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의 종이책 버전과 열책, 문예, 펭귄 세 개의 이북 버전의 맥베스를 소장(혹은 대여)하고 있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 읽은 것이 펭귄 판본인데, 1623년 <이절판>이라고 불리던 셰익스피어 전집에 최초 등장한 판본을 사용한다. 이것을 읽다가 열책으로 갈아탄 이유는 어딘가 생략된 듯 너무 빠른 스피드가 전개 때문이었는데, 결국 사건의 치밀한 구조와 실행의 디테일이 생략된 빠른 스피드 때문에 제임스 서버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라는 작품이 생겨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열책 버전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물론 번역의 텍스트는 꽤 달랐지만, 내용상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큰 특징만 잡는다면 열책 버전은 원어의 운문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운문적 형식을 그대로 채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줄바꿈을 자주하기 때문에 열악한 타사 서점의 이북 읽어주기 기능으로 듣기에 더 용이해서였다. (이렇게 계속 옆으로 새다가 어느 세월에 하고 싶은 말을 쓰게 될 지 알 수가 없다.) 또다른 특징은 펭귄 버전은 판본과, 작품에 대한 설명이 텍스트보다 많을 정도로 풍부한데, 이게 딱히 텍스트의 영문적, 학문적 분석을 요구하는 독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 유용한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우는 대충 읽다 너무 길고 지루해서 술렁술렁 넘겨버렸다. 그래도 유용한 내용이 있었는데, 이 텍스트의 유래에 대한 정보다. “셰익스피어는 라파엘 홀린즈헤드(Raphael Holinshed)의 『연대기』 제2권에서 맥베스와 덩컨 왕, 그리고 운명의 자매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냈다.”[1] 때문에 아침에 레이위키 영문판이랑 두루두루 뒤졌지만, 이 서문보다 더 자세한 정보는 별로 없었는데, 중요한 건, 이 홀린즈헤드 연대기에 맥베스의 덩컨왕 살해와 집권 후 10년에 걸친 집권기의 내용이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는 것이고, 셰익스피어는 그 평면적인 역사 서술서에서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 광기를 포착했다는 사실이다.
열책 버전에서는 판본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펭귄 버전보다 텍스트가 조금 더 이해가 편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알고보니 대사 자체보다는 지문이 보다 상세하게 추가되어, 상황에 대한 이해가 쉬웠다고 할 수 있다. 맥베스가 왕으로 추대되어 잔치를 여는 동안, 자객들을 시켜 뱅쿠오를 살해했는데, 방금 전에 자객을 통해 뱅쿠오가 죽어 묻혔다는 보고를 받은 후인데, 그가 만찬장의 자신의 의자에 그가 앉아 있는 것이다. 뱅쿠오의 유령을 본 맥베스의 반응은 두 버전이 약간에 차이가 있다. 펭귄이 유령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처리된 것과 달리, 열책에서는 하오체로, 영주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듯이 보인다. 뱅쿠오의 유령은 맥베스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터라,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 해도, 영주들에게는 말이 안되고, 독자들에게는 둘다 말이 된다. 나중에 다른 책의 버전에서도 확인해봐야겠다.
(펭귄)
맥베스 누가 이런 짓을 하였느냐?
귀족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맥베스 유령아, 내가 했다고 너는 말하지 못하리라. 피투성이가 된 너의 머리카락을 내 쪽으로 흔들지 말거라.
(열책)
영주들 무슨 짓 말씀이십니까, 폐하?
맥베스 내가 했다고는 말 못 하오. 그 피투성이 머리칼을 내게 흔들지 마라.
맥베스 부인은 그의 정신분열적 행동을 수습하려고 애를 쓰면서, 이이가 원래 좀 이상한 데가 있다는 듯 둘러대는동안, 그는 계속해서 뱅쿠오의 유령과 귀족들을 번갈아 가며 무의식적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뭔뜻인지 잘 모르겠는 부분이 나온다. 기껏 죽였는데 살아서 돌아다닌다면 무덤은 솔개의 창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고 솔개 위 창자가 우리의 무덤이 될 거라는 두 가지 다른 표현이 그것이다. 어쨌든, 시체가 돌아다니니 무섭다는 말인 거 같긴 한데, 불충분하긴 하지만 열책에는 설명이 붙어있다.
(열책)
맥베스 제발 저걸 보시오! 보라고! 보란 말이오! 봐! 저걸 어떻게 설명할 거요? 왜,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말도 해봐라. 납골당과 무덤들이 우리가 묻은 것들을 다시 내뱉는다면 앞으로 무덤들은 솔개의 창자로 만들어야 한다.(솔개가 시체를 다 먹어치우게 해야만 시체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라는 주석이 붙어있다.)
(펭귄)
제발, 저기를 좀 보시오! 저것! 바로 저것! 저것 좀 보시오!─자, 어떻소? 뭐야, 무서울 것 없다. 네가 머리를 끄덕일 수 있거든, 말도 좀 해보거라. 만약 납골당이나 무덤이 우리가 한번 매장했던 것들을 다시 돌려보낸다면, 솔개의 위 창자가 장차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이다.
⟪맥베스⟫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맥베스가 왕을 시해하는 장면이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맥베스⟫는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심리 중심이다. 왕의 시해와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피비린내나는 암살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문학으로 따지면 장르문학보다는 오히려 순수문학에 가깝다고나 할까. 나는 이 두 장르의 분류를 전에 김연수의 책에서 읽은 대로, ‘어떻게’와 ‘왜’의 차이로 생각해 보았다. 즉, 사건을 모의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정확한 디테일들은 거의 모두 생략되어 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가 누군가를 죽였고, 그 일로 인해 파생되는 인간의 심리 변화에 보다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극이 집중하는 것은 죽인 사람, 죽음을 모의한 사람, 그리고 희생자와 목격자들의 마음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다.
극중에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은데, 주석에 따르면 시해된 덩컨왕과 맥베스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형제 사이이고, 덩컨왕이 죽으면 덩컨왕의 아들 맬컴을 제치고 왕좌의 1순위가 맥베스였던 모양이다. 읽을 때는 주석을 생략하고 읽어서 세습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왕을 죽인다고 왕이 된다고 생각하는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주석을 보니, 예언을 인위적으로 실행하려는 맥베스와 그의 부인의 음모 정황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애초 계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언과 동시에 두 사람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실행된다. 맥베스 부인은, 남편이 숲에서 만난 그 기이한 예언에 대한 사건을 에 대해 쓴 편지를 읽으면서 동시에 시해 음모로 비약된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는데 편지에는 마녀들이 나를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분〉라고 인사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뿐인데, 그녀의 머리속은 왕의 시해 계획이 이미 착수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양심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남편의 이중적 가치관이다.
“당신의 성정이 걱정입니다. 지름길을 택하기에는 너무 인정이 많으시지요. 당신은 위대해지고 싶어 하십니다. 야망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야망에 따르는 사악함이 없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시지만 고상한 방법으로 그리되길 원하십니다. 속임수는 쓰고 싶지 않아 하면서 속여서라도 얻고 싶어 하십니다. 위대하신 글램즈 영주여 ”[2]
이 때까지 무훈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덩컨왕이 가장 신뢰하고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인정많고, 착한 심성을 드러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야망을 꿰뚫어보는 것은 그의 부인 뿐이다. ‘속임수는 쓰고 싶지 않으나 속여서라도 얻고 싶어하는’ 맥베스의 '등떠밀려 살인'은 몇 번이나 주저되고 머뭇거려진다. 왕이 글램즈 영지에 묵기로 한 날이 바로 모든 사건이 일어난 그 날 당일임에도,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아차리고 빠른 결단과 과감한 실행력, 그리고 집요한 설득으로 맥베스를 설득시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맥베스의 아내다. 아내가 없었다면 맥베스 혼자서는 그런 일을 계획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한다.
왕의 시해라는 거대한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의 심리는 서서히 전환을 맞는다. 유령을 보고 정신 착란적인 증세를 보일만큼 두려움과 후회와 불안에 떨던 맥베스는 그 불안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더욱 사악한 광기를 보이기 시작한다. 맥베스가 불안에 떨 때마다 부끄러운 줄 알라며 그래도 사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나무라던 맥베스 부인은 반대로 점점 자신의 손끝에서 풍겨나오는 진한 피냄새를 지우고 싶어한다. 강했던 마음은 잠재된 두려움에 의해 본성을 드러내고, 반대로 약했던 마음은 살인의 행위에 가속이 붙으며 점점 냉혈한으로 바뀌어간다. 이제 그들은 마음 편했던 옛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남편은 아내 없이도 음모를 꾸미고 왕좌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만한 요소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아내 역시 남편이 저지르는 수많은 광기의 살인을 느끼며, 더욱 더 진해지는 손끝에서 나는 피냄새에 매일 밤마다 촛불을 들고 다니며 손을 씻는다.
두 사람의 계획은 애초에 잘못되었다. 마녀들이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을 예언했을 뿐 아니라 동행했던 뱅코우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것도 함께 예언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왕의 시해를 계획할 때만 해도, 맥베스 부부의 관심은 맥베스가 왕이 되는 예언을 스스로의 음모로 실행시키는 것에만 있지, 마녀들이 함께 예언한 것 즉, 뱅코우의 자녀들이 왕위를 이어간다는 예언에는 생각이 도달하지 못했다. 자식이 없는 맥베스 부부에게 그들의 왕조 건설의 야망은 공허하다. “열매 없는 왕관”을 쓰고 “헛된 왕홀”을 손에 쥐고 있다(3막 1장)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가 받고 있던 존경과 찬사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헛된 왕권과 광기에 쌓여 계속되는 폭압, 그리고 지속적인 반란과 진압 뿐이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뱅코우의 자손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왕위를 찬탈한 중간 매개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광기를 체념적 무모함으로 이끈다.
맥베스를 다시 읽은 이유는, 제임스 서버(Thurber)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를 읽다가 등장 인물의 디테일이 기억나지 않아서였다. 전에도 맥베스를 읽었던 이유가 어떤 책에서 맥베스 부인의 손닦는 부분의 심리가 굉장히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어서였는데, 이번 서버의 책에서는 맥베스의 살인 그 자체를 추리 소설 독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내용이어서 누가 범인이니 아니니 하며 따지는 내용이라 좀 더 주의 깊게 읽었다. 과연, 살해하는 장면 그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추론이 가능하리라. 원래 계획은 서버의 단편 맥베스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리뷰하면서 맥베스 줄거리를 한단락만 추가할 계획이었는데, 마음대로 안되었다. 서버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는> 별도 리뷰할 계획
[1] 캐럴 칠링턴, 러터, 맥베스 탄생의 배경과 그 숨겨진 의미, 멕베스, 펭귄클래식코리아 서문 (1쇄 발행일 2010년)
[2] 맥베스, 1막 5장, 열린책들
맥베스-셰익스피어
데미안에 이어서 맥베스 서평을 씁니다. 그것도 열린책들 판본의 맥베스를. 판본이 어떻든간에 맥베스는 맥베스죠. 세 마녀에 의해 야망이 불타올라 반역을 저지르고 왕이 되어 파멸하는 맥베스. 세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 가장 전개가 빠르고, 분량이 작은 작품. 제가 과거에 읽었지만, 가끔식 기회되면 다시 읽어보는 맥베스.
맥베스를 데미안 서평에서 언급한 총체성의 관점에서 한 번 다뤄보려고 합니다. 일단 제가 생각하는 총체성을 더 구체적으로 말해볼께요. 기본적으로 저는 총체성을 크게 두 가지 개념의 총합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편성과 특수성. 보편성은 언제 어느 시기든, 어떤 장소든,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든지 혹은 누구든지 적용 가능한 개념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일이라도 지금 현재 한국에서도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식으로. 그에 보편성은 어떤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에서만 통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개념틀로 총체성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먼저 보편성. 맥베스는 야망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작품입니다.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욕망 없는 인간은 없는 법이죠. 욕망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 발화할 때가 되면 발화합니다. 맥베스가 세 마녀를 만나서 자신의 야망을 꽃 피우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맥베스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맥베스의 보편서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특수성. 누구나 맥베스처럼 욕망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욕망의 발현 양상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적과 흑>의 쥘리앵 소렐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왕정복고 시기에 서민계층으로서 자신의 야망을 드러냈다 비극을 맞죠. 쥘리앵 소렐의 비극은 대혁명 이후의 왕정복고 시기의 시대적 맥락과 쥘리앵 소렐 개인의 삶이 만나서 이루어진 쥘리앵 소렐만의 특수한 것입니다. 보봐리 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봐리 부인의 비극은, 자본주의적 욕망에 가득찬 탐욕스럽고 위선적이며 천박한 당대 프랑스 사회의 시대상과 보바리 부인이라는 개인의 삶이 만나서 빚어진 것입니다. 맥베스의 비극도 시대상과 개인의 삶이 만나서 만들어집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맥베스라는 작품은, 시대상을 그려내는 풍속소설이 아니기에, 특정한 시대상을 리얼하게 그려내는 것에 치중하지는 않습니다. 시대상을 담으면서도 희곡답게,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보편적이면서도 인공적인 느낌이 있죠. 여하튼 그런 상황에서 맥베스는 자신의 고유성으로 비극을 빚어냅니다. 야망을 드러내지 않다 세 마녀를 만나 부추김을 당하고, 음모를 실행하길 주저하다 아내의 종용으로 왕을 죽이고, 왕을 죽인 뒤에는 야망을 드러내며 독재자가 되고, 나중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죽는 아내와는 달리 죄책감 없이 자신의 야망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이 모습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맥베스만의 것입니다. 여기에 맥베스의 특수성이 있습니다.
저는 두 요소에 덧붙여 ‘신’이라는 측면에서도 맥베스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비극이라는 원류에서 이어진 비극의 흐름 속에 맥베스는 ‘신’이라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서는 신들이 직접적으로 극 속에 등장합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는 신이 드러나긴 하지만 삶에 그 힘을 드리우는 정도죠. 에우리피데스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을 해체하는 의도로 신을 이용합니다. 로마 시대 세네카의 비극에서는 잔혹한 비극의 전시적 요소로 신들이 사용되죠. 르네상스 시대와 이어지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비극인 맥베스에서는 직접적으로 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극에서 중요한 건 인간의 선택입니다. 인간의 선택이 비극을 초래하고, 거기에서 인간은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물론 마녀라든지, 유령이라든지 하는 요소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초현실적 요소들이 신을 떠올리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비극에서 중요한 건 인간의 욕망과 선택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선택이 삶을 만들고 그것이 운명으로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리스 비극의 전통을 이어가지만 신들과 멀어진 게 확연하게 보이죠. 그래서 맥베스는, 고대에서 확연하게 벗어나서 인간 중심의 근대로 달려가는 어떤 지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보다는 인간에 더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는 식으로.
자, 종합해보죠. 저는 맥베스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욕망을 비극의 형상으로 문학화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맥베스는 세 마녀라든지, 유령의 등장, 순신각에 바뀌는 욕망의 양상과 맥베스 특유의 대사 등으로 특유의 독특한 비극성을 가진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맥베스는 신에서 멀어져가는 인간 삶의 비극성을 표현한 작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제가 바라보는 맥베스이고, 저는 거기에서 맥베스의 총체성을 봅니다. 저와 같은 맥베스이자 저와 다른 맥베스이자 신에게 매달린 존재가 아닌 인간 고유의 삶으로 사려는 인간 맥베스로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굉장히 많이 들어봤지만,
아는 것은 햄릿 밖에 없었다.
나머지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 리어왕은 제목이라도 들어봤지만
맥베스는 솔직히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번역을 하신 권오숙 교수님의 셰익스피어 4대비극 강의를 듣고,
가장 잘 몰랐던 비극인, 맥베스를 먼저 읽어봤다.
고전은 잘 읽히지 않는데, 이 책에는 다양한 주석과 해석이 달려 있어 좋았다.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 장면들을 더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순진한 꽃처럼 보이시되, 그 밑에 도사리고 있는 뱀처럼 행동하십시오.
-당신 스스로 지녔던 희망은 술취한 탓이었나요? 그러고는 잠들어 버렸나요?
깨어나 다시 보니, 아까 그리 쉽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두렵게 보이시나요?
고전을 보는 것은 그 시대의 감성을 요한다. 작가의 정신에 울타리를 지운 시대 정신과 이전의 사회 문화의 관습들과 한계들 위에 서서 봐야 그 고전의 가치가 제대로 보인다.
그러나 이게 미션 임파서블이고 보면 고전은 종종 실망을 안기곤 한다. 맥베스도 마찬가지다. 캐릭터는 요즘 유행하는 트라우마를 가진 상처받은 영혼들 캐릭터에 비하면 밋밋하고, 플롯은 단조롭다. 그럼에도 맥베스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를 곱씹어보면 솥 바닥에 가라앉은 왕건이 처럼 건져지는 것이 있다.
맥베스의 가장 중요한 열쇠말은 equivocation이 아닐까 싶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모호한 말', '이중의 의미' 정도 된다고 한다.
맥베스가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역모를 하고, 왕이 되고, 그의 영혼이 핍폐해지고, 결국 반역자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매 사건의 단면들은 그 자체로 복이거나 불운의 징조를 겸하여 갖고 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한다면 '세옹지마'가 아닐까. 이렇게 매 순간의 상황들이 진전되면서도 이에 대한 가치의 판단은 결국 끝까지 뒤로 미루게 되고, 그리고 극이 끝난 이후에도 관객들은 맥베스의 선악에 대한 이렇다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이런 의미의 보류는 라캉이 말한 '흐르는 시니피앙'과 같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항상 그 뒤의 사건들로 재해석되고 판단되면서 그 사건 자체의 의미는 겹겹이 분화한다.
이런 의미의 층위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은 물론 캐릭터다. 밋밋하다고 한 것은 이들이 감정의 전형에 머물렀다고 보였기 때문인데, 그러나 매 순간 그런 전형을 보이면서도 극의 전개에서 변화를 보이면서 의미를 생성한다는 것은 캐릭터 작화에서 참고할 방법이 아닌가 한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요즘의 극에서 보이는 과도한 자의식, 세상을 다 책임질 것 같은 트라우마로 인해 정작 인물들의 행동은 더 소심한 햄릿에 머물고 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매 순간 명백한 표상들을 이어가면서도 맥베스의 인물들이 보이는 변화의 괘적은 여름이 겨울로 바뀌는 폭 정도다.
플롯 면에서도 짚어 볼 것들이 있다. 전체 순환구조도 그 단순 명쾌한 구조에 일여를 했지만 반복되는 서사에서도 교묘한 배려들이 눈에 띈다. 가령 뱅쿠오의 죽음의 경우 던컨 왕의 시해와 반복되는 듯 하지만, 집권 후의 맥베스의 타락을 보여주는 유일한 장면으로 기능한다. 물론 뱅쿠오의 후예인 제임스 1세를 위한 궁정극이라 뱅쿠오의 비장한 죽음을 (무대 밖 처리한 던컨과는 다른 비중으로) 묘사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관객을 범죄 행위의 증인으로 초대하고 공분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적절한 힘의 안배다.
요즘의 감성과 정치색으로 읽으면 시대 착오가 보이는 면도 적지 않지만 캐릭터나 플롯의 단순함이 밋밋한 것이 아니라 우아함으로 승화되는 것은 생명력 있는 고전이 갖춰야 할 미덕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제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글로 보지 못해서 뒤늦게 순례에 들어간다. 왕비가 죽었을 때 맥베스의 대사가 너무 좋다.
"왕비도 언젠가는 죽어야겠지.
그런 소식을 언젠가 한 번은 들어야겠지.
내일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하루하루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더딘 걸음으로 기어가는 거지.
우리의 어제는 우리 모두가 죽어 먼지로 돌아감을
바보들에게 보여 주지.
꺼져라, 꺼져, 단명하는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고 돌아다니지만
얼마 안 가 잊히고 마는 처량한 배우일 뿐.
떠들썩하고 분노 또한 대단하지만,
바보 천치들이 지껄이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
- 맥베스 5막 5장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