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을 통해서 우연히 ‘인간이 된 개’ 라는 설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 이 열린 책들과 창비에서 각각 다른 번역자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되었다. 지난 번에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눈먼 올빼미>가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으로 나란히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선택과 비교의 폭이 넓어지니 재미있는 현상인 것 같다. 이 작품은 1920년대 혁명과 내전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의사였던 작가 불가꼬프가 과학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써낸 기발한 작품이다. 인간의 놔하수체와 생식기를 개에게 이식을 한다니, 어쩜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작품의 시작부터 너무도 독특하고 기발해서 흥미를 유발시키는 작품이라 하겠다. 내가 읽은 책은 열린책들 버전이다.
극중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는 뇌하수체의 적응성에 대한 문제를 연구 중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의 유기체를 젊어지게 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뇌하수체과 고환을 연결해 이식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주인 없는 개를 데려다, 부랑자의 시신에서 남성의 생식기를 이식하고, 인간의 뇌하수체로 교체를 하는 엄청난 수술을 한다.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는데, 갑자기 이마와 몸통 옆구리에서 털이 현저하게 빠지고, 개 짓는 소리가 멍멍 소리 대신에 아-오 음절로 바뀌고, 대단한 식욕을 보이더니 몸무게가 늘어나고, 웃고, 단어를 짖어 대는 지경에 이른다. 개가 점점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개 샤리크가 아닌 인간 샤리꼬프가 된 것이다. 뇌하수체의 이식이 개를 젊어지게 한 게 아니라, 아예 개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놀라운 대발견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커다란 사건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샤리꼬프가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은 하지만, 인간답지는 않다는 것이다. 욕을 하고, 흡연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인간처럼 먹고, 옷을 입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인간' 처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을 그저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윤리적인 판단을 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인간답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이 되어 버린 개가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에게 하는 대사이다.
내가 당신한테 나를 수술해 달라고 청한 적이 있나
그는 흥분하여 지껄이기 시작했다
좋은 일 하셨구먼! 동물을 잡아다가 칼로 머리를 길게 썰어 줄무늬를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는 싫어하고 경멸하신다 이거지. 나는 나를 수술하라고 허락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그는 천장을 향해 두 눈을 위로 치켜 뜨고, 마치 모종의 법률적 문구라도 회상해 내려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내 친족들의 동의도 없었다고. 나는 민사상의 손해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
사실 다 맞는 말이다. 애초에 개의 의사를 물어보고 진행된 수술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있는 상황 전개에 원래 모습의 개와 인간이 되어버린 개가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를 찾아 보았다.
영화 속의 '개 샤리크' 와 인간 '샤리꼬프'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소설에선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를 중심으로 수술을 하고, 관찰을 하면서 그의 심경 변화가 중점적으로 서술되었다면, 영화에서는 그런 변화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인 부분에 조금 더 시선을 두고 만들어진 느낌이다. 무산계급의 혁명대원들에게서 울려 퍼지는 혁명의 목소리, 모두 방을 나눠가져야 하는데 박사 혼자 너무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며 쳐들어온 이웃들,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기존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샤리꼬프. 게다가 그는 이제 자신이 사람의 형상이니 다른 사람들처럼 서류에 이름도 올리고 싶고 어쩌고 하면서 슬슬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결국 교수는 창조가 아닌 또 다른 변형물인 개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 중대한 실수였음을 직시하고..샤리꼬프(개인간)을 다시 샤릭(개)로 환원시키는 수술을 단행한다. 마치 작가 자신이 당시에 저질러지고 있던 혁명의 소용돌이를 다시 그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4.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모습
사람은 사람 다울 때, 개는 개 다울 때가 가장 자신다울 수 있다. 각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리를 거역했을 때 엄청난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 사회에도 자연스러운 법칙과 순리가 있거늘, 국가에서 강제로 통제하여 억지로 만들어내는 평등은 부자연스럽고,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기발한 발상으로 풀어가는 한 편의 소동 극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짐작해보면 슬프고 무서운 작품이다.
이 책에 담겨져 있는 '개의 심장'과 '악마의 서사시'의 이야기를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살아온 시대를 알아야 하며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야 함에도 나는 떠돌이 개 '샤릭'의 입장에 서서 많은 것들을 떠올렸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생명을 탄생시키고 샤리꼬프에게 "아버지"라고 불리운 필립 필리뽀비치가 처한 상황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뭐, 그게 어때서? 쉬본제르가 샤리꼬프를 통해 필립 필리뽀비치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 일련의 행동들을 따라가면 그 시대를 알 수 있으니 지금은 이 책의 장르가 SF인가, <불가꼬프적>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소설인가 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을 생각이다. '악마의 서사시'는 '개의 심장'보다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어 좀 더 공감하기 쉬운 소설이었다. 그 시대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개의 심장'과 '악마의 서사시'. '악마의 서사시'에서는 까로뜨꼬프가 새로온 국장 깔리소네르의 이름때문에 실수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직장에서 잘리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불행의 시작으로 까로뜨꼬프의 삶은 샤리꼬프의 삶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개를 유럽 최초의 개인간으로 탄생시킨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가 인간으로 변해간다고 해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떠돌이 개 샤릭이 유럽 최초의 개인간 '샤리꼬프'가 되었을 때 그에게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인간이 되어 누릴 수 있는 것들임에도 모두 차단되고 빼앗기게 된 것은 완전한 인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샤릭에게 수술을 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줬더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안전한 곳에서 맛있는 먹이가 많이 있는 곳에서의 안락한 생활로 만족감을 얻는 개에게 이러 이러한 수술이 있다고 설명한들 알아들을 수도 없었겠지만 무엇보다 샤릭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없을 것이다. 샤릭을 수술한 필립 필리뽀비치마저 자신이 만든 샤리꼬프의 존재를 처음부터 예측하고 탄생시킨 것은 아니었기에 무엇보다 샤릭에겐 이 수술에서 살아남느냐가 더 중요했던 상황이었다.
샤릭이 샤리꼬프가 된 후 그가 요구하게 된 많은 것들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자신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요구하고, 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필요한 많은 것들은 생각만으로도 한숨이 나오지만 필립 필리뽀비치가 샤리꼬프에게 "아버지"라고 불리우면서 그에게는 이미 샤릭에게 생명을 부여한 사람으로 샤리꼬프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의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개가 사람처럼 변해가는 상황은 웃음이 나지만 '개의 심장'은 개의 본성을 버리지 못한 샤리꼬프가 쉬본제르가 원하는대로 행동하게 이들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고 필립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닥터 이반 아르놀리도비치 보르멘딸리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것이다. 필립 필리뽀비치 또한 좀 더 오만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 따르는 명성을 포기했을 것이고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이었을까.
까로뜨꼬프의 불행한 삶, 샤릭으로 살아가는 삶, 샤리꼬프로 살아가야 했던 지난 시간들, 이를 비교하는 것조차 버거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의 삶은 견뎌내는 것조차 힘겨운 일상들을 보내고 있다. 이 일상들이 모여 세상이 만들어 지니 미하일 불가꼬프의 소설집 [개의 심장]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버린 것 같아 한숨만 나온다. 왜 이렇게 행복한 이들이 없을까. 필립, 보르멘딸리, 쉬본제르, 까로뜨꼬프, 샤릭, 지나 등등 모두들 말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을 탄생시킨다. 드디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비로소 종말을 맞은 억압의 역사. 수고롭고 짐진 자들의 모든 근심이 완전히 사라질 것처럼 보이던 시대, <개의 심장>의 미하일 불가꼬프는 그 희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리어 환멸을 본 소설가였다.
<개의 심장>, 그리고 <악마의 서사시>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소설 <개의 심장>, 그리고 <악마의 서사시>는 모두 공산주의 사회의 천박함과 부조리를 고발한 작품이다.
<개의 심장>에선 끓는 물에 화상을 입은 옆구리를 질질 끌며 떠돌아다니는 개 샤릭이 등장한다. 어느날 외과 의사 필립 필리뽀비치는 이 개를 데려와 따뜻히 입히고 먹이는데, 그것은 샤릭에게 인간의 뇌하수체와 생식기를 이식하기 위해서였다. 이 그로테스크한 실험을 통해 개 샤릭은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된 샤리꼬프(개인간 이라는 뜻)는 가지지 못한 것이 폭력 행사의 자격이 되는 양 충천해 있던 그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처럼 온갖 폐 끼치기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지성이 부족한 샤리꼬프. 불가꼬프는 받아야 될 이유도 모르는 채 권력을 부여받은 인간이 얼마나 단순하고 천박해 질 수 있는지 인간이 된 개 샤리꼬프의 행위로 은유한다.
<악마의 서사시>는 공산주의 중앙 집권 체제의 비효율과 인간성의 말살을 조롱하는 작품이다.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레닌은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꿈꿨고 실제로 그러한 국가를 건설했다.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는 모든 생산과 소비 기타 등등 인간의 행위를 계획한다. 이후 체제는 이것을 맹신하고 예외를 인정치 않는 권위주의적 사회로 변질되는 데 특히 소비에트 사회는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반혁명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생각이 마비된 인간은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창의가 결여된 인간은 다양한 예외가 존재하는 세상 일에 기계적 반응으로 일관할 뿐이다. 결국 체제는 끔찍한 비효율 덩어리로 전락하고 인간은 하나의 부속품이 된다.
불가꼬프는 개에서 인간으로 급변한 '샤리꼬프'의 만행을 들려줌으로써 혁명처럼 급진적인 변화가 이 세상에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불가꼬프는 <악마의 서사시>를 통해 그 대단한 혁명이 이뤄낸 것이 그토록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정부였는지 의문을 던진다.
물론 역사가 보여준 공산 국가의 실체는 불가꼬프의 묘사대로였다. 프롤레타리아에게 혁명은 그저 분노를 배설할 화장실에 불과했고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사람들에겐 권력을 차지할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해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기가 됐다. 하지만 나는 불가꼬프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능한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를.
불가꼬프는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나타나고 국가라는 것이 형성된 이후 착취의 구조는 거의 변한 적이 없다. 우리는 수 천년의 시간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놀라운 진화는 언제나 급진적 변화를 통해 이뤄져왔다. 공산주의 혁명이 그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사악한 독재자들 때문에 변질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순수한 가치마저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한 사건이었으며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분노가 거세된 세대에게...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에 보면 회장 비서 영작(김강우 분)이 회장 아들 윤철(온주완 분)에게 싸움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윤철의 수모를 참다 못한 영작은 차를 세우고 윤철을 차 밖으로 끌어낸다. 힘으로는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영작은 그러나 주먹으로도 윤철을 이기지 못하고 길바닥에 뻗어버린다. 피착취자 최후의 수단마저(힘, 혁명)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분노하지만 철저하게 짓밟히는 우리 세대의 무력감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촛불 시위에 나섰다 물대포에 쓰러지는 시민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 옛말이다.
영작은 실패했지만 분노할 줄 안다는 면에서 일종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짜증을 내는 일은 있어도 분노할 줄은 모른다. 우리의 분노는 완전히 거세됐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건 뭔가가 억압하는 것만큼 짜증나고 귀찮은 일일 뿐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그냥 닥쳤으면 좋겠다.
사실 이 소설은 나에게 거의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혁명이란 우리 세대의 관심사에서 뿌리 끝까지 사라져버린 단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도 변할 수 있겠지. 사람은 늘 변하는 법이니까. 이 상황이 더 악화되는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동원돼 갔던 블라디캅카스에 장티푸스가 도는 바람에 불가코프는 그곳에 발이 묶이게 된다. 단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불가코프는 볼셰비키의 일을 돕게 되는데 그의 일은 볼셰비키적 관점에서 바라본 푸시킨과 체호프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고, 지방 극장을 위한 희곡을 창작하는 작업이었다. 불가코프는 이곳에서 국외로 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그는 러시아에 남게 되고 결국 모스크바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모스크바는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비롯하여 그의 일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 되고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형상화된다 1930년대 불가코프는 어떤 작품의 출간 및 상연도 모두 금지되는 신세에 놓인다. 불가코프는 ‘국내 망명 작가’로서 굶주림과 죽음을 눈앞에 둔 채 1930년 3월 28일 소비에트 정부를 수신인으로 하는 편지를 보낸다. 스탈린이 직접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하고 통화 이후, 그에게는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일자리가 주어진다. 그러나 1932년 희곡 <투르빈가의 나날들>의 무대 상연 허가가 난 것을 제외하고 이후로 그의 다른 작품들은 단 한 편도 이후 소비에트 무대에서 상연되지 못했고 한 줄의 글도 출판되지 못했다.계속되는 상연 금지 명령과 출판 금지 등은 불가코프가 오랜 시간 투병해 오던 고혈압 신장경화증의 병세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미 1939년 중반부터 의사는 불가코프의 상태가 희망이 없음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코프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대한 창작을 계속했고 작업은 그가 죽기 3주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1940년 3월 10일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