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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 열린책들 세계문학 052
아르까지 스뜨루가츠끼,보리스 스뜨루가츠끼 공저/석영중 역
하드보일드 탐정소절의 대표작 “몰타의 매”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미증유의 거대한 전쟁은 사람들을 허무주의로 내몰았고, 이런 황폐한 세상에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 결과 세상과 정서적 유대를 잃은 인물이 오직 자신의 본능에 의지해서 가치를 탐색하는 이른바 <하드보일드 소설>들이 태어났다. 대실 해밋은 추리보다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창시자이자 최고봉이라 평가되고 있다.
새뮤얼 스페이드는 납치당한 동생을 찾아달라는 의뢰와 함께 브리지드 오쇼네시를 조우하게 된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허리는 꼿꼿하고 도톰한 입술, 조심스러운 미소와 하얀이가 반짝이는 브리지드는 부끄러움이 많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함이 묻어난다. 섹시하고 도발적인 샤론 스톤의 유혹과는 다른,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연약함과 외모에 현혹 되어버린 스페이드의 동업자 아처는 브리지드가 지목한 서스비란 남자의 미행을 자처한다. 하지만 다음날 서스비와 함께 시체로 발견이 되고 사건을 의뢰한 브리지드 역시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베일에 쌓여 있으나 매력적인 여인 브리지드는 살인사건과 무관함을 호소하며 스페이드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구하고 나선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두 명의 새로운 의뢰인들로 인해 새(Bird) 조각상인 "몰타의 매"가 드디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16세기 십자군이 카를 황제에게 공물로 받친, 자신들의 최고의 보석을 박아 만든 황금 새의 조각상이 <몰타의 매>라고 설명된다. 이 새 조각상은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스페이드의 의뢰인인 거트먼에게 오고 있었으며, 그 심부름 꾼이 브리지드 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몰타의 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수많은 거짓들의 향연에 있다. 처음 자신의 신변부터 시작해 소설의 마지막까지 거짓으로 치장한 브리지드의 실체, 보호본능과 시선을 빼앗는 육감적인 매력으로 남자들을 자신의 수족부리듯 이용해 왔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브리지드를 추격한 거트먼 일당 역시 심부름꾼인 브리지드에게 속아 먼 길을 추격했고, 스페이드마저 그녀와 사랑을 나눴을 만큼 남자 다루기의 대가였다. 물론 거트먼 역시 거짓과 술수로 몰타의 매를 빼돌렸고, 배신한 브리지드와 다시 편을 맺어 스페이드를 속이는 등 책은 처음부터 종결에 이르기 까지 거짓으로 꽉 들어차있다. 이는 사회적인 배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1920년대 미국은 실제로도 범죄가 급등했고 금주법의 시행으로 밀주업자를 비롯해 거짓으로 꽉 들어찬 사회였다고 한다. 오히려 금주법에 저항하는 밀주업자들이 영웅이 됐던 사회, 작가가 되기 전 탐정사무소를 운영했던 대실 해밋의 범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범죄의 낭만적 속성에 매혹 되어있던 대중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약간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건 <<몰타의 매>>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물질만능 주의다. 금전적인 지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스페이드, 좀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는 거트먼의 의뢰에 브리지드를 보호하는 수호자의 역할을 쉽게 벗어 던진다. 몰타의 매를 소지한 브리지드를 이용해 거트먼과의 거래를 하는 모습이나 브리지드의 보석함을 뒤져 금전으로 교환해 지불하라 명령하는 그의 모습엔 일반적으로 정의롭고 약자를 위해 일하는 마음씨 좋은 탐정의 이미지는 그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브리지드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던 걸까? 탐정 사무소에 의뢰한다는 자체가 비용이 청구된다는 당연한 순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적인 냄새가 결여된 물질적인 사회풍조만을 따라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이 비호감스럽게 다가왔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몰타의 매를 손에 넣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한 거트먼 일당과 매력적인 여인, 그리고 돈을 위해 일하는 탐정이 그려가는 정의롭지 못한 소설(?), 하지만 거짓이 만연한 사회를 꼬집듯 입만 열면 거짓부렁만 해대는 악당에게 가끔씩 시원한 폭력이 행사된다. 마치 <<SOS 원숭이>>의 손오공이 “때로는 이런 폭력도 필요합니다” 라고 외치듯 스페이드 또한 그들을 처단하고 벌을 준다. 범죄를 찬양하던 시절에 대한 저항심이 느껴지는 이러한 단락들에서 어느 정도의 위안을 찾았다고 해야겠다. 나는 말이야.. 거짓말 한번 할 때 마다 벌거벗겨져 집에서 쫓겨 났었다고..너희들에게도 그 정도의 치욕은 필요한 거지..
맞다. 경우에 따라 폭력은 용인 되어야 한다.
<<몰타의 매>>는 이미 10년 사이 세 번이나 영화화 되었고, 그의 많은 작품 또한 영화화 됐다. 게다가 라디오 시리즈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져 한때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리는 작가였다고 한다. 개성넘치는 등장인물과 탄탄한 플롯, 정밀한 묘사로 탐정 소설의 장르를 뛰어넘는 평가를 받은 대실 해밋, 요즘 스릴러나 추리물처럼 심리적인 묘사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좀 떨어질지 모르지만, 시대를 풍미한 작가의 작품을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 싶다. 피가 튀거나, 잔인한 살인행위 등을 묘사하는 슬래셔 무비 같은 장면은 없으니 안심하고 책으로 빠져들어 보자!!
*스포일러가 있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이 소설이 재미 없지는 않을 겁니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를 드디어 읽었다. 좋아하는 열린책들 세계 문학 전집 양장본으로. 열린책들에 감사. 양장본에 감사.
<몰타의 매>는 나를 매료시킬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소설이다. 우선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하드보일드라면 그 대가라 불리는 헤밍웨이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OK인 나다. 나에게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신앙과 같다. 나 외에 다른 문학을 섬기지 말라? 말씀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법이다.
하드보일드하면서 탐정소설이다. 이 말은 나에게 문학과 장르 소설의 경계에 걸쳐 있다는 말로 들린다. 경계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 곳엔 두 가지 성질이 매끄럽게 섞여 있다. 문장의 아름다움 혹은 주제의 진정성 거기에 이야기의 재미가 붙는다. 순수 문학이 화려하게 피는 꽃이라면 경계에 선 문학은 그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 문학이다. 터져나온 과육이 뺨으로 턱으로 가슴으로 줄줄 흐른다. 지저분하고 천박해 보이지만, 그 맛을 모르고 논하지 마오.
<몰타의 매>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그녀의 추종자들이 뱉어내는 복잡한 트릭이 없다. 있는대로 플롯을 꼰 뒤 온갖 잡다한, 있을 법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트릭으로 장식하는 소설이 아니다. 범죄는 리얼하고 묵직하다. 미국 최대의 탐정 사무소에서 실제 탐정으로 일해 본 경력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몰타의 매>는 탐정 소설이지 추리 소설이 아니다. 탐정은 행동하지만 추리는 생각을 한다. 탐정은 움직이지만 추리는 빙빙 맴돌 뿐이다. 탐정은 추리와는 달리 밀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쑤셔 쥐새끼를 밖으로 끄집어 낸다. 그리고는 도망치는 쥐새끼를 온 힘을 다해 쫓는다. 이 소설엔 생각대신 행동이 있다. 지루할 새가 없다.
샘 스페이드. 유쾌한 금발의 악마 같은 남자. 그는 하드보일드를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다. 그는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볼 수 없다.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오로지 프로페셔널, 이거 하나 뿐이다. 직업 탐정의 세계에선 이거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유명한 탐정은 어느 순간 '범인은 바로 너야'하는 쇼맨쉽을 발휘해야 하지만 직업 탐정은 범인을 본 순간 주먹을 날려 턱을 부숴버린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주 앉아 협상을 벌인다. 정의의 사도로 보이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켜고 독서를 하는 우아한 인간이 아니다. 우선 살아야 한다. 살아서 연명해야 한다. 휴식은 담배 한 개비와 위스키로 충분하다.
샘 스페이드는 하드보일드 최대의 적인 '사랑' 앞에서도 자기 삶의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브리지드 오쇼네시는 온갖 거짓말로 온갖 사건을 일으킨 뒤 샘 스페이드를 엮어 소동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모든 음모가 탄로나고 만다. 여자는 샘 스페이드와 나눴던 사랑을 무기로 그를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하지만 샘, 어떻게 그런 일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는데 그러면 안 돼요."
"왜 안 되는 거죠?"
"그럼 당신은 나를 가지고 논 거예요? 나를 좋아하는 척한 거예요? (중략) 나를...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아요?"
"아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죠?" (중략)
"나는 서스비가 아니에요. 재코비도 아니고요. 당신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p.276)
샘 스페이드. 진정한 직업 탐정. 그는 단호히 사랑을 거부했기에, 비로소 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몰타의 매 The Maltese Falcon
대실 해밋 Dashiell Hammett
그렇다. 나는 <몰타의 매>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책의 1/3 쯤에 이르러 샘 스페이드가 브리지드 오쇼네시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는데,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앞으로 모든 글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후사정은 모두 생략할 것이다. 주인공의 직업, 사상 이런 것들도 모두 생략할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다만 내 말하기에 꼭 필요한 부분들만 적어나갈 것이다. 샘 스페이드가 주인공이고 탐정이고… 하는 것들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 남자의 이름은 찰스 플릿크래프트. 어느 날 문득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몇 년 후, 그의 부인이 자신의 남편을 찾은 것 같으니 자세히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 사람은 찰스 플릿크래프트가 맞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찰스 피어스로 자신을 바꾼 뒤였다. 그리고 플릿크래프트는 자신이 피어스가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나는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 소설을 좋아한다.
"그 남자한테 일어난 일은 이런 겁니다. … 공사장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 그때 빔인가 뭔가 하는게 10층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서 플릿크래프트 앞의 보도를 박살냈습니다. … 깨진 보도 조각이 튀어 올라 뺨을 강태했을 뿐이죠. … 그 사람은 그 이야기를 하며넛 그 흉터를 손가락으로 …뭐랄까 사랑스럽다는듯이… 만졌습니다. …경악했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어요. 누군가 인생의 어두운 문을 열고 그 안을 보여준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p85
그리고 이어서,
"그가 아는 인생은 공평하고 정연하고 이성적이고 책임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철제빔의 추락이 인생은 본래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훌륭한 시민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도 사무실에서 식당에 가다가 떨어지는 빔에 맞아 떨어지는 밤에 맞아 즉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죽음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찾아오며, 사람은 눈먼 운명이 허락하는 동안만 목숨을 부지한다는 걸 깨달았다." p85
사실 여기서 멈춘다면 이 이야기는 어딘가에서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런 운명의 불공평함이 아니었다. 최초의 충격이 지난 뒤 그 점은 받아들였다. 그를 괴롭힌 것은 그가 영위해 온 정연한 일상이라는 게 인생 본래의 길이 아니라 인생을 벗어난 길이라는 깨달음이었다." p86
"그는 철제 빔이 추락한 장소에서 5미터도 가기 전에 이 새로운 발견에 따라 자기 인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다시 평화를 되찾지 못하리란 것을 확신했다. … 그 자신도 난데없이 살던 곳을 떠나서 인생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특히나 이 '5미터도 가기 전' 이라는 말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코 앞에 철제 빔이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 얼떨떨한 상태에서 겨우겨우 5미터를 걸어갔다고 쳤을 때,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길어야 30초 정도 걸리지 않았을까?
그 30초 사이에, 그 짧은 시간(찰나의) 사이에! 그는 플릿크래프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실제로 그것을 행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생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자, 이쯤이면, 어떤 반성을 해야하지 않을까? 나는… 하고 말이다.
그래. 나는 … 3주 전에 이런 결심을 했다. 앞으로는 열심히 공부해야 겠어! 뭐든지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역시나 쉽지 않다. 1주 전에는 이런 결심을 했다. 요즘들어 낮에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니 밤에는 뭐라도 좀 하자! 그런데 역시나 쉽지 않다. 그리고 어제는 이런 결심을 했다. 그래! 이제는 달라져야지! 뭐라도 해야되는데… 뭘 할까… 음… 그래 홍콩 영화를 많이 못 봤으니까 홍콩 영화를 보자. 그리고 글을 쓰는거야! 그런데 역시나 쉽지않다.
하지만 플릿크래프트를 보라.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결심한 (장대하거나 사소하거나) 것들을 보라. 그리고 다시 플릿크래프트를 보라. 30초 사이에 그가 무엇을 결심하고 행동하는지를!
내게 부족한 건 철제 빔일까? 내가 맞아 죽을지도 모를 철제 빔 말이다. 아, 그런데 이건 좀 살떨리는 일이다.
플릿크래프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는 새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로 이 부분에서, 플릿크래프트의 이야기가 끝난 부분에서 스페이드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번째 부인의 외모는 첫 부인과 달랐지만,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는 같은 점이 더 많았습니다. … 그래서 자신이 결국 타코마에 두고 떠난 것과 똑같은 생활로 빠져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끝난 부분에서 시작된다! 기대하시라!) 그 사람은 철제 빔 사건 때문에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빔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빔이 떨어지지 않는 생활에 인생을 맞춘 거죠." p86
바로 이 부분!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이야기는 절정에 달하며, 처음 이 소설을 읽던 순간에 내게 와닿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 독자들은 이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코 앞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철제 빔을 떠올리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언제나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새로운 나가 되리라! (제발, 철제 빔이 코 앞에 떨어지기를! 머리 위는 너무하다!)
그러나 잠깐! 어디까지나 이러한 감상은 나-독자의 감상에 불과한 것이고, 샘 스페이드의 생각을 좀 더 살펴보자. 찰스 플릿크래프트 혹은 찰스 피어스는 자신의 인생이 새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샘 스페이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샘 스페이드의 생각으로는 찰스 플릿크래프트는 잠깐 인생의 본래의 길을 찾았다가 다시 인생의 벗어난 길로 돌아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샘 스페이드가 했던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보면 확실해진다.
"(그가 스포케인에 정착하고 나서는) 빔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빔이 떨어지지 않은 생활에 인생을 맞춘거죠."
"그래서 자신이 결국 타코마에 두고 떠난 것과 똑같은 생활로 빠져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샘 스페이드의 이야기를 따르자면, 결국 플릿크래프트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즉, 찰스 피어스는 찰스 크래프트 일 뿐이다. 찰스 크래프트는 찰스 피어스가 될 수 없다. 누구도 바뀔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면, 쉽게 지나치게 되는 이러한 면이 이 이야기의 하드보일드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자리에 머물러야 할까? 생각만 해도 우리의 삶이 무의미해지고, 우리의 삶 위로 쌩쌩 부는 찬 바람에 몸을 떨어야 할까?
아니, 한 발짝 더 나아가자.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끝난 부분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나의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플릿크래프트는 스페이드와 이야기 하기 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플릿크래프트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첫번째 가족에게 편하게 살아갈 재산을 남겨 주었으며, 자신의 행동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문제라면 그런 합리성을 스페이드에게 명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답답함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그 합리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어쨋건 처음으로 그런 시도를 했다." p84
그리고 곧 바로 스페이드의 이런 말이 나타난다.
"나는 이해했습니다." 스페이드가 브리지드 오쇼네시에게 말했다. "하지만 플릿크래프트 부인은 그러지 못했죠.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어쨋건 결국 잘 끝났어요." p84
이 부분은 약간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이드가 이해했다는 것이 플릿크래프트가 한 행동 (첫번째 가족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으므로 떠나도 된다는 것)의 합리성에 대한 이해인지, 플릿크래프트의 얼굴에 사랑스러운 상처를 낸 철제 빔의 의미에 대한 이해인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철제 빔의 의미를 이해했다는 쪽으로 나아가기로 하자. (어쨋거나 재산을 남기고 떠났으므로 그는 떠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소설을 형편없는 책으로 만들것이다.)
플릿크래프트-본인이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스페이드-타인이 이해한다. 샘 스페이드의 비관적인 인생관 혹은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오해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타인의 섣부른 판단, 나는 이해했습니다! 에서 말이다.
플릿크래프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어려움 그리고 답답함을 겪고 있다. 그리고 사실 그 경험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철제 빔의 경험을 설명 없이도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릿크래프트는 그냥 그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변했고, 그 경험이란 이미 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플릿크래프트는 답답함을 안고 그 경험에 대하여 굳이 이야기를 한다. 그는 왜 이야기를 하는가. 왜 굳이 이야기를 하는가. 플릿크래프트는 스페이드를 이해시키고 싶다. 스페이드에게도 새로운 인생에 대한 비전을 일깨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페이드의 "나는 이해했습니다"란 "그래서 자신이 결국 타코마에 두고 떠난 것과 똑같은 생활로 빠져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샘 스페이드는 자신의 코 앞에 철제 빔이 떨어진다고 하여도 아랑곳 않을 것이다. 그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가던 길을 갈 것이다.
이 세장 분량의 짧은 이야기는 스페이드와 플릿크래프트의 인생관, 정 반대되는 두가지 인생관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바뀔 수 있다! 라고 말하는 플릿크래프트와 사람은 바뀔 수 없다! 라고 말하는 스페이드.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으며 스페이드를 추적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스페이드를 관찰하게 되며, 결국에는 스페이드 그 자신이 된다. 어쨋거나 그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페이지가 넘어가며 플릿크래프트는 잊혀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라! 이 자리의 주인공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플릿크래프트이니 말이다.
다시 한 번 그의 말을 살펴보자,
"플릿크래프트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첫번째 가족에게 편하게 살아갈 재산을 남겨 주었으며, 자신의 행동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문제라면 그런 합리성을 스페이드에게 명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답답함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그 합리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어쨋건 처음으로 그런 시도를 했다." p84
나는 어디까지나 샘 스페이드는 플릿크래프트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페이드 자신만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플릿크래프트의 서투름이 한 몫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 시도!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릿크래프트 역시 그것을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나는 플릿크래프트의 이 첫 시도가 첫 시도 그 자체로 끝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쩐지 스페이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할 것만 같은 것이다.
언제나 첫 시도란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처음이라는 말에 큰 의미를 둔다. 첫 만남. 첫 사랑. 첫 이별.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나아간다. 첫 시도 뒤에는 두번째 시도가 있고 두번째 시도 뒤에는 세번째 시도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시도를 끝내지 않는 한 우리는 점점 더 익숙해진다. 답답함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우리가 도달하는 그곳에는…
만일 플릿크래프트의 이야기가 첫 시도로 그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시도로 이어진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점점 더 자신의 경험에 대한 설명에 익숙해진다면, 그 순간, 플릿크래프트의 이야기를 듣는 스페이드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 때도 여전히 "나는 이해했습니다." 라고 말 하고 있을까. 적어도 "나는 정말로 이해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감사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여운 주인공 스페이드에게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플릿크래프트는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 작가의 다른 작품
피의 수확
유리 열쇠
# 읽고 나서.
'루 아처' 시리즈 책을 읽고 나서 <몰타의 매>를 읽기 시작했는데, 시작부터 탐정인 '아처'가 죽어버려서 당황했다. 그래, 이건 샘 스페이드가 주인공이지 참. ㅋㅋ
남자와 사라진 동생을 찾기 위해 바다 건너왔다는 여성은, 그녀가 남자를 만나보기로 했는데, 만나는 자리 근처에서 그를 감시하며 조사해달라고 의뢰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따라갔던 샘 스페이드의 파트너 아처가 살해당한다. 아마도 아처를 죽였을 그 남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하고, 아처의 아내와 바람피운 것이 드러난 샘 스페이드는 순간 용의자로 지목된다. 미행당하는 샘, 거짓말에 거짓말을 보태는 여자, 살해당한 파트너 사이에서 샘은 그들이 쫓는 것이 몰타의 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엄청난 값어치의 보물.
하드보일드는 역시 잘 안 맞는다. 더군다나 주인공에게 정이 안 가는 경우엔 더. 예전에 읽었던 <피의 수확>은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하고 찾아보니, 그때도 하드보일드는 나랑 안 맞는 거 같다고 해놨네. 스케일은 더 작아진 느낌이지만 역시나 여기저기 일이 벌어지고, 샘 스페이드는 끝까지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정을 줄 수가 없다는... '남자', '직업' '자존심' 이런 것들 때문에 나머지는 다 하찮게 보이는 이들의 세계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밑줄
「누구라도 이따금 발을 헛디디는 법입니다.」
「문에 적힌 〈스페이드 앤드 아처〉라는 글씨를 지우고 〈새뮤얼 스페이드〉라고 새로 새겨 줘. 한 시간 후에 돌아오겠어. 아니면 전화를 하지.」
내가 일을 알아내는 방법은, 움직이는 기계 속에 대담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해물을 집어넣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거예요. 당신이 그 기계 파편에 다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한다면, 나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모든 게 다 지겨워요. 나 자신도 지겹고, 거짓말하는 것도 지겹고 그걸 지어내는 것도 지겹고, 뭐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모르는 것도 지겨워요. 나는….」
「하지만 나는 이런 격의 없는 비공식 대화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검찰에도 경찰에도 할 말이 없고, 이 도시의 모든 얼치기들한테 불려 다니는 것도 지긋지긋합니다. 나를 보고 싶으면 체포 영장이라든지 소환장 같은 걸 발부하세요. 그러면 변호사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윌머, 너를 보내게 된 건 정말 안타깝구나. 네가 내 아들이었다 해도 내가 지금 이상으로 너를 아끼지는 못했을 거야. 하지만, 아, 참말로! 아들을 잃으면 또 하나를 얻을 수 있지만, 몰타의 매는 하나뿐이야.」
「아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의 얼굴에 미소를 고정시켜주는 근육들이 울퉁불퉁 일어섰다. 「나는 서스비가 아니에요. 재코비도 아니고요. 당신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들어 봐요. 함께 일하던 동료가 죽으면 살아남은 사람은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합니다. 살아생전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아무 상관없어요. 이러건 저러건 동료였으니 그걸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든 움직여야 해요. 거기다 우리는 하필 탐정 업계에 있습니다. 탐정이 죽었는데 동료 탐정이 그 살인자를 밝혀내지 못하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죠. 그건 단순히 그 탐정뿐 아니라 세상 모든 탐정들에게 다 안 좋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