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은 행복을 진화생물학적 접근으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전제하에 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알아보고 행복의 정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에게 행복이란 생존(혹은 번식)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합니다. 철학적인 접근으로 다가가는 행복의 정의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일 수 있겠네요.
책에서는 행복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재밌는 예시를 듭니다. 서핑을 하는 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에게 서핑을 하도록 훈련시키며 새우깡이라는 유인책을 사용하게 되는데요. 개는 새우깡을 얻기 위해서 서핑을 계속 하게 되고 결국 그 새우깡을 먹으려다가 서핑을 할 줄 아는 개가 됩니다. 저자는 인간에게 행복은 새우깡과 비슷한 것이라고 설명합나다. 인간 역시 쾌감을 얻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며 그 쾌감이 행복감이라는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이 생존할 수 있도록 행복이라는 물질을 뇌에서 합성해내는데 그것이 주는 쾌감때문에 인간은 계속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장소는 우리의 뇌로 매우 원시적인 것이어서 음식과 사람에 반응이 크다고 합니다. 생물학적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음식을 함께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뜻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 가치있는 삶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라면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필요한 경험적 요소로써 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행복에 대한 흥미로운 접근이 매우 기억에 남는 책, <행복의 기원>은 과학도서의 냄새가 나는 인문도서로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행복에 대한 관념적 생각이 오히려 명쾌하게 가벼워질 수도 있으니까요.
♪ I AM
핵심적인 개념은 ‘공유된 이해shared understanding’다. 생각, 가치, 규범이나 행동 방식에 대한 문화 구성원 간의 암묵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가 서로 구축된다. (156)
+ 축구에 비유하자면 외향성은 개인기와 같고, 문화는 팀의 특성이자 분위기라고 한다. 축구하면 침대축구, 다시 한국 정치로 무한 루프 띠 발;; 앞 장에서 사람과 성격person ality이 강조되었는데 문화도 ‘사람이다.’
프랑스 축구선수, 할 만하다. 아니, 무슨 일을 하며 살든 이런 사회가 행복해지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곳이다. 개인의 가치와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고 수용하는 문화... 한 개인을 영웅시하는 서구의 상징물이 전통적인 이슬람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개인을 높이 세우는 문화가 있는 반면, 그를 눕혀 트럭에 싣고 나가는 문화도 있다. (158)
+ 지단의 박치기 퇴장이 동상을 낳았다. 혈육에 대한 인종차별 모욕이 심리전에 말려들게 했다. 팀이 전력 손실로 경기는 패했지만 프랑스인들은 이를 달리 평가한다. 이런 돌풍은 카타르 월드컵에선 철퇴 명령이 떨어진다. ‘문화(적 정서) 차이’의 일례이다.
한일 ‘동맹’을 놓고 국회의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갈라치기 혐오 정치와 친일 매국노들이 기득권을 쥐고 정국을 흔든다. 대통 등 인상 비평을 해야 하는 피곤함과 기사받아쓰기를 기사받아‘치기’(자판 치기라는)로 정보 업자들로 기자들이 욕 먹는다. 엠비에 이어 이게 나라냐! 2탄 ㅜㅜ
한국, 일본과 함께 다른 아시아의 신흥 경제국들도 행복 부진 그룹에 포함된다...
이처럼 개인과 집단의 뜻이 정면충돌할 때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느냐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문화의 핵심적인 차이다...
집단이 개인에게 때로 과도한 요구를 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은 철없고 이기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문화는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이다...
소득수준이 높은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도, 사실은 상당 부분 돈 때문이 아니라 유복한 국가에서 피어나는 개인주의적 문화 덕분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성향을 통계적으로 제거하면, 국가 소득과 행복의 관계가 거의 소멸된다. ◎즉 개인주의는 국가의 경제 수준과 행복을 이어 주는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
우선, 심리적 자유감이다...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씨앗은 개인의 자유감이 높은 토양에서 쉽게 싹을 틔운다... 우리나라의 집단주의적 문화에는..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도 이 덕분이다. 위기와 어려움에 대처하기에 적합한 구조다.
◎하지만 만성적인 긴장과 피로가 수반된다.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일상의 많은 것들이 옆으로 자유롭게 흩어져 있는 모양이 아니라 서열에 의해 위아래로 세워져 있는 식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단주의 문화는 사람에 묻혀 사는 문화다... 중요한 것이 무조건 좋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에 대한 반응이 민감하고 강렬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음식만큼 중요한 생존 자원이기에 이에 대한 감정적 반응 역시 강력하다. 그리고 음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양날의 검과 같은 속성이 있다... 즉, 사람은 가장 절대적인 행복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159-163)
+ 한국, 일본. 싱가포르도 소득수준은 높지만 정서가 메마른 국가로 나온다. 맞다, 우리의 촛불항쟁을 부러워했던 잘 사는 나라에서. 떨어져 내려 회복할 수 없는 박스에 갇힐까봐 아는 국민은 노심초사다.
저자는 오마이 갓. 박문호 쌤은 오마이 사이언스. 미국과 프랑스. 한국과 일본의 차이에 나오는 탄식이다. 문화가 수직적인 관계가 행복 예측을 어렵게 한다. 경제와 소득 성장은 개인주의 인정과 함께 가야 하는데 후자가 푹 꺼지면서 우뚝 서지 못하고 있다.
사실 엑스세대의 개인주의 덕을 쥴리가 누렸다. 유산을 언급하며 러브레터로 공개석상을 얼룩지어도 국민은 봐주었다. 개사과를 해도 쿨하게 넘긴 결과가 민주주의 시스템을 위해 하는 공동 정부를 방치하고 말았다.
집단주의적 문화의 ‘일장일단’이 쓰리다. 권위주의형 서열 위계를 강화하며 층층시하 (먹이)사슬 구조를 양산하는 단점이 있다. 장점인 십시일반 보태는 응집력과 추진력을 한 번 더 발휘할 수 있을까. 나는 흐린 날도 비 내리는 날도 좋아한다. 오늘도 후두둑 떨어지는 비 사이로 실컷 걸었다. 돌아와 이걸 쓰자니 다시 마음이 어둡다..
귀 닫고 입만 비대한 입벌구 정권이 집권 중이다. 수직적인 문화에서 모두가 부품part으로 축소 도구화된다. 우리는 복숭아 알레르기에 반응하는가, 아니면 겨우 양말 색 취향 문제에 감정을 일으키는가. 문화 교양 성숙도. 이슈를 선점하는 저널리스트처럼 어디에 반응하고 버튼이 켜지는지 살펴야 한다. 양치기 소년이 되거나 키우지 않도록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자유감과 타인중심적 사고가 특히 관련이 있다... 우선 개인의 자유감. 개인주의 국가들이 높은 행복을 누리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집단의 응집력과 통일성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이 부분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
위기에 대처하기에는 좋은 전략이지만, 평소에는 뭉치면 피곤하고 흩어지면 자유로운 경우가 더 많다. / 그러나 조직이 그 단단한 위계를 유지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모두 하나가 되어 규격화된 행동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다양한 취향, 가치와 감정 들은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결과적으로 자유감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런 모습은 회식 문화에 그치지 않는다. 매사에 무엇이 맞고 틀린지에 대한 정답이 정해져 있다... 이렇게 우리는 평생 정답을 찾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하나로 수렴되는 생각을 하는 데 익숙해지고, 정답에서 벗어난 가치와 행동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느낀다...
실제로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일수록 왼손잡이의 비율이 낮다. 부모들이 왼손잡이 아이들을 후천적 오른손잡이로 바꿔 놓기 때문이다.
이런 획일적인 사고는 행복에 큰 타격을 준다. 마치 행복에도 정답이 있고, 이는 몇 가지 잣대로 압축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좋은 대학 간판, 대기업 명함, 높은 연봉. 이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인생은 왠지 ‘행복 시험’에서 낙제한 것 같은, 그래서 불행한 삶이라는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 문화의 이런 획일적인 사고는 개인의 자유감을 저하시키고, 더 나아가 행복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문화적 분위기가 심리적 자유감을 무조건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결정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에 얼마나 신경을 쓰며 사느냐다.
물론 사회의 일원으로 살며 타인의 평가와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나침판이 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164-166)
+ 개인의 자유 추구는 평소에, 대조적으로 타인중심적 사고는 위기에 힘을 발휘한다. 이 둘이 적절히 균형 잡힌 상태가 이상적이지 않을까. 두 가지를 티피오에 맞춰 꺼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어떤 맛taste을 좋아하나 생각해보았다. 간략하다. 베이직 기본 충실. 양념이나 소스나 향신료 등을 속에서 잘 받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부터 식성이 먹는 양상이 성격을 함축한다고 뇌피셜을 부려 왔고 틀리지 않았으면 싶다.
어쩌다 자유하면 굥산품, 굥산주의가 연상되느냐 말이다. G자유만 어퍼컷 날리고 신난 대통에 물린다, 질린다, 지친다so sick. 회식 문화 얘기할 때 먹고 마시고 노랫가락 뽑는 누가 생각나서 쯧쯧쯧. 2024 ‘동물농장’ Loon Suck. 자기가 말하는 게 정답이라는 우격다짐과 획일적이며 규획적인 불량 사고가 치떨린다. 어떻게 저런 막말을.
내가 운동을 하고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남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나를 위해서 운동도 결혼도 하는 것이다.
“물론이지”라고 동의하면서도 우리는 늘 나를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 주고 싶어 하고, 그들로부터 좋다는 승인을 받아야 속이 개운해진다... ○바로 사진 찍기. 이렇게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영혼의 내용물보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얼굴형과 콧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나라는 존재에 미치는 타인의 존재감이 너무도 큰 것이다...
세상을 나의 눈으로 보기보다 남의 눈을 통해 보려고 한다. 이때부터 행복의 걸림돌들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된다... 우선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대단한 스트레스다. 인간의 뇌는 철저히 사회적인 뇌라고 했다. 생존과 직결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뇌의 최우선적 임무 중 하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과 주의가 자동적으로 집중되고, 집중하는 만큼 피로와 불안도 쉽게 온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To be happy, we must not be too concerned of others.” ... (167-170)
+ 트리어Trier 처치법을 ‘불안 조성 절차’를 꼭 영 부인이 거쳤으면 좋겠다. 국민이 2년 반 넘게 받은 피로와 고통을 되갚아줄 때이다. present 존재감 발광체이면서 그 자신하는 presentation 국민 앞에 하십쇼. 한씨 버금가게 형편없고 ‘안쓰러울’ 게 분명하다. 정리된 언어 구사가 아닌 짜깁기 조합이나 나열하지 않을까. 빈 깡통 소리 요란하려나, 아님 셋 중 그나마 낫다고 자뻑하려나.
미국인 식의 “내가 즐거웠다는데. 무슨 상관.” 남들이 뭐라 하든 여행에 대한 원래의 자기 느낌을 고수한다는데 왜 이리 불안한지. 취임 후 반년과 작년 연말과 신년 걸쳐 반년 칩거. 2년-1년=다달이 나간 셈. 헉! 이만하면 외유 중독 아닌가.
너무 모순적이다. 저렇게 센터 사진전을 하는데 외부의 평가는 자아가 없다로 귀결된다. 외국에선 드레스, 국내에선 호텔 직원 같은 복장도 요상하다. 코리아 전체를 코바나로 보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저리 용쓰는데 외신은 저스트 비 유어셀프나 빨래 건조대라는 표현을 쓴다. 말 그대로 쇼!잉? 주력함에 비해 넘 인기가 없다. 많관부. 어디까지나 디스크라이브, 본 대로 기술이다((유 작가니임 따라하기)).
자기가 보여주려는 대로 보라는데 영 부인이 마니 아프고 행복하지 않음을 지속적으로 인증한다. 자기가 누구누구 선망하고 모방하듯이 다른 이들도 카피 충동(드라이브)에 전염되길 발화한다. 남편 하는 공무에 손 저어가며 지시 하던데 얼마나 기획과 홍보력 있는지 쫌 공개 하시라. 이 엉망진창인 국정 운영과는 무관하것쥬얼ㄹ.
행복은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잣대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누구와 우위를 매길 수도 없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 행복이다. 내가 에스프레스가 좋은 이유를 남에게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허락이나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다...
행복의 본질이 뒤바뀌는 것이다. ◎스스로 경험하는 것에서 남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왜곡된다. / 이 과정에서 행복의 또 하나의 적이 탄생한다. 과도한 물질주의적 가치. 저 사람 “행복할 만하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우선 남들이 볼 수 있는 구체적 증거들이 필요하다. ◎내용보다 외형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런 행복의 외형적인 증거물들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진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물질적 풍요다.”
이 질문에 “YES”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다... 경제 상태가 아닌 어떤 문화적 가치가 개입되었다는 뜻이다. 남이 볼 수 있는 화려한 겉옷을 인생에 덧입혀야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관련 있을 것이다. (170-171)
+ 심리적 풍요 대 물질적 풍요. 에이, 돈crazy! 인지 왜곡과 편향이 심각하고 지나치다. 우리의 시대정신이 낳은 과실이니 달게 받는 중중중. 각자가 ‘경험’과 고유 서사를 만들어 가는 시대에 경연con test으로 내모는 초법 법 법이 슬프다. ‘동네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사랑과 돈을 등식화하는 한국인들이 이상하다 했다. 보여주기 종일 이벤트성 데이트와 전시를 해서 더 부담이 가중되는 듯하다.
호모사피엔스에게 다른 사람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생존 과정에서 타인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타인은 나의 불충분함을 메워 주는 절대적 존재였다... 예전에는 생존 보호 장치가 사람뿐이었지만, ○문명 생활을 하면서부터 돈이 그 역할을 분담하게 된 것이다...
돈은 사람에게 ‘자기 충만감self-sufficiency’이라는 우쭐한 기분이 들게 한다. 돈이 있으면 “너희가 없어도 난 혼자 살 수 있어” 같은 느낌...
돈을 생각하기만 해도 다른 사람을 덜 도우려 하고, 남의 도움 또한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돈의 존재감이 커지는 만큼 사람의 존재감은 작아졌다... 행복해지기 위해 돈에 집착할수록, 정작 행복의 원천이 되는 사람으로부터는 멀어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물론 지금 세상에서는 돈이 있으면 홀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다. 생존이 목표라면, 사람 없이 돈만 가지고도 살 수 있는 일종의 ‘신세계’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돈 냄새를 따라 아주 깜깜한 방으로(룸이 더 적합ㅠ) 들어왔기 때문이다. (172-175)
+ 가난하면 업신 여기고 소외시킨다. 서로의 다른 있음으로 보완을 모색하지 않는다. 기계 응답과 텍스팅 주고받기면 된다. 서로 손을 보태던 시절에는 친구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돈, 전자상거래면 된다.
‘내그럴줄알았다’ 유시민 편 특집 방송에서 어느 분이 말한 강남 사는 기자의 날씨 예보가 슬펐다. 서울 아파트 중심의 시각에선 장마전선이 서울만 빠져나가면 되는 것이다. 댓츠올, 문제 없다. 돈쭐 우쭐. 카=악! 목숨 값이 매겨진다. 실험에서도 돈에 노출될수록 타인을 돕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줄었다. 시간도 마음도 돈도 쓰지 않으려들었다. 자의식, 타인 의식 비대와 돈의 존재감이 실시간 방영 겸(사겸사) 뇌물present이 오간다.
이대로라면 각자도생과 그들만의 리그와 중세 탑이 재건(데얼 염원!!)될 것이다. 머니 뭐니 신세계 신인류를 인간이라 할 수 있나.
다른 사람을 행복에 필요한 한정적 자원(입시, 승진 등)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로 생각하다 보면, 타인에 대한 불신과 스트레스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누구 떡(파이라고 안 한 의도ㅋ)이 더 큰지 항상 비교하게 되고, 방심하면 남에게 당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갖게 된다...
우리 사회의 결핍이 나타나는 부분은 더 이상 ‘경제적인 부’의 측면이 아니다. 행복과 직결된 ‘사회적인 부’다. 양적으로는 인간관계가 과할 정도로 차고 넘친다... 에너지를 얻기보다 빼앗기고 돌아오는 만남들이다... ‘진짜 친구’가 몇 명 있는지가 중요했다. 만남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자유감의 중요성이 또다시 등장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보다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문화는 공기와 같다”라는 말을 남겼다. 문화는 공기처럼 절대적이지만, 그 익숙함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176-177)
+ 앞 장에서 박구용 교수의 ‘매불쇼’ 출연을 언급했는데 ‘복수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는 슬픔이 이런 것일 게다. 한국인은 남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반밖에 안 된다. 신뢰가 바탕일 때 무리 속에서 즐겁고 편안할 수 있다. 아니면 어색하고 인위적이고 불편하다. 대면과 함께함이 데면 데면 거북해진다. 혼족이 느는 이유라고도 한다. 진짜 우정일 때 그 행복은 전염된다. 해피 바이러스가 불행의 먹구름을 흩어지게 한다.
공기하면 왜 김어준 공장장이. 그가 웃으며 못 참겠다는 듯 두 손으로 머리를 칠 때 일종의 기계체조 같아 스트레스가 덩달아 날라 간다. 우리는 질 나쁜 공기 마시며 나빠지는, 아니 죽어나가는 중중중. 쟨 수사 중중중. 공기는 그 안에선 감지가 힘들다, 다른 문화와 비교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진단할 수 있다. 내집단 스핀들은 외집단 공으로 탁 타악 타 동시에 쓰러뜨려야.
자유감의 부족과 과도한 물질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의 공통 원인은 너무 예민한 타인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세상과 담을 쌓고 유아독존의 삶을 살자는 말이 아니다. 균형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가? ...
왠지 한국인의 행복 날개는 접혀 있는 듯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는 부러워할 만한 경제 수준을 가진 나라에,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친구들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쾌적한 나라에 산다... 각자 자기 인생의 ‘갑’이 되어 살아 보는 것에 좀 더 익숙해지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보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각자가 가진 독특한 꿈, 가치와 이상을 있는 그대로 서로 존중하며 이해하는 것. 이것이 사람과 ‘함께’ 사는 모습이다. 그래야 사람의 가장 단맛을 서로 느끼며 살 수 있다. (178-179)
+ 무게추.. 주도권.. 어디에 두나요. 쟤들이 스스로에게 안 물으니 국민이 묻고 답을 찾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안하무인...... 반면교사 덕분에 국민이 인지한다. 내가 본다, 고로 존재감이 생성된다. 나도 앞에서 써먹었는데 ‘위해’의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말재주를 부린다. 똥인지, 된장인지... 똥맛 말고 사는 맛, 단맛 꿀맛 공유합시당 >.<
덧> ‘최마존’에서 모성애와 부성애를 다뤘는데 댓글들이 숙론의 자세를 보여준다. 디스코스는 누가 정해 던져주는 게 아니라 쌍방향의 상호 보완의 만들어가는 텍스트, 콘 텍스트인 것이다. 저쪽 의원님들, 잠은 들어가서 주무시고 좀 배웁시다. 국민(의식 수준)과 동떨어진 국짐이 되서야. 이 개 뭔 난리 굿, 낭비(도)벽
인간이 현재 가진 신체적 모습과 생각, 감정. 이는 우연히 갖게 된 특징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모두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보유하게 된 특성이다... 행복에 대해서도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왜 인간은 행복을 느끼는가? ... 특히 행복은 ‘비움’ ‘감사’ ‘느림’이라는 공허한 지침들에 지친 이들과. [곰곰이 긴히 생각해보고자 한다] (69-70)
◎생존이 되려면 사회학보다는 생물학에 가까워야 해서 이해에 혼선을 빚을 수 있겠다. 진화생물학의 경계 자체가 연계 학문이라 인간은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존 기계’라고 외치는데도 문학 전공자인 나는 딴생각이 끼어든다. 수학을 못해 생물학을 택하고, 수학이 싫어 건축학을 택하는 차선책이 자구책이 되기도 하고, 그런 분들이 그 길에서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교육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하는 듯하다.
흥미-진진한 3장에 비해 다소 힘빠지는, 장맛비에 식은 아스팔트 같은 4장이다. 하우! 어떻게에 치중하던 심리학이 이제 와이? 왜냐고 묻기 시작했다. 할 말 없을 줄 알았는데 거니 땜에 머리에 스파크가, 끊겼던 시냅스까지 붙네 붙어. 내가 당신 땜에 모르고 싶었던 암흑세계를 많이 들추고 알게 된다. 위험 경고등, 아직 안 켜졌다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은 생존 확률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고, 행복은 이 청사진 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70)
심리학자들은 이 같은 ‘조형shaping’이라는 원리를 이용해 비둘기가 탁구를 치고, 개가 피아노를 치게 만든다. (72)
◎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덕분에 인간은 생물학적 생존 기계라는 합의에 이르렀다. 십년 전과 일반인의 이해가 조금은 달라졌음을 체감하시는지 궁금하다. 말은 이리 해도 인간이 애완견이나 동물 실험에 투입되어 쌍벽을 이룰 때 당황하고 곤욕스럽다. 늑대에서 스누피까지 개보 ㅋㅋ 어, 나 동물! 인정 힘드러. 애써 사회적 동물
그러면 개는 왜 그토록 새우깡을 먹으려고 했을까? 새우깡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먹을 때 개의 뇌에서 유발되는 쾌감 혹은 즐거움 때문이다. 개는 이 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새우깡을 계속 원하게 된 것이고, 그 과정의 누적이 (훈련대로) 서핑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마디로 행복의 본질은 개에게 서핑을 하도록 만드는 새우깡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서핑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점이다...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강화물’)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자.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 ‘아 좋아, 행복해’라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또다시 사냥을 나가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호모사피엔스 중 일부만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는데, 그들은 목숨 걸고 사냥을 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짝짓기에 힘쓴 자들이다. 무엇을 위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자아 성취? 아니다. 고기를 씹을 때, 이성과 살이 닿을 때, 한마디로 느낌이 완전 ‘굿’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이 된 자들은 이 강력한 기분을 느끼고 또 느끼기 위해 일평생 사냥과 이성 찾기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게 된다.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거창한 포부 때문이 아니라, 개가 새우깡을 통해 얻는 쾌감을 인간도 최대한 자주, 많이 느끼기 위해 고기와 이성에 몰두한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읽고 있는 우리에게 성공적으로 유전자를 전달했다. (73-74)
◎이렇게 한국인의 최애 과자를 보내버리십니까. 새우깡은 죄가 없당. 행복감도. DNA 캐리어. 이 말 유 작가가 했던가요, 가물가물ㅋ 나도 비위 마니 조하졌네, 새우깡 안 먹겠다는 소리 안 하는 걸 보니. ‘월간김어준’의 가발 절대주의도 배꼽 빠지지만 주얼리 편도 자막과 이미지 제공해 둘리의 짝 줄리의 쇼핑 쾌감과 흑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다. 다시 봐도 재미짐
내가 하고픈 말은 동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거다. 새우깡에 ‘아 좋아, 행복해’ 하는 중독증 환자들은. 원래 필 굿~은 좋은 감탄사인데 “완전 굿”은 짱나. 저 빕스가 유전자는 남기지 않아 다행인가 싶다가 패밀리 조작단이라 에휴 한다. DNA 본투비 난ㄴ. 걸쳤던 빽-들이 생존 유지에 알맞춤인거니.
나이테를 사랑한 남자의 말로 ㅜㅜ 다른 서사 리플레이 절실. ‘낚시아카데미’도 물비린내가 아닌 술 술~ 이 화면 뚫을 태세라.. 새끼 경고. 천박하고 저질의 퉁수권자 만나 요즘 새끼 베이비들 수난시대다. ♪ 사랑이 술을 가르쳐
지금까지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포함해 사람들 대부분은 행복을 너무 로맨틱하고 관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이런 ‘행복 신비주의’가 탄생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그는 행복이 최상의 선이라고 규정하고 존재의 최종적인 이유와 목적이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이 생각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다만 상당히 인간 중심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이다...
“아아- 주목. 인간과 벌, 특히 인간. 모든 생명체의 최종 목적은 행복도 꿀도 아니란다. 오직 하나, 생존이다.” // 그렇다. 생명체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호모사피엔스의 존재 이유도 벌, 선인장, 꽃게와 마찬가지로 생존이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이것을 행복과 연결시키면 당연하지 않은 결론이 나온다. 이 새로운 관점으로 보면 행복은 삶의 최종적인 이유도 목적도 아니고,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75-76)
◎왜 자꾸 물어, 행복감은 다 “생존, 그리고 번식”을 위함이라니까. 저자는 스티븐 호킹의 확성기를 빌려 와 공표한다. “인간의 최종 목적은 생존”입니다. 행복이 생존을 위한 정신적 도구라는 거 이제 안으세요.
실수로 쥐 뇌의 시상하부를 미세한 전극으로 자극했는데, 이후 쥐들은 이 자극을 받았던 장소로 계속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곳에서 뭔가 대단히 좋은 경험을 한 것이다. 연구자들이 상황을 다시 분석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쥐들이 되돌아가려는 그 장소에서 뇌의 ‘쾌감센터pleasure center’가 우연히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모든 동물의 뇌가 가진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쾌 혹은 불쾌의 경험을 즉각적으로 구분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쾌감은 뇌의 여러 부위가 만들어 내는 합작품이지만, ○역시 시상하부가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쥐와 마찬가지로 쾌감과 연합된 경험을 기억 속에 확실히 남겨 놓는다. 첫사랑, 그때 그곳, 그 맛을 절대 잊지 못하게 만든다. 나의 쾌감전구를 켜는 것 중 하나는 평양냉면이다...
쾌의 느낌에 우리가 붙이는 명칭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기쁘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즐겁다, 신난다, 좋다...... 그러나 모두 쾌가 원료인 경험이고, 이들은 행복감의 가장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행복의 핵심은 부정적 정서에 비해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자주 느끼는 것이다. 이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많은 현대인의 삶이 행복 과녁을 제대로 못 맞히는 이유가 쾌락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왜 모든 동물은 쾌와 불쾌의 잣대로 경험을 나누는 것일까? 생존과 밀접한 결정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다. 쾌와 불쾌의 신호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기회를 포착하도록 응원한다. ○뱀, 절벽, 사기꾼, 썩은 음식, 치명적인 위협들이다. 이때 우리의 뇌는 두려움이나 역겨움 같은 불쾌의 감정을 유발시켜 ‘위험하니 피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감정은 그 어떤 매체보다 즉각적이고 강력하며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위험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
비옥하지만 가 보지 않은 낯선 땅, 매력적인 이성, 절벽에 붙어 있는 꿀이 가득한 벌집. 지금 당장 손에 쥐지 못한다고 실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 장기적 생존을 위해서는 이런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의욕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 노력에 상응하는 강력한 보상이 필요하다. 쾌감을 유발하는 정서들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 희열, 성취감, 뿌듯함, 자신감. 이런 치명적 매력을 가진 경험을 한번 맛보면 또다시 경험하고 싶어진다. ○그것을 유발시킨 모든 사건, 물체, 장소, 사람을 또 찾아 나선다. 올스와 밀너 실험의 쥐들처럼,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장기적인 생존 확률은 높아진다.
간단히 요약하면, 쾌와 불쾌의 감정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려 주는 ‘생존 신호들’이다... 행복한 사람은 쉽게 말해 이 쾌감 신호가 자주 울리는 뇌를 가진 자다. 동전 탐지기의 신호가 아무 때나 울리지 않듯 행복 전구도 선별적으로 켜진다. (78-82)
◎그래야 사람이다. 본능에 충실한 사익 집단이 공직을 누비고 있다. 설치류 쥐박이와 화녀의 조합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따로 안 보고 산다면 모르지만 어떤 앎과 이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저자는 뇌와 행복의 관계를 단백질로 만들어진 동전 탐지기라 한다. 모래 속 금속을 찾아내는 일과 같다 한다. 쾌감센터에 신호 중독이 생기면 교통정리가 안 되면서 자기 새.끼.를 팽개치고 학대를 일삼는다. 주로 시상하부가 지배하며 ‘경험’ 즉, 아는 맛이 쾌감전구를 켜게 한다. 저자의 논지는 행복 과녁을 정조준할 쾌락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말자는 것이다. 바로 알기.
여사 주위의 나쁜 기운과 흘러내리는 남상이 그의 화기를 미뤄 짐작하게 한다. 동시에 얼마나 ‘강력한 보상’을 누리기에 저럴까 싶다. 비선 실세인 그가 가족의 ‘장기적 생존 확률’을 높일 수를 쓴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고쳐 쓸 수 없는 사람들임이 만천하에 드러나는데.. 생존 신호등의 적신호를 감지라도 할까. 웃고 있을 것 같은데. 저 ‘팝콘’ 브레인이 과연 실세라면 어떻게든 원씨가 되겠지. 뭐 한씨도 삼각대로 같이 접힐 신세라는 거 아는 사람들은 아니까. 누가 되든 개판일 테고 그래서 개놀이 삼매경 인 지 도.
오늘도 요괴보다 행복합시다, 김태형의 ‘가짜 사랑 권하는 사회’에 눈이 가요, 손이 가요. 읽을수록 김경일 심리학자가 좋아한다는 선배 김정운 님과 저자가 어딘가 많이 닮았다눈.
이 책은 행복을 단순한 기분이나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훈련되고 관리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행복은 비교에서 멀어지고, 감정의 소비를 줄이고, 나에게 집중할 때 생긴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 알면서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대부분 행복하고 가끔 불행하다. 감정은 반응일 뿐이다. 멀쩡한 본인을 치료와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로 세뇌하는 것은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행복이란 결국, 내가 나를 잘 챙기며 사는 법을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