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을 다 읽고나서, 제목 '기탄잘리'의 뜻을 찾아보았더니(읽기 전에 찾아봤어야 했나?)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고 한다.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 내가 느낀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줄 소감에서 밝힌 것처럼, <기탄잘리>는 님을 향한, 님을 위한 찬송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는 모두 103편인데, 1번부터 103번까지 번호만 매겨져 있을 뿐, 별도의 제목은 없다. 일련번호로 매겨져 있지만 그 내용은 대동소이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오로지 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님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친다는 고백의 기도(그렇지 않은 노래도 있다. 60번에서 62번은 님이 아닌 아이들(혹은 아가)에 대한 애정을, 90번부터 103번까지는 님에 대한 찬송이 아닌 (자신의) 죽음에 임하는 노래이다.).
다음 작품은 이 시가 님에게 바치는 '기도'임을 직접적으로 언명한다.
나의 주인이여, 이것이 내가 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내 마음속 빈곤의 뿌리를 내리치고 또 내리치소서.
기쁨과 슬픔을 가벼운 마음으로 견딜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소서.
님께 바치는 내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소서.
가난한 자들을 거부하지 않도록, 무례한 권력 앞에 코 무릎을 꿇지 않도록 나에게 힘을 주소서.
일상의 사소한 일을 초월하여 내 정신을 높이 세울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소서.
그리고 님의 뜻을 이루는 데 내 모든 힘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칠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소서. - 36번 작품 전문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나는 하나의 의문을 가졌야 했다, 이 작품들이 과연 시가 맞는가, 하는. 시라기보다는 짧은 기도문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이해인 수녀의 시처럼 기도문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기탄잘리>를 읽으면서는 이걸 시라고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세계적으로 인정됐으니(19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니)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시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시는 압축미나 운율 등과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시에서는 압축이며 운율을 느끼기 힘들었다(운율의 경우,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원작이 아니라 번역물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산문 같은) 짧은 기도문(혹은 신앙고백서)을 읽는다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시에 대한 나의 사고가 편협해서 이 시들을 시로 받아들이는 데 다소 거부감(?)을 느낀 것일 수도 있다. 운율을 제외하면, 아름다운 시라고 느낀 작품도 없지 않다. 다음은 그 중 한편이다.
그렇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다만 님의 사랑일뿐임을. 오, 내 마음 깊이 사랑하는 이여, 잎새들 위에서 춤추는 금빛 물결의 햇살이, 하늘을 가로질러 떠가는 이 나른한 구름들이, 내 이마 위에 서늘함의 자취를 남기고 지나가는 이 미풍이 님의 사랑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아침 햇살이 내 눈을 흠뻑 적셔 주었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게 전하는 님의 사연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님의 얼굴이 높은 곳에서 굽어보고 있음을, 님의 두 눈이 내 두 눈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내 마음이 님의 발에 가닿아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59번 전문
님에 대한 사랑을 잘 느끼게 해주는 시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떠올린 시인이 있다. 바로 한용운 시인인데, 위 시를 읽으면서는 <알 수 없어요>라는 시가 잠깐 떠올랐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최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전문
<알 수 없어요>에서 '누구'를 '님'으로 바꾸면 기탄잘리 59번 시와 한용운의 시는 거의 같아 보였다. <알 수 없어요>가 형식 면에서 의문의 형식을 취했지만 수사의문문으로 본다면, 형식도 문제가 안 되고, 내용은 외물에서 님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으로 같지 않은가.
한용운이 <기탄잘리>를 읽었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아마도 읽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고 보기에는 <기탄잘리>와 시집 <님의 침묵>에 실린 시들은 공히 님을 노래하며, 의미가 통할 수 있는 작품들도 꽤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용운이 <기탄잘리>를 읽었든 그렇지 않든, 나는 한용운의 시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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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탄잘리>가 님에 대한 찬송(혹은 신앙고백)이라면, '님'은 어떤 존재인가? 한편의 노래를 통해 알아 보자.
그는 가장 내밀한 곳에 머물면서, 깊고 은밀한 어루만짐으로 내 존재를 일깨워 주는 분입니다.
그는 이 두 눈을 황홀케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 안의 심금을 울려 다채로운 가락의 즐거움과 고통의 음악을 엮어 내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세상의 온갖 마야를 엮어,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미묘한 색조의 금빛과 은빛, 물빛과 풀빛의 천을 짜는 분, 그렇게 짠 천의 주름 사이로 자신의 발을 언뜻 내보이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의 발에 닿으면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지요.
나날은 다가오고 세월은 흐르지만, 수많은 이름으로, 수많은 모습으로, 수많은 기쁨과 슬픔의 황홀경으로 언제나 변함없이 내 마음을 감동케 하는 분은 바로 그입니다. - 72번 전문
님을 표현한 말은 여러 작품에서 드러나는데 다양하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 '나의 주인', '왕', '왕중의 왕', '천국의 주인', '삶의 유일한 반려자',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유일자', '하늘', '보금자리'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님을 지칭한다. 딱 꼬집어 말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없지 않지만, '님'은 대체로 '절대자'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한용운 시의 '님'의 의미처럼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 같지는 않다.).
<기탄잘리>를 읽으며 한용운의 시가 연상된다고 했는데, 한용운 외에도 우리 설화가 연상되는 작품(54번), 천상병의 시가 연상되는 작품(96번)도 있었다.
나무 그림자 비스듬히 드리워진 우물가에 나는 홀로 남아 있었지요. (중략)
님이 오실 때 나는 님의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님의 눈길이 나를 향했을 때, 님의 눈은 슬픔에 잠겨 있었지요. 님이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을 때, 님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배어 있었고요. "아, 나는 목마른 나그네요." 나는 백일몽에서 놀란 듯 깨어나, 하나로 모은 님의 손바닥 위로 물동이의 물을 부어 드렸지요. 머리 위에서는 나뭇잎들이 살랑대고 있었고, (중략)
님이 내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님께서 나를 기억하실 수 있도록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략) - 54번 작품 일부
물 위에 버들잎을 띄워주는 내용은 없지만,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을 떠주는 이야기, 우리 설화에도 있지 않은가.
내가 본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내가 하는 작별의 말이 되게 하소서. - 96번 작품 첫행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 3연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인용한 부분만 놓고 보면 흡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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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탄잘리>는 님을 위한, 님을 향한 찬송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대부분의 시편들에서 화자는 오로지 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몇몇 시편들에서 인간적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들조차 끝내는 님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어떻게 하면 이렇듯 절대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렇듯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 <기탄잘리>는 한없이 순정하고 솔직한 고백 앞에서 경건해지게 만드는 시집이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인도의 정신을 세계에 알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기탄잘리>는 무척 낭만적이며 신비스러운 시로 엮어져 있다.
총 103편의 영문시로 수록되었는데 이 모든 시들은 <님>을 향한 시가이다. 신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물질세계에서 존재하는 모순과 혼돈 속에서 자아성찰을 추구하는 타고르의 사상은, 103편의 시 전체에 흐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시편과 무척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다윗의 시편은 절대자 하나님께 향한 시임을 알수 있지만 타고르의 시에서 <님>은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시를 읽다보면 <님>을 깨닫는 과정이 우리 생 전반에 걸친 자아성찰과 맞닿아있으며 타고르의 생전부를 바친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통찰이라 막연히 느낄 뿐이다.
시 전편에 등장하는 <님>의 존재에 대해 시편 102편에서는 [그는 누구지요?]라고 물으면 [정말이지,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 사람들은 나를 나무라고는 비웃음을 흘리며 가버립니다. 그런데 님께서는 미소를 머금고 그곳에 앉아 계실 뿐입니다. 타고르의 모든 시가 님을 향한 시라 대체 사람들이 님이 누구냐고 묻자 자신도 님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답하는 것은 님이 한마디로 규정짓기 어려운 존재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시에서 보여지는 님은 어떤 존재인가..
71편의 시에서 보여지는 님은 절대자로서 우리가 사는 현생은 님과 나사이의 숨바꼭질이 이어지는 가운데 온 세월이 흐릅니다. 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님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님은 형체가 없는 존재로서 항상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43편의 시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내 삶의 수많은 순간에 영원의 각인을 새겨 놓으셨습니다. 어쩌다 오늘, 덧없이 흘러간 내 삶의 순간들에 불을 비추자, 그곳에 새겨진 님의 각인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순간 나는 님이 남긴 각인들이 내 사소한 나날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잊혀진 추억들과 뒤섞인 채 먼지 속에 흩어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님이란 언제나 존재하였지만 한 순간에 느껴지는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5편에서도 [나에게, 길을 따라 나에게, 언제나 나에게 오고 계십니다.] 라고 말하듯이 언제나 님은 곁에 있지만 그 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깨달음으로 찾아오므로 102편에서 <님>의 존재를 모른다고 한 것은 결국 님의 존재는 자신의 깨달음에 달렸다는 뜻이다. 인간이 소속되어 있는 물질 세계는 물론 인간까지도 한낱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 진정한 깨우침에 이르기 위해서는 현생이란 잠시왔다 머물러 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임을 말하는데 이것은 인도 종교 철학인 <마야>의 세계를 말한다.
시편 101편에서는 그 느낌을 이렇게 노래한다. [ 한평생 쉬지 않고 나는 내 노래와 함께 님을 찾아 헤맸습니다.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나를 이끈 것은 내 노래였지요. 나는 내 노래와 함께 내 주변을 더듬고 다녔습니다. 나의 세계를 찾아 손끝으로 느끼면서..]
따라서 타고르의 님이란 그어떤 시적 이미지와 비유을 동원하더라도 쉽게 그 모습을 밝힐 수 없는 존재의 님인것이다.
타고르는 인도의 부유한 계층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인도에서 농업 공동체를 설립하여 농민계몽에 힘썼다. 농민이 계몽하지 않고는 인도사회의 어떤 변혁도 힘들다는 타고르의 사상은 다른 지식인들과는 달리 무척 진보적인 사상이였다. 그러나 아내와 부친, 심지어 아들과 딸이 수년 사이에 연이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농업학교도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자 저서의 판권을 헐값에 출판사에 넘기게 되는 고통과 울분은 고스란히 시로 승화되어 [기탄잘리]를 탄생시키게 했다. 타고르의 시는 노벨상이라는 명성과 달리 의외로 무척 소박하고 화려한 미사여구는 등장하지 않지만, <님>을 향한 사랑은 때론 연인에게 속삭이는 밀어로, 때론 신께 고백하는 기도의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는 우리가 사는 생에 집착하는 모습을 버리고 진정한 내 안에 있는 님의 목소리를 듣는 깨달음에 다다른다는 것으로서 인간세상은 무한한 세상을 꿈꾸지만 결국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님과 숨바꼭질한다라고 비유한 타고르의 시의 세계는 철학적인 동시에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며 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시의 향연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내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생각하노라면, 모든 시간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죽음의 빛에 의지하여 나는 꾸밈없는 천연의 보물로 가득 찬 님의 세계를 엿봅니다. 그곳에서는 더할 수 없이 비천한 자리도 찾아보기 어렵고, 더 할 수 없이 비참한 삶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내가 헛되이 갈망해 왔던 모든 것과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게 하소서. 그리고 내가 늘 얕보고 무시하였던 것들을 진정으로 소유하게 하소서. -92편-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뜻으로 1913년 타고르에게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서문에는 시인 예이츠가 타고르의 시를 접하고 얼마나 열광했는지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며 소개하고 있다. 시집 뒤편에는 타고르가 직접 번역한 영문 시들이 함께 실려있다.
첫번째 시를 읽으며 한용운 님의 <님의 침묵>을 떠올렸다. 그만큼 유사한 데가 있는 느낌의 시들이다. 아마도 '님'으로 칭하는 대상에게 시인의 관심과 화제가 향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님'은 애인, 주인, 하느님, 또는 보편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 전체가 '님'을 향한 마음으로 다채롭게 물들어 아름답고 맑으며 울림이 있다. 시 한 편 한 편이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주관하는 절대자에 대한 기도처럼 다가온다.
4
내 생명의 생명이여, 님이 베푸는 생명의 손길이 내 온몸에 미칠 것을 알기에, 나는 언제나 나의 몸을 정갈히 하려 애쓸 것입니다.
님이야말로 내 정신 안에 이성(理性)의 불꽃을 지필 진실임을 알기에, 나는 언제나 그 모든 거짓을 내 생각 밖으로 쫓아내려 애쓸 것입니다.
님이 내 마음속 더할 수 없이 깊은 성소(聖所)에 머물러 계심을 알기에, 나는 언제나 내 마음에서 사악함을 쫓아내려 애쓸 것이고, 내 사랑의 꽃을 피우려 애쓸 것입니다.
또한 님이야말로 나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임을 알기에, 나는 움직일 때마다 이를 통해 님의 존재가 드러나도록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26p)
81
한가한 시간을 보내면서 시간이 헛되이 가버린다는 생각에 슬퍼하던 날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주인이여, 이는 결코 헛되이 가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님이 내 생명의 모든 순간을 손에 쥐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님은 모든 사물의 깊은 곳에 숨어서, 씨앗을 싹트게 하고, 꽃봉오리를 활짝 피게 하며, 또 꽃을 열매로 무르익게 하십니다.
피로에 지친 나는 나른한 잠의 나락에 빠져, 온 세상이 정지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나는 나의 정원이 경이로운 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12p)
옮긴이는 타고르의 '님'에 대한 이해를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예이츠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 세대를 걸쳐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길을 따라 여행하는 나그네들과 강을 따라 배를 저어 가는 사람들이 낮은 가락으로 노래할 그런 시편들'이고, '서로를 기다리는 연인들이 나지막하게 읊조릴 그런 시편들'이라는 거다. 여기에 실린 시들을 감상하는 독자의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어느 때는 하느님으로, 어느 때는 연인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처럼.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시인, 교육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신을 생각하며 바치는 103편의 모음시집이다. 타고르의 유명세와는 달리 국내에 번역된 작품을 읽을 수 없던 중에 시집이 있어 구매하였다. 마사 누스바움의 윤리학을 접하며 인간 종교, 자유 시민 사회에 대한 내용을 통해 콩트, 밀, 타고르를 순서대로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영국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쓴 서문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의 작품이 가진 신성함과 천성적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조심스러움이 느껴져 작은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탄잘리에서는 타고르가 민족주의적 색채를 거리끼던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님을 향한 감탄과 감사의 말이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시의 감미로움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찬미의 노래가 익숙지 않아서인지 읽으면서도 텍스트로 흘려보내어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기회에는 타고르의 소설 고라를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