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사쓰키. 어제가 아니라 내일을 봐.
-본문 중-
오늘 만난 도서는 묘를 둘러싼 한 가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며 동시에 시대가 변하면서 더 이상 묘에 대한 생각이 과거와 다름을 알려준다. 며느리 사쓰키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일어나는 내용으로 이미 묘자리가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파묘를 해달라고 했다. 이를 두고 사쓰키를 시작으로 시댁 식구들 역시 굳이 묘를 관리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면서 각자의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결혼을 하면 남편 성을 써야만 결혼으로 되고 여성 본인의 성을 그대로 쓰게 되면 동거인으로 된다고 하는 데 소설의 설정인지 아님 정말 일본 사회가 그런지를 모르겠다. 하지만,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어머니 세대와 다르게 시댁의 묘에 묻히지 않고 친정 묘에 또는 파묘를 생각하게 되면서 서서히 관습(?)에서 벗어난다.
등장 인물들은 마쓰오 가문의 시아버지를 시작으로 자식과 그의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이 등장하면서 각각 가지고 있던 고민거리를 풀어낸다. 가장 젋은 세대인 사쓰키의 딸 시호는 결혼을 생각한 남자 친구가 갑자기 결혼 후 남편 성씨를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간파하면서 둘 사이는 서먹거리게 된다. 과거와 달리 여성 역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결혼 후에는 배우자의 성씨를 써야하는 게 이들에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 조상의 묘를 관리하던 분위기에서 이제는 서서히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물론, 전체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생각의 흐름 역시 변하게 되고 소중함이 먼 미래와 과거도 아닌 현재라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다.
성 씨를 두고 둘러싼 이야기 그리고 묘를 두고 일어나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단순히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보단 스스로를 생각 해 본다. 사후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죽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세계다. 그러니 사는 동안 삶을 후회하지 않게 살아가는 게 삶을 대하는 자세임을 느낀 도서다.
가키야 미우, 1959년 생. 일본 메이지대학 문학부를 졸업, 소프트웨어 회사에 발 좀 담갔다가 2005년 <토네이도 걸>로 제27회 소설추리신인상을 거머쥐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2018년엔 <당신의 마음을 정리해 드립니다>로 제12회 게이분도대상 문고대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서성거리며 사색 중>, <이제 이혼합니다>, <대리모 시작했습니다>,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 등 다수의 작품을 썼다.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이 몫이라는 생각을 종종 해왔는데 연이은 친구 장례를 지켜보며 생각이 굳어졌다. 이번 추석 연휴 전후로 불알친구 둘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장례가 있었다. 한 친구의 아버님은 일 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사이좋지 않은 아들에게 꽤나 많은 카드 빚을 남겨 주고 떠나셨고, 다른 친구 어머님은 파킨슨과 치매로 10년이 넘게 아들에게 병수발을 받다가 떠나시며 친구에게 홀가분함과 꽤나 큰 상실감을 동시에 안겨주셨다.
가끔 봉긋한 봉분 예쁜 묫자리를 원하신다며 가족 묘지를 준비해 놓은 이모를 부러워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내 대 이후 누가 돌볼 것인지 염려를 해온 탓에 예사롭게 넘길 책이 아니었다.
작가는 마쓰오 집안과 나카바야시 집안을 통해 ‘대’를 잇는 것의 의미가 현시대에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묫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남성만의 고유 권한이고 쓸고 다듬는 관리의 주체는 여성의 전유물로 확인하면서 남성우월주의 내지는 가부장적 관습, 젠더 문제를 꼬집으며 편견 가득한 사회문화적 폐해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마치 열심히 흔들어 터져 나오는 사이다 같달까.
작가는 가부장적인 남편과는 절대로 묫자리를 같이 쓰고 싶지 않다고 수목장으로 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요시코, 결혼을 앞두고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을 따르고 싶지 않은 시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고수하려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묫자리를 이어받을, 다시 말하면 집안의 대를 이을 장손의 존재를 통해 가부장적인 관습이 우리 정서와 비슷해서 심각해지다가도 재치 있게 돌려 까는 문장에는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그러다 묫지기를 할 수 없는 딸의 존재를 비하하는 시호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오래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외할아버지는 밥상 머리에서는 말도 웃음기도 보여서는 안되고, 딸은 쓰잘대기 없는 가시내로 취급하는 걸쭉한 양반가의 장손이셨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엄마는 집안을 돌보지 않는 전형적인 한량에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삶을 내주었다. 어쩌면 엄마 속내도 사스키와 같지 않을까.
집안의 장손인 사촌 큰형이 제삿날 “나는 교회에 나가요. 이제 저희는 교회식으로 할게요.”라며 폭탄 선언해 버린 날 큰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 일로 난감해 하면서도 크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게 장손이 할 말이냐면서 울그락 불그락 하셨다. 그 뒤 엄마는 혹시나 집안 제사가 쓰나미처럼 우리에게 밀려 올까 신경을 곤두 세웠던 일이 떠올라 족보와 장손에 목숨 거는 한국 문화와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줄곧 실소가 새 나왔다.
38쪽
조상의 위패를 모신 불단이 구청 폐기물 목록 요금 표에 올라 있다며 죽음 이후의 일들에 목을 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 대목에서 조상의 돌보심은 진짜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조상이 돌보셨으면 내 목은 부러지지 않고 온전하지 않았을까? 돌보셔서 살아 있는 거겠지? 암튼 제상을 옮기면 조상님(귀신)이 헷갈려 배를 곪을 거란 말도 안 되는 말이 있는데 나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진짜 귀신에게 밥을 먹이려고 생고생을 해야 하나 싶긴 하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점점 흥미로워 진다.
63쪽
또 부유한 처가 덕인 걸 망각하고 현재를 즐기며 살라고 하는 아키히코의 말에 발끈하는 사스키의 속내는 현실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는데 이게 가슴에 팍하니 와닿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소시민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살기 팍팍한 게 현실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의 안녕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하지 않은가. 에이 괜히 울컥하네.
“엄마의 유언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관습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거기서 벗어날 자유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도 죽고 난 뒤에는 자유로워지고 싶다.” 98쪽
한데 궁금하다. 등장인물의 공통점은 여성들은 모두 남성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근데 왜 살지? 점점 이치로와 요시코, 사토루와 시호, 데쓰야와 마키바의 성대결 구도 같이 느껴진다. 남성의 세계에 갑자기 깃발을 휘날리며 대항하는 여성의 등장에 당황하는 남성을 보여준달까. 그나저나 나는 어느 편에 서서 관망하고 있는 걸까.
"오늘날 유명인이라면 SNS 등에서 비난이나 중상을 받는 것은 예삿일이다. 하지만 덴지로 세대의 대부분이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잘 사용하지 않으니 자신들이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측근들도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입에 발린 말만 하다가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300쪽
출생률이 바닥인 두 나라의 정책 역시 탁상공론이라는 점까지 닮은 현실을 기성세대의 낡은 사고와 고리타분하고 비상식적인 정치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정치가는 늙거나 젊거나 다 그놈이 그놈인 것 같은 게 일본이나 한국이나 매 한가 지구만.
책은 저출생, 고령화, 젠더 등의 사회 문제를 유쾌 상쾌 통쾌하게 담았다. 솔직히 장례 문화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답답하기까지 한데 기성세대의 관습과 문화는 답습이 정답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어제가 아닌 내일을 봐야 한다는 깨달음은 준다. 어차피 유골은 칼슘에 불과하니까. 세대를 막론하고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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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키야 미우 작가라서 읽었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설정에 많이 공감하면서, 숨겨둔 마음이 책 속에서나 풀어내자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표현하는 문장들에 속이 시원해지곤 했다. 평소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어왔기에, 이번 작품도 별 의미 없이 좋아하는 작가니까 읽었는데, 나 이 부분 보면서 빵 터졌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돌아가시기 석 달 전부터 계속 말했어. 죽음의 문턱에서도 내 손을 잡고 말이야. 두 손으로 꼭 잡았다고, 꽉 말이지. 마지막 힘을 쥐어짠 거야. 쉰 목소리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묘에 넣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하고 말이지.” (51페이지)
와아, 나는 우리 엄마가 언제 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신 건가 싶어서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우리 엄마가 평소에 막, 자주 얘기하던 건데, 소설 속에서 듣고 보니 이거 우리 엄마만의 이야기는 아닌 건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가족의 선산이 있는데도 아버지를 그곳에 모시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는데 한 번도 가본 적 없었고, 누군가 관리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언젠가는 그 선산을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질 텐데, 그때 만약 이장을 해야 한다면 우리가 감당하기도 어려웠던 터라,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여기던 때에 바로 시립추모공원을 알아보고 다녔다. 그리 어려운 절차는 아니었기에, 바로 화장하고 시립추모공원의 자연장으로 모셨다. 간단하게 생각했는데(실제로 절차는 간단했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버지만 모시면 되니까 1인용으로 하려고 했는데, 언젠가 엄마도 돌아가실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2인용으로 하자고 제부가 그러더라. 나는 반대했다. 평소 엄마의 간절한 바람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무덤에 자기를 넣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그런 마음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라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새로운 가족의 생각을 처음 들었고, 남들은 다 그렇게 한다고 하는 또 다른 발견을 했다고 해야 하나. 암튼 1인용은 너무 작았고, 엄마가 아버지와 같은 묫자리에 들어가고 말고는 나중에 결정해도 되니 일단 2인용으로 하자고 결론이 났다. 그렇게 7~8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엄마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어느 곳에 모실지 요즘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 엄마는 무덤도 만들지 말고, 납골당도 필요 없고, 그냥 어디에 훨훨 날아가게 뿌려달라고 하시던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편의 3남매는 고민에 빠졌다. 시어머니의 유언을 시누이가 꺼냈고, 당연하게 아버지 가문의 묘에 같이 들어갈 거로 여겼던 아들들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시누이의 고민은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리고 싶다는 거였고, 아들들은 어머니가 생전에 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적은 없다고 갑자기 그런 말이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정말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이가 좋았던 걸까? 하고 싶은 말 다하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죽은 후에는 자기 마음 하고 싶은 대로 남편 옆이 아니라 혼자 묻히고 싶다고 말했던 건 아닐까? 아들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거였다. 아직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당신 곁에 묻히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원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무게를 시누이가 감당하면서 아버지에게 전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결사반대였다. 멀쩡한 조상의 묫자리를 놔두고 아내를 따로 수목장으로 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타인의 시선만을 생각하는 아버지다.
이럴 수도 있구나. 정말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게, 내 아내가 죽어서도 나와 같은 장소에 있기 싫어했다는 것에 마음이 쏠리는데, 이 아버지라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만 신경 쓰고 있었다. 절대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며 더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빨리 결정해야 이 장례를 끝낼 텐데, 자식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내고 있지만 무엇 하나 분명하게 결정할 수가 없다. 게다가 어머니의 수목장 유언은 이제 어머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우리 살아가는 동안 변할 세상의 많은 것이 이 소설 속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면서 사회적인 문제로 커지고, 그 안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것을 선택하게 한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하다. 장례문화도 그렇지만, 조상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조상이 죽은 후의 그들을 기리는 방식도 비슷하다. 한 가지 다른 것은 결혼하고 여자가 남자의 성으로 바뀌는 문화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가지고 혼인 신고를 하면 되지만, 일본은 혼인 신고를 하면서 하나의 성을 선택해야 한다. 남편이 아내의 성으로 할 건지, 아내가 남편의 성으로 할 건지 선택하면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내가 남편의 성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만약 각자의 성을 그대로 가지고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냥 사실혼 정도로 가능하다고. 사실 비슷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다른 부분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조상을 모시는 분위기도 우리나라의 무슨 종친 문화를 보는 것 같았다. 조상의 묘에 시들지 않게 계속 꽃을 꽂아두어야 하는 일, 비어 있는 고택을 청소하는 일, 장남이 아니면 분가하여 살면서 조상의 묫자리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일 등 우리나라의 가부장 문화와 닮았지만 묘하게 다르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 문화의 공통점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 정도?
이 소설에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수목장 유언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지만, 이 문제는 묘지 문제에서 시작되어 저출생, 고령화 문제까지 다룬다. 조상을 모셔야 한다고 묘지를 만들고 그것을 관리하는 문제는 명확하게 구분하고 형제들과 나눠서 감당하지 않는다. 주지 스님에게 시보를 하고 정기적으로 절에 돈을 내지만, 그 비용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곤 한다. 아들이 대를 이어 이 문화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우기지만, 정작 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결혼하면서 성을 결정하는 문제의 이면에는 이런 부분도 포함된다. 대를 이어 조상을 모시고 조상의 묫자리를 관리하는 일 말이다. 이게 쉬운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걸 강요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누군가와의 결혼을 망설이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세대들의 문제는 그들만의 일이 아니고, 조상과 부모님에게서 연결되는 문제였다. 아내가 이런 일을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그런 사고방식은 상대방이 이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현실적인 문제 그대로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시원했다. 말로 열 번 해 봤자 듣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을 문제였다. 자기 형편에 무리하게 돈을 들여 조상을 모시는 일이 내가 감당해야 할 노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소설 속 남자 어르신들이 이해하셨을까 싶다. 아들이 없는 집도 있고, 아들이 있다고 해도 이 문화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거절하는 경우도 있을 거고, 딸들만 있다고 해서 부모를 모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거기에 저출생으로 줄어드는 인구는 이렇게 조상을 모시는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고, 묘를 유지하는 게 감당하지 못할 현실적인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묘가 의미 없어지는 건 이제 시간문제가 될 테고,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도 같은 문제로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소설 속 사쓰키의 말처럼, 파묘만이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언제나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을 기억할 만한 물건 하나쯤 간직할 수도 있는 일. 그거면 된 거 아닐까? 눈앞에 보이는 화려하고 커다란 묫자리 같은 거 말고 말이다.
엄마가 정말 자기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아무 곳이나 가능한 곳에 뿌려주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했는데. 아무 곳에서 뿌리는 건 불법이기도 하다고 해서, 나는 그냥 엄마를 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씩 찾아갈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이왕이면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고,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면 더 좋겠다. 죽어서도 아버지 옆은 싫다고 하셨으니, 적당히 좋은 자리를 찾아봐야겠다. 죽어서라도 마음은 편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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