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헌책이든 그저 헌책일 뿐이라서 나는 그것을 사랑해마지않는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제일 먼저 정리한 게 책이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읽었던 책 중에서 한두 번쯤 들여다볼 책을 남겨 두었었다. 지금은 읽지 않은 책들과 출판사에서 증정 도서로 받았던 책 위주로 정리했다. 3~400권의 책이 바닥에 쌓였다. 절판된 도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작가의 책, 일 년에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을뿐더러 더 이상 신간을 읽지 않을 작가의 책들이었다. 헌책방에 팔려고 했으나 헌책방이 거의 사라지고 인터넷으로만 판매하는 상태여서 인터넷 서점에서 운영하는 중고 서점에 몇 박스를 들고 갔고, 나머지는 폐지로 버렸다. 책이 좋아서, 절판된 책을 찾고자 전국의 헌책방을 수소문해 찾았으면서도 지금은 신간에 밀려 먼지만 쌓인 책들이 많았다. 정리했는데도 정리한 것 같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읽고 싶은 혹은 갖고 싶은 책을 찾을 때, 그게 절판본이라면 헌책방을 뒤져보았을 것이다. 애타게 찾으면서 누군가 갖고 있기를, 복간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분명 애서가다. 아무튼 시리즈를 간간이 읽으면서 하나의 주제로 된 산문을 읽는 게 좋았다. 헌책이라는 단어 하나에 구매하고 마는 나는 애서가인 게 분명하다.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오경철 작가의 에세이는 헌책에 대한 찬사이며 책들에 대한 애정이 물씬 풍기는 책이다. 책을 소유하지 말자고 애써 다짐했지만, 다시금 그가 말하는 책들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었다. 읽어보고 싶다, 갖고 싶다, 생각하며 말이다. 책은 책을 부른다.
책을 버리고 온 날, 하필 TV프로그램에서 1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영화평론가가 나와 서점 같은 책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법, 책을 읽는 것과 소장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자 오경철은 주로 헌책방에서 모습을 비춘다. 마치 산책하듯 헌책방을 어슬렁거리다가 좋은 책을 발견하여 구매한다. 그가 소장하는 책들은 아주 귀하다. ‘초판본’과 ‘반드시 소장하지 않으면 안 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책’외에는 어지간한 책은 집에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할 만하다.
책이 잘 팔리지 않자 출판사에서는 새로운 책을 출간하는 것 외에 기존의 도서를 특별판으로 구성해 독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나 또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판본별로 구매하기도 하는데 저자가 번역서는 어지간해서 사지 않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읽힐 만한 책들은 끊임없이 다시, 새로 번역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에게 헌책방은 기실 이러한 책들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는 장소다. 이러한 발견 자체에 책 수집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발견하는 순간 고스란히 생명력을 다시 얻는 책,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나만은 그 소중한 가치를 알기에 더없이 귀한 책, 내가 헌책방을 들락날락하는 까닭은 이러한 책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146페이지)
안목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는 눈에 따라 좋은 책을 발견하고 소장할 수 있다. 미술을 보는 눈처럼 책을 보는 눈도 아주 중요하다. 헌책방에 있는 책 중에서 좋은 책이어도 보는 눈이 없으면 헌책방의 그저 한 권의 책일 뿐이다. 좋은 그림을 판별하듯 좋은 책을 알아보는 눈도 필요한 법이다. ‘진귀한 고서를 알아보는 데에는 과거의 언어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건 당연하다.
나는 가끔 헌책방이야말로 책의 우주 같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곳은 책에 남은 흔적들의 우주이기도 하다고. (198페이지)
공감하며 또 배웠다. 책을 사랑하는 방법을, 책에 대한 안목을 배웠다. 하릴없이 헌책방을 거닐고 싶다고 생각했다. 혹시 아나, 좋은, 귀한 책을 발견할지. 책을 부르는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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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봤을 때, 대놓고 다독가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나마 애서가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책을 많이 읽지도, 깊게 읽지도 않지만 그냥 책이라는 물성 자체를 좋아하고, 책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을 싫어하니 애서가라는 이름은 붙여도 되지 않겠나.
여튼 그런 사람이어서 그런지 집에 책이 좀 많기는 하다. 방이 좁아서 많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일단 다 꽂지 못하고 바닥에 책이 쌓이는 순간 좌절하는 것도 나만의 라이프 사이클(?) 중의 하나이다. 그 해결방법은 두가지, 어쩄든 꾸역꾸역 꽂거나, 책을 다른 곳으로 치우거나.(절대 파는 법이 없지. 아무렴.)
새책도 많지만 헌책도 자주 사들이다보니 이번 아무튼 시리즈, 헌책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경철이라는 분의 책을 내가 이미 한 권 샀는데 그 책을 좀 읽다가 타이밍을 못맞춰서 내려놓았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흠. 두번째 책은 성공하겠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없는 글들로 채워져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고,
같은 마음으로 아파했다면 이 책의 소감으로 충분할지도.
수없이 많은 책을 사서 집 안에 들여놓은 나는 들여온 것만큼은 아닐 테지만 또한 상당히 많은 책을 집 밖으로 들어냈다. 이삿짐을 줄이려고 - 단언컨대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책을 증오한다 - . 비좁은 집이 책의 포화 상태를 극사실주의적으로 전시할 때, 그리고 책이라는 물건에 염증과 회의가 생길 - 모든 궁핍한 애서가들이 잊을 만하면 겪은 증상이리라 생각한다. 저따위 책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저것들을 끌어안고 있느라 이때토록 가난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게 아닌가! - 때마다 헌책방이나 온라인 중고서점에 책을 무더기로 가차 없이 팔아버렸다.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말하는 "책이 참 많네요"를 욕이 아닌 칭찬으로 애써 곡해해 들으며 몇번의 이사를 한 기억이 나도 몇 번 있다. 책은 참으로 무거운 물건이다. 그리고 책장에 꽂혀 있을 때보다 부려놓으면 그 양이 어마어마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저따위 책이 무슨 소용이냐고 매일 생각하면서 나는 또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책을 산다. 고질병이고 중증이다.
당신이 돈을 내고 자신의 물건으로 만들기 전까지 헌책방 책장에 진열된 책은 모두 헌책방 주인의 재산이자 소유물이다. 주인의 장서라고도 할 수 있다. 헌책방 주인이 다가가기 힘든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 가쿠타 미쓰요, 오카자키 다케시, <아주 오래된 서점>
정말 방글방글 웃는 헌책방 주인을 본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한때 나는 헌책방을 차려볼까 자못 진지하게 생각했다. 당장은 시작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그리고 헌책을 팔면 얼마만큼 벌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 무렵 단골로 드나들던 헌책방 두 곳의 주인장들에게 넌지시 조언을 구했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은 기어이 하고 싶다면 장서를 밑천삼아 온라인에서 먼저 시도해보되 점포는 절대 얻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름대로 오래 해온 책장사지만 언제나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전부 빚이라고, 가게에서는 그저 책들을 회전시키고 있을 뿐이라며 잘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어렴풋이 짐작하기는 했어도 역시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구나 싶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단계를 지나 책을 만들기도, 쓰기도, 유통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엔 많이 부족한 책들이 쏟아지고, 수많은 책방과 출판사가 창궐했다 사라진다.
헌책방이나 작은 서점에 대한 꿈은 열권 이상의 작은서점과 헌책방에 대한 책을 읽고 이미 접었다.
그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특히나 돈이 없는(책 좋아하는 사람은 왜 다 가난한지) 나같은 사람은 더더욱 손대면 안되는 일이다. 저자 오경철은 헌책방을 정말 해볼 작정이었는지 단골 헌책방 주인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역시 긍정적 대답을 듣지 못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피로와 나태에 찌들어 허망하게 흘려보내는 무위 혹은 방기의 시간은 불행한 시간이다. 이러한 감각은 간혹 퀴퀴한 냄새 가득한 헌책방의 서가 앞에 서서 낡은 책들의 책등을 우두커니 훑어보고 있을 때 매우 또렷해지고는 한다. 아직 완전히 이성을 잃지 않은 나의 또 다른 자아가 묻는다. 너 뭐 해? 또 책 사려고? 사가지고 가보았자 며칠 전에 사 간 책들 위에 고스란히 쌓이기만 할 게 뻔한데! 이봐, 이제 너는 젊지 않아.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읽지도 못할 책은 그만 사고 - 아무리 헌책이라지만 책값도 좀 아껴야지 - 네 방에 쌓여 있는 책들부터 진득하게 앉아 읽어보면 어때?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만 우울해지고 만다.
누가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싶게 동감했던 글이다. 책을 보면 기쁘다가도 우울해진다. 읽지 못한 책들이 눈에 밟히고, 읽고도 기억나지 않는 책들에 또 좌절하고.
언제쯤이면 저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면서 계속 새 책을 사는 내가 바보같다.
하지만 또 이런 우울감을 날릴 수 있는 현자의 말이 나를 기쁘게 한다.
서재는 반드시 우리가 읽은 책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언젠가 읽게 될 책들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죠. 그렇습니다.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은 아주 훌륭한 일이었죠. 서재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들입니다.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책들이죠. 그것들을 영원히 못 읽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 움베르토 에코, 장클로드 카리에르 대담, 장필리프 드 토낙 사회, <책의 우주> 중 카리에르의 발언
누군지 잘 모르지만 카리에르 만세!(장 클로드 카리에르는 프랑스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배우라고 한다)
내가 쌓아놓은 책들은 내가 언젠가는 읽을 수 있는 책들이라는 것이,
나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안심하게 하니 말이다.
한번 사는 인생, 가난하게 살지만 책만큼은 풍족하게 읽다 간 사람이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헌책에 대한 찬사, <아무튼, 헌책> 이다.