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고전문학을 접하는 처음경우(처음의 인상이 가장 중요해서 그 이후를 지배하기도 하는 등 가장 압도적이니까)가 아마도 자발적인 관심에서 우러난 접근이라기 보다는, 어떤 의무감이나 다른 목적 (예를 들면 국어2, 논술 등등)을 위한 방법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고전문학은 너무 진지하거나 읽어가기엔 즐거움보단 힘듦이 예견된 것이라고 지레 생각했다는 것을, 지난번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다.
그 많고 많은 책중에 바로 그 책을 잡는 순간의 이유를 잘 기억하는 편인데, 이 벽돌 (^^;;)을 잡은건 참 일종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벽돌과 손사이에 묘하게 흐르던 전기같은 뭔가가 아니었을까. 더운데 선풍기나 에어콘바람엔 오히려 더 아파지는, 열나고 머리아프고 코막히고 콧물나고 기침나고 가래끓고 하는 마당에 오히려 정신없이 읽어가는 흥미진진 서스펜스 작렬 작품들보단 찬찬히 달래고 식혀줄 작품이 필요했다. 그리고, 꿈에 '대심문관이야기' 2탄 (내꿈속엔 마치 헬보이가 연상되는 악마가 직접 출연했다)을 꿀 정도로, 바흐의 음악을 배경으로 읽다가 일류샤 때문에 펑펑 울 정도로 깊이 빠져버렸다.
... 그애가 도련님 형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아빠를 용서해주세요. 아빠를 용서해주세요'라고 애원했을때 그애가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했는지 아는 사람은 하느님과 나밖에 없을 겁니다....그애 어미도 울기시작하더군요 - 난 그애 어미를 무척 사랑하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내게 달려들어 두팔로 내목을 꼭 끌어안는 것이었어요...'아빠, 아빠, 사랑하는 아빠, 그자가 아빠를 얼마나 심하게 모욕했는지'하고....p.365~370
그러니까, 농노제도가 폐지되고 프랑스등 유럽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무신론 등등의 사상이 혼재된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대도시도 아니고 중소도시도 아닌 작은 도시에 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지주계급이지만 돈은 지지리도 없어서 아는 사람이나 친인척인 귀족들의 집에 얻혀살면서 스스로 광대가 되는 등 온갖 비굴함과 방탕과 무절제를 몸소 실천한 인물로, 여인네에 대한 정욕은 넘치지만 사랑은 없이 두 명의 아내를 각각 두고 불행을 안겨주었다. 각각 한명과 두명의 아들을 남긴채 여인네들은 각기 괴로운 생을 등졌다. 하지만, 남겨진 자식에 대한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 이 인물에게도, 단한가지 생에 있어 집착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돈. 그리고 유일한 행운이 있었다면 그런 주인이나마 옆에서 거둬주는 충실한 하인 그리고리.
세월이 지나 그와 전혀 관계없는 인생과 운명을 살, 각기 4살의 터울을 둔 세 아들이 각기 그를 찾아온다. 28살의 첫째아들 드미트리는 결국 그와 여인 그루센카를 놓고 다툼을 벌이지만, 가장 아버지를 많이 닮은 듯한(스메르자코프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 이반이라고 하지만, 글쎄 그건 그렇게 보이지 않은 속에도 까라마조프적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아들들은 모두 다 '까라마조프적이다') 욕정이 지나치고 허세가 강하지만 순수한 일면이 있는 장교였고, 둘째아들 이반은 철저한 무신론의 현실주의자로 학문의 길에서 잠깐 이탈한 상태였고 형인 드미트리의 약혼녀를 사랑한다. 세째아들 알료사 (도스또예프스키가 작품을 쓰는 중 잃은 아들의 이름이 알로샤였다)는 매우 순수하고 아름다운 심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소도시의 수도원에서 조시마장로의 밑에서 잠시동안의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이 세형제는 마치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인간형중 가장 크게 분류해놓은 인물들 같다. 아참, 그리고 또다른 아들로 간주되는 스메르자코프.
커다란 줄거리인, 이 가족내의 격렬한 다툼과 살인사건들 사이로 작은 에피소드 등이 곁들여지며 이들과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그리고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시대를 살면서, 아니 지금도 인류가 고민해야할 이슈를 보다 생생하게 살려주고 있다. 게다가 언제나 성경에서 가장 궁금했던 욥의 이야기를, 이제까지 살면서 들었던 그 어떤 설명보다 더 설득력있게 말해준 조시마 장로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그중 이반이 알로샤에게 자신이 머리속으로 지었다는 서사시 '대심문관이야기'는 읽으면서 호흡이 약간 벅차는 대단한 내용이다.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에게 한 세가지 유혹을 두고,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높이, 그러나 잘못 평가하였다고 예수에게 묻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따로 출판되고 읽혀지지만 그 이전에, 이반이 언급한 그 시대의 부조리한 실상과 그로인해 이반이 무신론적 결정을 뼈아프게 내린 부분까지 읽어야 훨씬 더 이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작은 소논문으로 비꼰 내용을 모르고 반색하는 이들과 수도원의 대면에서 냉소가 드러나는, 치밀하고 회의적 이성을 보이는 이반이지만, '영생을 믿지않게 되면 선행도 사라질 것' 이라며 매우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이반의 속엔 겉과 다른 아픔과 고뇌가 있음이 느껴지면서 이반에게 심하게 몰입된다.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원치않아. 그리고 만일 어린애들의 고통으로 진리를 구입하는데 필요한 고통의 모든 금액을 모두 보충해야 한다면, 나는 미리 단언해두는 바이지만, 진리 전체도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야...게다가 조화의 값이 너무 비싸서 내 주머니로는 입장료를 도저히 지불할 수 없단 말이야....신을 받아들이지않는게 아니야, 알료샤. 난 그저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보내는 것뿐이야...p.436
이와 대조적인 입장의 조시마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믿지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믿지않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믿는 사람은 비록 그전까지는 스스로도 믿지않났다 살지라도 민중들 속에서 자신의 보물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p.521
영과 속, 부조리와 이상의 간극이 각자의 경험에 의해 보다 극단화되며, 사람들은 보다 더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정신분열적인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보면서 감동을 얻는 순간은 바로 이들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깨닫지못하고 스스로를, 그리고 가장 가까운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괴롭힌다 (자존심에 입은 상처로 인해 오기를 부리며 소망대로 현실이 이뤄질 것이라며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까쩨리나 이바노브나 베르호프쩨바, 미련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사랑해버린 그루센까,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에게 또한 존경을 받고싶어 허세를 부리고 지레 실망해버리는 니꼴라이 끄라소뜨낀).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중 하나가 거의 초반부에 나오는 것을 보면..
... 중요한 것은 거짓을, 온갖 거짓을, 특히 자신에 대한 거짓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거짓을 감시하시고, 매시각 매분 그것을 경계하십시오. 타인에 대해서건 자신에 대해서건 혐오감을 품지마십시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추악하게 느끼는 것은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화되는 것이니까요...공상적 사랑은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해주는, 만족도가 빠른 성급한 성취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럴떄 실제로 자기 생명까지 바치겠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며 모든 사람에게서 주목받고 칭찬받기 위해 무대 위에서 처럼 얼른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실천적 사랑은 노동이자 인내이며..완벽한 학문이기도 합니다...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에 다가가기는 커녕 거기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움 속에서 목격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갑작스레 목표를 성취하게 되며....p.112~113
혈육에 대한 사랑은 없지만, 다시돌아온 아들들에게 경계심을 느낌에도 아버지 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는 알료샤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 이유로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떤 비판이나 판단을 내리지않고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각 부분을 분석했으면서도 전체를 간과했으니...그 전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들의 눈앞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서 지옥의 문도 그걸 정복할 수는 없는 거란다. 그리고 그 전체란 지난 19세기 동안 살아왔고, 개개인의 정시적 활동 속에, 민중의 활동 속에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지 않을까? 맞아, 그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자들,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그 무신론자들의 정신활동 속에서도 요지부동으로 살아있는 거란다....지금까지 그들의 지혜도 그들의 열정도 이미 옛날에 그리스도께서 모범으로 제시한 인간의 형상과 덕성보다 더 우수한 것을 창조해낼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지....p.305
아무리 작가의 분열적 상황이 반영되었다고는하나, 정말 작품속에서 묘사되는 러시아인에게 심한 괴리감을 느끼던차, 후반부의 법정씬에선 검사와 변호사의 입에서 다소 극화되었을뿐 결국은 인간의 이야기란 것을 알게된다.
..저열한 타락의 감정이 고상하고 고결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두 심연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것, 바로 이것이 없다면 우리들은 한없이 불행하고 또 불만스러우며, 왠지 우리의 삶이 충만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들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 어머니 대지처럼 무궁무진합니다. 우리들은 내면에 온갑 것들을 동시에 갖고있습니다. 별의별 잡다한 것이 같이 공존할 수가 있습니다....p.1221
검사의 심리분석과 변호사가 심리분석이 양날의 칼임을 지적하면서 보여주는 까라마조프가나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행동들은 매우 모순적이고 일관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악행과 실수를 용서할 만한 선함을 간직하고 있다. 맨발로 뒹구는 어린아이에게 건내준 호두를 기억하고 20여년이 흘러 돌아와 '성부,성자,성령'을 기억하는 모습이나, 죽어가는 친구의 괴로움을 달래기위해 개를 데리고 와서 묘기를 시키는 장면, 자신이 치고도 혹시나 죽지않을까 손수건으로 달래는 모습 등등.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상반되는 평가를 내리는 이반과 조시마장로의 양극 안에서, 성경적인 부친살해의 사건과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재판 등 극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안의 다양한 '까라마조프적인 것들'이 살아날때, 알료샤가 아이들과 약속한 것처럼 '우리가 가졌던 아름다운 추억과 감정들, 누군가를 위해서 해주었던 일들'을 기억한다면, 살아가면서 덜 후회할 것 같다.
...까라마조프 karamazov란 본래 '검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어의 '하라 hara'와 '바르다 mazat''란 의미의 러시아어의 결합이다. 결국 까라마조프란 어둠과 악으로 뒤범벅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도스또예프스키식 명칭에 해당된다...p.1361 (역자해설중에서)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로 미스테리소설을 썼지만, 추리소설적 시각으로 봐도 참 괜찮다. 사건들 둘러싼 상황, 증거 (변호사 정말 캡짱!), 심리, 목격자진술, 사건의 시간대구성 등등과 법정씬 등 역시 대가였다.
아참, 하나의 이름을 어찌나 벼라별 애칭, 약칭으로 부르는지...역자가 매번 주석을 달아놔서 정말정말 편했다 ^^
p.s : 요 작품에서 연결되는 작품들.
프리드리히 쉴러의 [군도] (또는 [도적떼])
고골 [검찰관], [코]
푸시킨 [에우게니 오네긴]
셰익스피어 [오델로]
말리노프스키의 [미개사회의 성과 억압] (yes24 검색엔 안나오지만, 삼성출판사의 삼성세계사상에 포함되어있음)
도스토예프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중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을 때는 지루할 틈이 없다. 읽다 보면 어느새 빠져 들고 만다. 무엇이 그토록 빠져 들게 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가진 매력은 뭘까? 아니 매력이라기 보다 거의 마력에 가깝다. 사실, 나는 지금껏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무언가에 황홀하게 빠지면 이성은 마비되고 한껏 들뜬 감성과 직관만 난무하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언젠가 책을 다시 읽고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겠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야 기회가 됐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가운데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품 세 권을 꼽으라 한다면 <죄와 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악령>일 것이다. 이 가운데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책 1순위다. 난봉꾼인 아버지와 아들 세 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졸한 가정사와 부친 살해 사건이 이야기의 소재다. 어릿광대 같지만 교활하고 음탕한 아버지 표도르는 두 명의 아내로부터 세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마을에 떠돌아다니는 백치 여인을 건드려 얻은 아들이 하나 있다. 호색한 표도르는 세 명의 여자에게서 아들 넷을 둔 홀아비로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자신의 아버지 표도르를 가장 빼닮은 아들이다. 그 둘은 비슷한 기질과 색욕을 지니고 있기에 아름다운 여인 그루센카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사이다. 드미트리에게 결정적으로 부친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따뜻한 품성의 소유자라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따뜻한 인간성은 종종 도발적인 행동과 격정적인 언행으로 가려지고 오해받기 일쑤다. 그리고 그의 이런 성격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한몫 하게 된다. 부친 살해의 누명을 쓰고 재판정에 섰을 때 무죄를 주장하는 그를 두고 끝내 유죄로 마음을 굳히는 배심원들은 그의 난봉꾼에 가까운 행각을 잘 아는 농부들이었다. '성격이 곧 운명이다'라는 말은 드미트리에게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둘째 아들 이반은 배 다른 형 드미트리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이다. 드미트리가 열정적인 외향적 감정형이라면, 이반은 냉철하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내향적 사고형이다. 무신론자이면서도 종교에 관심을 갖는 그의 이중성은 부친이 살해되는 과정에서도 역시 본의 아니게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형과 아버지가 재산과 여자를 사이에 두고 말썽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이반은 한 발 떨어진 방관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버지 표도르에 대한 그의 무의식적 혐오감은 형 드미트리 못지않다. 그리고 그의 이런 무의식은 아버지 집의 요리사이자 실은 자신의 배 다른 동생이기도 한 스메르쟈코프에게 전달되고, 스메프쟈코프의 실행으로 인해 살인 교사자가 된다. 드러난 분노보다 드러나지 않은 잠재된 분노가 더 무서운 법이다. 잠재된 분노는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반과 이반이 경멸해마지않는 스메르쟈코프는 서로의 무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공범자이자 머리와 손발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셋째 아들 알료사는 가장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인물이다. 첫째 형 드미트리가 가슴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행동파라면, 둘째 형 이반은 냉정한 머리를 가진 이론가다. 이에 반해 셋째인 알료사는 가슴과 머리가 골고루 발달한 휴머니스트다. 종교적인 분위기가 많이 묻어 있지만 교회 안에서 보다는 교회 밖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살려내려고 노력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선과 악을 모두 알면서도 선을 택할 줄 알고, 그 가운데 자신의 신념을 따라가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개성이 때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여서 주인공의 자리를 뺏기지 않을까 우려될 만큼 선명하지 않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두 작품인 <죄와 벌>과 <악령>처럼 살인 사건이 중심 소재로 등장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부친 살해사건이라는 점이다. 인륜을 저버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 사건보다 더 흥미로운 게 사실이다.도스토예프스키가 부친 살해라는 중심소재를 선택한 데는 계기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 자신의 부친이 부리던 농노의 아낙들을 데리고 술판을 벌이며 음탕한 짓을 서슴지 않다가 분노한 농노들한테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차마 생각할 수 없는 비극이지만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탄생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갖는 마력은 바로 이러한 현실과 현실적 가능성을 토대로 개성있는 인물을 설정하고, 인간의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극과 극을 오가며 첨예하게 체험하게 하는 데 있지않나 생각한다. 한 마디로 그의 작품에서는 성인과 극악무도한 불한당, 인간에 대한 신뢰와 배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좌절을 모두 체험할 수 있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누가 뭐래도 재판정에서 드미트리의 변호사가 변호를 하는 장면일 것이다. 유능하고 사리분별이 밝은 드미트리의 변호사가 이성과 감성, 크리스트교의 사랑에 호소하는 마지막 장면은 장장 몇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데, 내가 지금까지 만난 문학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무죄임을 입증받지 못한 억울한 현실을 통해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중 하)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단언컨데, 결코 읽기가 쉽지 않았다. 2월 하순부터 시작하여 3월 마지막날에야 다 읽을 수 있었다. 세권에 130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무게도 무게려니와, 러시아 소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특징이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이름으로 인하여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가 힘들어 상권 한권을 읽는데만 3주는 걸린 것 같다. ‘죄와벌’을 읽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예를 들면 카라마조프의 첫째아들 드미뜨리 표도로비치는 미쨔, 미쩬까, 미찌까, 미뜨리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이름들이 애칭과 같은 어떤 친밀도를 나타내는 의미가 있어서 소설 속에서 이런 다양한 이름을 섞어서 쓰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한글로 번역하여 읽는 독자들에게 그러한 뉘앙스가 전달되지는 않을 것이 뻔한데, 차라리 번역의 과정에서 한 이름(예를 들면 드미뜨리로…)으로 통일하여 쓰면 덜 혼란스럽지 않을까 싶다. 안그래도 등장인물들이 많고 러시아 이름이 익숙치 않아 이 사람인저 저 사람인지 헛갈리는 마당에 동일인물에 대해서도 이렇게나 많은 다른 이름들을, 그것도 주인공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에 대하여 쓰고 있으니 말이다. 나만 그렇게 느끼나…?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도 세권에 달하는 분량이긴 하지만, 이름을 통일해서 쓰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두번째 권부터 속도가 좀 붙기 시작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책의 마지막권을 덮고난 지금, 뭐라 이 책에 대해 말하기가 쉽지않다. 그 수많은 인물들의 심리와 내면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선과 악, 사랑과 질투와 증오, 가식과 오만 등 인간의 본성, 때로는 우리도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것 같은 본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느낌. 그렇기에 세기의 대작 1300페이지를 읽어냈다는 성취감에도 불구하고 읽고난 후가 편하게 혹은 개운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세명의 형제들. 저자가 ‘나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막내 알료사 (알렉세이 표도로비치)는 그야말로 완벽한 듯한 사람이다. 사제의 길을 가다가 조시마 장로의 죽음 이후 다시 세상으로 나오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신뢰하는 완벽한 사람처럼 묘사된다. 다혈질에 호색한이고 아버지와의 악화된 관계로 인하여 나중에 부친 살해 누명까지 쓰게되는 드미뜨리, 그러나 그는 결국 한 여자에게 정착한다. 가장 인텔리요, 그렇기에 자존심도 강하고 타협하길 싫어하는 둘째 이반. 그는 자신의 내면에 형 못지 않게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잔인한 마음이 있었음을 깨닫고 몹시 괴로워한다. 어디에선가 이 책을 읽고 세 형제 중에 누가 가장 마음에 드는가를 토론 포인트로 제시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알료사는 누구다 되고 싶어하는 모델인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되기 어려운 인물이다. 드미뜨리와 이반은 닮은 면도 있지만, 드미뜨리가 자신의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편이라면 이반은 그렇지 않고 삯히는 모습을 본다. 책 전체로 보면 이반의 비중이 드미뜨리나 알료사의 비중에 비해 덜하긴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아마도 이반과 비슷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책의 본류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일류사라는 아이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군데군데 이어지는데, 아이들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아름다운 이별의 모습이 그려지는 그 스토리 또한 감동적이다. 또한 상권의 끝부분에 삽입된 유명한 “대심문관”편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훌륭한 스토리이자 많은 신학적인 논의가 들어있어 꼭 기독교인 여부를 떠나 생각해볼 부분이 많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경과 신학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과 식견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아래 내가 인용한 구절들을 보면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생각이 많은 곳에서 드러난다.
1300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기에 왠지 감상도 무지 길게 써야할 것 같지만, 요기까지.
<책속으로>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비록 알당일지라도 우리의 일반적인 결론보다는 한결 순박하고 단순한 일면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P25
“그녀의 순결한 두 눈동자는 마치 면도날처럼 내 영혼을 도려냈지” p 31
“리얼리스트에게는 기적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다” p51
“어떤 면에서는 가장 현대적인 청년, 즉 천성적으로 진리를 갈망하고 그것을 탐구하고 믿으며, 또한 신앙을 갖게 된 후로는 자신의 모든 영적 능력을 다하여 빠른 참여를 갈망하고 빠른 성취를 희망하면서 그 성취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바치려는, 열망에 불타는 정직함으로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P52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가 거기서 비롯되니까요” p 80
“민중들에게는 필설로 다 못하고 꾹 참고 있는 슬픔이 있는데 그것을 가슴속에 묻고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시에 폭발해 버리는 슬픔도 있다” p89
“그러니 당신은 울지 말고 기뻐하시오. 당신의 아이는 하느님의 천사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오.… 당신의 아이는 지금 틀림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면서 당신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있을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울고 있는 거요,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p91
“그러니 위안을 얻으려 하지 말고 우시오. 단지 울 때마다 당신의 아들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내려다보다가 당신의 눈물을 보고 기뻐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알려 드린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당신은 어머니의 위대한 슬픔을 겪게 되겠지만 결국 그것은 고요한 기쁨으로 변하여 그 쓰라린 눈물도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고요한 위안과 진정한 정화의 눈물이 될 겁니다.” P92
“실천적 사랑의 실행으로 말입니다. 이웃을 실천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사랑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신의 존재도, 자기 영혼의 불멸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P103
“알료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결코 자신을 모욕하려 들지 않고, 단지 모욕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욕할 수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p180
“그것은 하나의 똑같은 사다리예요. 저는 가장 낮은 계단에, 형님은 열세 번째 계단의 어느 높은 곳에 있을 뿐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똑같은 부류일 뿐이죠. 맨 아래 계단에 발을 디딘 사람은 어쨌던 반드시 위의 계단으로 올라가게 마련이죠” p194
“형, 한 가지만 더 묻겠어요. 정말로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중 누구는 살 가치가 있고 누구는 그럴 가치가 없다고 결정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걸까요?” p253
“리즈, 우리 장로님께서는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린애 대하듯이 해야 하고, 병원에 입원한 환자처럼 대해야 한다고.” P 380
“내 생각으로는 이별 직전이 서로를 사귀는 데 가장 좋을 것 같아” p402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무엇보다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삶의 의미 이상으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지?’ ‘반드시 그래야죠, 형이 말씀하신 대로 논리 이전에 사랑해야 해요. 반드시 논리 이전에라야만 그 의미를 깨닫게 되죠.’” P404
“내 생각으론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종의 기적이라는 거야. 그분은 신이었다는 말이 맞아. 하지만 우리들은 신이 아니야. 예를 들면 내가 힘겨운 고통에 바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내가 겪는 수준만큼의 고통을 느낄 수는 없는 법이지.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야. 게다가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인정하는 데 아주 인색하거든 (마치 무슨 특권인 양 말이야)” p415
“내말을 들어봐. 고통으로 영원한 조화를 사기 위해 모두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아이들이 어째서 거기에 있어야 하는 거지? 어디 한번 말해 봐?” p428
“그렇다면 이 세상에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는 걸까?” p430
“’어머니, 울지 마세요. 인생은 천국이고 우리들은 모두 천국에 살고 있는데도 우리들이 그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에요. 만일 그것을 알고 싶어하기만 한다면 내일이라도 이 세상에 천국이 이루어질 거예요’ 우리들은 형의 이야기에 모두 놀라고 말았습니다” p504
“과거의 슬픔은 인간의 삶의 위대한 비밀에 의해 조금씩 고요하고 감동적인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화해시키며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진리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p512
“나는 ‘지옥이란 무엇일까’하고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결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p568
“오, 근본적인 요소들, 소위 그의 신앙이 마음속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별안간 하느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자신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었다” p597
“’나는 하느님에게 맞서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세계를 인정하지 못할 뿐’이야’ 알료사는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P599
“그는 조용히 기도를 드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자 거의 기계적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p631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는 그들의 기쁨도 사랑하는 법이니라…’”p632
“’나는 파 한 뿌리를 적선했고, 그래서 이자리에 있는 건데.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단지 파 한 뿌리씩, 단지 조그만 파 한 뿌리씩 적선했던 사람들이란다… 우리가 할 일이 뭘까? 그런데 조용하고 온순한 내 아들아, 너도 오늘 구원의 손길을 뻗는 한 여인에게 파 한 뿌리를 적선했더구나. 이제 시작하거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네 임무를 시작해, 얌전한 내 아들아… 그런데 넌 우리의 태양이 보이니, 그분이 보이냔 말이야?’ ‘ 전 두렵습니다… 감히 쳐다볼 수가 없어요…’” p635
“그순간 ‘그대의 기쁨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대의 그 눈물을 사랑하라…’는 구절이 그의 영혼 속에 울려 퍼졌다.” “’그때 누군가 나의 영혼 속에 찾아왔던 거야.’ 그는 나중에 확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p637
“그러나 대단히 정확한 사람들 혹은 대단히 아둔한 사람들의 결정 속에서 이따금씩, 특히 지금과 비슷한 경우에는 그런 일이 쉽게 벌어지는 법이다” p782
“인간이란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법 아닙니까?”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드미뜨리 표도로비치” p866
“그런데 요즘 정신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시도, 나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정신병을 앓고 있고, 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P1002
“얘야,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절대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아니란다!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말이다!” p1031
“더구나 증거, 특히 물적 증거들은 믿음을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토마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전부터 믿음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지.” P1105
“모든 비극은 바로 거기에 있어. 물론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되지…. 하지만 모두 살아가는 거야. 그것도 환상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말이야. 왜냐하면 고통이 곧 인생이니까. 고통이 없다면 인생에서 어떤 만족을 느끼겠나?” p1115
“언젠가는 착한 일 한번쯤 해야 하잖아.” P1121
그런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된 사랑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복수에 가까운 법이다. P1200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런 자가 어디 그자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어쨌든 그자처럼 살인까지는 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속으로 그자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은 그 파렴치한 놈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홀로 자신의 양심과 마주치게 되었을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체면이란 대체 뭘까? 피를 흘렸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하는 것은 편견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p1205
“우리는 최소한 이 순간만은 착하고 훌륭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서는 비웃지 못할 겁니다. 또한 아름다운 이 추억이 우리를 커다란 악으로부터 지켜줄 겁니다. 그리고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그래, 나는 그때 착하고 용감했으며 명예로운 사람이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겁니다.” P1345
“우리들을 이렇게 아름답고 선한 감정으로 한데 묶어서 영원히 서로가 서로를 잊지 않게 만들어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일류샤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착한 소년이었고, 사랑스러웠으며, 우리 모든 소년들에게 영원히 소중한 소년이었습니다! 우리 영원히 그를 잊지 맙시다! 앞으로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마음에 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기로 합시다!” p1346
“그래, 우린 틀림없이 부활할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 기쁘고 즐거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게 될 거야!” p1348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자못 이 위대한 스승의 정교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사력에 “정말 못 말리는 분이시군요.” 하며. 웃음이 나오곤 한다.
그만큼. 강인한 인상이 머리에 인이 콱! 하며 찍혀지기 때문에 그 박혀버린 통증의 지근거림이 지속되어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경우 아버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어릿광대, 자기기만, 온통 거짓으로 삶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누더기 같은 옷이 마치 그의 삶인 것 같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게 제각기 남의 손을 타며 자라난 세 아들들이 있다.
쾌락과 뜨거운 정열을 쫓는 첫째 드미트리, 너무나 이성적이고 차가운 둘째 이반, 그리고 선의 대명사 순결하고 따뜻한 막내 알료샤 , 이렇게 삼형제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무책임함으로 남에 집에서 키워지다시피 했으며, 이들이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한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와 사건은 숨가쁘게 진행된다.
엉뚱하지만, 단어 이야기를 먼저 나누어 보자.
우리가 숭고하다고 부를 수 있는 단어에는 각각의 가치가 있다.
아버지란 단어에는 물리적으로는 자식을 낳아준 父 그 관계자체이나, 영적으로는 책임감과 사랑이 상호간 소통하며 뭍어나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 단어의 진정성을 물리적인 세계가 진실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세계야 말로 진정한 가치라는 것을 암시하며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세계와의 소통과 거리 먼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에게 삶의 진실은 쾌락이고 기만이고, 거짓이다. 철저하게, 모든 세계는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자기 몸으로는 온통 흐느끼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울지는 않는다.
실패를 반성은 하지만 잘못은 뉘우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무엇보다 믿음과 사랑이 시작되는 가장 초기의 단계, 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먼저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 속에 펼쳐진 무한한 마음의 세계, 그 천국 같기도 하고 지옥 같기도 한 그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우선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경에 나오는 “도마의 의심”이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마음으로 화두를 던진다.
오래 전, 도마와 3년 동안이나 함께했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모든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흘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예수님은 도마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신다.
이ㅡ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세상과 생명까지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던가.
또한 도마와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해서도 이미 죽기 전에 암시 하였던 것이다.
그가 도마에게 다시 나타났을 때, 도마는 순간 의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도무지 믿지 않고 직접 만져보며 확인하길 원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는 이런 믿음이 없는 도마를 책망하신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 고 말씀하신다.
[출처] 성전꽃꽂이.7월11일성전꽃꽂이.의심많은 도마.|작성자 신실
도마의 “믿음” 없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믿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못 말리는 날카로움은 보다 더 깊은 곳을 찌르고 있다.
오ㅡ그는 오래 전부터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간절하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를 믿음이 없도록 만든 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믿어왔던 “善”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것을 믿어왔던 바로 자신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악마의 승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믿음 그 자체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 믿고 있는 내 자신을 비뚤어 버리는 것, 바로 그것이 악마의 계교인 것이다.
사실, 악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선을 추락시키는 최고의 공격 방법이리라.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이야말로 더 잔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말을 통해서 역설한다.
만약, 신이 없다면, 악은 인간이 만들어 냈다는 것 인데 그렇다면, 인간이야말로, 동물보다 더 잔인하고 고약한 모든 악을 마음에 품은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상은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아니, 이런 일이 실제로 자행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고 또 보지 않았는가! 인간은 악하다.
그러나, 알료샤의 말을 통해서 다시 반문한다.
신이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이라면, 최고의 선을 만들어 낸 것도 인간이기에 우리의 마음에는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는 신성함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우리에 마음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고약한 싸움에서, 우리의 가치와 소망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정 곰곰히 추적하고 고민한 것 같다.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작품 후미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명장면들이 마치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드미트리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대 아수라장은 지금까지 그가 말하고자 한 인간의 한계, 모든 선악의 판단을 놓치고 혼란에 빠져버린 인간들의 복잡한 감정을 터트려 버린다.
고통속에 괴로워한 이반의 양심이 법정에서 절망과 함께 고백되어지고, 드미트리의 무죄가 가까워 오는 듯한 절대 절명의 순간, 오ㅡ믿을수 없게도 러시아 최고의 변호사까지 고용해준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테리나는 순간 질투와 자신이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 동안에 믿음을 단 한순간 뒤틀어 무너뜨려 버린다. 그리고 눈물과 절규와 포효 속에서 재판장은 일대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인 것이다. 선과 악을 공유한 인간, 그것이 우리이기에, 아니, 그런 모습조차도 용서 하신 신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선과 악의 싸움에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 그것은 악마의 계교로 한 순간 뒤집어질 수 도 있음을 작가는 쥐어 터트려 버리듯 느끼도록 전하고 있다.
결국,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마음, 곧 그 믿음을 오롯이 인내하고 지켜 낼 때에 위대한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이 준 참된 평안이요, 악의 구속에서 해방시킨 자유라는 것이다.
아울러 열매의 힘은 때론 고통스럽기도 해서 반듯이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삶을 내려놓고 남을 위한 삶으로 방향을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선택한 방법이 우리를 대신해서 오직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해서 이루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유 된 우리는 모두에게 빚진 자가 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하나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떨어져 죽어, 땅에 힘찬 뿌리를 내리며 솟아오른 밀알은, 오직 남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는 기치를 두고 있다.
그 안에는 내 삶에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가치를 깨달았을 때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조시마 장로를 통하여 눈물을 흘리며 대지에 입맞추라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처음부터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거친 마음의 풍랑이 몰아치더라도, 오롯이 끝까지 믿고 나아간다면, 자유함으로 인해서 그 생명의 통로, 축복의 열매가, 내려질 것이고, 내 삶이 생명력이 넘쳐 흐르며, 풍성하고 , 넘치는 사랑의 열매가 나를 둘러 쌓을 것이다.
그것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조시마 장로의 썩어가는 육체의 슬픔과는 다른 내 마음에 나라, 바로 우리 앞에 보이지 않는 천국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에 우리는 영원히 자유함으로 평안할 수 있는 것이고 언제나 소망하며 살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대작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꼭 한번쯤은 읽어봐야 된다는 소리도 종종 듣곤 했다. 하지만 분량 때문인지 손이 잘 안 갔고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 책을 다시 접하고 고생 끝에 다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란 작가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라서 지루할 줄 알았는데 읽는 내내 흥미를 잃을 수 없었다. 비록 너무나 긴 분량으로 진이 빠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그가 죽기 3개월 전에 완성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활동의 정점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껏 이런 장편인 소설을 읽은 적도 없었고 이렇게 깊이 있는 소설도 처음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여러 생각들과 가치들이 제시되는데, 그 하나하나가 깊게 생각해 볼 주제들이었고 작가는 이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 모티브는 ‘친부살해’이다. 현대에 와서도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를 19세기 도스토예프스키는 중심 소재로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 ‘친부살인’이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라는 점은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4명의 형제들은 각각의 인물을 형성하고 있다. 드미뜨리는 가장 러시아적인 남성상으로 가지고 있으며 불안정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고상하고 젠틀한 것 같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의 추악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 또한 이를 감추거나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이반은 이성적인 인물상으로 모든 일에 합리적인 생각을 우선으로 한다. 그는 신앙을 거부하고 무신론의 입장에 서 있다. 신의 존재에 관한 그의 생각이 담겨진 ‘대심문관’이야기는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불합리하고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신앙은 의미 없다고 말한다. 불합리에 대한 그의 답은 인간의 욕구를 현실적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만 분명 교활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작가의 주인공인 셋째, 알료샤가 있다. 그는 신앙적 인물이다. 모든 생각의 뿌리는 신앙으로부터 시작되며 신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재자 역할을 하기 원하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원하지만 그가 생각한 만큼 잘 실현되지는 않는다. 형제 중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이지만 그도 역시 한계를 가진다. 마지막 사생아인 스메르짜꼬프가 있다. 그는 친부살인의 범인으로 이반의 영향을 받는다. 독특한 인물이었고 약간 현실적 느낌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특히 종교적인 인물과 질문들에 관심이 갔다. 소설 중반에 죽게 되지만 이 소설에서 유일한 긍정적 인물인 조시마 장로가 있다. 형식과 외식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중요시 여기는 그의 태도는 많은 감명을 주었다. 특히 수도원 암자에서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기 전 사람들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그의 이야기는 작가가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이념과 사상은 매우 균형잡혀 있고 또한 매우 신앙적이다. 현대의 크리스천인 나에게도 그의 말은 영향력이 있었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 시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지금 교회에서도 조시마 장로의 생각과 행동들은 페라뽄뜨 신부가 그러듯 배척받을 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어르신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순수한 신앙과 양심을 가진 조시마 장로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 지금 시대에도 말이다.
그리고 대심문관 이야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문제에 관해 이렇게 깊게 통찰한 작가는 처음 보았다. 충격적일 정도로 작가는 그 시대의 종교 지배자들을 색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 사람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발상 자체가 매우 흥미롭고 재밌기까지 했다. 그 서사시는 인류의 행복은 무엇을 기본으로 하는가? 에 관한 것 같다. 표면적으로 자유냐? 빵이냐? 라는 이원적인 주제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류의 행복은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그 것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의 대립인 것 같았다. 대심문관의 생각은 빵, 즉 물질로서의 지배와 권력을 통한 지배가 사람의 양심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질문,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망각하게 만들 뿐이다. 물질에 휘둘려서 살고 권력자들의 지배 속에서 아무런 선택과 결정없이 통제된 삶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작가도 서사시 내에서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일과 빵을 선택할 일이 있다면 사람들은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일을 따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가치가 없는 삶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양심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양심의 뜻에 따른다는 말이다. 이는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과 책임을 짊으로써 가능하다. 옳은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아닌 타성에 의한 사람은 그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일일 뿐이다. 그 사람은 과연 자신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대심문관은 다수의 약자와 소수의 강자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이 논리는 너무 결과만 놓고 따진 것 같다. 과연 하늘의 빵을 택한 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을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항상 옳은 결정을 할 수 없으며 물질의 유혹에 항상 의연할 수는 없다. 가끔 천사의 빵을 먹기도 하지만 지상의 빵을 먹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인간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하지만 실패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결정하는 권리, 자유의지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배를 통해 양심을 피하는 것은 편안해 지는 것이 아니다. 잠시 망각할 뿐이다. 그리고 결국에 반드시 그 양심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의 상황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 전날, 백여명의 이단자들을 화형시켰다. 다수의 만족을 위해서, 그리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아니, 이는 강요가 아닌 희생의 집행이다. 대심문관은 성경적 교리로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며 이를 통해 존경을 받고 있다. 예수가 필요치 않을지는 몰라도 예수가 말한 사상은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심문관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지배 사상조차 부정하는 일인 것이다. 사랑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최고 우두머리가 이단을 명분 삼아서 살인을 하는 것이다. 이를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다수의 만족을 위해 소수를 억압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결국 곪아 터지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다. 대심문관은 변화가 가져다 주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썩어가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각각의 이야기와 대화들은 가볍지 않았다.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아도 충분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드미뜨리가 왜 억울함을 뒤로 하고 모든 걸 짊어지고 유배를 떠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형제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수만 가지가 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깊이 인간 영혼의 신비를 파고들어간 작가라고도 말한다. 분명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것을 느꼈다. 소설이란 장르가 단순히 흥미와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닌 근본적 질문에 관해 거부감 없이 스스로 질문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도구라는 생각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