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떠한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브 엔슬러는 45년에 걸쳐 써온 글들을 주제별로 묶어 한 권의 책을 냈어요. 이 책에는 이브 엔슬러의 인생을 이끌어 온 사유가 담겨 있어요. 저자는 상실과 모순에 관한 사유와 슬픔에 관한 사유, 애도도 되지 못하고 나누어지지 못한, 소화되지 못한 슬픔이 너무나 많다고, 그래서 이 책은 '어떤 슬픔의 형상'이라고 표현했어요. 혼돈과 폭력, 어린 시절의 구타와 강간이 남긴 기억 상실, 파편화된 지성이라는 균열을 넘어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발견했던 '나'는 글쓰기가 하나의 생존 방식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갑자기 번쩍 번개가 치듯이, 머릿속에 '폭력'과 '기억 상실'이 터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과거 어느 시점에 어린 '나'는 끔찍하고 비참했던 경험을 기억에서 지우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마저 잊고 싶었다는 걸 떠올리고 말았어요. 십대 시절에 일기장을 채워가며 아픈 마음을 위로했지만 점점 글을 쓰는 것이 두려워졌던 이유도, 그건 발가벗겨진 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겁쟁이였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수많은 비극들을 목격하면서 아픔과 슬픔은 살아 있는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브 엔슬러의 깊게 뻗어나간 사유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트라우마의 시대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고, 왜 이브 엔슬러가 V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네요. 저자의 말처럼 저 역시 이야기의 힘, 이름이 가진 힘을 믿어요. 진득하게 쌓여 있던 고통들이 기억들을 통해 드러날 때,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그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걸 V가 알려줬네요.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는 V의 회고록이자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슬픔과 희망의 사유이기에 읽을 수밖에 없었네요.
"사유는 대체 무엇이며 지금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할까?
사유의 과정은 기억하기, 인식하기, 책임지기의 행위를 수반한다.
눈앞에 있으나 우리가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수치심을 기꺼이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
사유는 개인과 집단의 책임과 그 둘이 언제,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결정한다.
진정한 사유에는 실수와 잘못, 악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필요하다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일까지도 뒤따른다.
지난 45년간 나는 수많은 글과 일기를 썼다.
내게는 까만 글씨 위에 에스프레소 자국이 짙게 남은 종이 한 무더기가 있다.
모놀로그, 연극, 기사, 에세이, 우화, 연설문, 시, 불평들이다.
코로나19는 내게 그간 써온 글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내 일생의 천착과 호기심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사유에 관한 책 한 권이 되었다."
(20p)
왜 글을 쓰는가?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쓰고 누군가는 취미로 끄적인다. 아무리 혼자 쓰는 일기라도 목적 없는 글은 없다.
이브 엔슬러는 글을 쓰면서 자신을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해 분노하고 연대하고 단합했다. 이 책은 고발이자 고백이며 끝내는 사랑이었다.
저자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폭행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철저히 방관자였다. 가부장제 아래 집안의 모든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책에는 고통 받고 있는 여성들의 증언이 담겨 있다.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가 이제는 여성의 몸을 관통하고 있다. 아직도 이런 문제가 끊임없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p.158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대량 강간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콜탄이 묻혀 있어요. 콜탄은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광물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여성들이 유린당하고 살해되고 있는 거예요.
읽는 내내 울컥했고 많이 부끄러웠다. 내 행복에만 매몰되어 세상을 외면한 것 같아서. 아픔을 가진 자만이 깊은 상처를 알아보는 것일까.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글과 강연으로, 연극와 영화로 널리 알리고 있었다.
p.151
바로 잊히는 것,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그들이 겪은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그저 귀 기울이기만해도 그들은 큰 위안을 얻었다. 아주 작은 친절이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복수도 아니고 진정한 사과다. 사과란 가해자가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달라지겠다는 의지다. 피해자중 사과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 저자 또한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결국 사과를 받지 못했다.
여자이기에 더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도 많았고, 애도 되지 못한 슬픔에 가슴 저리기도 했다. 이브 엔슬러가 45년간 써온 글쓰기엔 확실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해방되고 구원되었듯이 그들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지지하고 있다.
카프카가 말한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은 바로 이런 책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의미있는 책이다.
#도서협찬 #그들의슬픔을껴안을수밖에 #이브엔슬러 #푸른숲 #에세이 #사유 #여성 #해방 #치유 #책리뷰 #책추천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당신도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기를
함께 분노하고 구역해질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