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Schlafwandler - Eine Romantrilogie :: Hermann Broch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와 함께 손꼽히는 3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철학 소설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이 책 읽기를 진작에 포기했었을 것이다. <율리시스>와 <잃어버린~> 의 첫 장을 읽자마자 '이건 4-50대에 가서나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그것도 문학/철학적 소양이 그만큼 넓어졌을 경우에 한해)' 애초부터 미련없이 덮어버리고 책장에 고이 모셔만 두었으니 말이다. 글자만 읽으라고 한다면야 소리내어서라도 읽을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을 '해석', 아니, 알아 들을 수 있는 우리말로 '번역' 하라고 한다면 입도 뻥긋할 자신이 없다. 인텔리겐치아들(혹은 스노브들)에게는 필독서나 다름없다 해도 지금의 나는 여가 시간을 (누구는 게임을 하고 누구는 영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소설 읽기' 로 때우는 난독자일 따름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내게 있어 주제넘다 못해 '무(모)한도전' 이나 다름 없었던거다. 그나마 1, 2부는 스토리 중심적이라 비교적 편히(?) 읽었지만, 3부에 들어선 당최 알 수 없는 문장들로 아주 몸살을 앓았더랬다. ' 읽기 어렵고 재미없는 책을 구태여 읽을 필요가 있나? 그런 책은 던져버려라!' 고 호기롭게 말씀해주신 대인배 독서 달인님들 덕택에 나는 꿇리는(?) 기분을 떨치고 당당하게(?) 하권을 덮고 마찬가지로 책장 속에 묻어버렸다. 그게 재작년쯤의 일이다. 그런데 애써 상권을 다 읽은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모양인지, 때때로 <몽유병자들>의 하권이 눈에 치였다. (조이스나 프루스트의 책보다 덜 파묻어 놔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올해,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을 런칭하며 이 책이 다시 깔끔해진 양장본으로 리스트에 오른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몽유병자 마냥 사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예술적인 표지에 절대적으로 끌렸다. 표지만 봐선 귀족 사회의 허상을 담은 오스트리아판 <순수의 시대> 쯤으로 생각했건만)
한 셋트도 아닌 두 셋트나 생겼겠다, 이젠 칠십을 꺾은 나이로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겠다, 등의 온갖 자기 납득성 이유를 붙혀대며 다시 한번 '무한도전' 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상권만큼은 다 읽은 게 아까웠던거다.) 그런 내 오기가 하늘에 계신 브로흐님이 보시기에 기특하기라도 했는지, 느닷없이 페터 한트케를 소개해주시며 오스트리아 문학사의 길잡이를 열어주셨다. (- 라기보다 실은 한트케를 읽은 덕분에 브로흐에게로 다시 닿을 수 있었다. 한트케님 쌩유! 쌩유!) 그리고 기어이 하권, 3부를 다 읽어내고 말았다. 때로는 벽에 머리를 박아가며, 때로는 불면증 치료약으로 써가며, 아는 단어인데도 '내가 정말 이 단어의 뜻을 알고 있는걸까' 하고 수백번 단어 사전을 검색해가며, 한 장 한 장 뜯어먹듯이 읽어 해치우고 만 것이다. 내 자신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해야 할 판인데, 실은 결과적으론 졌다. 여전히 뜻을 모르겠을 문장들이 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에 관한 내용만 적으려 해도 긴 글이 될 수도 있는데, 굳이 민망한 경험담을 웃기지도 않는 농담까지 써가며 서문 아닌 서문을 쓴 것은, 혹여나 이 책을 예전의 나처럼 어렵다고 도중에 포기하거나 아예 읽어볼 생각조차 안해 보실 독자님들께 용기와 희망(?) 을 드리고 싶어서다. 일단 상권의 1,2부는 고전답게 재밌다. 그리고 상권을 읽으면 하권을 읽을 미련이 생긴다....가 아니라, 하권의 3부는 템포를 조절해가며 씹어 읽을수록 감칠맛(?)이 우러난다. 어렵고 어렵지 않고는 문제가 아니다. 영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거기 그대로 놔둬도 상관없다. 작가가 소설 중간 중간에 뭐라뭐라 설파하시는 철학론은 일단 제껴버리고 전체적인 내용 이야기만 따라가도 충분히 느끼게 되는 것이 많다. 그렇게 한 번 읽고나서 처음으로 돌아와 아까 못풀었던 문제를 다시 보듯 제꼈던 글귀들을 한 문장 한 문장 되풀이해 읽으면 갑자기 머릿속 이해의 전등이 반짝 켜지기도 하고, 영영 깜깜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문장읽기' 의 폭넓어짐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슬슬 오지랖스러워지는 잡설은 이제 그만하고, 바로 나의 <몽유병자들 읽기> 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앞서 말한대로 이 책은 <1888 : 파제노 혹은 낭만주의>, <1903 : 에슈 혹은 무정부주의>, 그리고 <1918 : 후게나우 혹은 즉물주의> 이렇게 3부로 나뉘어져 있다.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즉위한 1888년을 시작으로 1918년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소용돌이 치는 시대의 격변을 브로흐는 세 명의 캐릭터로 메타포하여 그려내고 있다. 즉, 1부의 주인공 요아힘 폰 파제노는 쇠퇴해가는 낭만주의의 잔재적 인물로서, 2부의 아우구스트 에슈는 밀려오는 사회주의의 이상향만을 꿈꾼 무정부주의자로서, 3부의 빌헬름 후게나우는 자신의 이해利害 여부에 따라 변덕스럽게 가치관을 바꾸고 그것을 합리화 시키는 즉물주의자들의 출현의 모델로서 당시대를 대표하는 것이다.
때문에 캐릭터를 읽기보다 먼저 브로흐가 말하는 낭만주의, 무정부주의, 즉물주의에 대해 주지해 둘 필요가 있다. 먼저 19세기(적 가치관)의 몰락과 함께 붕괴한 낭만주의는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시발점은 독일에서부터였다. 18세기의 계몽주의에 대해 당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계몽주의자인 헤겔을 비판하며 이른바 '주관적 자유주의' 를 주창했는데, 이것이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 이라는 신 사조를 일으키며 슐레겔에 의해 독일식 '낭만주의' 의 개념이 다져졌다. 여기서 브로흐는 '니체가 말한 자유주의를 시대가 곡해했다' 며 그것이 결국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서구의 가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것을 입증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바로 이 <몽유병자들> 이란 (작가가 정의한) 박물소설인 것이다.
1부의 파제노는 구시대부터 내려온 관습에 따라 강제적으로 사관 학교에 입학한 것에 대해 부친을(장남이 사사로운 결투로 사망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서신 교환을 인생 최대의 낙으로 생각하는 지독한 낭만주의자) 대상으로 반발심을 품으며 관습을 던진 친구 베르트란트와 술집 여급인 루체나와 연애를 즐기는 자기만의 자유주의를 쫓다가, 그들과의 교제 중에 그의 인습적이면서도 고정적인 가치관과 자신이 서있는 위치에 끊임없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급변하는 도시의 생활을 못견디고 시골의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정해준 상대와의 결혼을 택하며 '낭만주의자' 의 마지막 세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브로흐는 고상하고 우아했던 '낭만주의' 가 시대의 흐름 앞에선 '고집스런 보수의 초라한 말로' 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미 몰락하기 시작한 귀족 사회에 대한 파제노의 미련이 세계를 여행하며 사업을 하는 베르트란트와 루체나의 신분을 경멸하거나 동정하면서 자기합리화의 틀에 갇히는 모습으로 그를 영원히 19세기 속에 박제해 버린 것이다.
낭만주의의 '주관적 자유' 추구가 니체가 말한 '자유에 대한 자아적 책임' 은 망각한 채 개인적이고도 퇴폐적인 방향으로만 흘러버렸기에 몰락한 것이라고 주장한 브로흐는 2부에 들어서서, 산업화로 인해 귀족주의적 계급에서 자본주의적 계급으로 사회 질서가 바뀌자,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하위 노동자 계급이 평등한 자유, 이상향의 사회주의를 꿈꾸며 (폭력과 전쟁을 동반한) 혁명을 지지하는 '무정부주의자' 가 되었다며 그것을 평범한 소시민인 에슈를 통해 그려낸다. 에슈는 친구 마르틴 가이링이 노동조합의 데모 획책을 이유로 구금되자 모든 것이 자본주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 상징적 존재인 기업가 베르트란트 사장을 암살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계획은 패기없이 끝나버리고, 결과적으론 그 자신 역시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하면서도, 끝까지 현실 사회를 부정하고 이상향만을 (자유의 땅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급기야는 목사로서 천국을 꿈꾸는) 쫓다가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끝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적으로 산업화가 급진전하며 이른바 '자본주의' 가 도래하자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가 대두될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완성을 위해 자본주의가 필수불가결한 변증법적 조건임을 주장한 마르크스의 소신과는 다르게 무조건적인 반자본주의와 반국가주의(바쿠닌적 무정부주의)로 흐름이 어긋나면서 결국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프롤레테리아를 위한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테리아에 대한 독재로 악용되며 마르크스적 공산주의관은 변질되고 만다. 이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고, 브로흐는 그러한 독일의 당시 모습을 에슈의 행적을 쫓아가며 증명해낸 것이다.
세계사의 판도를 바꾸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이분화한 이 파괴적 현상에 대해 브로흐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3부에 들어서 보다 면밀하고 다각도적인 시선으로 분석한다. 1,2부를 합친 양만한 3부는 그 분량만큼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다양하고 형식적인면서도 다채롭다. 그만큼 한 인물과 시각만으로 대변할 수 없는 격변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전개 형식이 1,2부와 다르기 때문에 독자에게도 한층 어렵게 느껴지는데, 특히 소설 내용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베를린의 구세군 소녀 이야기> 와 <가치들의 붕괴> 는 이야기 흐름의 맥을 끊는 마냥 매우 개별적이고 독립된 문단들이다. 베르트란트 뮐러라는 철학 박사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베를린 구세군 소녀 이야기> 는 그려지는 시대부터가 모호하며 형식도 산문, 시 등을 번갈아가며 서술이 되어 차라리 이 단락들만 따로 떼어 읽는 편이 나을 정도다. (개인적으론 <베를린 소녀> 부분은 독일인으로서 유대인에 대한 고찰 정도로만 읽혀 이 부분에 관해선 주관적인 접근 밖에 못한다는 판단 아래 언젠가 충분한 사료를 거쳐 따로 읽자고 미뤄두었다.) 그러나 작가의 철학적 사견으로 쓰여진 <가치들의 붕괴> 는 가장 어려운 단락이면서도 이야기 전개 내용을 부연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실질적으로는 작가가 이 소설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바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기에) 반드시 주의깊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렇게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고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3부에 나오는 인물들부터 살펴보면 가장 먼저 중심 인물인 후게나우가 있다. 그는 전쟁 중에 탈영을 했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을 위한 '휴가' 라고 합리화 하며 뻔뻔하게 일반 사회로 돌아가 돈을 벌려는 사업 계획을 짠다. 자기 돈 한푼 안 들이고 오로지 기회주의를 통한 인맥과 임기응변식 거짓말로 에슈가 경영하던 신문사를 약탈해 내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옹호하다가, 종전 후에는 종교관까지 바꿔 개종하여 재산을 불리고, 심지어 자신을 믿고 도와주던 후원자를 정신착란자로 만들어 버리는데다 급기야 살인마저 서슴없이 저지르는 등 오로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온갖 비윤리적 수단을 동원한다. 즉, 그는 자본주의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잘 탄 인물임과 동시에 자본주의가 낳은 시대의 괴물인 셈이다. 브로흐는 이를 <즉물卽物주의(아무런 관념이나 이념없이 물질적인 면만 중시하는 태도)> 라고 정의한다. 놀랍게도 후게나우가 정신착란자로 만들어 버리는 건 1부의 요하임 폰 파제노이며 살해하는 것은 2부의 에슈다. 이는 곧 자본주의가 앞선 세대의 가치를 말살했다는 것을 은유한다.
3부에 등장하는 또 다른 캐릭터로 루트비히 괴디케와 야레츠키, 한나 벤틀링, 마르그리뜨가 각각의 이야기를 갖고 나오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시대의 흐름을 자기 것으로 만든 후게나우와 비교해 흐름에서 소외되거나 길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미래상까지 예견하여 그리고 있다. 미장이 출신 루트비히 괴디케는 전쟁 중에 거의 죽음을 맞이했다가 억지로 살려진 사람이다. 비록 죽지는 않고 살아갈 수는 있으나 반송장 상태나 다름없는 괴디케는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해체된 자아의 조각을 맞추려 하지만 고통과 허무함만을 느낀다.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결여된 무엇인가를 되찾아봤자 새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절망한 그는 결국 정신 분열을 일으키며, 그나마 (붕괴 되었다가) '부활' 한 자아를 지키려는 태도로서 타인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게 된다.
괴디케와 마찬가지로 전쟁 때문에 한쪽 팔을 잃었지만, 괴디케와는 달리 야레츠키는 잃은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전쟁은 끝나지도 않고 끝나서도 안된다' 고 주장한다. 전쟁이 아니면 그의 자아를 입증할 수 없고 전쟁이 끝난다는 것은 곧 자기 소멸을 의미한다고 믿어서다. 그는 자신의 부상을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애써 자신을 합리화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세상의 반응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일시적인 동정뿐이었고, 그 속에 갇혀 혼자가 되버린 야레츠키는 결국 알콜중독자가 되고 만다. 브로흐는 괴디케와 야레츠키를 통해 시대의 격변, 특히 전쟁은 한 사람의 인격을 분리시키지만 결코 재조립 시켜주지 못하고, 그 폐허에서 새로 짜집기된 불안정한 자아는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본능적으로 세상과 타자를 배격하며 스스로를 고립 시키게 된다고 말한다. 전쟁은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인간에게 고독이라는 기형 인자를 주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전쟁에 참가한 남성들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다. 변호사이자 중위인 남편을 둔 한나 벤들링은 전쟁의 처참함을 한 번도 경험하거나 본 적도 없을뿐더러,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부유하고 안락한 무위도식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끊임없는 허무함과 우울함에 시달린다. 잡지를 보며 유행하는 패션이나 인테리어를 꾸미고 그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다른 여성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우월감을 느끼지만 그것도 그때 뿐이고, 한나는 이러한 것들이 언젠가는 자기에게 있어 무의미한 것들이 될까봐 두려워하다 결국 신경쇠약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 타인에게 다가가기를 거부하고, 남편과 아들마저 낯선 존재로 의식한다. 자유주의의 퇴폐와 전쟁이 가족의 붕괴마저 이끌었다는 브로흐의 주장은 마치 작금의 사회를 예언한 것만 같아 오싹하기조차 하다. 100여년전의 한나 벤들링의 모습이 쇼핑중독에 빠져 허무함을 달래는 요즘 여성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사실 한나 벤들링은 2부에서 나온 헨트옌 부인의 미래형이자 보충 설명된 캐릭터와도 같다. 헨트옌 부인은 과부로서 정절을 지킨다는 이유로 남자를 거부하지만 실은 다시 남자와 접촉했을 때 함께 찾아 올 고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두려워해서다. 때문에 그녀는 비록 몸은 에슈에게 넘겨주고 그와 재혼도 하게 되지만 그로 인해 고독이 소멸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희망으로, 닿지 않는 욕망으로, 꿈으로서만 바랄 뿐이다. 그에 비해 에슈는 헨트옌 부인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고독을 메꾸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어머니에게로의 회귀 본능에 불과한 것으로 그려진다. 자본주의가로서 성공하여 (학대 받는다고 여기는) 서커스 단원 일로나를 구출하겠다는 영웅 심리에 들떠 있던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헨트옌 부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자 가장이자 남자로서의 상실감을 느끼고 도리어 헨트옌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 부서진 자존감을 끌어 모으려 한다.
2부에서 주인공이었던 에슈는 3부에서도 주요한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 변화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지 못하는 법과 언론에 분노해 스스로 급진주의적 신문을 만들지만 그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죄책감과 면죄부에 불과할 뿐, 성공한 기업가(베르트란트)를 시기하며 돈과 물질에 대한 욕구를 버릴 수 없었던 에슈는 자신이 자본주의에서 분리될 수 없음을 자각한다. 그 어느 쪽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에슈는 자포자기에 이르며 한 때 자신이 바보라고 놀렸던 로베르트처럼 착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 그러나 사회 참여적이었던 로베르트와는 달리 에슈는 세속과 단절되기 위해 종교를 택하고, 이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1부의 주인공 요하임 폰 파제노와 그를 묶는 연결 고리가 된다. 에슈와 파제노는 신의 선과 과거의 것들만이 현실적이라 여기며 변화와 미래는 악이라고 규정하지만, 이미 부조리해진 비현실적인 현실 속에선 그들은 그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떠도는 몽유병자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시대의 흐름을 잘 탄 자유주의자나 자본주의자들은 과연 잃은 것 하나 없이 성공하기만 했는가? 브로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전 3부작의 숨겨진 주인공 베르트란트를 통해 답한다. 1부에선 자유주의자로 결혼의 속박마저 거부하며 온 세상을 여행하며 다녔고, 2부에선 뛰어난 사업가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지만,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가는 바람에 고독해진 그는 동성애에 빠졌다가 그것을 시대가 미처 다 받아주지 못하자 끝내 자살하고 만다. 파제노는 그를 자유주의의 교본으로, 또 에슈는 그를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사실 베르트란트 역시 '고독' 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즉,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도래는 그 누구도 승자나 패자로 만들지 못하고 오로지 인간에게 실존적 고독만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불안한 자아가 무조건적인 자유주의에 노출되면서 외부 세계, 즉 타자와의 긴장과 대립이 팽창하고, 그것에 대해 맞설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 안전하고도 소외받지 않는 삶을 위해 자기만의 여행(환상)으로의 도피를 꿈꾸며 타인과 거리를 두고 고독에 적응해 가게 되어 결국은 관계 상실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 브로흐가 이 소설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 그는 그 모습을 그 시대만의 일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어린아이인 마르그리트를 통해 미래에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예고한다. 즉물주의자인 후게나우를 따르는 마르그리뜨는 후게나우보다 훨씬 더 가치관의 결여되어 있을뿐더러, 세상엔 목표란 없으며 목표를 찾아 헤메는 것은 아무런 수확이 없고 헛된 일이라고 인식한다. 이는 결코 브로흐의 과장된 미래상의 예고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자유주의의 새 이름인 '신자유주의' 의 지배 아래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마르그리뜨 그 자체가 아니던가.
즉물주의로 점철된 현대에서 우리는 아무리 자신의 행동에 논리적인 정당성, 혹은 합리화를 확보한다 해도 어떤 방향으로든 종말적 가치 붕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가 시대에 도태된 몽유병자일 수도, 무가치관적인 후게나우 일 수도 있다. 구체적 개인마다 다르게 정립하는 수많은 세계관들 속에서 구심점을 잃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로고스를 선별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브로흐는 희망적이거나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인 삶을 통해 완성되는 체험 체계, 공감, 교감, 소통이 필요하며 그 역할을 문학이나 예술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도 그에 대한 사명으로 이 소설을 쓰는 데 임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독자는 자신만의 가치관을 찾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고독에서 구명해내기 위해서라도 이런 예술 작품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뿐더러 늘 생각하는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자유주의, 타자를 존중하고 배려함으로 획득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