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 한마디
[2024년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피부가 파랗게 되는 ‘블루 멜라닌‘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주인공. 가족의 품에서도 교묘한 차별을 받았던 그가 피부색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그려냈다. 우리 안의 편견과 혐오를 목격하게 하는 작품. 심사위원단 전원의 지지를 받은 수상작. - 소설/시 PD 김유리
나도 사람이지만 가끔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섭다. 어떤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고 괴롭히고 따돌리는 것일까? 그걸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때론 어른보다 더 잔인하다. 나도 한때는 성선설을 믿은 사람이지만, 요즘은 잘 모르겠다. 원래 악 하게 태어난 아이들을 교육을 통해 선하게 하는 건 아닌지. 양심이라든가 배려라든가. 더불어 사는 것을 교육을 통해 지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재일은 파란 피부의 아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냉대와 이웃의 멸시. 학교에서는 아바타, 스머프, 도라에몽, 똥남아 튀기로 불린다. 그나마 재일이 견딜 수 있는 건 강직한 성격의 어머니 덕분.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던 날 윗집 부부가 재일을 보고 쑥덕거릴 때 어머니는 고함을 지르며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미국 이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생과 베트남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자 재일은 상심한다. 외롭고 험난한 미국 생활. 그나마 재일에게 버틸 수 있게 힘을 주는 사람들. 매사 불평불만인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준 강우 삼촌과 고등학교에서 만난 클로이, 셀마. 강우 삼촌은 재일에게 ‘제이’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주고 미국 생활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한다. 클로이는 백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파란 피부의 아이. 셀마는 ‘칭챙총’이라는 인종차별 발언하는 교사에게 직언한다. 셋은 청소년기 아이들이 그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재일에게 평온한 시간은 오래 지속 되지 않는다. 미네소타로 이사간 클로이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이로 인해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다. 클로이가 당한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재일. 심지어 강우 삼촌도 불의의 사건을 겪게 되는데...
이 피부색은 나를 계급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보낸다. 다수에 속해 있음이 정상성을 정의하는 세상에서 내 피부는 확연한 비정상이었다. 장애를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24)
네 파란색 자체는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지. 하지만 삐뚤어진 너는 위협이 돼.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너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모두에게 위협이 될 거야. (112)
사람들은 선한 얼굴로 살을 벤다. (195)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나는 인종에 대한 차별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만약 내가 다른 나라에서 자랐다면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왜 나와 다른 사람에게 혐오를 느끼고 차별을 하게 되는 것일까? 다르다는 의미가 틀리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우리 안의 어떤 감정이 싫다는 감정을 내보이는 것일까? 어릴 때는 나와 다른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호기심 어린 눈빛이 그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 조차 몰랐으니까.
평등한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평등한 세상이긴 할까?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 다양한 계급이 존재하는 세상. 그게 돈이 될 수 있기도 하고,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외모가 될 수도 있는 세상. 피부색에 의해 가장 낮은 단계의 계급에 속한 아이.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오로지 한국 사람으로 자랄 수 없고, 피부색에 의해 더 낮은 계급으로 전락해 누구보다 외로운 아이. 한국보다는 나은 삶을 생각하고 이민을 가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도 피부색이 남다른 재일에게 평등하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더 외롭고 힘들어진 재일이지만, 또 그렇게 성장한다. 하지만 이렇다 할 정답은 없다. 재일은 여전히 외로울 수 있고, 계속해서 편견과 싸워야할 지 모른다. 다름에 대해, 편견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성별, 세대, 인종, 국가, 종교로 분류된 인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을 작가의 깊은 시선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파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가정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살펴보게 된다. 더불어 학교라는 사회적 집단에서 교사가 파란 피부를 가진 학생을 평등하게 대우하였는지도 밀착해서 관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스쿨버스에서 차별을 받는 주인공은 그것을 피하고자 일부러 걸어가게 되지만 집단 폭력을 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된다.
성별로 분류되는 사회, 인종으로 분류된 사회, 국가로 분류되고 정치적 취향으로 분류될수록 사회는 대립과 마찰음이 구석구석에서 번져나기 시작한다. 작고 큰 마찰음들이 폭력과 영혼에까지 깊은 상처를 오랜 시간 남긴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다양한 사연들을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이는 젊은 여성이며, 어떤 이는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이들의 죽음은 살해라는 방식으로 참혹한 결과로 다양하게 남겨진 이들에게 그리움을 남기게 된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다시 되돌리지 못하기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가 지금 무엇을 노력하여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소설로 남는다.
연대가 아닌 고립의 방식으로 분류된 수많은 인간들을 보게 하는 소설이다. 차별과 계급화로 분열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확대경으로 주인공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깨우기 시작한다. 수직적 사회를 수평적 사회로 연대하는 힘이 왜 필요한지 차분히 하나씩 자극을 주는 소설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수직적 사회를 수평적 사회로 이끌어야 하는 이유를 확인하게 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귀 기울이게 된다.
누가 무엇을 위해 이 사회에 차별과 계급화를 구축하였는지부터 차분히 인지할수록 극소수가 구축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인류의 문제들을 일본의 관동대학살과 난징대학살,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중국의 티베트학살, 미얀마의 로힝야족학살, 수단의 다르푸르학살과 연결해서 고찰하게 된다. 참전한 군인이 고통을 잊고자 마약을 하게 되는 악순환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로 접근하면서 영혼이 고장난 참전 군인의 참상을 이 소설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면도날』,『카시지』, 『도둑신부』,『눈먼 암살자』,『반쪼가리 자작』,『태고의 시간들』, 『낮의 집 밤의 집』 등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소설을 통해서 전쟁의 참상과 참전 군인들이 어떻게 영혼이 파괴되는지 고발한다. 군사 보복과 억지 명분으로 아이들과 여성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것은 결코 정당성을 잃게 된다.
이 소설에서도 전쟁과 다름없는 차별과 편견의 방식으로 미성년이 어떻게 혹독하게 살아갔는지 주인공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파란 피부를 가진 아들에게 발언하는 폭언과 차별, 도망간 베트남 엄마가 아들에게 "잘 지내니?"라고 한국어로 물었을 때 "잘 모르겠어요."라고 영어로 말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대답한 이유를 가볍게 지나치지 못하게 된다. 모국어를 버리고 생존을 위해 선택한 영어가 무심결에 나올 정도로 이 아이는 얼마나 혹독한 환경에서 치열하게 버티고 있었는지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건들에 파란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자로 지목되고 교회의 교인들조차 아이를 보호하기는커녕 산불을 낸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교리와도 일치하지 못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아버지도 교회생활과 집에서의 생활은 매우 다른 삶을 보여준다. 교회에서 보이는 교인의 삶과 집에서의 그의 삶은 아주 이질적이다. 아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졌을지도 짐작하게 되는 작품이다.
낙인찍힌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혹독한 삶인지 소설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파란 피부는 질기고도 잔인한 방식으로 차별과 편견 속으로 가두어 버린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길들여진 이러한 차별과 편견들이 무엇인지도 차분히 떠올려보게 한다. 남녀 차별, 종교적 차별, 인종 차별, 출생지역 차별 등이 존재한다. 계략적으로 구획된 수많은 분류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무임승차권을 가진 집단인지 부당한 차별과 편견에 무수히 피해를 보는 민족인지도 고찰하게 된다. 아시안인이라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경험하게 되는 무수히 많은 인종차별에 우리들도 파란 피부를 가진 주인공과 다름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파란 피부는 곧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로 존재하며 언제든지 당할 수 있는 무차별적인 의혹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파란 피부를 가진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보게 해준다. 수직적 사회가 아닌 수평적 사회가 대안이며, 고립이 아닌 연대로 힘을 주는 사회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희망적인 사회이며 세계라는 것을 이 소설과 작가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문학은 힘을 준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존재한다. 암담한 사회이지만 그래도 다시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고자 주변을 살피게 한다. 하나의 따스함, 하나의 보살핌, 하나의 관심이 이 사회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거라고 믿게 한다. 트럼프, 박근혜, 이명박 등이 언급되는 만큼 정치역사도 함께 언급되는 소설이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가하는 폭행에 대해서도 언급되는 작품이다. 데이트 폭행, 가정폭력에 무력하게 익숙해지는 여자가 없어야 하는 이유도 소설의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베트남 엄마가 미국 이민에 합류하지 않았던 이유도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아내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언급하였지만 무시하는 남편의 태도에 처음으로 자신이 찾는 꿈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가는 베트남 엄마의 모습도 함께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으로 남는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곳에 속할 수 있는 현자가 아니었다.
나는 개인이었다. 작고 어린 파란색이었다.
나는 더 이상 백인을 우러르지도,
흑인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선망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인간을 무채색으로 만들고 나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일터와 인간관계의 지친 사람들,
애국심과 규율로 무장한 벙크에
숨어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291
제29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심사위원 전원 압도적 지지!
차별과 멸시 속에서 마주한 세계의 비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자란다.
"나는 이름 대신 몇 가지 별명으로 불렸다. 보통 아바타, 스머프, 도라에몽 중 하나였다. ‘똥남아’ 혹은 튀기라고 불리기도 했다. 때로는 그 둘을 합해 ‘똥남아 튀기’라고 불렸다. 줄여서 ‘똥튀기’라고 불릴 때도 있었고 ‘파란 똥튀기’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그냥 똥이라고도 했다. 그런 말들은 마음 깊은 곳까지 나를 찔렀다.
라는 문장은 그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며, 차별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 줍니다.
이 소설은 한 소년의 고통을 넘어 차별과 혐오의 구조가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 조명합니다. 클로이라는 소녀의 죽음을 통해 소년이 직면한 세상의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잔인한지 드러납니다.
"휴대전화를 꺼내 클로이 일리야,라고 적어 뉴스를 검색했다. 몇 개 되지 않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단어들이 점처럼 눈에 들어왔다. 파란 피부, 살해, 용의자, 체포, 카니발리즘. 기사를 아래로 내리자 웃고 있는 클로이의 사진이 나왔다. "
파란 피부, 살해, 카니발리즘, SNS의 잔인한 글들을 통해 재일을 둘러싼 세상의 잔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차별과 멸시의 세상은 재일을 끊임없이 억압하며 그를 고립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차별과 혐오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어떻게 이러 일이..."라는 재일이 질문처럼 멜라닌은 소수자의 고통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고통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구조를 비판합니다.
이 소설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차별은 피부색에 국한되지 않고, 훨씬 넓고 깊게 퍼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전히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차별은 계속될 것입니다.
멜라닌은 우리에게 차별과 혐오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경고하며, 우리가 그러한 구조를 깨부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나부터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