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편견 하나, 주머니[pocket]
주머니(pocket)가 성차별의 상징이라고?
요새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고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실 요즘 나오는 남자 와이셔츠도 주머니가 없어지는 추세이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주머니가 성차별의 상징이라는 얘기는 서양의 얘기다. 중세까지만 해도 서양에서는 옷에 주머니가 붙어 있지 않고, 남자는 허리띠에 가깝게 주머니를 차고, 여자는 주머니를 다리 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형태로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남성들이 참여한 전쟁과 스포츠 같은 활동을 염두에 두고 남자 옷이 몸의 움직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전과 달리 통으로 된 치마 형태에서 두 다리를 따라 감싸는 ‘바지’의 등장이 이를 상징한다. 16세기에 이르면 남자 옷은 바지 안쪽에 주머니가 부착되는 방식, 구체적으로 다양한 물건을 넣고 꺼낼 수 있도록 바지와 재킷 곳곳에 주머니를 붙이는 형태로 진화했다. 반면에 여자 옷은 치마 안쪽에 천 주머니를 매다는 방식을 취했다. 19세기에 여성의 드레스 패션이 바뀌면서 치마 안쪽에 주머니를 매달 공간이 사라지고, 대신 여성 핸드백의 효시라고 불리는 레티큘(reticule)이 등장했다.
이러한 의상의 변화 과정에서 주머니는 남성의 실용성과 호기심의 상징처럼 묘사되기 시작했고,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않는 한 주머니를 가질 수 없었다. 이는 주머니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 사회의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사고방식, 여자를 전통적인 위치에 묶어두려는 태도가 여자의 옷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 중략 ~
주머니가 없는 여자의 옷은 여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게 주머니 문제의 핵심이다.
친애하는 슐츠(Schulz)씨
20세기 미국 최고의 인기 만화가 찰스 슐츠(Charles Schulz, 1922~2000, 이하 ‘슐츠’)가 자신의 만화 <피너츠(Peanuts)>를 통해 편견을 깨왔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의 <피너츠>는 인종분리 정책이 합법이었던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했고, 따라서 한 동네에 사는 아이들을 다루는 만화에 백인들만 등장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헤리엇 글릭먼(Harriet Glickman, 1926~2020)의 호소에 응답, 흑인 아이 프랭클린 암스트롱(Franklin Armstrong, 이하 ‘프랭클린’)이 등장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를 ‘토큰 블랙(token black)1)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흑인을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나 범죄자로 묘사하던 당시를 감안하면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장면에 흑인 아이가 끼어 있게 되면 훗날 흑인 아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날이 온다 해도 이를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흑인이 여분의 캐릭터로 등장할 때는 대개 교도소 같은 불행한 상황입니다. 흑인들이 평범하게 생활하고 사랑하고 걱정하고 호텔이나 회사 건물의 로비에 들어가는 모습,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는 풍경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화와 TV, 잡지, 만화 같은 업계에서 이렇게 묘사하는 습관은 교활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즉, 슐츠는 프랭클린이라는 여분의 캐릭터를 통해 백인의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흑인은 수영을 하지 못한다’와 같은 인종에 따른 편견을 자연스럽게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교조화된 PC(Political Correctness) 주의처럼 노골적으로 ‘편견 극복’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작지만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이는 <이솝 우화>에 실린 ‘해와 바람’ 이야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나그네의 겉옷을 벗긴 것은 따사로운 햇살을 비추기만 했던 해라는 것을.
슐츠는 인종문제만 아니라 남녀문제에도 관여했는데, <피너츠>에서 가장 운동을 잘하는 ‘페퍼민트 패티(Peppermint Patty)’라는 여자아이를 통해 여자아이들의 스포츠 활동을 자연스럽게 지지했다. 심지어 테니스 스타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 1943~ )이 제안한 여성 스포츠 재단의 이사를 수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 슐츠는 자기 남편의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여성들이 불평을 하고 법안 통과를 촉구했기 때문이지, 남성들이 준 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본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이 말했듯이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니까.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어크로스’로부터 무료로 도서(가제본)를 받았습니다
특성화고, 일반고, 과학고를 다 거친 한 고등학교 교사는 일반고 학생들의 생기부가 짧은 이유를, ‘결핍의 덫’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넉넉한 환경의 학생들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실력으로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고, 그럴 때마다 격려를 받는다. 그러면서 인정에 익숙해지면서 자신감을 갖게 된다고 한다. 그런 기회 없이 자라는 학생들은 자신감 없이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저 ‘노~력’을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란 얘기다.
이런 얘기도 있다.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이혼 후 소송에서, 이미 조니 뎁이 앰버 허드를 폭행했던 것이 영국에서의 재판에서 결정이 났는데도, 결국은 앰버 허드는 소시오패스가 되고 더 많은 금액을 조니 뎁에게 지불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했다는 얘기다. 어떤 스테레오타입을 가정해놓고, 그에 위배되면 실제로는 상관없는 일에서까지 인정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빈부의 격차가 단지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 흑인들은 운전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 중국계는 물론 한국계가 미국에서 차별을 받는다는 것, 여성들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등등. 우리는 알고 있다. 편견을 나쁜 것이며, 차별 없이 함께 사는 사회가 좋다는 것 말이다.
물론 노골적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논외다. 그들은 이런 책이나 여기의 내용을 차분하게, 심각하게 읽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읽더라도 한마디로 무시할 것이다. 그러나 차별과 편견을 옳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은 어떤가? 여기서 우리가 비폭력의 상징처럼 여기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글을 읽어본다.
“선의는 있지만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악의를 가지고 있으면서 완전히 착각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좌절감을 줍니다.
미온적인 수용은 노골적인 거부보다 더 당황스럽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왜 옳은지, 왜 잘못된 것이 그른 것인지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알고 있더라도 행동은 그렇게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번엔 미국에서 장애인 이동권 쟁취에 혁혁한 역할을 한 주디 휴먼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같은 장애인들에게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했고, 장관 대변인에게는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좀 그만하혔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는 것은 아닐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주로 미국에서 소재를 찾고 있지만, 이를 우리 사회에 적용하는 데는 단계가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우리도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며, 우리가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은 매우 아픈 질문들이고, 대답하는 데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아니 형식적인 대답은 쉬울지 모르지만, 진짜 대답은 어려운 질문들이다. 해결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해결의 단초도 찾을 수 있다. 찰리 브라운 만화에 흑인 소년 암스트롱을 넣은 슐츠라든가, 체조 선수 바일스, 테니스 선수 오사카 나오미, 트렁크에 들어가 신인 배우에게 조언한 배우 케이트 윈슬릿, 전문가로서 자존심을 지킨 데이비드 케이 박사 같은 이들이 그것을 보여준 이들이다.
우리는 알고 있지만, 모르고 있다. 그러나 낡은 관습과 편견을 치워버리면 보다 넓고 다양한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진짜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내가 올해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마음 속에 남을 최고의 책 중 하나다.
캐스터 세메냐는 AIS(안드로겐 불감성 증후군)로 정상남성 XY핵형을 가지고 있으나 남성호르몬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고 외형적으로 여성의 특징이 나타나는 여성이다. 그가 가진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은 무감증후군으로 체력 경기력을 높여주는 남성호르몬의 덕을 보지 못한다.
경기 규칙:여자의 외양을 가지고 있어도 테스토르스테론의 양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여자 선수와 경쟁할 수 없다.
이 규칙은 400m 800m 1,600m에만 측정하기로 한다. 이 규칙은 세메냐를 겨냥한 것으로 선수 자신이 평생 살아온 몸의 호르몬을 강제로 떨어뜨리는 약을 6개월간 복용해야만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규칙은 세메냐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받아야 할 불평등은 아닐까.
찰스 슐츠는 우리에게 <스누피>로 익숙한 <피너츠>를 그린 만화가이다. 책 제목 <친애하는 슐츠 씨>는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일화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오래된 편견과 그를 넘어서고자 한, 넘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박상현 저자는 '당연'이 아닌 '왜 그런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어느새 인류의 오래된 습관으로 자리 잡은 편견을 바꾸는 이들의 행보를 전하고 있다. 일상에서 편견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따르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부터 시작되었다.
오래된 습관으로 자리 잡은 편견을 부수기 위한 사람들의 결단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금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무언가가 누군가에게는 큰 차별이고 편견이자 폭력일 수 있겠다는 자각에 흠칫 놀랐다. 이런 개개인의 깨달음이 모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화시키고 행동의 방향을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하게 할 것이다.
<친애하는 슐츠 씨>가 던진 흥미로운 화두로 감았던 눈을 뜨고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놀라운 경험이 펼쳐졌다. 가제본으로 책의 모든 내용을 살펴볼 수 없었지만, 인류의 오래된 습관들 중 '개인적 습관'을 넘어 '사회적 관습'으로, '문화'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차별을 겪는 이들의 목소리에 사회가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연대의 움직임이 꿈틀 된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흑인 인권 신장에 힘쓴 마틴 루서 킹이나 장애인 인권을 부르짖은 주디 휴먼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쉽지 않다.
박상현 저자는 슐츠 씨와 아니 브릭스 씨의 사례를 들어 사회 변화에 동의하고 그 과정에 동참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 아니라 아주 상식적인 결정이라 말한다. 아주 오래되고 차별적인 사고방식을 깨닫고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
친애하는 슐츠 씨가 해리엇 글릭먼 씨의 부탁에 귀 기울여 흑인 아이 '프랭클린 암스트롱' 캐릭터를 그린 것처럼,
테니스 스타 빌리 진 킹 씨가 요청한 여성 스포츠 재단 이사 자리를 기쁘게 수락하고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엄청 열심히, 경쟁적으로 하는 여자아이들' 캐릭터(특히 페퍼민트 패티)를 그린 것처럼,
기이한 이유로 여성의 등록 자체를 금지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캐서린 스위처가 첫 공식 여성 완주자가 될 수 있도록 변칙 참가를 도운 브릭스 코치처럼.
변화는 동참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더 빠를 것이기에 <친애하는 슐츠 씨>를 통해 이 시대의 슐츠 씨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오래된 습관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경청하고 수용하며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끈다. 무지에서, 외면에서 비롯된 습관에서 벗어나는 선택의 손을 내밀고 있다. 주저 말고 덥석 손을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