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읽고 나서 오직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이 책을 꾸역꾸역 끝까지 읽은 이유는 단지 '말테의 수기'를 읽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내 손때가 묻은 책을 책장에, 책이라기 보다는 트로피로 전시하고 싶은 욕심 외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진작 포기했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내게 이 책에 관해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릴케는 시로 읽는게 어떨까?' 이런 대답쯤이지 않을까?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시를 위해 눈을 뜨고자 하는 시인의 파리 체험이며 두번째는 어린 시절의 추억, 그리고 마지막은 독서 체험에 대한 회상이다. 당연히 마지막이 가장 어렵다.
릴케의 표현대로 이 책은 기억의 파편들을 몽타주 형식으로 정리한 글이다. 말하자면 연결 고리 없이 기억의 단편들이 두서 없이 나열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부분에서 전혀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는 말들을 어쩌면 하나하나 유추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러려면 몇달 정도로는 힘들 것 같다.
다만 - 전체적인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 부분부분 소름 끼치는 문장을 만나곤 하는데, 혹시라도 이런 문장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동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 가지 싶다.' [7]
'이젠 어떤 편지도 쓰지 않겠다.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변하고 있다면,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와 다른 존재라면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낯선 사람들,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다.' [10]
'시는 기다려야 한다. 한평생을,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아서 의미와 단맛을 모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맨 마지막에는 좋은 시 겨우 열 줄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감정이 아니다(감정은 이른 나이에도 충분히 갖는다). 그것은 경험이다.' [24]
'우스운 일이다. 나는 여기 작은 방에 앉아 있다. 나, 브리게는 스물여덟 살이 되었고, 아무도 나를 모른다. 나는 여기 앉아 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흐린 오후 6층 방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27]
'내가 모든 인간 중에 가장 천한 사람이 아니며, 내가 경멸하는 인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몇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게 해주소서.' [60]
'개는 병이 들어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개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개가 간헐적으로 짧게 짖었다. 낯선 사람이 방 안에 들어오면 늘 하던 대로였다. 우리 둘 사이엔 그런 경우 이렇게 짖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지중에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낯선 손님은 벌써 개의 몸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개의 시선을 찾았고, 개도 나의 시선을 찾았다. 그러나 작별을 하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개는 나를 아주 엄하고 서먹서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개는 내가 그 낯선 손님을 들였다고 비난했다. 개는 애가 그걸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때 개가 나를 항상 과대평가해 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개한테 그것을 가르쳐 줄 시간은 없었다. 개는 죽는 순간까지 나를 서먹하고 외롭게 쳐다보았다.' [178]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처음 알게되었다. 이름만 듣고는 여성시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콧수염까지 자란 남성작가였다. 이 책은 평소 감명깊은 시를 쓰며 이름을 알린 릴케가 쓴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형식이 특이한데, 어떠한 형식이나 전개 없이 중구난방으로 주인공의 생각과 서사를 따라간다. 그렇기에 읽어나가기에 난해한 부분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말테의 수기는 주인공이 파리라는 도시에 와서 상념에 젖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정말 무료한 평일 오후, 한번씩 책을 펼쳐들고 몇 구절 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첫 번째 작품. 프랑스 작품을 읽을 수록 새삼 마르셀 프루스트가 프랑스 문학에 직간접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매번 1권만 읽고 포기했기에 따로 보탤 말은 없지만, '말테의 수기'를 읽으면서 내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프루스트의 작품이 생각났다.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 가지 싶다.'
유명한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말테는 죽음에 대해 깊게 사유하게 된다. 자신의 유년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고, 역사속 인물에 대해서 고찰하며, 대도시의 허상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렇게 '고독과 고난을 숙명처럼 짊어진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작품도 그러했지만, 릴케의 작품 또한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의식의 흐름 대로 흘러가는 서술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렇게 무수히 많은 사유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타인의 고독을 이해하기란 이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