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서 저 별로 '이사'하는 이야기
<아무튼, 디지몬>을 읽고
“찾아라 드래곤볼, 세상에서 제일 스릴있는 비밀을! 찾아내자 드래곤볼, 세상에서 제일 유쾌한 기적!”으로 시작되는 만화영화 『드래곤볼』의 주제곡은 지난 유년 시절의 한 페이지를 펼쳐 보이는 마법의 주문과 같다. 누구나 기억 속에 어릴 적 인상 깊게 본 에니메이션 한 편쯤은 저장하고 있지 않을까. SF소설 『천 개의 파랑』을 쓴 천선란 작가는 『디지몬 어드벤처』를 그러한 작품으로 손꼽는다. 밀레니엄버그(Y2K) 현상으로 촉발된 불안한 기운이 감돌던 1999년에 영화계에서는 세기말의 어수선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매트릭스』가 등장하였고, 이듬해 국내에서는 『디지몬 어드벤처』가 방영되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작가와 달리 고3 수험생이었던 나는 여러 면에서 다른 작품들과 닮아 보여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를테면 “찾아라 비밀의 열쇠, 미로같이 얽힌 모험들!”로 시작되는 오프닝 송은 『드래곤볼』의 그것과 비슷하게 들렸고, 제목에서부터 포켓몬의 향기가 날 뿐 아니라 대표 캐릭터인 디지몬의 생김새마저 포켓몬의 파이리와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에게 <아무튼, 디지몬>은 하마터면 포켓몬의 아류작 정도로 기억될 뻔한 디지몬 이야기에 심폐소생술을 시전하여 또 하나의 다채로운 세계를 재발견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이제야 뒤늦게 디지몬 세계의 문지방을 넘어서려는 나와 살짝 어깨를 마주쳐 지나가며 말한다. 이 책은 ‘디지몬 세대’인 자신을 살린 디지털 세계와 이별하는 이야기이자 어린 시절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라고.
현실 세계에서 가상의 디지털 세계로 갑작스레 내던져진 ‘선택받은 아이들’이 파트너 디지몬들을 만나 악의 축에 선 디지몬들과 맞서는 과정 속에서 저마다 성장과 변화의 가치를 깨닫는다는 서사의 줄기는, 회를 거듭하면서 밝혀지는 아이들의 과거와 이들이 선택된 이유 등이 가지로 뻗어나가며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재미를 더한다. 특히 현실 세계의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디지털 세계에도 데이터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어 디지몬은 데이터를 모아 몸집을 키우는 이른바 ‘진화’를 한다는 설정이 눈길을 끈다. 이는 디지몬에게 육체적인 부담을 주므로 평소에는 성장기의 모습을 유지하다가 힘이 필요한 순간에만 파트너의 디지바이스(진화를 시켜주는 게 아니라 특성에 맞게 진화를 하도록 유도하는 기계라고 한다)로부터 일시적으로 힘을 얻어 진화하는데, 이때 디지몬과 아이가 어떤 마음을 갖는지에 따라 진화의 방향도 달라져 ‘바이러스’ 또는 ‘백신’ 타입이 된다는 점 또한 퍽 흥미롭다.
저자는 이러한 세계관을 담아낸 『디지몬 어드벤처』가 줄곧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외로움에 둘러싸여 불안의 나날들을 보낸 유년의 ‘각색’이자 유일한 도피처라고 고백한다. 답답한 여기 말고 저 너머에 다른 차원이 존재함을 알려줬고, 언젠가 그곳으로 가게 되기를 희망하게 만들었다고.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진화했다가 되돌아오는 디지몬을 보면서 마음에 안들거나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때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였다. ‘괜찮아, 다시 진화(進化)하면 돼(46쪽).’라며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의 한 마디는 자신의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진화(瞋火)하는 주문처럼 들린다. 아울러 삶은 전쟁터가 아니기에 무작정 버티고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로부터 도망(85쪽)’쳐 그저 꿋꿋하게 ‘있는’ 나로 존재하면 그것으로도 삶의 의미가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가수 선우정아가 부른 「도망가자」를 그가 부른다면 이렇지 않을까. “(텔레비전 앞에 앉기만 하면)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디지몬)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너의 맘이 편할 수 있는 곳(디지털 세계) 그게 어디든지 얘기 해줘.”
차마 그 세계로 갈 수 없다면 현실 세계에서라도 디지몬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던 스물한 살의 그에게 자신이 돌봐야 할 디지몬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치 완전체로 진화하여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모든 데이터를 소진한 뒤 성장기로 되돌아간 디지몬처럼, 혼탁한 세상에서 저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모든 힘을 다 써버리고 유아기로 돌아간 듯한 디지몬, 그를 통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한 저자가 어쩌면 디지몬 파트너인 동시에 디지몬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삶의 현장에서 도망가야 할 때를 알아차려 몸집을 줄이면서도, 자기만의 디지몬 옆에서는 온 힘을 다해 커져 기꺼이 그를 돌보기 때문이다. 과연 이 디지몬은 누구일까, 궁금한 독자는 디지몬 도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아무튼, 디지몬>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여러 디지몬 가운데 아포카리몬은 디지몬 세계의 마지막 빌런이자 아포칼립스,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캐릭터라고 한다. 저자의 첫 장편소설이 아포칼립스를 주제로 쓰여진 점만 보더라도 디지몬 세계관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그를 포함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해도 모든 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들이 매 순간 일어나는 곳이다. 인간은 그 한계를 인정해서인지 아니면 인정할 수 없어서 그 대안으로 디지털 세계를 만든 게 아닐까, 물론 그곳에서도 언제든 오류가 발생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통제 가능하며 그것을 전제 혹은 목표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닐까, 이십여 년 전 『디지몬 어드벤처』가 나왔을 때와 비교해 오늘날은 말 그대로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세상임을 떠올려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한 세상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거나 아니면 이미 사라지고 다른 세상이 펼쳐졌음에도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어른이 된’ 선택받은 아이들이 십 년 만에 파트너몬과 함께 겪은 마지막 모험을 다룬 극장판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에서, 그들이 디지털 세계를 다시 구한 후 마침내 돌아온 곳은 당연하게도 현실 세계이다. 디지몬 월드를 동경하던 어린이에서 자기만의 SF 월드를 창조한 어른이 되기까지 저자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도망치고 싶을 만큼 고단한 시간이 찾아올 때도 있겠으나, 현재의 그는 과거보다 덜 울고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이유도 많이 찾아내었을 것이다. 그동안 아픔과 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삶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경험들을 쌓으며 자신만의 진화를 거듭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고쳐 쓰고 싶다. 이 책은 저자가 디지몬 세계와 이별(離別)하는 게 아니라 그 세계관을 백업하여 또 다른 세계로 이사(移徙)하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라고. 나처럼 아직까지 작가의 작품을 만난 적이 없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그가 다지고 쌓아 올린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