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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 열린책들 세계문학 052
아르까지 스뜨루가츠끼,보리스 스뜨루가츠끼 공저/석영중 역
블루님의 추천으로 헨리 제임스의 <워싱턴스퀘어>를 재미있게 읽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달랐다기 보다는, 문장적으로나 전체 스토리 구조적으로나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개별 문장의 불가해적인 부분은 아마도 번역투의 거친 문장 때문에 문맥을 알아차리가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 같은데, 원문 자체가 애초에 쉽게 번역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을테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내용적으로 뭐가 뭔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가장 먼저 의문이 드는 것은 주인공인 가정교사의 정신이 온전한가 하는 것이다.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고, 액자 바깥의 이야기 도입에서는 더글라스라는 사내가 난로 앞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엄청 무서운 얘기가 있는데 귀신들과 아이들 둘이 연관되어 있으니 무서운 이야기에 나사를 두 번 조여주는 효과가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해달라고 해달라고 하니까, 아 그 얘기는 집 서랍에 글로 되어 있는데, 원하면 그걸 하인에게 가져오게 하겠다고 하고, 다음 날 뻥치고 있네 하던 사람들 일부는 가고 남아있는 액자 바깥 화자에게 그 서랍속에 글을 읽어주는걸로 시작된다. 쓸데없이 프레임 속과 프레임 바깥의 인물은 아무 관련도 없는데 왜 이런 구조를 사용했을까 의문이 들어서 다 읽고 나중에 뒤적뒤적 살펴보니 새로운 사실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이 파트가 무섭다. 그렇다면 이건 스포가 되니까, 일단 뒤로 뺀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아이들의 보호자인 삼촌에게 반한 그녀는 플로라에게도 매료되어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아이의 오빠 마일스가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확신하는데, 따라서 아이를 만나기도 전에 열어보게 된 퇴학통지서는 부당한 것이라는 확신을 그로즈 부인에게서 듣고 싶어한다. 아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자기 식대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마일스가 집에 온 이후에도 그녀에게는 마일스가 순수하고 신선하고 다정한 아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보호자인 삼촌은 가정교사에게 아이들 문제로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처리하는 조건으로 월급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퇴학 건은 가정교사가 가장 먼저 처리해야 일순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들과의 달콤한 관계에 빠져, 그 일을 뒤로 미루는데 아이 역시, 퇴학 건에 대해 새 가정교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낸다. 자신이 맡게 된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퇴학당했었다면 그것도 처음 다루게 되었으니만큼 그로즈 부인에게 아이의 어떤 행동에게서 나쁜 행동을 보았는지 캐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로즈 부인이 본 아이의 나쁜 행동이라는 것도 결국은 엉뚱하게 아이의 순수한 장난기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이후 더욱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더글라스가 미리 예고했던 대로, 집안 구석구석에서 귀신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귀신의 정체는 집에서 일했던 하인 퀸트와 그 하인의 애인이었던 전 가정교사 제셀이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순진하지만 어딘지 불한하고 엉뚱한 가정교사는 그 귀신들이 아무때나 불쑥 불쑥 나타나서는 아이들을 조정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단지 그녀의 생각 속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지만, 귀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을 포함한다. 어린 플로라가 갑자기 없어지자 가정교사는 제셀 귀신의 짓이라 확신하여 연못 건너편 제셀 무덤가에 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하인 퀸트의 생김새를 알지 못했음에도 그의 모습을 그로즈 부인에게 묘사하는 것, 가정교사가 확신하듯 마일스를 조정하던 귀신이 사라지자 마일스가 가정교사의 품안에서 죽는 일 등이 그렇다.
그로즈 부인의 설명에 의하면 퀸트와 제셀은 살아 생전 서로 남녀 관계를 맺어왔는데, 가정교사는 이 관계 자체를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신분이 낮은 퀸트와 제셀이 어울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결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또한 아이들이 한명은 제셀 한명은 퀸트에게 맡겨져 나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죽고 나서 그 아이들을 조정하여 일을 꾸미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가 이전 가정교사와 하인,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를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하인이라는 신분, 그리고 그로즈 부인이 언급한 바람둥이 기질 같은 것으다. 설사 귀신이 되었다 한들 죽어서 어떤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왜 아이들 곁을 배회하면서 악의 기운을 퍼뜨린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이 점에 대해서는 가정교사가 목사의 딸이라는 점, 그래서 악령의 존재를 믿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할 수 있겠으니, 만일 정신착란증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이 자신에게 존경을 품고 착하고 귀엽게 군다는 가정교사의 말과는 달리, 궁극적으로는 가정교사를 보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심리가 그녀의 집착적인 행동을 차차 눈치채면서 거부감이 생겼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반면, 만일 그 귀신들의 존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게서 악령을 떼어놓으려는 것을 방해하는 가정교사를 퀸트와 제셀이 아이들을 조정하여 밀어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스포라고 얘기했던 부분인 액자 바깥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 속의 남자 아이 마일스가 글을 읽어주는 더글라스와 동일인물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일단 마일스와 가정교사의 나이를 따져보니 이야기는 그녀가 스무살이었을 때 이야기이고 그 때 마일스가 채 10살이 안되었다고 하니 둘의 나이 차이가 10살 난다는 것인데, 액자 바깥에서 더글러스가 이야기의 화자와 자신이 10살 차이나는 연상이라고 밝힌다. 또한 액자 바깥의 화자는 그 글을 쓴 가정교사가 자신의 누이의 가정교사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그녀는 가정교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방학때 찾아왔을 때 그녀와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하며 더없이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도 동일인물임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일스는 죽었기 때문에 더글라스가 만일 이야기속의 주인공 마일스라면 더글라스는 귀신이 되는 게 된다. 더글라스가 처음에 엄청나게 무서운 이야기라고 했는데 사실 읽을 때는 가정교사가 뭔가 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이상한 것 말고는 귀신들이 뭐 피를 뚝뚝 흘리며 너잡아먹지 하며 무섭게 묘사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진짜 무서우려면 이야기되지 않은 곳에서 무서움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만일 더글라스가 만일 귀신이라면 이게 진짜 무서운 이유가 된다. 가장 중요한 단서로 액자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이 액자는 가정교사가 누구냐를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더글라스의 존재가 필요없어진다. 더글라스의 역할은 단지 자신이 좋아했던 10세 많은 여인이 자신에게 준 글을 읽어주기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 등장한 난로가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또다른 액자 밖의 화자들이 그렇게 쓸데없이 한 겹 둘러싸고 있을 이유가 없어보인다.
여기까지가 내 생각이고,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발표되면서 더욱 그녀의 (삼촌에 대한) 억압된 욕망과 불안한 심리를 재료로 다각적인 방향으로 해석과 비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수도 없이 많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작품 자체의 모호하고도 불확실한 성격 때문인 것인데, 이러한 방식의 책들이 요즘에야 널리고 널렸지만, 당시에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매우 혁명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식스센스 급의 반전이 가능한 것도 이러한 개척자의 시도가 있어서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공감돼서 퍼온 것이 아니라, 이게 뭔 뜻인가 이렇게 밖에는 번역이 안되는가 의아해서, 영문본을 찾아보려고 표시해둔 곳인데, 영문본PDF는 받아놓고 찾아 보다 말았다. (번역이야 알아서 잘 했겠지 싶은데, 내 머리가 잘 안돌아가는 거 같다)
나의 태도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과시하듯 돌아다녔다. 194/241
그러나 그렇게 돌아다님으로써, 그 아이가 전날 플로라를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아 나를 속이고 우롱함으로써 우리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더욱 공공연히 알리게 되었다. 194/241 (몬소리야 망이 안되자나)
이후 다가올 고뇌를 예고하는 불꽃으로 우리의 흐릿한 눈이 이미 타오르고 있는 광경이 지금도 보이는 듯하므로 205/241
늘 너무 놀란 상태로 지낸다는 것을 이유로 우리 두 사람은 전보다 더 친밀해졌다. 35/241
몇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생생한 모습을 다시 재현할 수 있는 당혹스러운 환영이 나타났다. 41/241 (즉몇년 뒤에 썼다)
내가 본 것을 받아들이는 사이, 마치 주변 모든 광경은 죽음의 빛을 띠고 있는 듯했다. 42/241
애매모호함으로 시작해서 계속되는 명확치 않은 설정들… |
어린 여동생과 오빠가 진짜 애들인지, 어른의 심정을 지닌 늙은 아이들인지도 잘 나타나질 않고, 10살 마일스가 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없으며(억지로 거짓말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주기는 한다), 8살 귀엽고 천사같이 순수한 아이 플로라는 가정교사를 갖고 놀 정도의 지적수준을 갖고있다. |
한쌍의 귀신이 존재를 하는 것인지 아닌지, 귀신이 아이들에게 어느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대충이라도 설명을 해놓질 않았다. |
귀신들이 왜 죽었는지, 생전의 그들의 성격이나 행동들이 어떠했는지도 대충 얘기를 할려다가 만다. |
귀신의 나타남은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잘모르겠다.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것인지, 애들에게 함부로 접근한다든지, 생각의 변화 등을 할려는 시도를 막을 의도인지, 그냥 나타나야했기때문인지 등등 도대체 명확한 것이 없다. |
화자인 가정교사가 플로라는 삼촌에게 보내놓고는 마일스를 구원하겠다고 하면서 한 말이라든가 행동자체도 거의 억지에 가깝게 느껴졌지만 대충 얘기하다가 별안간 마일스가 죽었다는 설정은 도대체가 무슨 의도인지 잘 모르겠다. 마무리의 방법이 너무 단순해서 명작이가 일컫는 것인지, 그 속에 담겨있는 수많은 복선이 독자의 감동을 일으킬 것이기에 좋다는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질 않는다. |
다행이 책두께가 그리 두껍지가 않아 읽는데는 그리 무리가 없었다만, 읽고나서 어찌해석을 해야하는지 약간의 망설임을 주는 책어였던 것 같다. |
마일스가 왜 퇴학을 당했을까, 귀신들은 살아 생전에 무슨 일들을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죽었을까, 애들의 삼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카들을 맏기면서 자신에게는 일절 얘기를 하지말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을 붙여서 가정교사를 들인것일까 등등 이런저런 생각들을 잠시 해보긴 하였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이었는가 보다….. |
책을 읽는 내내 이제는 뭔가 나오겠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가지게 하면서 읽다보니, 어느정도 지나서부터는 살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나중의 결말에 가서는 내가 왜 이책을 읽고있는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이책의 백미는 결국 궁금증의 유발이 아니었는가 한다. |
스티븐 킹은 자신의 책(『죽음의 무도』)에서 셜리 잭슨의『힐 하우스의 유령』과 함께 지난 100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바로 이 헨리 제임스의『나사의 회전』을 꼽는다 ― 동시에 유령의 원형에 관해서라면 친절한 꼬마 유령 캐스퍼를 논의하는 게 더 낫다는 발랄한(!) 단서를 달아두고서. 시골 대저택에 온 가정교사가 유령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심리 공포 소설『나사의 회전』은 다분히 중의적인 동시에 다의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다. 어린애들의 마음이 구부러져 있거나 가정교사의 시력이 좋지 않거나 하다는 건데(제발 두 가지의 경우밖에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 고상한 문장으로 하여금 공포가 공포로서 온전히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비밀은 비밀로 남겨두는 어정쩡한 미학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과정은 ― 두 번쯤 읽으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 쉽게 삼킬 수 있게 만들어진 캡슐 속의 약이 아니라 겉의 캡슐이 부서져 바닥에 모조리 쏟아져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가정교사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대저택의 주인이라는 작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고 게다가 마지막에서 아이는 제 가정교사에게「이 악마 같으니!」― 다른 판본에서는「이 악질아!」라고 ― 하고 소리친다. 가정교사가 헛것을 봤거나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하고 그냥 넘겼으면 좋겠으나 간단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니 실제로『나사의 회전』은 읽고 난 다음이 고생이다.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을 따른다는 칸트의 통찰이나 그와 반대로 현상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려했던 니체를 굳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끝에 가서 아이는 죽음을 맞게 되지 않던가? 또 이야기는 주인공이 아닌 가정교사의 시점에서 철저히 진행되지 않던가? 그러니까 독자 역시 그녀가 보게 되는 것 이상은 볼 수가 없잖은가. 유령이 오직 가정교사에게만 보인다는 점에서는 그녀의 환각에 불과한 것이지만(독자로서 그녀의 정신 상태는 믿기 힘든 점이 많다!) 아이들에게 정말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도 없는 이유다. 물론 시대상과 프로이트를 들어 섹슈얼리티를 언급하면서(막대기와 탑 vs 나뭇조각의 구멍과 호수) 그녀의 성적억압과 욕구의 좌절에서 오는 극도의 환상으로 볼 수는 있다. 그런데 작품 속 유령의 실체감은 상당하다. 이를테면 유령을 빼면 이상한 점이 발견되는 것인데, 더글러스의 긍정적 평가, 본 적이 없는 퀸트에 대한 묘사 등이 그것이다 ― 이것도 다 미친 가정교사의 탓이고 모든 게 다 환상이며 어쩌다 맞아떨어진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우연을 그렇게도 좋아하니)폴 오스터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적확한 답은 없고, 단순하다면 한없이 깔끔하지만 복잡하다고 보면 아주 훌륭하게 공포란 장르에서 가치 있는 시도를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지적 게으름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제임스의 유령(들)>만이 존재함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