의 성스러운 조건으로 파악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
지금 당장 왜 <마의산>을 읽어야하냐고, 그 이유를 대보라면 딱히 할 말이 없을 거 같다.
천페이지가 넘는 장편의 관념소설을 재밌어라 읽어댈 이는 드물테니, 이 책과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한스라는 평범한 이십대 청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설마 7년이나 걸리겠냐"는 작가의 농담은 시간의 유용성, 내지는 효율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한다.
그런만큼, 시간성의 문제는 이 소설에서 중요하다.
3주 예정으로 사촌 요아힘의 문병을 위해 베르크호프 요양원을 방문했던 한스는, 자신도 결핵 진단을 받고서 7년이란 시간을 그 마성의 공간에 머무르게 된다. 지상의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에는 전혀 개의치않고서 도도하게 흐르는 시간들, 기억할 새도 없이 훌쩍 덩어리가 되어 지나가버리기도 하지만, 순간 속에 영원을 담듯이 한없이 미분화돼 정지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그래서 음악이 중요하다. 시간을 타고 흐르는 예술, 음악은 "시간의 흐름에다 각성과 정신과 귀중함을 부여하니"까. "음악은 시간을 일깨우고, 우리들이 시간을 아주 섬세하게 향유하도록 일깨우니"까. 주인공 한스가 이 요양원에서 음악에 빠져드는 이유다. 그러나 사촌 요아힘은 요양원에서의 무의미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지상의 의무 속으로 복귀하지만, 끝내는 나약한 육체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은 요양원으로 다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러한 요아힘과는 달리 한스는 날짜를 세는 것이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영역을 탐구하고 순간 속에 비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비전도 찰나 속에 사라져버릴 만큼 시간은 도도하게 인간을 배반하며 흐른다. 7년이 흐른 뒤 한스가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다. 젊은 군인으로 전장에 참여하게 된 한스, 이것은 그 시대가 청년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참여" 방식이다. 청년의 죽음을 요구하는 지상의 시간 또한 오만하기가 이를 데 없다. 전장에서의 한스는 전우의 시체를 짓밝으며 무거운 군화발로 질척질적 전진한다. 전진할 수밖에 없으므로,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흥얼거리며, "가지에 새겨놓은 사랑의 말들"을 기억하면서, 한스는 그렇게 죽음에 다가선다.
이 소설의 또하나 굵은 줄기는 한스를 교육하는 이들 사이의 논쟁이다.
시민적 계몽주의자를 자처하는 세템브리나, 종교적 사해동포주의자 나프타, 그리고 마담 쇼사와 그녀의 연인 페퍼코른의 대화적 논쟁은, 각 인물들이 대변하는 가치들의 생애 마지막 불꽃이다. 계몽주의가 보여주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무한 낙관주의, 그 빈틈을 치고 들어오는 나프타의 역설적 언변들, 이를 테면 선과 악을 뒤집거나, 병든 육체의 윤리성을 찬양하거나, 폭력의 미학을 정당화하는 논변들, 그리고 관능과 육화된 욕구에 충실한 페퍼코른의 압도성, 이 모든 논변들은 한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한스는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한스를 위한 교육 소설이니, 성장 소설이니 하기도 어렵다. 한스의 각성은 혼미한 정신 속의 직관적 비전, 딱 그 순간 뿐이기에 그렇다. 이들은 모두 죽는다. 병으로, 자기 육체에 대한 폭력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암울한 시대적 열병 속에서도, 무감각과 폭력이 지배하는 이 지상에서도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곧 잊혀져버린 한스의 비전, 그 예감이다.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 포탄의 불꽃이 춤을 추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슈베르트의 음악처럼 피어올릴 수 있는 예감, 사랑,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이걸 알기 위해서 이 긴 소설을 읽어야만 했을까?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그래, 이 장편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에.
마의 산은 아주 어릴 때 부터 시도해봤던 책이지만 그 방대함에 놀라 늘 읽다 중간에 포기한 책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더 도전을 하였습니다. 역시나 책 중간 중간에 나오는 두 사변가의 논쟁 부분은 이해가 다 안되더라도 완독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보니 다시 한번 더 꼼꼼하게 읽고 넘어 가는게 소설의 전반적인 이해에 굉장히 큰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더 완독을 도전하겠습니다.
한스 카스트로프는 3주 예정으로 알프스 산중 베르크호프 요양소를 찾는다. 사촌 요하힘 침센을 문병할 요량이었다. 요하힘은 폐결핵으로 베르크호프에 요양중이다. 위의 사람들은 평지와는 다른 생활을 한다. 의무와 일의 세계인 평지 사람들과 달리 요양원 사람들은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이런 삶은 시간 감각을 무디게 한다. 이곳 환자들과 의사에게 3주라는 시간은 너무 짧아 의식하가 힘든 단위이다. 그들은 3주 예정으로 왔다는 한스 카스트로프를 비웃는다. 그들의 예언대로 한스 카스트로프는 폐결핵 초기 선고를 받고 베르크호프에 눌러 앉게 된다. 처음 3주간은 견딜 수 없이 시간이 느리게 갔다. 적응할 수 없는 것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요양원 사람들의 숙명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이 한스 카스트로프도 처음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시간은 천천히 갔다. 그러나 3주가 훌쩍 지나고 한스 카스트로프도 적응할 수 없는 것에 적응하는 법을 터득한다. 이때부터 작은 시간 단위는 의미가 없다. 시간 단위를 크게 뽑는다면 취생몽사와도 같은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가득한 삶은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이 허망하고 빠르게 지나간다.
사랑과 죽음, 시간에 관한 이야기
(마의 산)
20대 청년 카스토르프는 스위스 고산지대 다보스에 있는 고급 호텔식 폐결핵 요양소 <베르크 호프>에서 요양 중인 사촌을 방문한다. 이 책은 3주 예정으로 휴가차 방문하였지만 우연이 자신(카스토르프)에게 폐결핵의 징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후 7년간을 ‘겨울이 아닌 적이 없었고 간간히 해가 내리쬐는 여름 날씨가 끼어있는’, ‘도무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인 그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상, 중, 하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사랑과 죽음,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의 의미는 제발 애매한 그대로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 애매모호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랑에는 삶과 인간성이 담겨있는 것이다.”(하권, 213쪽).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하권, 71쪽)
“우린 공간을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식하지. 시각과 촉각으로 말이야. 좋아, 그러면 시간을 인식하는 기관은 도대체 무엇일까?”(상권 132쪽)
중권 뒷부분에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키를 타다가 길을 잃고 생사를 넘나드는 장면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추위 속에서 잠시 꾼 꿈을 통해 삶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되고 다시 길을 찾아 나선다.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된다.”(중권 480쪽)
한스가 7년간의 요양생활을 끝내고 돌아간 곳은 전쟁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토마스만의 장편소설이다.
20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