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삶의 다른 모습들이다. 다양한 소설에서 삶의 형태를 마주하고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우리가 느끼는 모습과 다른 새로움을 배운다. 소설은 작가의 경험을 나타내기도 하고, 경험과는 상관없는 상상력의 산물만으로 쓰기도 한다.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을 쓰는 일. 소설이 가진 힘이다.
여덟 편의 소설은 마치 한 편의 장편처럼 이어졌다가 달랐다가 비슷했다. 작가가 지향하는 방향에 가까워졌다고 해야겠다. 아이와 이십 대 청년, 사십 대의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미래의 삶을 예견해볼 수 있다. 기후 위기의 피해와 전쟁, 은퇴,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들이었다.
「쓰게 될 것」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는데, 폭탄이 떨어지는 장소와 가까운 곳에서 혼자 남아 있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할머니의 죽음을 흙처럼 작아져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전쟁은 끝이 없다.’는 문장이 있다. 이거야말로 현재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두려웠다. 문장 하나에도 우리는 현재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살아야 한다면 사는 게 낫다.’ 무의미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매일 밤 삶을 선택한다. 할머니에게도 총이 있었을까? 전쟁을 세 번이나 겪는 동안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전쟁 속에서도 서로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신이었다. 그리고 나의 신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던 사람들. 자주 상상한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을. 내가 죽어야만 누군가가 살 수 있는 상황을. 새벽마다 거울 앞에서 연습한다. 거울 속의 나는 나를 겨눈다. (39페이지, 「쓰게 될 것」 중에서)
「디너코스」는 회갑을 맞이한 가족이 나온다. 이십 대의 오나영, 대학생 오민영, 명예퇴직한 아버지 오석진, 출판일을 그만두고 도배기능사 자격증을 딴 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은근한 보람을 느끼는 어머니 김영선이 대화한다.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달랐던 식당 선택에서부터 친구 건물에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바리스타로 일하겠다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각자의 말은 우리 현실을 대변한다. 돈 때문에 비혼을 선택한 오나영은 부모의 경제적 상황에 모르는 편을 택했다. 가족일수록 더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고 여기나 가까운 관계이기에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거다.
「ㅊㅅㄹ」을 보자. 남편을 사랑하지만 부족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게 나았다. 어느 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친구인 줄 알고 잘못 보낸 메시지였다. 영어캠프에서 만난 아이를 좋아한다는 고백을 친구에게 하고 있었다. 자기는 유시진이 아니라고, 윤서진이라고 밝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은율은 ‘1’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서야 모르는 사람과 채팅은 위험하다는 말을 보내는데, 서진은 ‘사랑’의 사전적 정의를 찾다가 ‘윤서진 사전’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온 게 ‘최진영 사전’인 것 같다. 최진영 사전 엽서가 책 속에 수록되어있다. 최진영 작가가 생각하는 사전적 정의는 하나의 선물이었다. 출간하는 책마다 엽서 하나씩 들어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되지 않을까.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기억 속의 ‘집’과 관련된 이야기 「홈 스위트 홈」은 엄마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폐가를 고치며 남은 삶을 살겠다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과 반대로 주인공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과거를 기억하듯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하는 말에서 짙은 슬픔이 느껴진다. 고통과 두려움을 넘어 슬픔이 가득한 감정들. 엄마는 딸을 이해할 수 없고, 살아갈 날들을 모두 기억할 주인공의 미래는 기억될 수 있을까.
때로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치열하게 살 필요도 없으면 목매고 있던 물건 또한 아무 필요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좋아하는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좋다.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쓰면 될 일이다. 쓰게 될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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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밀리의 서재에서 읽게 된 <쓰게 될 것>입니다. 최진영 작가의 책으로는 처음 만나는 책입니다. 전자책이라서인지 아니면 작가의 작품들의 전반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빠르게 읽었다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이 작품집에서는 표제작 ‘쓰게 될 것’을 비롯하여 모두 8편의 작품을 담았습니다.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이들 작품들은 2020년부터 2023년 사이에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작품들이 발표된 매체는 물론 작품을 쓰는데 영감을 얻은 원천을 밝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쓰게 될 것’의 경우는 우크라이나 여성 스베틀라나씨가 2022년 2월 24일부터 4월 26일까지 쓴 일기를 전재한 시사IN의 ‘유모차 밀던 자리에 폭탄이 떨어져도’와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올가 그레벤니크의 <전쟁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암으로 진단받고 투병하는 과정을 적은 ‘홈 스위트 홈’은 개인적으로도 읽으면서 큰 관심이 생겼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조한진희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비롯하여 역시 시사IN의 기획 ‘죽음의 미래’와 ‘엔드게임: 생이 끝나갈 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어디이며 등장인물이 누구이던 간에 8작품 모두 작가의 시선으로 본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다는 생각에 자전적인 글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쓰게 될 것’에 나오는 “나의 일기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살아야 한다면 사는 게 낫다.’ 무의미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39쪽)”는 대목은 여러 갈래로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전제가 필요하지 않는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하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네 속담에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책을 읽어가면서 표시를 해둔 작품도 ‘홈 스위트 홈’입니다. 첫 번째 표시해놓은 대목은 “아픈 사람일수록 생활이 편리하고 큰 병원이 가까이 있는 도시에 살아야 한다.(807쪽)”입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직장도 병원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필요한 진료를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표시해둔 대목은 수술과 항암치료가 종료된 후 1년이 지나지 않아 재발, 그리고 2차 재발이 되면서 등장인물과 가족은 상황이 어렵게 될 수 있다고 하는 3차 재발에 대하여 언급을 피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라는 검은 구멍이 한 발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한 발 뒤에도, 한발 옆에도. 죽음은 두려웠다. 그통에 짓눌릴 때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내가 피하려고 하는 것이 고통인지 죽음인지 알 수 없었다. (…)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내가 좀더 낮은 확률에 속할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믿음이 필요했다. 회복, 차도, 건강에 대한 염원, 기적을 바라는 기도, 나의 상태를 나타내는 숫자 바깥에 있고 싶었다.(773쪽)”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숫자 바깥에 있고 싶었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저 역시 18개월 전에 암수술을 받고 추적관찰을 하고 있는 중인데 재발을 감사하는 검사를 매월 받아가면서 검사값에 일희일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검사값이 떨어지면 기뻤다가 다시 올라가면 두려움이 생기곤 합니다. 아직은 위험 수위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경계할만한 수위에 올라와 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 소유정은 작품해설에서 최진영의 <쓰게 될 것>에 실려있는 여덟편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작가에게 미래란 알 수 없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지금과는 달리 바꾸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반드시 만나게 될 미래를 위해 불안을 딛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모두 지난 일이다. 그리고 反復될 일이다. 나는 이제 그것을 理解한다. '理解한다'는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태어나면서 世上을 받아들이듯. 그러므로 싸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의 할머니는 戰爭을 세 番 겪었다. 첫 戰爭은 할머니가 어린아이였을 때 일어났다. 歷史는 그것을 鎭壓이라고 記錄했다. 鎭壓當하는 사람에게는 戰爭과 다를 바 없었다. 할머니의 엄마가 할머니를 살렸다고 한다. 감추고, 警告하고, 부둥켜안으며 이 苦難에는 끝이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正말 끝이 났기 때문에 할머니는 希望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할머니가 어른이 되었을 때 모두가 틀림없이 戰爭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할머니에게는 지켜야 할 자식이 다섯 있었다. 할머니는 어릴 때 배운 것처럼 감추고, 警告 하고, 부둥켜안으며 希望을 나누었다. 섭이, 필이, 은이는 죽고 곤이와 홍이는 살았다. 戰爭이 끝났을 때 할머니는 神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貴하고 所重한 우리 섭이, 필이, 은이를 잘 보살펴달라고 祈禱하기 爲해서. 더는 나이 들지 않기에 永永 보살핌이 必要한 세 子息을 神에게 暫時 맡긴 거라고 믿었다.
세 番째 戰爭이 일어났을 때 할머니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언젠가는 끝날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戰爭 속으로 堂堂히 걸어 들어가 物件을 팔고 飮食을 求하면 消息을 傳해 들었다. 그러다가 神에게 맡겨둔 子息들을 되찾으러 떠났다. 그토록 詛呪하던 人間을 벗어던진 것이다. 기다리던 버스에 마침내 오르는 사람처럼 未練도 後悔도 없는 表情으로 죽었다고, 나의 엄마 홍이는 回想했다. 當時 엄마는 서른세 살이었고 나는 일곱 살이었다. 그때 나에게 죽음이란 숨바꼭질처럼 언젠가 끝날 놀이였다. 다시 만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에 숨었든 내가 찾아낼 거야. 찾지 못해도 어딘가에는 있겠지. 못 찾겠다고 외치면 슬쩍 나타나 나를 놀려대겠지. 아무리 기다려도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 멀리 숨으면 反則인 걸 알면서. 젊은 사람들, 아이가 있는 사람들, 現金이나 寶石을 가진 사람들, 다른 地域에 家族이나 知人이 있어 居處를 付託할 수 있는 사람들부터 동네를 떠났다. 平生을 한곳에서 살아온 老人들과 몸이 不便한 사람들,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남았다. 처음에는 엄마도 떠나고 싶어 했다. 곤이 三寸이 살고 있는 首都에 가려고 했다. 할머니는 남겠다고 했다. 앞서 두 번 戰爭을 겪을 때도 할머니는 집을 버린 적이 없었다. 엄마는 할머니를 두고 떠나기를 망설였다. 할머니가 죽은 뒤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엄마는 집을 지켰다. 할머니의 집. 엄마가 오 랫동안 살다가 떠났던 집. 나를 안고 돌아간 집. 이제는 記憶에만 存在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
처음 接하는 최진영 作家의 作品입니다. 좋은 作品 찬찬히 읽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