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을 구입하고 나서 이전에 사놓았던 빅또르 위고의 <93년 - 상,하>. 이 작품은 빅또르 위고가 마지막으로 쓴 장편 소설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바로 <레 미제라블>과 비슷한 배경인 프랑스 대혁명인데, 방데 지역에서 일어난 방데 반란을 소재로 삼고 있다. 솔직히 장발장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고, 아직 <레 미제라블>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레 미제라블>이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파리의 시민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작품이라면 <93년>은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한(1789년) 이후 1793년에 왕당파의 세력에 의하여 발생한 방데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위고는 이 작품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을까?
방데 지방은 프랑스 지도를 놓고 보면 프랑스 서북쪽 해안가를 접하고 있다. 1793년 방데 지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난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하여 처형된 루이 16세의 복수를 꾀하면서 동시에 다시 왕정 복고를 위하여 왕당파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협의로 입헌 군주제의 형식을 띄었으나,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인하여 결국 왕당파는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비롯한 프랑스 왕정 복고 세력과 내부의 왕당파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순양함 한척이 은밀히 방데 지역으로 접근을 한다. 이 순양함에는 우후죽순 반란을 이끌던 왕당파 세력의 구심점이 될 지휘자를 태우고 프랑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의 첩자로 인하여 이들의 계획이 이미 프랑스 혁명 정부에 알려져 순양함 클레이모어호는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게 된다. 그러나, 왕당파의 지휘자가 될 방데 지역의 후작인 랑뜨낙은 평민인 알말로와 함께 보트로 탈출에 성공하여 결국 방데 지역에 잠입을 하게 된다.
알말로는 랑뜨낙의 지시로 방데의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왕당파의 부대에게 랑뜨낙의 명령을 전달하러 떠나게 되고, 랑뜨낙 후작은 홀로 접선 장소로 떠난다. 그러나, 이미 곳곳에 랑뜨낙 후작의 몸에는 커다란 상금이 걸려 있고, 혁명군 부대에 의하여 포위가 된 상태였다. 다행히 뗄마르라고 하는 한 노인의 도움을 받아 그의 거처로 피신을 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랑뜨낙 후작. 그의 정체를 알고 있던 뗄마르는 과거 그가 후작 시절에 뗄마르에게 적선을 한 기억을 떠올리며 랑뜨낙의 도망을 돕게 된다. 랑뜨낙 후작은 왕당파 반란 부대와 합류하여 그를 포위했던 혁명 부대가 있던 마을을 불태우고, 부대에서 키우고 있던 어린 삼남매를 포로로 데려간다.
한편 혁명 정부는 고뱅을 토벌 사령관으로 하여 랑뜨낙 후작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씨무르댕이라는 사제 출신의 주교구 대표를 고뱅의 감독관으로 보낸다. 사실 고뱅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서 랑뜨낙 후작의 종손(랑뜨낙이 고뱅의 작은 할아버지인 셈이다.)이었으며, 씨무르댕은 고뱅의 가정 교사 출신이었다. 특히, 혁명 이전에 사제 출신이었던 씨무르댕은 철저한 혁명 지지자이면서 동시에 고뱅을 아들처럼 교육시켜왔고 이번 토벌을 기회로 재회를 하게 된 셈이었다. 고뱅의 뛰어난 지휘로 인하여 방데 반란은 서서히 진압이 되고, 랑뜨낙 후작은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결국 랑뜨낙 후작은 자신의 가문의 거성인 라 뚜르그에서 최후의 일전을 다짐한다.
고뱅도 자신의 어릴 때의 추억이 담긴 라 뚜르그를 보면서 추억에 잠긴다. 그러나, 고뱅은 비록 자신의 종조부이지만, 혁명 정부의 반역자인 랑뜨낙을 반드시 처단하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었고, 랑뜨낙 역시 자신의 의지를 꺽지 않고, 어린 삼남매를 포로로 하여 끝까지 대항을 한다. 랑뜨낙은 고작 19명이었기에 패배는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지만,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라 뚜르그에 대한 대규모 공세가 벌어지면서 랑뜨낙의 세력은 계속 밀리게 되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그 순간 이전에 자신이 심부름을 보냈던 알말로가 비밀 통로로 들어와서 후작에게 도망칠 것을 권하고, 랑뜨낙도 역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비밀 통로로 탈출을 감행한다. 비밀 통로의 존재를 몰랐던 고뱅은 랑뜨낙을 아쉽게 놓치게 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삼남매의 서재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발을 동동 구르지만, 서재로 향하는 철문의 열쇠는 랑뜨낙이 가지고 있기에 대책없이 바라만 보게 된다. 그 사이 랑뜨낙은 성채에서 빠져나와 반란군의 진지로 향하려다가 서재 창가에서 울부짖는 삼남매의 모습과 아이들을 발견한 어머니의 절규를 듣게 된다. 자신의 부하가 최후의 수단으로 불을 질러서 발생한 이 사건을 보고 랑뜨낙은 결국 다시 성으로 들어간다. 혁명군은 다시 돌아온 랑뜨낙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그 사이 랑뜨낙은 열쇠로 철문을 열고 아이들을 창가로 하나하나 대피시키고 나서 혁명군에게 포로로 잡혀간다.
고뱅은 고민을 한다. 애당초 랑뜨낙을 혈족이라는 이유로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던 혁명의 참 모습이 공포정치로 인하여 과연 그것이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이었는지 고민하던 찰나에 도망간줄 알았던 랑뜨낙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구한 장면에서 혼란을 겪게 된 것이었다. 다음날 처형날짜를 기다리던 랑뜨날을 지하감옥에서 접견하는 고뱅. 랑뜨낙은 그러한 고뱅 앞에서 자신의 확고한 근왕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피력하고, 그동안 국왕 아래에서 이루어졌던 자랑스러웠던 프랑스의 역사를 설명하고 나서 어서 죽이라고 당당하게 말을 한다. 이에 고뱅은 그저 말없이 랑뜨낙을 탈옥하게 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다음날 씨무르댕은 랑뜨낙 대신 아들처럼 여겨왔던 고뱅을 발견하게 되고, 혁명재판을 통하여 주저없이 고뱅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 길로틴에서 고뱅의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한발의 총성이 울린다. 사형을 주관하던 씨무르댕이 고뱅의 죽음과 동시에 자결을 한 것이었다.
꽤 많은 분량의 장편 소설이었다. <레 미제라블>의 배송을 기다리면서 읽은 빅또르 위고의 작품이었지만, 이 작품 역시 대작이라 손꼽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만 요약하였지만, 책의 곳곳에서는 빅또르 위고의 박식한 프랑스의 역사와 문학적 지식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책의 각 장의 이야기를 진행하기 이전에 마치 신문 기사를 쓰듯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라든지 실제 역사적 인물인 당시 프랑스 대혁명의 주요 인물이었던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의 대화는 실제 역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실제적인 사건이 허구의 이야기와 결합하면서 더욱더 사실성을 부각시키면서 허구의 인물인 고뱅과 랑뜨낙, 씨무르댕을 통하여 당시의 복잡한 상황과 이념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고뱅과 랑뜨낙은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였고, 씨무르댕은 고뱅의 사부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으며, 랑뜨낙에게 고용된 전력이 있던 인물이다. 랑뜨낙 후작은 구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왕당파의 입장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고, 로뱅은 귀족 출신의 젊은이로서 혁명의 이상을 좇던 인물이고, 씨무르댕은 엄격한 혁명주의자(공포 정치 옹호)의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씨무르댕과 고뱅은 혁명이라는 공통의 입장을 취하지만, 그 이상과 현실에 대하여 입장차를 느끼게 되고, 고뱅은 랑뜨낙와의 대화를 통하여 결국 그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정한 이상은 바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랑뜨낙이 보여준 인간애였음을 깨닫게 되는 모습과 혁명 정부의 엄격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렇게 아끼던 고뱅을 처형하면서 동시에 목숨을 끊는 씨무르댕의 모습은 죽음으로써 밖에는 극복할 수 없는 당시의 복잡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 <레미제라블>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 생각되는 <93년>. 하지만, 이 책에서 랑뜨낙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적진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장발장이 자베르 앞에서 마차에 깔린 마부를 구하는 장면과 유사하며, 또한 씨무르댕이 자결하는 모습도 역시 장발장을 풀어주면서 자결하는 자베르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93년>은 <레 미레라블>의 등장 인물들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념하에 개인의 갈등을 표방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그러한 개인적인 갈등을 넘어선 이념적인 갈등의 극한을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레 미제라블>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도 한번 비교해보면서 읽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93년> 서평 - 세 인물의 삼각형, 삼각형의 열림, 자연 보다 위대한 인간
랑뜨낙 - 자네들은 헌신하고 희생할 능력이 없는 배신자들이며 비겁자들이야. 자작 나리, 이제 기요띤느로 나의 목을 자르시게.
씨무르댕 - 자연보다 위대한 사회, 자네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네. 꿈일 뿐이지.
고뱅 - 도대체 인간을 변질시키는 것이 혁명의 목적이란 말인가? 가족을 파손하고 인간성의 숨통을 조이기 위하여 혁명을 감행하였단 말인가?
이 책과 관련한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세프 비사리노비치 주가쉬빌리라는 한 조지아(지금은 그루지아라고 불리며 이전에는 러시아에 속해있던 흑해 연안국)의 청년 신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반사회적 인사로 낙인이 찍혀 감옥에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위고의 이 마지막 소설을 감명 깊게 읽은 후 '스탈린'으로 개명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레닌 이후 러시아를 '공포 정치'를 통해 지배한 이 스탈린이라는 인물에게 특히 감명을 주었던 인물은 혹자에게는 이 소설의 악당으로 인식되는 시무르댕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시무르댕이라는 인물을 악당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한 일이다. 그는 자신이 이전의 질서, 즉 자신이 몸 담고 있던 교회의 질서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된 공화국의 법에 충실한 자였다. 이런 새로운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어떤 폭력적인 일면이 존재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다. 누가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 대해 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한 집안 사람으로 서로에게 총칼을 겨눠야 했던 랑뜨낙 후작(이하 랑뜨낙)이나 고뱅 자작(이하 고뱅)의 경우는 어떤가. 사실상 그들 이외에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 중 어느 누구도 전쟁의 와중에 부를 쫓는 용병과 같이 천한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 헌신하기로 결정한 대의에 자신의 방식으로 충실했던 것이다. 그들은 숭고하다. 그러나 동시에 비인간적이다. 그리고 법을 만드는 동시에 법을 위반한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가장 진부한 측면을, 다시 말해 정해진 틀 안에서 안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동물적인 측면에서 벗어날 때, 일정 이상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추구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괴물이 될 때,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이 소설에는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위고의 마지막 소설답게 그의 인물에 대한 창작력이 최대한 발휘된 이 소설에 대해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특히 우려되는 바는 이 소설을 깊이 보기 시작하면 글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간략히 중심이 되는 세 인물을 각각의 점으로 하는 도식적 접근을 해 볼 요량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잠시 간략히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방데 전쟁'에 대해 살펴보자.
방데 전쟁
93년은 유럽이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고, 프랑스가 빠리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그리고 대혁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프랑스가 유럽을 상대로 거둔, 그리고 빠리가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이다. 그것에서 93년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순간의 광대함이 비롯되며, 따라서 그 순간이 그 세기의 나머지 전체보다도 위대하다.
<93년>은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실질적으로 19세기의 프랑스 역사를 주도하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의 위대한 전환의 과정이었다. 1793년은 프랑스 역사에서 혁명 이후 펼쳐진 외국 군주들과의 전쟁으로 점철된 한 해이며, 혁명을 통해 선언된 공화정을 전복하고 왕정 복고를 노린 왕당파들의 반동혁명이었던 '방데 전쟁'이 발발한 한 해다. 분명한 것은 위고가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 순간이 세기의 나머지 전체보다도 위대'했던 그런 시기라는 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전쟁이 '내전(Guerre civile)'이 아니라 '방데 전쟁(Guerre de Vendee)로 명명된다는 점이다. 이 전쟁은 위고가 한 소 챕터에서 취한 '플루스 쿠암 키빌리아 벨라(Plus quan civilia vella)'라는 말 그대로 내전 이상의 것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명명과 이 전쟁의 '내전 이상의 것'이라는 특성은 방데라는 지역의 특수성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원래 골족(영국에서는 켈트족)이 살던 지역이며, 오래 전 프랑스 국왕에게 복속되기 전에는 영국 왕가가 다스렸던 지역으로, 이 지역 출신자들을 브르통(Breton)이라 부르는 것도 다 이런 사실에 연유한다. 다시 말해 이 지역은 프랑스 내에서도 '프랑스어가 아닌 말'(켈트어)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일종의 프랑스 국토 내에 있는 외국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이런 면면이 묻어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던 위고는 이 소설 속에서 공화파와 왕당파 어느 쪽에 대해서도 폄하하는 서술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방데 지역 즉 브르타뉴를 비롯한 로와르(Loire) 강 이남의 지역에 대해서는 파리와 대별하여 시대에 뒤처진 지방으로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어쨌든 역사가들이 꼽는 방데 전쟁을 촉발했던 이유는, 1. 사제들에 대한 탄압, 2. 과도한 징병이다. 우선적으로, 프랑스 혁명 정부가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 조직(가톨릭)이 왕정 사회 내에서 일종의 최고 신분의 지위를 누리면서, 왕정과 귀족 신분에 대한 조력자로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교회는 일종의 선동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고(일요일에 행해지는 미사에서 사제의 강론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사제들은 왕과 귀족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던 이유로, 혁명 정부는 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선 서약을 강요했다. 그러나 반이 넘는 교구 사제들과 단 몇명의 주교들 이외에는 이 충성서약 조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째로,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유럽의 모든 군주국들의 공통적인 적으로 규정되어, 국경의 대부분이 전선으로 확대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전국에 징병 명령을 하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하달된 과도한 징병 쿼터는 방데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빌미가 되었다.
방데 전쟁은 이런 이유로 촉발되었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 랑뜨낙은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영국 왕실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봉토였던 브르타뉴 지역을 장악하여 영국 육군을 상륙시키도록 하는 사명을 띠고 영국으로부터 돌아온다.
간단히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방데 전쟁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이제부터는 각 인물들을 연결하는 선과 이들 세 사람이 그려내는 도형을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국가적 이념의 두 괴물 - 랑뜨낙, 시무르댕
랑뜨낙은 브르타뉴 지역의 전통적인 귀족이다. 그는 그 지역에 오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가문은 과거 그 지역에 정착하여 지배권을 가졌던 골족의 왕가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브르타뉴 대공이며, 랑뜨낙 후작, 퐁뜨네 자작이라는 여러 타이틀로 불린다. 하지만 이 이름들 보다 더 분명한 것은 그가 일종의 괴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오랜 시간을 자신의 영지 보다는 전쟁터를 누빈, 베테랑 지휘관이다. '뒤섞인 영국과 프랑스', '뒤섞인 귀족과 평민'이라는 혁명이 가져온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바다의 험난한 파도가 가져온 배 안에서의 혼란의 상황에서도, 랑뜨낙은 초연하고 결의에 찬 모습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다. 랑뜨낙은 합목적성(finalite)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목적, 방데 지역에서 반군의 활동을 지원하고, 돌-드-브르타뉴 지역에 영국군이 상륙할 교두보를 마련하는 목적은 그를 '괴물'로 만든다. 랑뜨낙이 잠시 그를 죽이려 했던(배 위에서의 잠시의 촌극으로 인해) 알말로라는 평민을 통해 각 지역의 지휘관들에게 보내는 지령은 그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봉기하라. 가차없이 처단하라." 그리고 실제로 전쟁의 국면에서 그는 공화파 병사 및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모토를 실행한다. 공화파라면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도륙하는 그의 모습은 '괴물'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또 하나의 괴물, 시무르댕은 한 때 랑뜨낙의 봉토 내에서 교구 사제직에 있었다. 랑뜨낙과는 말하자면 영주와 교구 사제라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시무르댕은 한편으로 랑뜨낙의 종손 고뱅의 교육을 책임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자유 사상에 심취했을 법한 - 그는 혁명이 발발하자 자신의 사제직을 가차없이 버리고, 혁명에 가담한다.
93년은 강렬한 해이다. 한껏 노하여 팽창한 뇌우가 그 속에 있다. 씨무르댕은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 광란적이고 야수적이며 눈부신 환경이 그의 웅대한 심기에 잘 어울렸다. 그 사람은, 바다수리처럼, 외견상 모험을 즐기면서도 내면의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있었다. 사납되 태평스러운, 날개 달린 특정 생물체들은 큰 바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폭풍의 영혼들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
<93년>이라는 폭풍과 같은, 혁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안정을 찾을 수 없는, 시기 가운데서 그는 '외견상 모험을 즐기면서도 내면의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있었다.' 혁명과 이를 이끄는 혁명 정부가 만드는 새로운 법, 그것은 자연 상태로의 복귀를 말한다. 물론 인간은 이미 자연으로부터 유리되었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불가능하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왕도 귀족도, 누구든 다른 누구를 지배하는 자가 없는 자연 상태로의 복귀이며, 시무르댕은 그러한 과거의 질서를 타파하고 과거의 모든 유대를 끊어내는 새로운 질서에, 새롭게 창조된 법에 누구보다 충실한 자다. 그러므로 시무르댕에게 있어, 자연은 법과 같은 것이며, "자연보다 위대한 사회, ..., 그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는 법에 충실한 자, 즉 새로운 법의 현현이다. 따라서, 공화국의 법을 위반하는 자, 그 누구라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는 법의 인간,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또는 아들)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그에게서 우리는 또 하나의 괴물을 본다.****
가족, 아버지와 아들 - 시무르댕, 고뱅
고뱅의 부모는 그가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다. 그런 이유로 고뱅을 교육할 후견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은 지역 교구 사제였던 시무르댕이 떠맡게 된다. 한 때 사제였던 시무르댕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까닭에, 고뱅은 그에게는 마치 자식과도 같은 제자였다. 고뱅 역시 세상을 등진 부모나 거의 언제나 전쟁터나 파리의 왕궁으로 주유하는 종조부 랑뜨낙 보다는 시무르댕이 더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그것이다. 그리고 고뱅은 자신의 영지나 지위의 보전 보다는 아버지와 같은 선생님의 가르침에, 혁명을 떠받치는 자유, 평등, 우애의 가르침에 더 끌리게 되어, 이후 당시 프랑스의 여러 귀족출신 공화파들과 같이 혁명군에 지휘관으로 참가하게 된다.
문제는 고뱅이 이상주의적 인간이라는 점이다. 고뱅은 명백히 훌륭한 지휘관이었고 방데 지역에서 야기된 혼란을 정리하여, 지역의 지배권을 잡는데 일조한다. 무엇보다 '작은 군대와 위대한 전투'를 성공적으로 연결시켰던, 그의 훌륭한 전술로 인해 랑뜨낙이 영국군을 위한 상륙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혁명 정부 수뇌부(아직 <공포 정치>가 시작되기 이전의)는 고뱅을 믿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이상적이며 고귀하다. 다시 말해 귀족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공화국이 규정한 선을 넘어 왕당파 군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돌출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혁명 정부는 고뱅을 제어할 한 사람을 파견하는데, 그 사람은 공교롭게도 시무르댕이었다. 아버지와도 같은 은사가 공화국의 법을 위반할 경우 그를 가차없이 심판하라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파견을 통해 소설은 역설적 비극의 모습을 띤 종결부를 예비한다.
자비, 인간성, 두 인간 - 고뱅, 랑뜨낙
세 사람이 그려내는 도형을 이루는 마지막 선분은 고뱅과 랑뜨낙이 그려내는 자비와 인간성의 선분이다. 이에 관해 서술하기 전에 잠시 책 속에서 울려퍼지는 위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 상황은, 서로 적대적인 진리들이 결국 맞닥뜨리게 된 일종의 무시무시한 교차로였고, 그곳에서 인간의 절대적 세 이념이, 즉 자비와 가족과 조국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세 음성이 각자 차례대로 발언권을 얻었고, 각자 나름대로의 진리를 개진하였다. 어떻게 선택한단 말인가? 각자 나름대로 현명함과 정의로움의 접합점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것 혹은 저것을 하라고 말하였다. 해야 할 것이 그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는가 하면 아니라고도 하였다. 이치가 이 말을 하면 감정은 다른 말을 하였다. 두 조언이 상반되었다. 이치가 이성에 불과한 반면, 감정은 대개 양심이다. 이성이 인간으로부터 오는 반면, 양심은 더 높은 곳으로부터 온다. 감정에 명료함이 부족하되 힘이 더 많은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극한에 이르는 '라 뚜르그'에서 치뤄진 랑뜨낙과 고뱅의 결전은 공화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랑뜨낙과 몇 남지 않은 방데 지역 왕당파의 잔당들은 때 맞춰 요새의 비밀통로를 열고 나타난 알말로를 따라 탈출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요새에 화재가 일었고, 이 요새 안에 있는 서재에는 세 아이들이 잠긴 철문 뒤에 갇혀 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미셸 플레샤르라는 시골 여자, 랑뜨낙은 이 장면을 도처히 그대로 지나치지 못한다. 비록 후일을 기약해야만 할 자신의 임무가 있음에도, 그는 공화파 군대로부터 빼앗은 사다리로 화재가 난 서재에 있던 아이들을 구출한다. 그는 비록 괴물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뱅은 적이지만 종조부이기도 한 랑뜨낙의 인간적 행동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도저히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기요띤느(단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의 양심은 치명적인 결정으로 향하게 되며, 결국 지휘관의 군복을 입혀 랑뜨낙을 탈출시키게 된다. 그 결과는 자명하게 비극적이다. 랑뜨낙을 탈출시킨 고뱅은 군법 재판을 통해 참수형에 처해진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시무르댕은 자신의 머리에 총을 발사한다.
미셸 플레샤르와 아이들 - 삼각형을 열어내는 보충물
이런 비극적인 결말은 이 소설이 만들어내는 삼각형 구도를 무너뜨린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삼각형은 도형 중 가장 처음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들 중 가장 완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그려내는 인물적 도식은 매우 완전하다. 그러나 그 완전성은 동시적인 불완전성을 부르고 있다. 말하자면 이 완전한 도형의 두 꼭지점이 사라지는, 또는 이 도형이 '열리는' 방식*****으로 결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완전성 또는 '열림'이야말로 어떤 소용돌이와 같은 과정의 특성일 것이다.
어쨌든 이 '열림'을 일으킨 것은 가난한 촌동네 여인 미셸 플레샤르와 그녀의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들은 프랑스라는 집합 속에 있는 가장 약한 자들, 말하자면 혁명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어떤 부분으로 재현되지 못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사회적인 의미 속에서 실존하지 않으며(모든 집합 속에 포함된 공백과 같이), 어떤 방식으로도 보호받지 못한다.(미셸 플레샤르가 아이들을 찾아 라 뚜르그로 향하는 여행길에 대해 위고가 서술해 놓은 부분을 보면 이런 이야기는 매우 자명해진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라도 그들은 프랑스라는 집합 또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새롭게 구성된 집합에 속한 자들이며, 랑뜨낙이나 고뱅과 같은 국가 이념을 따르는 자들이라면(서로 다른 이념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보호해야만 할 자들이다. 어쩌면 바로 여기가 위고의 기층 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드러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레 미제라블에서처럼). 이들은 비록 '실제적'으로는 없는 것이나 다른 없는 자들이지만, 언제나 국면 속에 '실재'하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보이지 않는 보충물(supplement) 혹은 꼭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더해짐'으로 인해 삼각형이라는 완전하게 폐쇄된 구도는 붕괴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이념은 혁명의 운동성이다. 물론 혁명은 어떤 새로운 '상태'로 가기 위한 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말하자면, 이 운동이 어떤 하나의 상태에 고착되는 순간, 운동은 사라지고, 그것은 더 이상 앞을 향한 전진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 인물들의 꼭지점들 - 그리고 각 인물 간의 관계가 만드는 국가 이념, 가족 이념, 인간성이라는 선분들 - 은 하나의 완전한 삼각형을 구성하는데, 이 완전한 도형은 폐쇄되어 있으며, 스스로 완전하기에 어떤 운동성을 결여한다. 미셸 플레샤르와 아이들은 바로 이 완전성을, 다시 말해 폐쇄성과 고정성을 붕괴시켜 운동의 이념을 드러내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보충물인 것이다(이들은 소설의 국면 속에서 마치 소설의 전개와는 무관한 것처럼 나타나며, 종결부에서야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시무르댕의 "자연보다 위대한 사회(는)... 꿈일 뿐이"라는 말은 이들을 통해 뒤집어진다. 자연보다, 시무르댕이 이상으로 삼는 인간의 법이나 자연의 법칙 보다 위대한 인간들이 바로 이들의 '더해짐'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연보다 위대한 인간, 그것은 법을 넘어서며,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위고의 소설 읽기는 언제라도 해 볼만한 일이다. 특히 <레 미제라블>이 드러내는 인물의 구도와 이야기의 배경은 독자가 언제라도 이야기를 - 이념을 통해 - 새롭게 보도록 한다. <93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백년이 넘는 세월 이전에 쓰여진 이 소설이 마치 어떤 정체 속에 갖혀버린 듯한 이 시대에 드러내는 이념은 탁월하다. 이 훌륭한 소설에 대한 이 졸고가 누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주
* 우리는 가무한이 아니라 실무한을 말하는 칸토르의 정리로부터 무한수의 영역에서는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히 무한서수의 멱집합을 통해 해당 서수의 부분들을 모두 하나로 셈하는 기수는 서수 보다 더 큰 멱(또는 힘, power)를 가진다. 그로부터 우리는 자연적인 원소들이 속해 있는 세계 혹은 상황(사회) 보다 이 안에 있는 상태 혹은 국가(공히 state)가 더 크며, 후자가 전자를 지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에 있어서도 단순히 연속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 보다 어떤 사건이 벌어진 시간, 즉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 지니는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 사실상 이런 측면은 프랑스 혁명이 표방했던 입장과 연관된다. 혁명 이후 프랑스는 '로마'를 본 뜬 '공화국'이었다는 것이다. 소설 내에서 위고가 곳곳에서 말하고 있는 이런 측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역자의 해설에 대해, 특히 로마라는 공화국과 관련한 역주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역자가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자연보다 위대한 사회', 법 또는 자연의 법칙 보다 위대한 인간은 가능하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법을 이기는(위반하는) 인간을 선언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 법의 인간이라는 괴물, 혹은 법 그 자체라는 괴물의 죽음이 수반된다. 이런 부분은 위고의 다른 작품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에서 서술된 자베르의 자살과 공명한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레 미제라블> 역시 '1832년 6월 봉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혁명과 연관된 작품이다.
**** 실상 이런 괴물적 측면은 자명하다. 어떤 이념 혹은 질서를 확신하던 자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향할 때, 그는 철저하게 이전의 것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그 방향전환이 일종의 자기 부정이자 배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배신자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한다.
***** 도형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닫혀야 한다. 삼각형을 생각해 보면 세 개의 선분으로 닫혀있는 공간을 만든다. 이런 닫힘은 어떤 완전한 결정, 규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이유로든 '열림' 혹은 구멍이 생기면 이 도형은 더 이상 닫히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가 된다.
****** 그렇다면 애초부터 사회 혹은 법의 외부로 등장하고 있는 거지 뗄마르는 어떨까? 그 역시도 어떤 국외자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 봐야할 점은 그가 어떤 '자연의 법'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자연의 법'이란 시무르댕이 재현하는 새로운 사회 혹은 질서를 구성하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법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시무르댕과는 달리 애초에 자연 속에 있는 자이다. 게다가 뗄마르는 랑뜨낙을 숨겨주고 미셸 플레샤르를 치료하는 등, 등장 인물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뿐 소설 속의 구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소설 내에서 자연 혹은 대지와 같은 존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 운동과 상태(/국가)의 관계는 서로 모순적이다. 프랑스어로 etat라는 말은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국가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말해지는 상태라는 말에는 국가라는 의미가 함께 포함된다. 어떤 운동, 역사 또는 정신의 상승 운동으로서의 혁명, 이것을 고착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공포 정치'가 끼치는 문제는 심대하다. 인간은 정신을 고양하는 운동을 통해, 한편으로, 비인간적이거나 또는 인간 이상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포를 통해 비인간적이거나 또는 인간 이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족 - 번역문과 역주에 대한 불만.
1. 번역문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잘 읽힌다. 솔직히 프랑스어는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 할 정도로 제대로 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잘 읽히는 글을 만들어 준 역자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한 가지 꼬투리를 잡고 싶은 점은 랑뜨낙이 하는 말을 굳이 고어체로 옮길 필요가 있었는지 하는 것이다. 꼭 무슨 개역판 성서 읽는 것 같은 느낌은 좀 별로였다.
2. 이렇게 말하면 본격적인 비판이 될 듯 한데, 역주는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다. 소설 자체는 훌륭한데 역주가 망치는 꼴이었다. 이에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지적하는 바이다.
p23 역주 24. Houzard는 세르비아 용병으로 구성된 헝가리나 폴란드 기병을 뜻하는 단어 Hussar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역자가 언급하는 Hussard도 이후에 Hussar를 본 딴 경기병대.
p56 역주 76. vis는 힘, 에너지, vir는 용기, 명예를 의미한다. vir를 spiritus(정신)이나 intelleligentia(지성)으로 새기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 하다.
p88 역주 95. La parole, c'est le Verbe. 이 말은 '말씀은 곧 신이다'로 풀기 보다는 '언변, 그것은 신의 말씀이다' 정도가 더 좋을 듯하다.
p160 역주 2. 아테네의 체제는 공화정이 아니라 민주정이다.
p208 역주 91. dictator는 집정관이 아니라 독재관이라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다. 집정관은 consul.
p245 역주 145. 떡갈나무가 갈리아의 상징인지는 모르겠으나, 로마 공화정에 떡갈나무 가지로 엮은 관에 얽힌 관습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시민관(corona civica)라고 하는 관은 동료 병사의 목숨을 구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관이며(두번째로 영예로운 훈장), 이를 수여한 사람들 중 유명한 예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율리우스 카에사르가 있다. 프랑스 혁명이 로마 공화정으로의 복귀의 의지를 저변에 깔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각상들의 머리 위에 놓인 떡갈나무 관은 시민관으로 보는 편이 옳다.
p313 역주 52. 사념으로 옮긴 idee는 이념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듯 보인다. 동작어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
p585 역주 209. 아들을 죽인 만리우스는 기원전 353, 349, 320년에 독재관을, 347, 344, 340년에 집정관을 지냈던 사람으로, 339년에 있었던 라틴족과의 전쟁에서 각자의 위치를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전투에 나서 전공을 세웠던 자신의 아들을 반역죄로 처단했던 사람이다.
p596 역주 213. 여기에서 저울은 '이성'이 아니라 '법'을 상징한다. 법의 여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빅토르 위고는 나에게 항상 만리 장성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늘 쳐다만 보았고 올라 보지는 못 한 것 같다. 엄청난 명성으로 다가옴에도 감히 다가설 엄두를 못냈다. 단 한 권 '노트르 담 드 파리'는 읽었는데 그것이 뇌리 속에 항상 화두로 자리잡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역사의 한 변곡점이다. 그 이전 역사의 정리이자 새로운 시대에 대한 서막, 즉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어제끼는(빼꼼이 여는 게 아닌) 성문이다. 열린 성문으로 엄청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현 세계의 모든 제도와 생각들을 던져 놓았다. 혁명을 공부하면서, 읽으면서 그 시대의 그 사람들은, 개인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위고가 여기에 답을 해 준다.
위고는 1802년에 태어났다. 대혁명이 막을 내렸지만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시대는 성문을 나와 버린 상턔였다. 위고의 화두는 항상 혁명이었다. 혁명은 내전을 유발한다. 1793년 방데 전투는 그러한 내전의 한 유형이었다. 가장 치열했다고 하는 그 전투, 위고는 이 전투를 말하고 싶어한다. 위고는 소설가이며 역사가이며 철학자이고 휴머니스트다. 1874년에 이 책이 출판된다. 위고의 말년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것들을 얘기하고 싶어 한다.
"93년은 유럽이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고 프랑스가 빠리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그리고 대혁명이란 무었인가? 그것은 프랑스가 유럽을 상대로 거둔, 그리고 빠리가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이다. 그것에서 93년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순간의 광대함이 비롯되며, 따라서 그 순간이 그 세기의 나머지 전체보다도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