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를 쓰는 일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것은 필요하다. 문학의 역할 중 하나로 생각한다. 문학, 예술을 통해서 시대를 읽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마는 일들, 시의성 있는 소설로 우리는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정신의 ‘소설, 잇다’의 첫 번째 백신애, 최진영의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현대 여성 작가가 이어 쓰는 형식을 지녔다. 근대와 현대라는 시대 차이를 생각하면 어떻게 이어 쓸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백신애의 단편을 읽고 그런 의문은 사라졌다.
시대가 지나도 여전한 우리 사회의 문제(여성을 향한 차별적 시선, 폭력, 부당한 대우, 가부장제)는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글픈 현실이다. 우선 백신애(1908~1939)가 쓴 세 편의 단편을 보자. 1938년 발표한 「광인수기」부터 「혼명에서」, 유작인 「아름다운 노을」까지 주인공 여성의 삶은 시대상을 반영하다.
열일곱 살에 혼례를 치른 「광인수기」의 ‘나’의 남편은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고 시누이와 시어머니와 살게 된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그들에게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남편은 편지를 보내고 대학교를 그만두고 남편이 돌아오자 시댁으로 들어온다.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주의자’에 빠져 맘 고생을 시키고 나중에는 바람까지 피우고 ‘나’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어느 누구 자신의 말을 들어줄 이가 없는 ‘나’가 하느님께 고하는 독백 형식의 이야기.
나를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 내가 모두 팔자로 돌리고 좋으나 궂으나 좋다고만 하니까 아주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이지,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 (「광인수기」, 17쪽)
당시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백신애가 대단하다. 어디 소설뿐이었을까. 모든 잘못은 아내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흔했던 시대. 그러니 이혼 후 돌아온 「혼명에서」 속 ‘나’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나’는 아플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혼이 뭐 대수라고 말이다. 그런 ‘나’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한 이가 있었으니 우연하게 만난 ‘S’였다. 운명처럼 세 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나’는 건강을 회복하고 먼 앞날을 검토하라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돌아온 건 ‘S’의 사망 소식이다. 소설에서 ‘나’와 ‘S’가 연애 감정을 지녔거나 호감을 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분명 사랑이다.
당신은 살아서 나에게 ‘힘’을 가르쳐주었으면 죽어서 나에게 희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혼명에서」, 107쪽)
백신애의 단편 중 가장 아름답고 여운을 남긴 건 「아름다운 노을」이다. 남편이 죽고 아들 하나를 둔 삼십 대 여성 ‘순희’는 재혼을 해야만 했다. 시집의 대는 아들이 잇고 재혼으로 친정의 자산을 받기 위해서다. 의사인 재혼 상대는 순희의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그의 동생 ‘정규’를 본다. 자신이 원했던 이상향의 모습, 그림을 그리는 순희가 절실하게 원했던 모습이다.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화폭에 그릴 수 있는 얼굴. 단지 모델로 반한 거라고 다짐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순희를 향한 정규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의 감정은 진정 사랑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뤄지는 건 불가능하다. 아들보다 세 살 많은 정규를 어찌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최진영이 이어 쓴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은 백신애의 「아름다운 노을」 변주한 소설이다. 이혼 후 십 대 딸을 키우는 사십 대 ‘순희’와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십 대 여성 ‘정규’의 이야기. 소설은 화자인 ‘나’ 정규의 불안으로 시작된다. 여자 혼자 일하는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 귀갓길의 위험,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여성이 조심해야 할 문제가 아닌 범죄.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불안. 그 안에서 사랑은 가능할까. 최진영은 순희와 정규를 통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정규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순희를 처음 만났다. 여학생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이 있냐고 묻는 순희에게 정규는 본 적이 있지만 없다고 말한다. 그 뒤 정규가 일하는 펍에서 순희를 다시 만난다. 자연스럽게 친해진 둘은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과 고민을 나눈다. 비 오는 날 달리기를 좋아하는 일, 퇴근하고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걷는 일.
따뜻한 바람이 우리 뺨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다가갈 것이다. 오래오래 바라볼 것이다. 정성을 다해서 내 마음을 전할 것이다. 당신이 빗속을 달릴 때 나도 그 빗속에 있어요. 어딘가에서 나도 당신처럼 혼자 달리고 있어요. 홀로 달리고 있는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요. 심심하고 외로운 당신이 그 사실을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229쪽)
더 나은 쪽을 향하여 시대가 변한다고 믿는데 데 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나날이 늘어나고 세상은 혐오와 증오가 가득하다. ‘소설, 잇다’에 참여하고 에세이 「절반의 가능성, 절반의 희망」에서 최진영이 “백 년을 사이에 두고 선생과 나는 같은 생각을 품고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여성을 비롯하여 소수자를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공포”(240쪽)라고 말하는 이 사회가 참으로 갑갑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런 소설을 읽고 응원하고 함께 나가야 한다. 앞으로 여성이 살아갈 시대에는 이런 주제가 아닌 다른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근현대 이야기가 담긴 소설
근대 소설 작가 백신애의
광인 수기, 혼명에서, 아름다운 노을이
현대 소설 작가 최진영의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에세이 절반의 가능성, 절반의 희망이 담겨있다.
백신애, 시작하는 이야기 광인 수기
광인 수기에서는 어린 시절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자와 결혼해 살아온 주인공. 주인공의 넋두리와 푸념 원망으로 시작하는 글의 빠른 전개가 빠져들게 만들었다. 결혼과 시작된 아내의 삶, 동경으로 유학 간 남편을 기다리며 홀로 이겨낸 며느리의 삶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은 사상운동을 한다고 겉돌고, 주인공은 염려되어 우연히 나선 길에서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해요. 주인공은 미쳐버리게 만드는 세상에 분노를 불륜 현장에 쏟아 내지만, 주인공의 아픔, 일련의 과정은 묵인된 채 결국 억울하게 병원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게 된다.
"세상에다 자아를 자랑하고만 싶은 허영을 버리세요. 세상은 으레 욕하고 시기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의 성미를 다 맞춰 주려면 결국 당신 자체는 가치 없는 하나 흙무덤으로 그치고 말 뿐입니다. 도리어 세상을 내 성미에 맞도록 만드세요!" 83
두 번째 이야기 혼명에서
근대 시기에 이혼한 여성이 돌아온 가정은 마음 기댈 곳 없는 불편한 곳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이혼한 집안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해 이혼하고 돌아온 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나는 답답하고 어머니는 눈물로 지새는 날이 계속되자 주인공은 정처 없이 기차표를 끊고 떠나려 했던 길에서 동지들을 만난다. 그 친구들은 나에게 왜 그렇게 울고 지쳐있고 힘들게 있는지,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그러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며 위로와 조언을 구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찾아간다. 그 힘이 되는 조언을 건넨 S' S를 향한 마음에 이겨내고 그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다.
작가 사후에 발표된 아름다운 노을
이야기의 주인공 여성 순희가 아들 또래의 청소년 정규에게 연모의 감정을 느끼고 고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변에 말에 이끌려 만나게 된 의사와 그의 동생인 정규, 그러나 감정이 정규에게로 향하고, 정규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주인공은 고민하게 된다.
최진영,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현대 소설이 시작되니 반갑기도 했고 최근 읽은 편의점 소설이 기억나는 배경이라 친근했다. 주인공은 평일과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하는 20대 취준생이다. 어느 날 딸의 친구를 찾는 다며 방문한 손님 순희에게 눈길이 갔고. 이야기를 나누다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편의점에서 주인공 정규가 일하는 펍에서 2차례 만나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나이차가 제법 있지만 가까워지는 두 사람. 정규는 순희의 나이에는 삶이 어떤지 궁금하고 순희를 기다리게 된다.
정말 오랜만에 읽게 된 근현대 소설. 정말 오랜만의 근대 소설이라 반갑고 신기했다.
첫 광인 수기를 시작하며 고전을 읽는 듯한 문체와 빠른 전개로 쉽게 빠져들었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시작된 주인공의 이야기는 궁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다양한 감정을 표현했다. 각각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다른 감정이지만 다양한 삶 속에서 겪었을 법한 상황, 번뇌하는 삶을 담았달까?!
작가는 다르지만 이야기가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 비슷한 감성을 경험하기도 했다. 짧은 소설이지만 마음속 깊은 감정을 나타내고 혼돈을 헤매는 과정과 삶이 시대적 배경과 함께 그려져 재미있기도 했고, 현대의 어두운 면과 아픔을 담고 있어서 안타깝기도 했다.
YES 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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